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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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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왕국

진주는 산으로 둘러싸여 부족들이 난립한 경남 서부내륙에서 유일하게 도시라 부를 수 있는 곳이었다. 진주는 사천을 통해 바다와 내륙을 이으며 교역과 상업, 가내수공업에 종사하며 지역 중심지 역할을 했고 기술의 우위를 통해 주변 부족들의 맹주로 군림했다.

그러나 신안의 약탈이 시작되자 정체된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남해를 점거한 신안의 약탈단은 사천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왔고 진주를 비롯하여 주변 산간 부락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때 진주의 유지들을 규합하여 군대를 만든 것이 소명웅이었다. 그는 군대를 만들어 신안에 대항하여 회전을 피하고 작은 부대들을 곳곳에서 요격하며 신안에 피해를 입히는 것에 성공했다. 그는 신안을 쓸어버리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사천으로 진격했으나 군대가 충돌하여 패배했다. 그렇지만 그의 노력 덕에 내륙으로 들어오는 약탈단의 숫자는 크게 줄었고 그는 진주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곧 그는 지역의 패자 자리를 명문화하고 싶어했다. 그렇게 회합을 소집하여 여러 족장들을 불러모았다. 진주왕 소명웅은 자신의 공적 덕에 그들이 신안의 약탈단을 피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자신을 왕으로 모시고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야만 신안의 위협으로부터 그들이 지켜질 것이라는 협박은 덤이었다. 한편 족장들은 처음엔 유화적인 태도였으나 고압적인 왕의 말에 분노했다. 그들은 진주와 자신들은 단지 교역관계일 뿐이고 자유인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까지 신안이 들어오는 것은 진주가 유린당한 이후이므로 자신들은 아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전운이 감돌았다.

산간 부락의 족장들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힘을 합치는 것에 동의했고 신가야연합을 선포했다. 연합의 맹주는 진주 남강 동쪽의 함안이었다. 한편 진주에서도 군대가 소집되었으나 이 전쟁을 원하는 것은 왕 혼자였다. 소명웅은 신안에 맞설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반면 귀족이 된 유지들 입장에서는 아직 신안이 남긴 상처가 완전히 복구된 것도 아니었고 전쟁의 승리는 곧 왕의 공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왕이 땅을 점령하면 왕령지가 될 것이고 이는 곧 소씨 왕실의 영지를 의미한다. 이런 전쟁이 지속된다면 귀족과 왕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 그들은 왕에게 생사여탈권을 맡기게 될 것이 자명했다. 그러나 상대가 군대를 일으켰으니 이제와서 전쟁을 피할수는 없었다.

진주-가야 전쟁

진주의 군대가 함안을 따라 내려가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함안으로 진군한 군대가 맞이한 것은 텅빈 마을 뿐이었다. 이미 신안의 약탈을 통해 산간 부락들은 거점을 포기하고 산으로 빠지며 적을 괴롭히는 유격전에 익숙해져 있었다. 부족민들은 가진것이 적었기에 가능한 전법이었다. 함안에 허울뿐인 깃발을 꽃은 소명웅은 역시 강을 따라 창녕으로 나아갔다. 이미 보급선은 한없이 길어졌기에 진주군은 매우 위험한 상태였다. 낙동강을 도강한 그들을 맞이한 것은 역시 텅 빈 마을이었다. 이때 모든 상황을 파악한 소명웅은 퇴각명령을 내렸다. 이대로라면 1년이 가도 사람한명 만나지 못할 수가 있었고 그렇게 된다면 농사를 짓지 못한 진주는 파멸이었다.

퇴각을 시작하자 그는 비로소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보급선이 갑자기 끊겼고 후미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급히 다시 낙동강을 도강하던 중 강 동안에는 창녕사람, 서안에는 함안사람들이 나타나 진주군을 공격했다. 실제로 칼에 맞아 죽은 이들은 거의 되지 않았고 물에 빠진 이들이 속출했다. 대형이 무너지자 만 명에 달했던 진주군은 무너져 왕과 그 휘하 백명만이 통제에 남았다. 이들은 남강을 따라 후퇴하던 도중 함안 족장 김명진에 의해 급습 당해 왕과 장수들이 죽었다. 왕이 죽고 군대가 와해 되자, 가야연맹은 진주에 더 이상의 원한을 사지 않기 위해 진주사람들을 돌려보냈다. 물에 익사한 사람이 백명 남짓이었고 칼에 맞아 죽은 사람은 사십명 정도였다.

대부분의 진주인들이 송환되자 진주 귀족회의에서는 함안족장에게 감사를 표하고 선물을 보냈다. 전후 처리를 위한 회의에서 진주는 자발적으로 왕직의 폐지를 결정하고 5인 귀족회의가 진주를 다스리는 것으로 합의했다. 왕의 가문인 소씨에서도 귀족회의 참석권을 얻는 것으로 이를 수용했다. 가야연합은 진주가 군대를 내어 그들을 침탈하지 말것과 옛날처럼 진주에 시장을 열어 자유로운 상업을 보장할 것을 종전조건으로 내걸었다.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종전협상은 평화로이 종료되었다.

사천 사태

그러던 어느날 남해의 대대적 침략에 의해 사천과 삼천포가 모두 함락되는 일이 일어난다. 진주에서는 전쟁의 기억에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하여 5인회의의 부의장 권영만을 사절로 보내 상황을 염탐하였다. 진주의 깃발을 든 그가 사천으로 향하자 많은 사천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와 사천을 해방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빈객관에 머무르는 동안 사천시장 강연품과 삼천포시장 박천수는 밀사를 보내 진주의 출병을 요청했다. 진주의 군대가 고개를 넘어오면 사천사람들은 적극 호응하여 진주의 병력이 될 것이며 사태가 종결된 이후 사천은 진주에 몸을 의탁하겠다는 것이었다.

처음 권영만은 무리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공격적인 태도와 협박을 가하는 남해왕을 접견한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사절은 나흘 만에 진주로 돌아갔고 귀족회의에 이 사실을 전달했다. 회의는 빠르게 종결되어 만장일치로 군사를 내어 사천을 병합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진주는 오천명의 병력을 내어 빠르게 사천으로 넘어왔고 소식을 미리 들었던 사천사람들은 남해의 병사를 공격했다. 남해군은 당황하여 빠르게 퇴각하였고 왕 역시 사천시청에서 물러났다.

삼천포와 사천을 해방시키고 전쟁이 종결되나 했지만 곧 남해왕이 만 서쪽에 상륙하여 가화강을 경계로 진을 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결국 강을 마주보고 일주일간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남해에서 먼저 사절이 도착해 신안의 동태가 심상치 않으니 이쯤하여 전쟁을 끝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사천에서는 모든 영역을 수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으나 5인의회에서는 신안을 막는 것이 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의회는 현상유지를 조건으로 종전에 동의하였다. 이 결정에 사천사람들의 불만이 터져나왔기에 시장들의 가문인 밀양 박씨와 진주 강씨를 귀족의회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그들의 화를 달래었다. 이후 의회는 7인체제로 개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