박정희 (민국 38):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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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 반란사태 당시 박정희는 장교직을 잃고 연금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원증을 불태워버리고 정부에 충성맹세를 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나진 진공작전을 비롯하여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형을 설득하여 봉기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덕에 박정희는 여운형 총리로부터 훈장까지 받앋고 육영수와 재혼도하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조공 반란사태 당시 박정희는 장교직을 잃고 연금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원증을 불태워버리고 정부에 충성맹세를 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나진 진공작전을 비롯하여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형을 설득하여 봉기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덕에 박정희는 여운형 총리로부터 훈장까지 받앋고 육영수와 재혼도하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 정계 입문과 국방부 장관 ===
=== 정계 입문과 국방부 장관 ===
1960년 육군 대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박정희는 당시 국방부 장관이자 [[한국사회당 (민국 38)|사회당]] 소속 민의원 김원봉에 의해 형인 박상희와 함께 사회당에 영입되었다. 곧 그는 군복을 벗고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김원봉 국방부 장관이 장면 총리와의 갈등으로 인해 사임하자 동시에 사임하였다. 이후 사회당 전국구 의원으로 민의원에 입성하였으며 장면 총리와 대립하던 김원봉 라인이었으나 대중적인 인지도를 바탕으로 국방부 장관에 선출되었다.
1960년 육군 대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박정희는 당시 국방부 장관이자 [[한국사회당 (민국 38)|사회당]] 소속 민의원 김원봉에 의해 형인 박상희와 함께 사회당에 영입되었다. 곧 그는 군복을 벗고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김원봉 국방부 장관이 장면 총리와의 갈등으로 인해 사임하자 동시에 사임하였다.
 
장면 총리가 민의원을 해산하고 제6대 민의원 의원 총선거가 치뤄지자 박정희는 사회당 전국구 의원으로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의원 재임 당시 군인출신 다운 결단력과 혁신을 내세우며 젊은 층과 당내 혁신계의 지지를 얻었다. 이에 당시 정치 혁신을 표방하던 장준하 총리는 그를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하였으며 재임당시 기초적인 국군 현대화를 실시하여 강군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장관 재임기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주요 사업은 화력강화와 차량화였다.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높아져만 가는 소련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만일 소련군이 남하할 시 빠르게 대비할 수 있도록 국군의 차량화, 경량화, 기동화에 주력하였으며 포병 장교 출신답게 포병전력을 크게 강화하였고 그 덕분에 박정희 체제의 국방부는 포방부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으며 대한민국은 동아시아 2위의 육군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장관 재임기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주요 사업은 화력강화와 차량화였다.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높아져만 가는 소련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만일 소련군이 남하할 시 빠르게 대비할 수 있도록 국군의 차량화, 경량화, 기동화에 주력하였으며 포병 장교 출신답게 포병전력을 크게 강화하였고 그 덕분에 박정희 체제의 국방부는 포방부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으며 대한민국은 동아시아 2위의 육군력을 가지게 되었다.


장면 총리가 민의원을 해산하고 재7대 민의원 의원 총선거가 치뤄지자 박정희는  
한편 장준하 총리가 군에 과도한 제원을 쏟는다는 비판을 받고 당내 보수파의 공격으로 사임과 동시에 민의원을 해산하자 자연스럽게도 박정희는 장관직을 내려놓게 되었고 제7대 민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신의 고향인 선산군(現 구미시)일대인 경상북도 제11선거구에서 지역구 출마를 감행하여 81.3%의 전국 최고 득표율을 기록하며<ref>이 기록은 이후 노무현이 83.2%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깨지게 된다.</ref> 지역구 의원으로 민의원에 입성하였으며 이런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사회당 총재에 선출되었다.
 
7대 민의원 임기내내 박정희는 윤보선 총리와 날을 세웠으며 특히 그의 군사정책에 관련하여 많은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그런 불편한 민의원 의원 생활은 윤보선 총리가 1967년 평양에서 폭탄테러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지며 종결되었다. 당시 윤보선 총리는 사경을 오가는 상황이었고 결과적으로는 왼팔이 마비된 상태로 무려 '''27년'''을 더 살다가 서거하였으나 그건 나중의 일이었고 윤보선 총리의 회복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 유진산 부총리 겸 총리서리는 김원봉 대통령과 합의 하에 민의원 해산을 단행하였다.
 
선거국면에서 박정희는 소련과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조선공산당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고 대일공 선제타격과 소련 극동에 대한 보복 성격의 국지도발 등을 주장하며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물론 이러한 공약들이 실질적으로 지켜 질지는 미지수였으며 당대 사람들도 실질적으로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으나 냉전시국에 적당히 눈치를 보며 유세했던 다른 후보들과 달리 이런 원색적인 비난으로 가득 찬 박정희의 유세는 눈이 뒤집혀 있던 국민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선거기간 내내 그는 당내의 강경론을 주도하며 사회당 명의의 소련 규탄문을 발표시켰고 기존의 박정희가 가지고 있던 강골·혁신 이미지와 맞물려 사회당의 지지율은 폭등하기에 이른다. 이후 사회당은 전체 400석 중 238석을 얻는 대승리를 거둬<ref>비율 상으로 본다면 아직도 1위기록을 가지고 있다.</ref> 제8대 국무총리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 최장기간 재임총리 ===
=== 최장기간 재임총리 ===



2022년 7월 21일 (목) 01:5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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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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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국상 · 고구려 대막리지 · 신라 상대등 · 고려 문하시중 · 조선 영의정 ·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대한민국 대통령
대한민국 제8·9·10·11대 국무총리
박정희

朴正熙 | Park Chung-hee
출생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現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로 107)
사망 2010년 5월 16일 (향년 91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국무총리묘소
사저 경상북도 구미시 형곡2동 373-5
재임기간 제11대 국방부 차관
1961년 3월 27일 ~ 1962년 9월 18일
제15대 국방부 장관
1964년 5월 12일 ~ 1965년 8월 9일
제8대 국무총리
1967년 5월 16일 ~ 1968년 7월 13일
제9대 국무총리
1968년 7월 14일 ~ 1972년 7월 13일
제10대 국무총리
1972년 7월 14일 ~ 1976년 7월 13일
제11대 국무총리
1976년 7월 14일 ~ 1979년 11월 21일[1]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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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고령 박씨[2]
등록기준지 경상도 성주목 망성방 철산리 사읍촌
(現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장산리)
부모 아버지 박성빈, 어머니 백남의
형제자매 형 박동희, 박무희, 박상희, 박한희
누나 박귀희, 박재희
배우자 김호남(이혼)
육영수(재혼)
자녀 아들 박지만
박재옥, 박근혜, 박근령
학력 구미공립보통학교 (졸업 / 11회)
대구사범학교 (졸업 / 4회)
육군대학 (졸업)
정당
지역구 경상북도 제11선거구[3]
종교 불교 (사실상 무종교)
신체 164cm, 60kg, A형
의원 선수 6 (민)
의원 대수 6, 7, 8, 9, 10, 11
약력 제11대 국방부 차관
제6대 민의원 (전국구 / 한국사회당)
제15대 국방부 장관
제7대 한국사회당 총재
제7·8·9·10·11대 민의원 (경상북도 제11선거구 / 한국사회당)
제8·9·10·11대 국무총리
한국사회당 명예총재
한국사회당 최고상임고문
국가원로자문회의 부의장
중수(中樹)
약칭
군사 경력
임관 신경군관학교 (2기)
일본육군사관학교 (57기)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
복무 만주국 육군
1944년 ~ 1945년
한국광복군
1945년 ~ 1946년
대한민국 육군
1946년 ~ 1961년
최종 계급 중위 (만주국 육군)
중대장 (한국 광복군)
대장 (대한민국 육군)
주요보직 제5보병사단장
제6군단 부군단장
제7보병사단장
제6관구사령관
군수기지사령관
제2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병과 포병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중일전쟁)
조선공산당 반란사태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 제10대 국방부 장관과 제8·9·10·11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역대 총리중 두번째 20세기 출생 총리이자 두번째로 젊은 총리[4] 그리고 역대 최장 기간 집권한 국무총리 기록을 보유한 인물이다.

1961년 김원봉 당시 국방부 장관에 의해 사회당에 영입되었으며 이후 김원봉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좌우합작 장면내각에서 국방부 차관을 역임하였다. 1962년 제6대 민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사회당의 텃밭이자 자신의 고향이던 경북 선산군(현 구미시)에서 당선되었으며 장준하 총리에 의해 1964년 국방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1966년에 세대교체를 주장하며 사회당의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1968년 평양 테러이후 사회당 내부에서 강경론을 주도하며[5] 유진산 총리의 사망과 지도부 부재로 통일된 의견을 내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한독당을 제치고 사회당의 지지율을 높이는데에 일조하였으며 이후 총선에서 사회당이 압승을 거둠으로서 제8대 국무총리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 후 1979년 소련에 망명한 반국가단체인 자칭 '조선사회주의공화국'[6]의 지령을 받은 간첩 일본계 교포 문세광에 의해 피습당해 정치일선에서 물러났으며 사회당의 명예총재(1991년 사임), 최고상임고문, 국가원로자문회의 부의장[7]을 역임하다. 2010년 91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집권이후 이룩한 포항제철(현 포스코) 설립으로 대표되는 중화학공업 발전 및 경제개발의 성과와 신 5개년 계획, 새마을 운동을 통한 농촌진흥정책과 평안북도 서해안의 석유시추 성과 등으로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정치인이지만 집권기간중 보인 권위주의, 독선적 행보와 강경한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대소·대일공관계를 크게 악화시킨 점, 당내 정적 탄압등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생애

초년시절

1917년 11월 14일 일제강점기 시절 경상북도 구미에서 농민 박성빈과 백남의 부부 사이에서 4남 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가난했던 집 사정으로 인해 어머니 백남의가 간장을 마신다던가 하는 식으로 낙태를 유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박정희는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태아일 때의 이런 고생 때문인지 박정희는 아버지나 형제들에 비해 작은 키를 가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집안에서는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형인 박성희와 함께 그를 학교로 보내 근대식 교육을 받게하였으며 이에 박정희는 1932년 3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기도 했다. 본래 어려운 집안사정 때문에 사범학교 응시를 포기하려 했으나 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과 교장이 부모를 설득해 응시하게 되었다. 어머니인 백남의는 그가 낙방하기를 바랬으나 정원 100명 중 51등으로 합격했고, 대구사범학교에 제4기생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기숙사에서 등하교 하였고 품행평가에서 그리 좋지못한 평가를 받았으나 군사 체육 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좋았다고 한다. 1937년 사범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동년 4월 문경공립보통학교 훈도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 훈도로 부임하던 와중 아픈 아버지의 간청으로 1936년 19세의 나이로 김호남과 결혼을 했고, 이듬해에 딸 박재옥이 태어났다. 그러나 사랑없는 정략결혼 이었던 관계로 부부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고 한다.

청년기·군인시절

그렇게 교사로 제직하던 와중 어린 시절부터 품어왔던 군인에 대한 동경과 한국인 교사 차별문제, 가정불화 등을 이유로 교사직을 그만두고 1938년 21세의 나이로 신징육군군관학교 1기에 1차로 지원했다. 처음에는 나이 제한으로[8] 인해 거절당했으나 이후 혈서를 써서 들어갔다고 전해진다.[9] 이 혈서를 본 고향선배이자 시험관이던 간도특설대 대위 강재호가 그의 후원자가 되주어 결국 만주국육군군관학교 2기에, 합격자 240명 중 15등으로 입학하였다.

이후 1942년 다카기 마사오라는 이름으로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수석 졸업생 자격으로 "대동아 공영권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고 선서하며, 만주국 총통 짱스이에게 은사품으로 금장시계를 받고 일본육사 유학생대 편입 특전을 받았다. 졸업 이후에는 당시 관행에 따라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2년)에 진학해 졸업하였다. 1944년에 일본육사 57기를 3등으로 졸업해 견습군관으로 관동군 635부대에 배치되었으며 동년 7월에는 제6군관구 보병 제8단 배장(소대장)으로 근무하였다.

당시 부대의 엘리트였던 박정희는 보병 8단 단장의 부관실에 부임해 을종 부관(작전참모) 겸 부대의 기수(旗手)가 되었다. 이후 1945년 7월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 질 무렵 중위로 진급하였으며 8월에는 소련군이 남하한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17일 둬룬으로 집결하였으나 도미나가 교지 사단장이 "이렇게 싸우다 죽는건 개죽음"이라고 말하며 사단을 이끌고 중국군에 항복하는 바람에 박정희 역시 중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중국군의 포로가 된 박정희는 당시 장교출신을 찾고있던 한국광복군에 동료였던 신현준, 이주일과 함께 편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였다. 이후 광복군이 중국군 및 소련군과 함께 국내로 들어오자 광복군 제1대대 제2중대장 자격으로 서울에 입성하였다. 당시 한반도 남부에 주둔하던 미군은 광복군과 임정, 각지 인민위원회의 해체를 요구하였으나 중국군과 소련군은 이를 거부했고 사회주의자였던 형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이때부터 박정희는 사회주의와 중국·소련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를 3개월 단기 과정을 마치고 2기로 졸업하였고 과도정부가 수립되어 각지의 무장세력들을 통합하여 조선국방경비대가 설립되자 임관하여 포병 소위계급을 부여 받았다. 당시 박정희는 형인 박상희의 설득으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는데 이로 인해 당시 과도정부와 군정당국의 견재를 받았다고 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조선공산당 당적을 유지하며 장교 생활을 이어나가던 박정희였으나 공산당 당수였던 박헌영이 반체제적 발언을 이어가자 당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으며 1948년 12월 3일 헌법재판소에서 조선공산당에 대한 강제해산이 결정되자 당일부로 조공 당원증을 불태워 버렸고 동년 2월에 공산당 잔당이 청진시 일대에서 봉기하자 형인 박상희를 설득하여 봉기참여를 막았다.

조공 반란사태 당시 박정희는 장교직을 잃고 연금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원증을 불태워버리고 정부에 충성맹세를 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나진 진공작전을 비롯하여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형을 설득하여 봉기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덕에 박정희는 여운형 총리로부터 훈장까지 받앋고 육영수와 재혼도하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정계 입문과 국방부 장관

1960년 육군 대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박정희는 당시 국방부 장관이자 사회당 소속 민의원 김원봉에 의해 형인 박상희와 함께 사회당에 영입되었다. 곧 그는 군복을 벗고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김원봉 국방부 장관이 장면 총리와의 갈등으로 인해 사임하자 동시에 사임하였다.

장면 총리가 민의원을 해산하고 제6대 민의원 의원 총선거가 치뤄지자 박정희는 사회당 전국구 의원으로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의원 재임 당시 군인출신 다운 결단력과 혁신을 내세우며 젊은 층과 당내 혁신계의 지지를 얻었다. 이에 당시 정치 혁신을 표방하던 장준하 총리는 그를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하였으며 재임당시 기초적인 국군 현대화를 실시하여 강군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장관 재임기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주요 사업은 화력강화와 차량화였다.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높아져만 가는 소련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만일 소련군이 남하할 시 빠르게 대비할 수 있도록 국군의 차량화, 경량화, 기동화에 주력하였으며 포병 장교 출신답게 포병전력을 크게 강화하였고 그 덕분에 박정희 체제의 국방부는 포방부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으며 대한민국은 동아시아 2위의 육군력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장준하 총리가 군에 과도한 제원을 쏟는다는 비판을 받고 당내 보수파의 공격으로 사임과 동시에 민의원을 해산하자 자연스럽게도 박정희는 장관직을 내려놓게 되었고 제7대 민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신의 고향인 선산군(現 구미시)일대인 경상북도 제11선거구에서 지역구 출마를 감행하여 81.3%의 전국 최고 득표율을 기록하며[10] 지역구 의원으로 민의원에 입성하였으며 이런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사회당 총재에 선출되었다.

7대 민의원 임기내내 박정희는 윤보선 총리와 날을 세웠으며 특히 그의 군사정책에 관련하여 많은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그런 불편한 민의원 의원 생활은 윤보선 총리가 1967년 평양에서 폭탄테러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지며 종결되었다. 당시 윤보선 총리는 사경을 오가는 상황이었고 결과적으로는 왼팔이 마비된 상태로 무려 27년을 더 살다가 서거하였으나 그건 나중의 일이었고 윤보선 총리의 회복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 유진산 부총리 겸 총리서리는 김원봉 대통령과 합의 하에 민의원 해산을 단행하였다.

선거국면에서 박정희는 소련과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조선공산당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고 대일공 선제타격과 소련 극동에 대한 보복 성격의 국지도발 등을 주장하며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물론 이러한 공약들이 실질적으로 지켜 질지는 미지수였으며 당대 사람들도 실질적으로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으나 냉전시국에 적당히 눈치를 보며 유세했던 다른 후보들과 달리 이런 원색적인 비난으로 가득 찬 박정희의 유세는 눈이 뒤집혀 있던 국민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선거기간 내내 그는 당내의 강경론을 주도하며 사회당 명의의 소련 규탄문을 발표시켰고 기존의 박정희가 가지고 있던 강골·혁신 이미지와 맞물려 사회당의 지지율은 폭등하기에 이른다. 이후 사회당은 전체 400석 중 238석을 얻는 대승리를 거둬[11] 제8대 국무총리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최장기간 재임총리

졍계 은퇴와 말년

평가

대한민국의 제2차 경제발전을 이끌어내고 현대 대한민국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한 인물중 하나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나 그 실행 방법에 대해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다.

긍정적 평가

박정희 총리 집권기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가 엄청나게 성장한 것은 사실이며 장면 총리 시기의 5개년 계획을 발전시킨 신 5개년 계획을 실시하여 경공업 위주의 경제체제를 가지고 있던 한국을 중화학공업 위주의 경제체제로 변화시킨 것은 그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또한 독선적인 그의 정치방식은 비판을 받기도 하나 그런 정치운영 방식 덕분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나 포항제철 건설, 성진제철 복구 등의 강한 추진력이 요하는 계획들을 빠르게 입안시켜 실행함으로써 현대 선진국 대한의 토대를 닦게 되었다.

또한 조소앙·조봉암 내각 당시에 진전되었다가 장면 내각이후 침체되었던 복지시스템에도 공을 들여 해외에서도 극찬하는 의료보험 제도가 이당시에 자리잡았는데 이 또한 당내외의 비판을 감수하고 추진한 것으로 박정희 총리의 추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그리고 장면 내각 시기에 이루어졌던 개발은 대도시 및 거점도시에 한정되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박정희 내각이 추진한 새마을 운동을 통해 이를 보완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이 시기에 농촌의 초가집과 비포장도로가 없어지고 콘크리트 건물과 포장도로가 들어섰으며 제한적이지만 전기가 공급되는 등 농촌의 삶의 질은 상당히 높아졌다. 또한 농촌에 현대식 농기구가 보급되면서 농산물의 생산량이 상승하여 결과적으로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상당히 높아지게 되었다.

국방면에 있어서도 기존 미중양국의 뒤에 숨어서 조용한 평화의 시대를 누리던 한국의 안보체계를 장준하 총리의 뒤를 이어 강화하고 국군 현대화를 추진하였으며 대규모의 군비증축과 자주국방 계획이 실시되었다.

부정적 평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김종필 등 일부 측근들과 재건동지회를 구성하여 주도권을 잡고 독재적인 당 운영을 하였으며 집권후반기에는 자신의 경제계획에 반대한 몇몇 의원들을 당에서 재명하려는 시도를 했다가 실패하는 등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지도자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독선적인 면모를 보인덕에 김종필을 제외한 후계자를 전혀 키우지 않았으며[12] 결국 박정희 총리의 정계 은퇴이후 김종필 총리를 제외한 다른 미래권력이 없던 민주공화회는 내분에 휩싸인 끝에 붕괴되었고 결과적으로 통일사회연합(舊 혁신정우회)의 김철이 총재로 선출되어 총리가 되게 되었다.

또한 사회당 출신의 총리임에도 불구하고 의료보험제도 이외에는 복지에 큰 관심을 주지 않았으며 일부 대기업과 유착하여 노동자 인권탄압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실제로 이 당시의 근로기준법이 제정되고 시행되기는 하였으나 박정희 본인은 상당히 전체주의 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노동자의 인권향상 같은 '소수'를 위한 정책보다는 '다수'의 풍요을 위한 경제발전에 치중하여 결과적으로 한국의 노농계급 권리를 상당히 퇴보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당내외의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대학 교수들을 비롯한 지식인과 언론인들을 동원한 여론조작을 하였음은 당시에도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10월 유신'등의 실체없는 구호들에 대한 비판또한 지식인들을 동원해 무마시켰으며 각주에서 언급되듯 민주공화회 내부의 측근들과 이러한 친유신 지식인들을 모아 '유신정우회'로 계파명을 바꾸고 반대파 의원들을 처내려는 시도를 하는 등 지식인들을 정치적인 친위세력으로 이용한 것은 말할것도 없는 박정희 총리의 암적인 면이며 비판받아야 마땅할 부분이다.

비판 및 논란

민주공화회(舊 재건동지회, 박정희계)

여담

어록

소속 정당

선거 이력

대중메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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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정희 총리 피습사건으로 김종필 부총리가 권한대행 (1979년 10월 26일 ~ 1979년 11월 21일)
  2. 직강공파 29세손, 혁거세 65세손 ◯희(熙) 항렬.
  3. 선산군, 군위군 일원
  4. 첫번째 20세기 출생 총리이자 가장 젊은 총리는 제6대 장준하 국무총리이다.
  5. 사회당 주류파와는 달리 측근인 김종필 당시 민의원 의원(이후 12대 총리)등과 함께 실질적으로 가능할지는 의문이지만 대일공 선재타격과 소련을 대상으로 한 도발등을 주장하였으며 한독당과 당내 반대파는 이를 비판하였으나 당시 총리의 사망으로 눈이 뒤집혀져 있던 국민들은 여기에 열광하며 박정희를 지지해주었다.
  6. 고려공산당
  7. 2008년 세계경제위기 당시 일시적으로 거국내각이 구성되었을때 김영삼, 권영길, 김종필(이상 전 총리), 홍숙자(전 대통령, 자문회의 의장)등과 함께 임명
  8. 당시 신징군관학교는 17세 이상 20세 미만 미혼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고 이는 박정희 본인도 알고 있었다.
  9. 다민 이는 진위여부 논란이 있다.
  10. 이 기록은 이후 노무현이 83.2%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깨지게 된다.
  11. 비율 상으로 본다면 아직도 1위기록을 가지고 있다.
  12. 김종필 조차도 집권후반기에는 견제하여 김종필 총리의 영향력을 지우고자 소속 회파의 명칭을 유신정우회로 변경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반발에 못이겨 취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