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관계
초창기
양국은 각각 1855년, 1866년 서구 열강에게 문호를 개방한 뒤 각자 근대화와 독립의 유지를 위한 국가적인 정책을 시행하였다. 통상 자체는 1867년 조일통상조약이 맺어지며 근대적인 관계의 초석이 세워졌으나, 아직 이 당시는 양국 모두 혼란에 휩싸였던 관계로 제대로 된 근대적인 교류가 이루어지진 않았다.
이러한 둘의 직접적인 접촉이 이루어진 시기는 한참 사화와 전쟁의 불길을 지나 개혁이 꽃을 피우고 있던 1874년으로, 새롭게 들어선 메이지 정부에서 보낸 거만한(...) 칙서를 당시의 조선 조정이 형식적으로 수락하면서[2] 본격적인 메이지 일본과 조선의 관계가 막을 올렸다. 얼마 후 조선에선 홍범 14조가 발표됨과 함께 1877년 기존 조공질서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함으로서 대한이 막을 올리게 되었고, 이로서 '한일관계'라는 명칭이 사용되는 시대가 열렸다.
이 무렵 일본에선 정치적인 내전인 세이난 전쟁이 발발하였고, 부채를 갚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이 기회에 메이지 정부에게 외교적인 빚을 얹기로 한 대한국 조정의 대외방침에 따라 메이지 정부를 상대로 한 총기무역이 시행되었다. 마침 공장을 비롯한 산업기반 대부분이 단단히 내전을 준비해온 사쓰마번 측에게 강탈당한 상태였던 메이지 정부의 입장에서, 때마침 떨어진 한국의 지원은 가뭄에 단비가 내린 격이였고, 이후 메이지 정부의 승리가 결정되며 사쓰마는 몰락하였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이미 음지 학문으로 전락했던 대외정책인 정한론이 폐기되는 한편, 양국의 국민감정이 급격히 가까워지는 계기가 마련되며, 개항 이후 새롭게 시작된 한일관계는 우호적인 분위기를 띄게 될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편 세이난 전쟁을 시작으로 전개된 우호관계는 이후 실리적인 측면과 맞물리며 사실상 두 나라간의 관계를 새로 정립시키다시피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93년엔 각각 대만과 동만주를 확보할 목적에서 외교적인 대타협을 비밀리에 체결하였고, 사실상 짜여진 판 위에서 순나라와 후금을 상대로 승전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1900년엔 9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순나라의 수도인 북경에 입성하기도 했다. 이후 영일동맹, 영한동맹 등으로 묶인 해외에서의 연대와 제 1차 극동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러시아 격퇴라는 목표까지 공동으로 성취한 시점에서, 두 나라의 외교적 밀착은 공동통치령 경영을 연해주에서 성공시킬 정도로 상당히 긴밀해진 수준에 이르렀다.
중반기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한국과 일본은 모두 협상국으로서 승전을 거머쥐었고, 전쟁특수를 통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한 국가의 반열에 올랐다. 다만 대중국외교에선 서로 묘하게 경쟁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등의 양상을 보였으나, 이조차도 결국엔 지분 다툼의 문제였던지라 우호관계에 크게 균열이 가는 수준은 아니였다.
이후 대공황을 기점으로 기반이 부실하던 동아시아 일대의 선진국들이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러한 와중에 대외팽창을 통한 위기극복을 목표로 삼은 양국은 제 2차 한일동맹을 출범시키게 되었다. 이렇게 팽창적인 부문에서까지 결탁이 이루어지자 양국의 국민여론은 아예 두 국가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질서를 새로 개편하자는 축으로 기울게 되었고, 결국 제 2차 동아대전이 발발한 이래 대한과 일본은 사실상의 연합을 이루어 , 추축국과의 결탁과 힘을 합쳐 세계의 반을 상대로 대전쟁을 치르는 행보를 보이게 되었다.
이 시기 극에 달한 고립적 외교와 양국의 연대는 한편으로는 또 다른 방향으로 치닫기도 하였는데, 전후의 신 질서에서 장차 다가올 독일과의 대전을 대비하여 아예 하나의 국가를 이룩하자는 이론이였다. 다만 두 나라의 황실 모두 보수적이라는 한계 탓에 직접적으로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이 이론은 살아남아 현대에도 종종 제기되는 이론인 양조합방론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후반기
1945년 6월경, 주요 도시 3곳에 폭격을 맞은 대한제국이 먼저 연합국 측에 항복하며 양국의 긴 단결은 짧은 적대기간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이 연합국에 참여하며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선언한 그 시점에서도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는 연합국에게 참전을 불공평하게 강요당한 것"을 이유로 들어 선전포고를 거부하였고[3], 그나마 양국이 교전했던 사건이 바로 쓰시마 전투다. 다만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해당 전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일본에 2발의 원자폭탄이 투하되며 양국의 적대관계는 2달이 채 안되는 시간을 끝으로 종결되었다.
이렇게 동맹으로서 연속적인 승리만을 거듭하던 두 나라는, 패전에서 맞은 끝 또한 유사한 결말을 맞았다. 전후 한국과 일본을 모두 관리하게 된 맥아더는 지극히 군주주를 정신적인 지주로 삼는 경향이 강하던 양국의 본토를 포함한 핵심적인 세력권[4]에서 대부분의 군주들의 실권을 거세시키는 한편 전쟁을 일으킨 전범들을 처형시켰고, 대대적인 개헌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19세기부터 20세기동안 두 제국의 관계는 끝을 맺고, 현대의 한국과 일본의 관계로 이어진다.
현재
이러한 종결과는 별개로, 이 시기에 이루어진 양국의 관계는 사실상 현대 한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에도 깊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비록 수백년간의 세월에 따른 라이벌감정이 또한 존재하나 이웃나라중에서 가장 외교적 우호관계가 높게 선정되는 국가들 또한 이 둘이 대표적이며, 특히 20, 21세기에 들어선 통혼과 교류가 더 가속화되면서 점점 더 관계가 깊어질 전망이다.
기타
이 무렵 양국간의 우호관계가 꽃피우면서 일본에서는 조선에 대한 기이한 학론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바로 조선은 고려가 아니라 대를 건너뛴 백제의 후신으로 봐야한다 는 주장(...)이였다. 대한 황실의 국성이 전주 이씨가 옜 백제의 귀족인 대성팔족과의 연관성이 있다는 점이 그 근거라고 전해진다. 이 속설이 퍼져나간 이유는 정확상 신라와의 감정이 좋지 않았던 점을 숨기고, 한국과의 우호관계를 단단히 해둘 목적으로 백제와 조선을 연관시키려던 일본 정부의 방침이 낳은 결과로 추정된다.
한편으론 조선에서도 서남전쟁에서 메이지 정부가 승전한 이후부터 젊은 개화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성리학적으로도 메이지 신정부가 도리에 맞다는 주장을 전개하였는데, 간악한 역적들을 쓰러트린 뒤 나라를 안정시키고, 몇천년간 유폐된 왕실에게 권력을 돌려 바침으로서 인의를 지켰다는 이론을 펼쳤다. 때마침 이 무렵 대한국 조정이 이전의 칙서 건으로 생겼던 묘한 긴장감을 가려버릴 의도에서 이 이론을 선전하면서, 졸지에 당대의 메이지 정부는 기괴한 형태의 일본 정부에서 성리학적인 도리를 따르는 진정한 유자의 정부로(...) 평가가 오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