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경찰 막부 (민국 38)

신단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7월 8일 (금) 16:5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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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틀:역대 일본 내각 (민국 38)

쇼와 시대
국가최고행정위원회
国家最高行政委員会 | National Supreme Administrative Committee
1960년 12월 17일~1970년 12월 17일
출범 이전 이후
스즈키 모사부로 내각 제1차 사토 에이사쿠 내각
상임위원장 하야시 게이조 초대 상임위원장 | 제59-61대 총리
야마다 마사오 2대 상임위원장 | 제62-63대 총리
내각총리대신
여당 무소속[1]
연립 여당


이외 기타 5개정당
국행위 시대의 두 총리, 하야시 게이조(左)와 야마다 마사오(右)

개요

... したがって、現在の警察兵力だけでは国家の治安を維持しにくいと判断されるため、本人は軍の最高指揮監督権者として政府の統治権が及ぶすべての地域に国防軍の治安出動を命令するところです。
... 따라서, 현재 경찰병력 만으로는 국가의 치안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되기에 본인은 군의 최고지휘감독권자로써 정부의 통치권이 미치는 모든 지역에 국방군의 치안출동을 명령하는 바입니다.
오히라 마사요시 당시 외무대신 겸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
国家の治安維持と安定のため、本日付で国会が指定した期間中、内閣の機能を停止し、内閣の権限を国家最高行政委員会に移転する。
국가의 치안 유지와 안정을 위해 금일부로 국회가 지정한 기간동안 내각의 기능을 정지하며 내각의 권한을 국가최고행정위원회로 이전한다.
국가최고행정위원회에 관한 법률 1조 中

국가최고행정위원회 체제(国家最高行政委員会体制) 또는 줄여서 국행위 시대(国行委時代)는 1960년 일본 국회의사당 테러사건과 이로인한 스즈키 모사부로 총리의 암살 이후 1970년 제1차 사토 에이사쿠 내각 성립까지 전확히 10년간 유지되었던 일본의 정치체제이다.

배경

1960년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안보투쟁으로 실각한 이후 치뤄진 29대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전쟁 이후 세력이 크게 붕괴한 일본사회당이 제1당으로 떠올랐으며 사회당 좌파의 스즈키 모사부로가 총리로 집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당은 1당이 되었지 다수당이 되지는 못하였으며 사회당 자체도 좌우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표면상으로는 사회당과 민주당, 실질적으로는 사회당 좌우파와 민주당의 연립정권이 집권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사회당 내부는 좌우파로 분열되어 자신들이 선출한 스즈키 총리를 흔들고 있었고 민주당은 애초에 우파정당 이었으나[2] 사회당 측이 각료의 3/1을 내주고 중의원 의장을 양당 합의하에 임명하기로 하면서 겨우겨우 모셔온 상태였기 때문에 이 연정이 안정되어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은 자유당 요시다 총리의 장기집권 이후 지속되는 정치혼란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이러한 사회 풍조에 좌우익의 극단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체제전복을 주장하는 시위가 일파만파 퍼져나가고 있었다. 안보투쟁이 안보 조약 개정에 대한 반대운동에서 무능한 기성정당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성격이 변화하여 '기득권 정당'중 하나인 민주당이 포함된 연립정부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는 와중 스즈키 총리는 국회의사당에서 직접 좌우익의 시위대 수뇌부와 만나 상황을 타계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대부분의 각료들과[3] 전체의 약 5/1에 달하는 중의원 의원들, 야당의 거물급 정치인들과 좌우 시위대의 지도부가 1960년 12월 14일 교토의 국회의사당에서 만났다. 처음에는 비교적 조용하게 토론이 진행되었으나 이윽고 고성이 낭자하기 시작했으며 국회의사당 내부는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것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밖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으나 시위대 수뇌부와 정치인들의 충돌을 방지하기위해 몸싸움을 벌이고 있던 국회 경호원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유조차가 국회의사당과 충돌하면서 국회의사당 내부의 인원 전원이 폭사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에 극단주의 시위대가 내각몰살을 기회삼아 체제전복을 부르짓자 이에 위기를 느낀 오히라 마사요시 당시 총리대리가 미중양국의 묵인하에 남일본 전역에 국방군의 치안출동(사실상의 계엄령)을 명령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함으로써 치안유지를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제1야당이자 국회 제1당인 자유당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기에 이른다.

  1. 거국 관료내각
  2. 현재 민주당의 리버럴한 이미지와 달리 당시의 민주당은 자유당보다도 보수적인 우익성향의 정당으로 분류되었다.
  3. 발목 부상으로 쉬고 있던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대신 등 3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