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넘이 정변
new year Coup d'état
新年政變
100%
날짜 1663년 12월 31일 ~ 1664년 1월 1일
장소 게파르토 게파르토 제국 뵐케주 모지리 시
원인 키르수스와의 전쟁으로 인한 패전, 경제개혁 진행 부진
결과 반란 성공, 황실 및 확립내각 해산
피안토네 내각 국권 장악
영향 게파르토 제국 몰락, 정치 전쟁 사건 발생
지휘관
진압군
게파르토 제국의 황제 폐하만을 위한 제국군
반란군
총통을 위한 대 게파르토 국가방위군
게파르토 다카리바고 3세
게파르토 게파르트 다누비아
게파르토 이반 노로코베츠
게파르토 피안토네 레파치오
게파르토 세인트 고모리아
게파르토 슈탄다르테 하겐다스
게파르토 노가르슈 훈예디
피해
진압군
게파르토 제국의 황제 폐하만을 위한 제국군
반란군
총통을 위한 대 게파르토 국가방위군
260여 명 380여 명


해넘이 정변은 1663년 12월 31일부터 1월 1일까지 피안토네 레파치오 육군 소장을 비롯한 게파르토 제국군 장교들에 의해 시행된 군사반란이다. 기록상 건국력 560년부터 건국되어 약 1103년간 지속되어온 게파르토 제국과 1620년부터 친정을 펼쳐온 제국 황제 게파르토 다카리바고 3세의 치세가 43년 만에 무너졌다. 에세르 지방키르수스 제국의 개입 하에 분리독립하였으며, 피안토네 소장을 주축으로 하는 게파르토 인민단결공화국이 건립되였다.

당시 게파르토 제국군 내부에서는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종전 이후의 경제적 혼란상과 황실의 극단적 정책, 키르수스, 사련의 군사-사회적 압박, 군 개편에 대한 반대 의견 등으로 인해 황실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이 존재했다.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한 피안토네 소장과 휘하 회지 너슈트 대령 및 슈탄다르테 사관학교 생도들과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의 주도 하에 쿠데타가 기획되었다.

당시 군에서는 대규모 숙청 작업이 시행 중이었다.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이후 키르수스군을 상대로 전위적인 전과를 얻어낸 게파르토 제국군은 동원령이 해제되자 황제는 비대한 장교단을 유지하고 전쟁영웅으로서 전국민적인 지지를 얻던 피안토네에게 정치적인 압박을 느꼈고, 피안토네 소장과 그 지인들을 대상으로 강제 예편을 시도하였다. 이에 64년 4월에 예편이 예정된 소장은 군의 부정부패와 비리, 에세르 점령 이후 군에 대한 포상 전무를 이유로 반란을 계획하였다.

군사반란 세력은 피안토네 휘하 제대였던 제3독립기병연대, 제52기병연대, 제1보병사단[1]이 주축이 되었으며, 이 외에도 다수의 예비보병연대 및 포병연대가 동조했다.

12월 31일, 신성수도 모지리 시에서 열병식 도중 기병대들의 갑작스런 돌격과 탱켓들의 사격음을 신호로 반란세력은 열병식을 위해 모여있던 각 부처 대신들과 군 최고사령부 및 최상급제대 사령관, 황제를 비롯한 황실 일가를 포로로 잡아 대부분을 처형 및 전향시켰으며, 게파르토 제국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전권을 게파르토 공화국에 이양시킨다.

혁명 직후 공식적으로 2월까지 반란 세력의 제국군 소탕 작전인 대협상이 진행되었다. 에세르 지방에 잔존한 게파르토 제국군은 소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대협상 이후 1667년까지 게파르토 제국군 소수 잔당들에 대한 토벌작전이 시행되었다.

  1. 당시 신편 중이었으며, 구 제48보병연대제43보병연대가 주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