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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료국
大遼國
국기
2410년~2422년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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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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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칭제건원 2410년 7월 15일
  • 요녕 통일 2415년
  • 제1차 하북 원정 2416~2417년
  • 제2차 하북 원정 2420~2421년
  • 묵던 전투 2421년
  • 정일남에게 항복 2422년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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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랴오양(遼陽)
최대 도시
주요 도시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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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주류 문화
랴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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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묵던, 자오랴오, 연
언어
동북 관화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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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종교
티베트 불교, 야명도, 텡그리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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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체제
관료제
지도자 (황제)
태조 고황제 랴오쑹즈(遼宋志)(2410~2421)

폐황제 랴오지양(遼機楊)(2421~22)

개요

대요국은 요녕 지방에 존속했던 황제국으로, 랴오양의 하급 장수였던 랴오쑹즈(遼宋志,료송지)가 쿠데타를 일으켜 량씨 왕족들을 몰살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며 성립되었다. 사건 이후 요동 땅의 여러 국가들 중 유일하게 중원을 직접 노렸으나, 아쉽게 철수하였고, 요동의 다른 세력들을 전부 통합하려던 중 군재가 더 뛰어난 정일남에게 가로막히고 황제가 살해당하면서 11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얄루 제국의 사실상 전신이다.

역사

기원

랴오 쑹즈는 요양 근교의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가문은 보잘것 없었으나 쑹즈의 능력 하나 만으로 일어나 귀족이라 자칭할 정도가 되었다. 이런 그의 출신 문제는 계속하여 그의 출세길을 붙잡게 되었다. 당시 요양 군문의 고위 관직은 량 가문과 왕에게 찬동하는 소수의 가문들에게만 허락되어 있었다. 그는 보여준 능력에 비해 낮은 자리를 전전하였다. 이런 상황에 불만을 품은 것은 그보다는 그의 부하들이었다. 쑹즈는 그의 부하들을 잘 다독이고 병사와 지속적인 교감을 나누며 이들을 잘 다독이는 역할로 그의 쓸모를 증명하였다. 그러나 불혹이 되던 날, 초원으로 떠오르는 달을 보며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는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을 넘어 한족의 고향 중원 땅으로 들어가는 꿈이 었었다. 그가 처음 군문에 들어설 때는 그 선봉에 서고 싶었지만 지금의 요양은 량 가문의 오랜 지배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그는 늙어 죽는 날까지 이런 삶을 지속하게 될 것이 자명했다. 그렇다면 죽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데 생각이 닿은 쑹즈는 하루라도 더 늙기 전에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세력을 끌어들였고, 요양군의 하급 장교와 병사 대다수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량씨의 눈 밖에 나 벼슬 길이 막힌 많은 귀족 가문 역시 이에 동참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조선족의 지도자 정일남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개마기병은 요양군에도 위협이 될 정도로 위명을 떨치고 있었고 조선족이 량 가문에 대해 가지는 원한은 유명한 것이었다.

그들의 동맹은 성공적이었다. 2410년 정월 대보름, 요양에서 상원절 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에 요양왕 량 둥마오와 태자 량 차오반이 참석하였고 고관대작들과 함께 술독에 빠지듯 연회를 즐겼다. 그날 밤 랴오 쑹즈와 차별 받던 귀족들, 요양군, 그리고 조선족이 합세한 반란이 일어났다. 모든 량씨는 죽거나 나포되었고 잡힌 이들도 다음날 아침 목이 달아났다. 량 가문의 모든 이들을 죽였는데 그중에는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열 명이나 있었지만 그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량씨와 그를 따르던 가문을 제거한 뒤 요양은 빠르게 안정되었다. 상원절로부터 여섯 달이 흐른 뒤, 중원절에 랴오 쑹즈는 스스로를 대요 제국의 황제로 선포하고 연호를 천의라 하였다. 혁명에 동참한 조선족은 왕을 세울 권리를 얻게 되었고 당연히 정일남을 조선족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추석날 28살의 나이에 태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태왕에 오른 이후 황제는 그를 고려왕으로 다시 봉작하여 번왕으로 삼았고, 졸본과 환인을 그의 영지로 분봉하였다.

팽창

처음 대요가 세워질 당시 누구도 황제라는 명칭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초원에서 황제를 선포한 이들은 많았지만 그들은 모두 무리한 전쟁 끝에 초원의 한줄기 핏물이 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요는 달랐다.

기존의 여러 주먹구구식 제도를 일신하고, 고대 중국 왕조들을 본받아 황제 중심의 강력한 행정 제도를 확립하였다. 또한 량씨 치하에 존재하던 고위/하위 귀족 간의 구분을 폐지하고, 심지어는 평민 출신들도 능력을 보이면 적극 등용하였다. 이는 특히 군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자연스레 새로 편성된 군대는 황제에 대한 강한 충심을 갖게 되었다.

군의 재조직이 끝난 뒤 황제는 동원을 개시했다. 과거 부실한 요양의 군대를 생각하던 주변의 왕국들과 도시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요의 깃발을 내걸게 되었다. 황제는 도시들의 자치권은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도 저항한 봉건 영주들의 토지는 몰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특히 조선-요동-산동 삼각무역의 중계지이던 대련을 얻은 것은 크나큰 수확이었고, 이들은 상거래의 자유를 보장받은 채 황제에게 금은보화를 가져다 주었다.

이 모든 일은 5년 만에 마무리되었고, 이를 지켜보던 몽골의 호르친,차하르는 발빠르게 복속하였다. 보병 전력에 치중한 황제의 군사개혁을 보완할 강력한 기병대를 얻은 것이다. 황제는 마침내 평생의 열망이던 입관(入關)을 위해 산해관으로 진격하였으니, 이것이 제1차 하북 정벌이다.

그러나 모사재인성사재천(謀事在人成事在天)이라 하였던가. 대요의 7만(호왈 30만) 대군세는 내전 중이던 하북의 형세를 파고들어 손쉽게 입관하는 데까진 성공하였으나, 열하를 건너던 중 하필 폭풍우가 휘몰아쳐 싸워보지도 않고 수만 사상자와 치중대가 쓸려나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전투병력의 손실은 미미했으나, 보급품이 대부분 날아가는 바람에 진격은커녕 주둔조차 불가하게 되었다. 그나마 중원 땅의 풍부한 물산들과 부귀를 약간이나마 맛보고, 조금 챙겨갈 수 있는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그것만 해도 상대적으로 황량한 요동인들에게는 성공적 약탈이었다.

원래 사람 성정이 그렇듯, 잘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운 때문에 실패했다면 그만큼 기분 나쁠 일이 없으리라. 입관이, 중원 땅에 깃발을 꽂고 천명의 주인을 가리려던 그 성스럽고 숭고한 목표가 고작 재화 조금 뺏어오겠답시고 벌인 도적질 따위로 전락해 버렸으니, 객관적으로 국력에 큰 손실은 없었다고는 하나 황제는 분노를 숨길 수 없었다. 이로부터 그는 지금까지 보이던 자애로움과 총기를 차차 잃고, 감정적이고 독선적으로 변해 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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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황제는 조선족을 자신의 신민으로 여기며 태왕의 권위를 조금씩 침범하기 시작했다. 1차 하북 원정이 끝나고 이 움직임은 더욱 심해졌다. 2419년 태왕은 고려왕의 자격으로 황제를 알현하며 현 상황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황제는 정일남의 고려왕 작위를 박탈하고 감옥에 가둬버렸다. 곧 개마기병을 무장 해제 시키려 하였으나 낌새를 눈치챈 조선족들에 의해 오히려 무장 폭동이 일어났다.

요양에서 일어난 이 혼란 속에서 정일남은 탈옥하여 개마기병과 조선족들을 이끌고 초원으로 떠나게 되었다. 폭동 진압 후 조선족들은 병사로 강제 징용되었다. 이들은 정처 없이 떠돌다 2420년 심양의 칸 원타이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이때 심양에는 요 황제가 10만의 대병력을 이끌고 묵던을 칠 것이라는 소문이 만연했다. 원타이는 대요 내부 사정에 정통하고 병력까지 있는 그를 용병으로 고용하였고, 제한적이지만 군대의 지휘권까지 맡겼다. 2421년 황제는 2차 하북 정벌에서 돌아오며 곧바로 심양을 공격했다. 오랜 원정으로 이미 지쳐있던 병력이지만 원타이와 그 동맹보다는 압도적인 수였고, 여차하면 북방의 차하르부와 호르친부가 그의 요청에 따라 묵던의 후방을 칠 수도 있었다. 원타이는 항복까지 고려하였으나 정일남의 강력한 주장에 항전을 결심했다.

몇번의 산발적인 국지전을 거친 끝에 심양군 2만, 대요군 5만이 성 앞 평지에서 대회전을 펼쳤다. 이 전투에서 정일남은 기병과 보병을 이용한 망치와 모루 전법을 정석적으로 활용하였고, 미리 손을 써 대요군에 속한 조선족 병사들이 항명하게 하였다. 안에서부터 지휘 체계가 무너진 대요군은 기병 돌격에 대오가 무너졌고 참수 작전에 의해 수뇌부가 참살 당했다. 황제와 태자, 2황자가 몰살당한 대요군은 상장군 왕첸슈(王泉秀)가 겨우 병사를 추스려 요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군재가 없었기에 요양에 남아있던 3황자 랴오 지양은 급하게 황위 승계를 선포하고 부황에게 태조의 묘호와 시호를 내렸으며 자신의 연호를 명천이라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왕재 또한 아니었고 왕첸슈를 패전의 책임을 물어 감옥에 가두었다. 이후 요양 일대에서 사람들을 긁어모아 5만의 군대를 다시 만들어 냈지만 대다수는 병사라 부를 수 없는 자들이었다. 황제는 권위가 무너진 상황에서 지방에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미 상황을 파악한 점령지는 제국에서 이탈하였다.

마침내 요양 일대에서 지배력까지 흔들리게 된 황제는 길길이 날뛸 뿐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을 전해 들은 정일남은 요양으로 진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원타이는 이를 반대하며 회군할 것을 명하였다. 이미 제국은 박살났고 요양을 정일남이 정복하게 될 경우 자신의 묵던 지배가 흔들릴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원타이의 명령은 전투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여 군대를 실망하게 하였다. 이에 정일남은 원타이의 심복들을 제거한 후 병력을 그의 것으로 온전히 삼게 되었다. 원타이의 동맹군 역시 정일남의 전술과 용병술에 감화되어 그를 따르게 되었다. 지난 전투에서 흩어졌던 많은 대요 군들도 정일남의 군영에 속속 합류하였다. 이윽고 2422년 정일남의 군대가 요양성 앞에 진을 치게 되었을 때, 그의 군대는 3만에 육박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요의 황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결국 금위대장 위안타오(元道)가 황제의 목을 치고 첸슈를 출옥시켜 협상 대표자로 삼았다. 첸슈는 정일남에게 대요의 옥새를 바치며 항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