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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령
신성 복음 연합의 봉신국
국기
2330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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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부 총독부의 성립 2330년
  • 기계교에 대한 전면 탄압 2380년
  • 2402년 기계교의 대반란
  • 2418년 신성 혁명, 총독부에서 대공령으로의 전환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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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체제
봉건제
지도자 (대공)
임요한

개요

북부 대공령은 신성 복음 연합의 북쪽에 위치한 대공령이다. 현재 대공은 임요한.

충남의 태안, 서산, 당진, 홍성, 예산, 청양, 공주를 차지하고 있으다. 대공령 승격 당시 보령, 부여, 서천, 논산은 제국령에 편입되며 반납하였고 천안과 아산은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상황이다. 대공치소는 공주에 있다.



역사

북부 총독부의 건설

현재 북부대공령은 과거 북부 총독부의 영역으로 북부 총독부는 2대 황제 이문호의 치세 당시 창설되었다.

2대 황제 이문호의 확장주의적 정책은 당시 수원을 기반으로 한 기계교 연맹체과의 충돌을 야기했다. 신성 복음 연합 결성 초기에 이루어졌던 교역과 기술자 초빙 등으로 양국의 관계는 나쁘지 않은 선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원불교의 난으로 촉발된 양국의 충돌은 곧 전쟁으로 이어졌다. 원불교의 난 직후 제국군이 창설되었고 기계교와의 전쟁 역시 시작되었다. 당시 기계교 세력은 큰 도전을 받지 않았고 경기 남부에서 호서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을 이끄는 구심점은 수원, 공주, 대전의 3개 도시였다.

2329년 12월 겨울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북벌은 아주 고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종전에도 익산과 논산은 평야로 이어져 있어 그 길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제국군은 텅 빈 논을 지나 진격하였고 논산의 작은 부락들은 대군세에 저절로 길을 열어 주었다. 당시 논산은 약한 기계교 우세 지역으로 중앙의 부족이 아니면 무속 신앙을 숭배하는 분위기였다. 그랬기에 중앙과 지방의 마찰이 있었고 전쟁은 싱겁게 종료되었다. 2330년 정초에 황제에게 논산의 정벌 소식을 알렸을 정도이다. 황제는 즉시 제국군 북부사령부를 설치하였고 기계교 세력의 토벌을 시작하였다. 북부사령부는 현지 징집을 통해 병력을 늘인 후 병력을 둘로 쪼개어 진격하였다. 그 목표는 공주왕국 이었다. 공주왕국의 왕 나도겸은 그 진격을 예상하지 못하였고 급히 우금치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북부사령부의 정예병사들은 그들을 쉽게 격파하였고 왕은 공산성으로 퇴각하려 하였다. 그러나 다른 고개를 통해 넘어온 병력이 이미 공산성을 점령하고 있었고 결국 나도겸은 항복하고 처형되었다. 천안에서 구원군을 보내어 퇴각하였으나 이미 공산성은 허물어진 뒤였다. 공주의 함락 이후 천안이 버티고 있는 북부를 제외한 충남 남부 지역의 지배권은 소멸하였고 이를 제국에서는 빠르게 점령하기 시작했다. 북부군 사령관 김상원은 스스로를 공주왕국 국왕이라 칭하며 기계교로 개종하여 기계교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하였고 황제는 이 전략에 대해 묵인하였다. 같은 해 부여를 점령하였고 이듬해 서천이 스스로 항복해 왔다. 2332년 황제가 신안을 향한 남진을 개시하였다. 이때 북부의 안정적 관리를 위해 북부총독부를 개설하여 사령관 김상원을 초대 총독으로 삼았다. 병력의 절반이 남부로 차출되었지만 현지에서 징집되는 기계교의 병력이 이를 충원하고도 넘쳤기에 남진 도중에도 북부총독부의 확장은 계속되었다. 2334년 해안가를 따라 북상하여 보령과 홍성을 점령하였고 2235년 보령에서 청양으로 넘어가 점령하였다. 해당 지역은 모두 지역 세력에게 백작위를 수여하여 간접 지배하였다. 2336년 동부원정을 위해 추가로 절반의 병력이 차출되었기에 내부 안정활동을 이어나갔다. 2345년 2대 총독으로 박헌주가 임명되었다. 그는 다시금 기계교로 개종하였고 공주왕을 칭하였다. 2350년 다시 양성한 병력을 이용하여 청양과 논산에서 동시에 진격하는 방식으로 또다시 공주를 함락시켰다. 당시 공주는 천안시국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격퇴함으로써 공주를 완전히 북부 총독부의 영역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이후 천안-아산 세력의 방어를 위해 북쪽 골짜기에 초소를 설치하였다.

초기 제국은 무역 연합이었기 때문에 종교갈등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대총독 김상원과 2대 총독 박헌주는 지역의 안정을 위해 기계교로 개종하였고 황제는 정략적 판단에 근거하여 이를 묵인하였다.

북부 총독부의 번영

2351년 3대 황제 이제용이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 전에 명령을 통해 미리 북부 총독부의 치소를 공주로 옮겼다. 이는 2대 총독 박헌주가 기계교로 개종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대관식에서 신성 복음 제국이 선포되자 북부 총독부의 민심이 험악해졌으나 기계교도이자 공주왕을 자칭하는 박헌주는 이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공주와 홍성에서 작은 소요가 일어났으나 무력행사와 위무를 통해 진정시켰다. 이후로도 북부 총독부는 상당한 수준의 자치가 허용되어 북부 총독부의 제국군 사령부는 황제 대신 총독을 통해 명령이 전달되도록 체계를 변경하였고 종교의 자유 역시 허용되었다. 그러면서 황제는 지역에 도로와 수로, 저수지, 다리 등을 건설하여 제국의 은혜를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논산, 서천, 부여 등 남부에서는 목사의 선교를 허용하고 암암리에 제국 국교회가 우세한 지역에 더 많은 혜택을 내려주었기에 호서 남부에서는 상당한 수의 개종이 이루어졌다. 부가 충족되자 민심은 긍정적으로 돌아섰으며 내부 단속에 필요없어진 군대는 북방을 향하였다. 2359년 3대 총독으로 김학표가 임명되었다. 그는 국교회인이었지만 공주왕을 자칭하였고 황제의 명령에 따라 북부에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천안과 아산을 점령하였고 일시적으로 기계교 연맹의 수도 수원을 공성하는데 이르렀다. 수원 화성의 견고함에 비록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주변지역에서 약탈이 이루어졌고 이 부는 다시 총독부에 돌아갔다. 천안과 아산을 점령하며 제국 해군이 이동하였고 바닷길을 막자 서산, 당진, 예산, 태안이 북부 총독부에 항복하였다. 이를 인정하지 않은 세력의 반란이 있었지만 2370년 서산에서의 마지막 반란을 끝으로 저항세력이 대부분 소멸하였다. 목사의 선교는 이제 청양, 공주, 보령 등 중부의 도시들로 향하였다.

북부 총독부의 몰락

이러한 짧은 황금기는 4대 황대 박중현의 치세에 이르러 종말한다. 황제는 힘을 잃었고 제국은 주변 귀족들에게 흔들리며 총독부의 쇠퇴기가 시작되었다. 2380년 새로 임명된 4대 총독은 목사 출신의 권혜성이었다. 그는 군정을 하지 못하였기에 북부 사령부를 부활시켜 군권을 독립시켰다. 그가 신경쓴 것은 오직 선교였다. 먼저 공주왕의 칭호는 이교의 것이라 하여 폐기하면서 전국의 기계교의 행사가 취소되었고 교당도 모두 폐쇄되는 등 기계교의 모든것이 탄압 대상이었다. 비록 남부에서 선교가 어느정도 진척된 상태라 해도 남부조차 네명중 한명은 기계교를 믿고 있었고 나머지 세명도 기계교의 전통을 자신들의 것이라 여기며 암묵적으로 따르는 상태였다. 실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벌어진 탄압으로 인해 불만이 치솟았지만 마을마다 제국군이 몰려다니는 상황은 어쩔수 없는 것이었다. 2390년까지 가시적으로 제국 남부지역의 제국 국교회 개종률은 90%에 이르렀고 중부는 50%까지 올라갔다. 그 해 권혜성은 '북부 총독부의 야만스러운 땅에서의 성공적인 이교도 교화' 라는 공로로 제국교회 고위직이 되어 떠났다. 직후 5대 총독 박권성이 임명되었다. 그는 박중현의 5촌 친척으로 능력도 없고 말재간도 없었으나 이교도에 대한 두루뭉술한 연민과 약간의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발령 직후 북부 총독부의 상황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2391년 그는 이 갈등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그 방책은 기계교와 제국교회의 예배방식을 어느정도 절충하고 기계교의 전통을 기독교 식으로 제국교회에 흡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그 누구의 지지도 얻지 못하였다. 기계교도들은 신앙을 금지시키더니 이제는 오염시켜 버리려고 한다고 날뛰었고 제국교회의 성직자 역시 이교의 풍습을 정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마땅찮아했다. 이런 상황이 중앙에 보고되자 제국 국교회 중앙회는 엄중히 경고를 표하였고 이 정책은 철회되었다. 북부 총독부의 상황은 더 나빠졌다. 이제 기계교도들은 제국교회와 제국을 믿을수 없게 되었다. 반란은 기정사실이었고 기회만 엿보는 상황이었다. 2393년 박권성은 공주 총독부 치소에서 국교회로 개종한 하인에게 암살당하였다. 직후 공주에서 반란이 있었으나 제국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6대 총독으로 제국군 남부사령부 출신 이재욱이 임명되었다. 그는 공포정치를 펼치며 북부 총독부를 계엄령에 준하는 상태로 유지하였다. 이렇게 유지되던 균형이 파괴된 것은 2399년의 제 3차 신성 복음 연합-신안 제국 전쟁이었다. 신성복음연합이 상대하는 신안은 상당한 국력을 회복한 상태였고 개전 두달 후 북부총독령의 병력이 차출되었다. 하지만 신안 제국과의 회전에서 신성 복음 연합이 패배하면서 제국군은 소멸하게 되었고 그 안에는 북부총독령의 병력 역시 존재하였다. 신안 제국 또한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에 제국 내부로의 진군 없이 철군했지만 파병으로 인한 총독부의 병력 손실은 매우 치명적이었다. 치솟아 오르는 불만을 제어할 수단이 없어진 총독부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북부 총독부의 위기

북부 총독부는 뿌리깊은 기계교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2400년 북부 총독부에 연합-신안 전쟁의 결과가 알려지자 반란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총독부는 필사적으로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중앙은 북부 총독부를 유지할 여력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한 제국군 장군을 좌천시켜 북부 총독부 임시 안무사로 부임시켰다. 그는 제국군과 신안의 대회전에서 병력을 밀어넣지 않고 후퇴한 죄로 좌천되었다. 그의 부대는 제국군 중에서 모든 편제를 보존한 유일한 부대였다. 임요한 장군은 삼백명의 기병과 칠백명의 보병을 이끌고 논산을 통해 북부 총독부로 진입하였다. 그는 우선 논산, 부여, 서천의 반란을 진압하고 종교에 대한 유화책을 펼쳐 더이상의 봉기를 막았다. 동시에 사람들을 구슬려 징집하여 군대로 무장시켰다. 제국군 정규복식이 보급되지 않았기에 새로 편성된 임요한의 부대는 기계교도가 흔히 사용하는 갑주와 무기로 무장하게 되었다. 이를 이용하여 기만책과 간첩 등 다양한 전술을 동원하였고 보령과 청양을 거쳐 2403년 공주를 수복하는데 성공하였다. 총독 이재욱은 이미 작년에 기계교도에게 투항하여 성을 열었다가 처형당해 오체분시되고 썩어 문드러진 목이 성루에 매달린 상태였다. 그는 임시로 제국군 북부사령부 사령관이 되었고 본격적인 반란 진압을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중앙에서는 그를 7대 총독으로 임명하였지만 병력의 추가 지원은 없었다. 임요한은 곧 홍주, 예산, 당진, 서산, 태안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천안-아산지역은 이미 경기 남부 기계교 국가인 기계조합연맹의 아래로 들어갔기에 마지막 상대로 미뤄놓고 있었다. 2405년 한달간 천안-아산을 공격했지만 번번히 실패하였다. 결국 기계조합연맹과의 대타협을 통해 국경선을 설정하고 전쟁을 종료하였다. 타협이 이루어진 후 중앙에 통보하였고 중앙에서는 답신이 오지 않았다. 2418년 민중반란에서 일부 혁명군이 총독부 남부로 진입하며 기계교도를 학살하자 임요한 총독이 직접 나서 봉기를 진압하는데 성공한다.

북부대공령의 탄생

기계교와 혁명군을 소탕한 북부는 다시 안정되고 평화가 찾아온다. 안정된 기반을 마련한 임요한 장군은 야망을 가지고서 제 2의 인생을 시작했지만 노화의 흐름에 따라 세습 작위를 요구하게 된다. 장군은 지역 토호들을 설득하고 탄원서를 보내며 안정된 북부를 위해서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명분 하에 수도 전주에 편지를 보내게 된다. 황제는 총독부에 보낼 수 있는 지원이 한정됨과 동시에 임요한 장군의 죽음은 총독부의 붕괴임을 이해했기에 안정된 완충지대를 원하는 부여와 홍주 선제후의 지지 아래서 마지막 총독이자 초대 대공이 되는것에 성공한다.


주요 봉신

홍주

이단 반대파 박만희

박만희의 선조는 기계교 세력을 배신하고 신복에 가입해 수많은 공을 세워서 공작 자리에까지 올랐다. 또한 임요한의 북부 정벌 당시에서도 살아남은 영주 중 하나였다.하지만 박만희는 여전히 기계교 비밀 신앙을 간직하고 있으며 중앙집권을 거부하고 자신의 영지에서 계속 왕처럼 군림하길 바라고 있다.


특징

북부대공령은 혁명가,기계교,기회주의자,총독부,기타 등등의 수많은 부류의 사람들의 적대적인 공존의 장이다. 경제적 침체와 사회 혼란에서 북부대공령은 제국의 우울과 함께 모순적으로 끝없이 변화하는 제국의 역동적 면모를 상징하고 있다. 진정한 기계교의 햇불이 될 것인지 혁명의 새로운 보루가 될 것인지 제국에 동화될 것인지 제국의 모범주가 될 것인지 훗날 강력한 제국의 기반이 될 것인지 아니면 장군의 소박한 꿈을 이룰것인지 이는 모두 당신의 몫이다.


  1. 지역의 문화는 홍성,천안,대전
  2. 지역에서는 중부 한국어 사용
  3. 2359년까지 기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