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보날 내전

이름100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5월 21일 (수) 02:22 판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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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페로스벨트  ·  바네버베센  ·  투디아  ·  낸팬  ·  신디아  ·  헤르니소스  ·  바필리아  ·  펜데아시아  ·  디흐트에이븐
국가
키르수스 제국 게파르토 제국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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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련 구성국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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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디아  ·  낸팬  ·  신디아
헤르니소스  ·  바필리아  ·  펜데아시아  ·  디흐트에이븐
연표


-546
1423
고전고대
고대 후기
중세 초기
중세 성기
중세 말기


1423
1664
근대
현대


보편전기
연표
-546
1483
1664
고전 고대
고대 후기
중세 초기
중세 성기
중세 말기
근대
현대














보편전기
무기
권총  ·  기관단총 소총  ·  기관총 차량

게파르토 ㅔㄱㅣㅋㅔㅈㅔㅅ·ㅍㅜㅅㅡㅋㅏ 49M

게파르토 Moosmeier 32M pistol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26식 수포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엘빙거 권총



게파르토 ㅍㅜㅅㅡㅋㅏ1651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41형 표준 영도진 보병소총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이리야-야조프 45식 보병용 소총

그란치프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르브 소총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무흐타레프 장비

키르수스 Maschinen Gewehr 57

게파르토 ㅗㅌㅗㅁㅏㅌㅏ·ㅍㅜㅅㅠㅋㅏ

키르수스 Panzerabwehrkanonen 1656

게파르토 49M 6.3qb bombarde

게파르토 51M 6.3qb Bergbombarde

게파르토 52M 6.3qb bombarde

게파르토 50/54M 33qb Bergbombarde

키르수스 1656년식 야전차량 경형

키르수스 1654년식 전선장갑차량

게파르토 53M 3톤 중형트럭 어비거일



잠수함 함선 전투기 폭격기
키르수스 퇴브리크크루비엔 Ddkf.V

그란치프게파르토 가르당 17

게파르토 53M 반도르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피어스마린 F.3 키드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피어스마린 F.5 돌핀

키르수스 그니베겐 GFz.III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하디 베넷 타입P

아인종
카노쿠겔
Kanokugel
드베르그
Dweorg
리겔
Ligel
테살리데스
Teßalides
죄뢰이
Jöröi
라퓰러이
Lafülöi
오르바나 학회  ·  케네우스 의사회  ·  마법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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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파르토 ㅔㄱㅣㅋㅔㅈㅔㅅ·ㅍㅜㅅㅡㅋㅏ 49M

게파르토 Moosmeier 32M pistol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26식 수포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엘빙거 권총



게파르토 ㅍㅜㅅㅡㅋㅏ1651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41형 표준 영도진 보병소총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이리야-야조프 45식 보병용 소총

그란치프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르브 소총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무흐타레프 장비

키르수스 Maschinen Gewehr 57

게파르토 ㅗㅌㅗㅁㅏㅌㅏ·ㅍㅜㅅㅠㅋㅏ

차량
키르수스 Panzerabwehrkanonen 1656

게파르토 49M 6.3qb bombarde

게파르토 51M 6.3qb Bergbombarde

게파르토 52M 6.3qb bombarde

게파르토 50/54M 33qb Bergbombarde

키르수스 1656년식 야전차량 경형

키르수스 1654년식 전선장갑차량

게파르토 53M 3톤 중형트럭 어비거일



잠수함 함선
전투기 폭격기
키르수스 퇴브리크크루비엔 Ddkf.V

그란치프게파르토 가르당 17

게파르토 53M 반도르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피어스마린 F.3 키드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피어스마린 F.5 돌핀

키르수스 그니베겐 GFz.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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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  ·  도서  ·  만화  ·  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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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500년대 말, 대륙 남단의 군소왕국이었던 코르보날은 스타니스와프 지그문트 왕의 전면적 개혁[1]을 단행하며 근대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2] 구(舊) 봉건 귀족층은 왕권 강화에 반발했으나, 지그문트는 농민 봉기 진압 때 보여 준 군사적 카리스마와 교회·도시 세력의 지지를 묶어내 조약을 성사시켰고, 이때 만들어진 입헌 군주제적 장치는 이후 코르보날 내전 이전까지, 코르보날을 견인했다.[3]

그러나 17세기 초 얀 아우구스트 왕이 즉위하면서 국정 기조가 급격히 흔들린다. 전임왕이 남긴 개혁 청사진을 “왕국 고유 전통 회복”이라는 명분 아래 축소·지연했고, 국고를 담보로 그란치프·에세르 예술품을 수입하며 문화 르네상스를 표방했지만 곧 재정 파탄을 초래했다.[4] 여기에 궁정 내 밀실 재판, 교역 독점권 남발 등 비리가 겹치며 의회는 “스타니스와프 지그문트 유지를 잇자.”을 슬로건으로 삼아 공화혁명을 개시했다. 혁명은 계급 투쟁이라기보다는 ‘왕권의 부패에 맞선 귀족·도시·상공 연합’ 성격이었고, 국왕은 종교 명목상의 원수라는 상징만 보존한 채 주권을 완전히 상실한다.

공화혁명 직후, 연합 공화당이 국정 주도권을 잡았으나 다당 난립과 중재자 부재로 의회 내 협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왕정 체제에서 “느리지만 일관된” 개혁 동력을 제공하던 국왕이 사라지자, 입법은 파편화되고 개혁 법안마다 지루한 필리버스터가 이어졌고, 지방귀족·교구단은 중앙정부를 신뢰하지 못해 분리자치 담론을 들고나왔다.[5] 당시 왕정 시절 귀족들은 여전한 권한을 갖고 있었고, 공화 혁명 당시 이득으로 기득권을 유지했다. 덕분에, 당시에 개혁에 대한 강한 방해를 줄 수 있었고, 코르보날에 큰 혼란을 불러왔다.

심지어는 1590년부터 1600년, 대타협 이전까지 이어진 코르보날 1차 내전의 영향으로, 코르보날의 정계는 상당한 고통을 겪었다. 다행인 점은, 전쟁으로 인해 상당한 귀족들이 권력을 상실, 각 지역 군부가 성장해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6]

1643년 등장한 브와디스와프 에르체프스키 내각은 이런 개혁 피로감을 돌파할 카드였다. 에르체프스키가 속한 인민당은 연합 공화당의 모호하고 약한 사회 접근과 달리, 국민의 지지를 통한 “강한 정부가 곧 민생”이라 선전했다. 그는 국가주의적 사회통합 프로그램을 포함한, 국가주의, 보수주의 정책을 밀어붙여 보수파 및 군 장성의 전폭적 지원을 얻었다. 언론과 야합하며, 연합 공화당의 정책들을 일부 변형해 사용하며, 이에 대한 반발을 과거 연합 공화당의 발언을 교묘히 편집해 이용했다. 상당한 대중주의적 접근을 활용해, 정권을 더욱 더 강화한 결과, 에르체프스키 내각은 충분한 정치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했고,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에서 전시 경제의 선언까지 국민의 지지 하에 가능했다.

하지만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에서 강대국 그란치프 편에 서며 전쟁경제를 선포한 것이 치명적이었다.[7] 전쟁이 장기화·패전으로 귀결되자 실업·곡물가 폭등이 폭발했다. 심지어는 전쟁 후반기에 코르보날 국무회의의 소집을 통해, 야누시 티오르멘 장군을 배제하고, 작전을 수립, 실행시키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심지어는 해당 작전으로 키르수스에게 미움을 사, 전후 처리에서 강력한 배상금 역시 물게 되었다. 성과 하나 없이, 손해를 강요받은 정권은 오랫동안 정권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결국 전쟁의 책임을 지고, 에르체프스키 내각은 해체되었다.

그 결과 국내의 여론은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에 가깝게 혁명을 통해 갈아엎어야 한다는 극단적 좌파와 전쟁으로 인해 형성된 강한 민족 갈등에 기반을 둔 권위주의, 민족주의적 우파로 갈리게 되었다.[8] 이러한 민족주의 세력은, 코르보날을 반드시 자기들 민족이 주도해야 하거나, 독립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코르보날 민족주의 세력을 골치 아프게 했다.[9]

이런 민심 흐름 속에서 전 국방군 원수[10], 야누시 티오르멘은 “좌우 극단 모두를 견제할 최후의 중립 카드”로 의회 의장에 선출된다. 그는 군 통수 경험과 덕장 이미지 덕에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부각됐지만, 1658년 6월 1일 새벽, 크세사바 자택 앞에서 피살되며 상황이 반전된다.

발생

티오르멘 암살

암살 직후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의 지원을 받은 비슈네츠 혁명당 사주설, 반대로 왕당파 귀족의 배후설, 급기야 키르수스 첩보공작설까지 난무했다. 이러한 음모론은 일부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쉽게 노출되었다. 의회는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구성했으나, 극좌 및 극우 세력을 달래기 위해, 증언·증거 누락과 기록 파기로 자기보신이란 비판을 자초했다. 중도층조차 의원 불신임 청원을 내기 시작했고, 군 장교단 내 불온 문건에는 “의회가 국가를 팔아먹었다”는 격문이 돌았다.

결의정변(1658년 6월 9일)

군부는 키그전쟁 당시 범한 실책으로 대대적인 개편이 일어나 군대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11] 그러한 상황에서 행정조직이 안정되지 못하고 암살 사건이 연달아 터지는 동시, 의회에서도 명확한 책임 요소 없이 상대에 대한 비방만 지속되어 정치적인 혼란이 사그라들 희망이 없어 보였다. 티오르멘 생전,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를 중심으로 결집한 군 내 사조직 연합회는 여러 회 발생하는 쿠데타를 막아내며 다양한 국민적 신뢰를 얻어내고 구 군부와 에르체프스키가 잃어버린 군대에 대한 신뢰를 회복, 연합회의 인물들에 대한 충성도만은 이전보다 높다고 볼 수도 있었다.

이런 시점에, 국수주의적, 비슈네츠인 주도 성향의 결의당을 견제하기 위해 앉혀 두었던 의장[12], 야누시 티오르멘이 암살당하면서 위태롭던 정치적 상황이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야누시 티오르멘은 결의당을 견재하는 동시에 좌익정당도 견제하여 중립을 지키는 자리에 걸맞는 인물이었으나, 소문으로는 그가 좌익 정당에게 암살당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한 사태에서 의회는 상황의 안정을 위해 사건을 은폐하려 들었고, 의도와는 반대로 불만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코르보날 군부 내부에서는 야누시 티오르멘을 제하면 연합회의 파우수트시스키가 가장 많은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에,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는 결의당 좌파과 결탁하여 1658년 6월 9일, 쿠데타를 실행, 결의당 우파와 기타 좌익 적당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이때 과정은 아래와 같다.

1. 연합회 외에도 다양한 군부 장교의 묵인을 확인. 2. 1658년 6월 9일, 슬로딘 예하 중앙군 보병 사단 5개, 기갑사단 3개, 기계화보병사단 1개로 구성된 9개 사단 규모 쿠데타군이 새벽 3시에 코르보날 연합국 수도에 진입.[13] 3. 경찰과 경비대의 저항.[14] 4. 보병사단이 경찰과 경비대와 교전하는 사이, 기갑사단이 중앙 경찰청을 포격하고, 기계화 보병사단이 시가지를 우회 기동해 대의회에 진입하면서 불과 30분만에 수도를 장악. 대의회 의원 구금. 5. 이후 3시 45분. 슬로딘은 대의회 내의 부패를 폭로, 아래에 이야기할 선언을 정리, 언론사에 전달하였다.[15]

다만 이러한 진행 과정은 슬로딘 정권의 발표에 따른 것으로, 너무나 빠른 전개에 의해, 실제와는 많은 차이를 가질 것으로 추정한다.

이때 슬로딘은, “민중과 동떨어진 엘리트층의 이념 다툼을 종식하고, 민중을 위한 정치 시스템의 자리를 잡겠다,”고 선언하였다.[16] 물론 그는 일반적이고 대중을 위하는 정당들에게 국가의 통치권을 남겨 주겠다는 약속에 따라, 결의당을 지지하고 연합회의 군인 신분이자 결의당의 당수 신분으로 정치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슬로딘의 정치에 대한 욕심이 너무 강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강해졌으며, 결의당 내부 계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결의당의 주요 정치인들이 다수 사망하거나 은퇴, 즉, 결의당의 정치력이 약화되었고, 타 좌파 정당들을 숙청하며 지지가 분산되었다.

여러 좌익정당과 적대적 관계가 확실하게 성립하며, 좌익 정치인들 주도의 연합결의당에 합류하였기 때문에, 우파 정치인들과도 완전히 합세하기 힘들어, 정변 이튿날 선언한 계엄령에도 불구 여러 소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지속적인 강경책으로 인해 적어도 비슈네츠와 크세사바 내에서는 계엄령 선언 이후로 추가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동시에 강격책으로 인해 슬로딘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이 발생하였다.[17] 그러한 의심은 여러 음모론을 산출, 슬로딘의 발표에 대한 문제 제의까지 발전하였다.

각 자치령은 갖고 있는 큰 권한에 따라, 새로운 결의정부의 눈치를 보며 각자의 이권을 수호하기 위한 내부적 움직임이 발생하였다.

경과

결의정부

결의정부 정권에 협력한 주요 정당은 아래와 같다.

1. 비슈네츠 결의당(당수, 스타니스와프 그와비에스키) => 연합결의당(당수,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

2. 코르보날 인민민족당(당수, 보이체흐 사차스키) => (구 명칭으로 회귀)코르보날 인민민주당

3. 코르보날 인민당 [18](당수, 빈센티 카지미에르조프스키)

4. 비슈네츠 국민노동당(당수, 얀 레오노프스키) => 코르보날 국민노동당

결의당은 쿠데타 과정에서 연합회와 합쳐 연합결의당으로 발전,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를 당수로 추대하였다. 비슈네츠 결의당의 당수이자 결의당 우파의 구심점, 스타니스와프 그와비에스키는 정변 이후로 실종되어 비슈네츠 내 그와비에스키 지지파는 유력한 범인으로 슬로딘을 점치고 있다. 그러나 결의당을 지지하는 일반적인 지지층은 그러한 정보를 접하기 힘들며, 또한 결의당의 규모를 키우고 다른 당들을 포괄하는 거대한 정당연합 민족전선을 형성하였기에 슬로딘을 좋게 평가한다.

당시 결의정부 신정권에 협력했던 정당 외 타 정치 세력은[19] 심사 과정을 거친 후 피선거권을 얻는 것을 약속받았으나, 실질적으로 이후에 새로 등록된 정당은 전무하다. 일부 위성정당을 통해 표심을 달래는 것 이상의 새로운 정당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한 비민주주의적 사태로 인해, 각 자치령은 반란에 협력한 네 정당을 추방하고 결의정부를 코르보날로 인정하지 않는 등의 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의정부에서는 곧바로 코르보날 중앙군을 이용해 각 자치령을 공격, 자치권을 박탈하고 자치군을 중앙군으로 이전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전쟁 이후 증가한 군부 영향력으로 인해, 전쟁 이전과 달리 여러 자치군이 집합하면 충분히 중앙군에 맞설 수 있는 무력을 갖추며, 심지어는 각지의 헌병이 중앙군이 아니라 자치군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결의정부는 각각의 자치령을 각개 격파하는 방법을 택하였으나, 완수되기 이전, 7월 4일, 울리르 자치령에서 좌파 3당(코르보날 인민사회당·인민당 좌파·노동자당)이 뭉쳐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선포를 감행한다. 해안·조선공장 등 대공장을 장악한 울리르는 물류 요충지·산업 기반을 무기로 인근 자치령을 흡수했고, 해상로로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과 접촉해 군사·농업기술자를 수용했다.[20] 비슈네츠 중심으로 코르보날을 재통일, 각 자치령을 다시 평정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나, 이러한 봉기 이후로 완전히 무너졌다는 의견이 코르보날에서는 주류 의견으로 나타나고 있다.[21]

결의정부는 즉시 적색 반란으로 사건을 규정, 중앙군을 동원했지만 전선 분산과 여론 이탈, 자치군 배신으로 통제력을 잃는다. 산업화가 집중된 프로슈 자치령은 다행스럽게도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의해 합쳐지지 않았음에도,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에 대한 반발로 독립하기까지 했다. 비슈네츠계 대지주·노동자 구도가 얽혀 있었는데, 슬로딘이 민족주의 색채를 강화하자 비슈네츠계 노동자의 비중이 적지 않던 프로슈의 각 계층이 협력해, 반 결의정부 성향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인민공화국 설립

1658년 7월 4일, 울리르 해안선 일대를 장악한 좌익 세력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실질적으로는 코르보날 인민사회당, 코르보날 인민당 좌파, 코르보날 노동자당 세 정당이 코르보날 인민정부연합이라는 느슨한 정당연합을 결성하여 권력을 공유하는 형태였으나, 주도권은 창당 직후부터 인민사회당이 쥐고 있었고, 연합 참여 정당들은 곧 “혁명적 단일 전선” 명분 아래 사실상 흡수되었다.[22]

울리르의 켈라우틴이 임시 수도로 택해진 것은 두 가지 실리에 근거한 선택이었다. 첫째, 울리르는 코르보날 최대의 조선·화학 공단과 심해어 업단을 품은 “해안–강 하구 산업 회랑”의 중심지로, 내륙 공업도시 프로슈 못지않은 산업 자본·노동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둘째,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과 직통하는 해상 루트 덕분에 전쟁 중에도 식량·병기·고문단을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들여올 수 있었다.

이에 반해 고도산업화된 프로슈 자치령은 대지주와 비슈네츠계 도시 노동자라는 복잡한 계급·민족 구도로 얽혀 있어, 혁명 초기 “계급 해체” 구호가 농민·소지주 반발을 불러올 위험이 컸다. 인민정부연합 지도부는 소농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되, 해안대(帶)를 교두보 삼아 산업 벨트를 따라 내륙으로 진격이라는 단계론을 택했다.

초기 인민공화국 정부는 다음과 같은 4대 기조를 천명하였다. 1. “토지·공장·해안항만의 즉각적 국유화, 당을 통한 노동자들의 직접 관리” 2. “코르보날 인민군 창설, 자치군·노동자 민병 일원화” 3. “당을 통한 전시배급경제” 4. “혈통·성(姓)·종교를 초월한 ‘코르보날 인민공동체’ 건설”

그러나 건국 직후, 헌법이 발효되면서, 인민당 좌파·노동자당은 명목상 동맹 정당(위성정당)으로 격하되었고, 실권은 초대 공화국 주석 마르쿠스 버멜론에게 집중되었다.

한편, 인민정부는 당·국가를 재빠르게 일원화하는 대신, 점령 지역 행정은 지방 준주권국에 상당한 재량을 부여했다. 이는 인민공화국이 아직 내륙으로 깊게 침투하지 못한 상황에서, 소규모 지역 자치·자위를 허용해 빠르게 ‘혁명 정통성’을 뿌리내리기 위한 전술적 선택이었다. 코르보날 내전의 주 원인이,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의 강력한 지방 탄압에 있었음을 고려하면, 반혁명적인 코르보날 결의정부에 대항하는 주요한 한 축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더욱이 독립 자치령의 발생을 억제하는 역할 역시 맡았다.

요약하면,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1659년 말까지 해안과 서부 내륙 산업축을 실질 지배하고, 주요 산업 지역 중앙화에 성공, 지방에 대한 충성을 얻기까지 합쳐 결의정부와 자치령 전체에 대항할 수 있는 대등한 국력을 확보하였다.

키르수스의 엘레니아 진입(1658년 7월)

1658년 7월 초, 내전 소용돌이가 코르보날 전역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자 베른하이어와의 교역 관문인 엘레니아 자치령은 “외부 안전 보증” 없이는 중립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자치 평의회는 민·상·교구 대표 연석회의(7 월 4 일)를 열어 “키르수스 왕국에 대한 보호 요청” 결의안을 38 : 5 (기권 2)로 통과시켰고, 같은 날 저녁 외교 사절단을 알레마니아주 루르바리엔현 아우스부르크에 파견하였다.

키르수스-엘레니아 상호방위조약에서 키르수스 정부는 “자발적 청원에 따른 방위·경제 협력”이라는 형식을 택했다. 조약의 내용은 엘레니아의 국내 자치권·종교 자유 보장 키르수스군의 주둔·치안 지원, 점진적인 경제권 통합, 내전 세력 불개입 등 네 조항으로 간단했으며, 같은 달 25 일 엘레니아에 주둔이 시작됐다.

엘레니아 농민·도시 상공인은 북해 수출 항로가 유지되고, 키르수스 시장 접근성이 확대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일부 자치군 장교단이 “사실상의 병합”을 우려해 소규모 시위를 조직했으나, 의회는 무력 충돌을 일절 금지하고 군정 대신 “합동 치안위원회” 모델을 채택함으로써 마찰을 최소화했다. 이후에는, 군에 대한 키르수스의 상당한 규모의 지원과, 훈련 강화로 군에서도 이러한 진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결의정부는 당초 “불법 점령”이라는 표현을 검토했으나, 자치령 자발성·협정 형식이 명확해 공식 항의를 자제했고 표현을 하지 않음을 통해 영유권에 대한 주장은 유지하되, 키르수스를 적대하지 않는 노선을 택했다. 인민공화국 또한 내륙 전선 정비에 집중하기 위해 이 사안을 외교 의제로 삼지 않았다.

PA 협약(1661)

키르수스–엘레니아 협정으로 북방 완충지가 사라지고, 프로슬레우의 수도를 포함한 북부 지방의 일정 부분이 코르보날 결의정부에 의해 점령되며, 프로슬레우아키드노스는 양국 모두가 위협적인 상황이라는 사실에 동의했다. 그런 배경에서, 산업대국 프로슬레우 공화국과 곡창지대 아키드노스 대공국은 공동 안보를 위해 PA 협약(프로슬레우–아키드노스 상호지원 및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다.

  • 물자 상호보급 : 아키드노스는 곡물·가금류를 무관세 공급하고, 프로슬레우는 전로강·차륜·경공업 기계로 상계
  • 연합참모국 : 아쇼프에 합동 정보·작전본부를 두고 전시 통일지휘권 발동
  • 상호불가침·공동방위 : 제3국(명시 대상 = 인민공화국·결의정부) 침략 시 자동 군사개입
  • 항만·철로 공동사용 : 아키드노스 리메리아 항과 프로슬레우 국영철도를 상호 개방

협약 발효 1년 만에 양국 교역량이 148 % 증가했고, 아키드노스 농산물 가격 변동폭은 ±22 % → ±7 %로 안정되었다.[23] 이를 바탕으로 코르보날 결의정부의 확장에 대해서는, 내해의 교역량과 전략적 우려를 바탕으로 멈출 수 있었다. 다만,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해안을 확보한 만큼, 여전히 지속적인 위협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조약 이후 프로슬레우아키드노스의 주요한 전략적 목표는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타도가 되었다.

방제 작전(1663 – 1664)

1662년 말, 마르쿠스 버멜론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최고의장은 코르보날 해방 1차 공세 계획(코드명 ‘홍수’)을 승인하여 코르보날 인민군으로 하여금 PA 협약국을 타격하게 했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대전략은 독립 자치령에 대한 각개 격파를 바탕으로, 결의정부에 대한 포위망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코르보날 인민사회당은 사전에 아키드노스프로슬레우에 육성해둔 지하 세력을 동원, 빠르게 유격대를 움직여 정부 장악을 시도했다. 이에 따른 아키드노스프로슬레우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 범인임을 밝히는 발표와 동시에, 코르보날 인민군은 선제 타격을 시도했다.

이에 대응해, PA 협약아키드노스프로슬레우는 전선에 양국이 함께 육성한 군을 투입, 처음으로 대규모 실전 작전을 치뤘다. 세고르사그측은 전선의 확장이 인구가 적은 자신들에게 있어 최악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을 상대로 PA 협약과 함께 전선에 참여했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을 상대로 초기에 전선에서 조금 물러났으나, 대규모 유격 활동을 바탕으로 일방적인 소모를 강요하는데 성공했다.

첫 대외 공세의 실패는 코르보날 인민정부연합 내의 당쟁으로 이어졌고, 마르쿠스 버멜론에게 있어 대대적인 숙청을 강요했다. 목적과는 반대로 보수 세력들의 결합을 강화한 꼴이 되었던 만큼, 코르보날 인민군의 역량으로는 나머지 전체를 상대로 전략적 승리를 거두기 힘들 거라는 판단 하에, 확장을 한정적으로 포기했다.

PA 협약은 양국의 군사적 성과를 바탕으로, PA 협약군을 설립, 제도화해 주요 사령부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코르보날 결의정부는 이번 사태에서 전선과 거리를 둔 강한 세력으로, 오사넨 연방에 대한 공세를 가할 수 있는 여유와, 내부적 단결을 다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연합결의당의 내부 당쟁을 일정 부분 해결,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의 정권이 더욱 굳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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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페로스벨트  ·  바네버베센  ·  투디아  ·  낸팬  ·  신디아  ·  헤르니소스  ·  바필리아  ·  펜데아시아  ·  디흐트에이븐
국가
키르수스 제국 게파르토 제국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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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546
1423
고전고대
고대 후기
중세 초기
중세 성기
중세 말기


1423
1664
근대
현대


보편전기
연표
-546
1483
1664
고전 고대
고대 후기
중세 초기
중세 성기
중세 말기
근대
현대














보편전기
무기
권총  ·  기관단총 소총  ·  기관총 차량

게파르토 ㅔㄱㅣㅋㅔㅈㅔㅅ·ㅍㅜㅅㅡㅋㅏ 49M

게파르토 Moosmeier 32M pistol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26식 수포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엘빙거 권총



게파르토 ㅍㅜㅅㅡㅋㅏ1651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41형 표준 영도진 보병소총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이리야-야조프 45식 보병용 소총

그란치프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르브 소총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무흐타레프 장비

키르수스 Maschinen Gewehr 57

게파르토 ㅗㅌㅗㅁㅏㅌㅏ·ㅍㅜㅅㅠㅋㅏ

키르수스 Panzerabwehrkanonen 1656

게파르토 49M 6.3qb bombarde

게파르토 51M 6.3qb Bergbombarde

게파르토 52M 6.3qb bombarde

게파르토 50/54M 33qb Bergbombarde

키르수스 1656년식 야전차량 경형

키르수스 1654년식 전선장갑차량

게파르토 53M 3톤 중형트럭 어비거일



잠수함 함선 전투기 폭격기
키르수스 퇴브리크크루비엔 Ddkf.V

그란치프게파르토 가르당 17

게파르토 53M 반도르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피어스마린 F.3 키드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피어스마린 F.5 돌핀

키르수스 그니베겐 GFz.III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하디 베넷 타입P

아인종
카노쿠겔
Kanokugel
드베르그
Dweorg
리겔
Ligel
테살리데스
Teßalides
죄뢰이
Jöröi
라퓰러이
Lafülöi
오르바나 학회  ·  케네우스 의사회  ·  마법
무기
권총  ·  기관단총 소총  ·  기관총

게파르토 ㅔㄱㅣㅋㅔㅈㅔㅅ·ㅍㅜㅅㅡㅋㅏ 49M

게파르토 Moosmeier 32M pistol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26식 수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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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파르토 ㅍㅜㅅㅡㅋㅏ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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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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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수스 1656년식 야전차량 경형

키르수스 1654년식 전선장갑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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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 함선
전투기 폭격기
키르수스 퇴브리크크루비엔 Ddkf.V

그란치프게파르토 가르당 17

게파르토 53M 반도르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피어스마린 F.3 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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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교 분리, 귀족 특권의 제한, 상공·도시 영민 보호법 제정, 그리고 무엇보다 의회 권한 확장
  2. 얀 자호르스키, 『코르보날 인물열전』(1661), 119 – 148쪽.
  3. 『크세사바 조약 90주년 기념연설』(1659),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
  4. 코르보날 재무성 내무보고(1585), 7 – 9쪽: “왕실 부채 총액이 국내 조세 수입의 2.8배에 달함”.
  5. 『코르보날 지방자치사』(1655) 2권, 201 – 225쪽.
  6. 일부 계층에서는 반대로, 군부의 성장은 단지 군부가 이전의 기득권층을 대체했을 뿐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나, 장교는 초급 귀족 가문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신흥 귀족일 뿐이라는 시각 역시 혼재한다.
  7. 국방성 전시경제령(1650.9).
  8. 전후 코르보날 국내 여론은 완전히 양극화되어 중도적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9. 코르보날 내 민족주의 세력은, 코르보날 민족주의와 각 민족 민족주의 세력으로 나뉘어 다투었다.
  10. 이전 코르보날 국무회의에서 공공사업부 장관의 자격으로 에르체프스키의 작전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출석을 방해당해 반대표를 던지지 못한 인원이다. 잘못된 작전 수행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군 장교와 장관 자리 양측에서 사퇴했다.
  11.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를 주도로 군 내에 연합회라는 사조직이 당시 성장하였는데 이것이 결의정부의 모태가 된다.
  12. 야누시 티오르멘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으며, 군부에 몸을 담았을 때부터 중립을 잘 지켜왔으므로 국민적 지지와 양당의 이해관계와 맞물려서 의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13. 수도권 방위군단에서 차출.
  14. 코르보날은 국토가 인구에 비해 매우 넓은 편으로, 법적 지위가 부여되지 않은 시에서는 헌병대가 치안을 맡는다. 수도 크세사바의 치안은 법적으로 경찰력이 담당하도록 지정되어서 경찰과 헌병대가 함께 저항하였다.
  15. 불가능한 빠른 시간 내였으므로, 이에 대하여 일부는 슬로딘의 위증을 주장하기도 한다.
  16. “연합회는 국가 안정화를 최우선 목적으로 하며, 이는 인민의 권리 증진에 무엇보다도 큰 비중을 둘 것입니다. 군부가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연합회는 국가의 통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다양한 정당이 여전히 우리 국가의 지도층에 있을 것입니다. 바뀌는 것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여러분들에게 그들의 실체를 항시로 보여주고 감사를 실행할 것입니다. 좀 더 빠르게 진행되는 정치적 상황과 확고한 기조를 지지함으로써 현재 우리 국가가 가진 문제를 이른 시일 내에 안정화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17. 현재는 그때와 달리, 학자들은 슬로딘이 높은 지위에서 억지로 일으킨 정변인 만큼, 그가 갖고 있는 정치적 욕심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정치적 욕심만이 아닌 정말로 자신이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8. 동명의 정당이 여러 개 있다. 이 정당은 농업주의 정당.
  19. 정당법에 의해 등록된 정식 정당이 아니므로, 정치 세력으로 칭한다.
  20. “대코르보날 지원 각서”(1659).
  21. 세고르사그 등에서는 이런 종류의 봉기가 없었더라도 스스로 국가의 보호를 할 수 있었을 것을 자주 발표하며, 인민 공화국은 초기에 다른 자치령들이 협력을 거부하고 결의정부와 홀로 맞서는 것을 선택한 것으로 인해 내전이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22. 『인민사회당 창립위원회 회의록』(1658.10), 14–19쪽 : “다당제적 외피는 자본가 세력의 분열 책략을 허용할 뿐이다.”
  23. PA 경제통계국, 『1662년 연간무역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