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 목록 ]
[ 세계관 소개 ]
[ 문서 목록 ]


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틀:역대 재한국일본국민단 단장 (민국 38)


일본제국 육군 제15군 사령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초대 재한국일본국민단 단장
무타구치 렌야
牟田口廉也 | Mutaguchi Renya
출생 1888년 10월 7일
일본 제국 사가현
(現 일본국 사가현)
사망 1966년 8월 2일 (향년 77세)
부산직할시 서구 부산대학교병원
국적 남일본 (민국 38) 일본국 | 대한민국 (민국 38) 대한민국[1]
재임 기간 일본제국 육군 제15군 사령관
1943년 3월 18일 ~ 1944년 8월 30일
초대 재한국일본국민단 단장
1953년 9월 20일 ~ 1956년 9월 20일
[ 펼치기 · 접기 ]
배우자 무타구치 토시코
자손 장남 무타구치 마모루쿠니[2]
차남 무타구치 모토도[3]
손자 모전구조공[4]
학력 현립 사가중학교 (중퇴)
구마모토 육군유년학교 (졸업)
육군중앙유년학교 (졸업)
육군사관학교 (졸업 / 22기)
육군대학교 (졸업 / 29기)
신장 약 157~160cm
종교 불교
군사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22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910년 ~ 1945년
최종계급 중장
주요 보직 지나주둔 보병제1연대장
일본제국 육군 제4군 참모장
육군여과사관학교장
일본제국 육군 제18사단장
일본제국 육군 제15군 사령관
병과 보병
주요 보직 중일전쟁
  • 루거우차오 사건
  • 임팔 작전

개요

구 일본군 소속의 장성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일본인 출신으로는 네번째로, 일본군 장성 출신으로는 두번째로[5]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일본제국 육군 제15군 사령관, 초대 재한국일본국민단 단장과 관선 부산직할시 시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일본군의 장교였으나 버마주둔 제15군의 사령관이던 시절 보여준 극치의 무능으로 인해 일어난 대규모 항명사태로 버마에 낙오되었다. 그러나 당시 같이 낙오되었던 일본 민간인들(공무원 등)과 한국인 노동자들을 모아서 영국군에 투항했고 이후 그들을 책임지고 각자의 고향으로 귀국시킨 선행을 행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귀국하였으나 남일본 국민들의 냉소와 반발에 부딛혔고 1950년 일본내전이 일어나자 한국으로 넘어가 도미나가 교지등과 함께 우익성향의 재한일본인 단체인 제한국일본국민단을 조직하여 초대단장으로 취임하였다. 단장직 퇴임 이후에는 부산시의 재한일본인들의 지지로 관선 시의원을 역임하였으며 사후 2018년 이낙연 총리에 의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고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버마에서 한국인 노동자들과 일본 민간인들에게 행한 선행과 일본군의 학살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점그리고 일본의 전쟁패배에 결정적인 책임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으나 중일전쟁 개전의 장본인 이라는 점과 수만명이 굶어죽은 임팔 작전의 입안자라는 점[6], 그리고 구 일본군의 장성이란 점 때문에 국내와 국외, 그리고 국내에서조차 평가가 크게 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생애

1888년 10월 7일 구 일본제국 시가현에서 3형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현립 사가중학교를 다니다 중퇴 한 뒤 구마모토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군인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이후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22세의 나이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7년후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이후에는 시베리아 침공, 캄차카 정탐등에 투입되었으며 주 프랑스 재무관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 중국에서 복무할 당시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고 일본군 병사 한명이 잠시 사라지자 이를 중국 국부군의 짓으로 단정짓고는 중국군을 향해 불법전투를 개시하여 중일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심지어 전투가 진행되는 와중에 기자들이 취재하러 오자 전투에 나가지도 않고는 팔에 피묻은 붕대를 감아 "국민혁명군의 도발을 내가 격퇴하는 중이다."라는 언론플레이를 했다.

이런 무능함과 뻘짓을 보여준 무타구치였으나 그보다 더한 무능함과 정치질을 자랑하던 구 일본군 사령부는 그를 소장으로 진급시켰고 무타구치는 제4군 참모장을 거쳐 1939년 육군유년학교 교장이 되었다. 1940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해 18사단 사단장으로 싱가포르 전투에 참여했다. 이 전투에서 그는 수류탄에 부상을 입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부대에서 술판을 벌이다 날아온 포탄을 피하기 위해 하수구를 대피소로 착각해 숨으려다' 였다고 전해진다.....

1943년 3월, 무타구치는 버마에 주둔하던 육군 제15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는데 이전에 밀림과 산악에서는 작전 수행이 어렵다라는 이유로 반대했던 대본영의 인도 진공 계획을 영국군이 버마를 공격하고 자신이 버마 주둔 15군 사령관이 되자마자 적극적으로 추진하기에 이르니 이것이 바로 세계 전쟁사에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라는 의미로 한획을 그은 임팔 작전 이었다.

임팔 작전 당시 그는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일본인은 원래부터 초식동물이다."와 같은 명언을 난사하며 고대 게르만족보다도 못한 수준의 계획을 밀어붙였고 그 결과는 총 병력 92,000여명 중 52,000여명 가량이 전사 및 아사한 기적적인 수준의 대참패였다. 그러나 정신을 못차린 무타구치는 체면 때문에 차마 후퇴하겠다고 말도 못하며 눈치를 보다가 후퇴명령 조차 내리지 못하는 대단함을 자랑하다가 사토 고토쿠 중장이 독단으로 후퇴를 결정하는 일본군 항명 1호사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무타구치는 돌아온 부하들을 똥군기를 부리며 갈구다가 분노한 부하들의 반란크리를 맞고 측근군인 5명과 함께 창고에 구금되었다. 이후 그를 버린채로 일본 제15군은 명색이 사령관인 그를 버린 채 복귀했고[7] 무타구치는 곧 측근들과 함께 버마일대에서 잠적하며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던 와중 빠져나가지 못한 일부 일본 민간인들과 군무원 그리고 조선인 노동자들을 발견한 무타구치는 자신을 일본군의 하급 장교라고 속이며 그들을 규합했으며 이후 그들을 대리고 버마주둔 영국군 사령부에 투항했다.

영국군에 투항한 이후에는 이전의 항명사태와 낙오에서 교훈을 얻은 것인지 주변인에게 굉장히 친절한 태도를 보였으며 영국군에게도 유화적으로 굴어 영국군은 그를 비교적 편하게 대하였다. 그는 배고픈 노동자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거나 고국에 가족들을 두고온 잔존병들과 일본인들을 위로하는 등의 태도를 보여 수용소 내에서 상당한 수준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전후 그는 버마에 남은 일본 민간인들과 조선인 노동자들이 귀국선에 오를 때 까지 버마에 남았으며 모든 수용소 사람들이 귀국하고 나서야 마지막 귀국선에 몸을 실어 일본으로 귀국하니 그때가 1946년 3월 16일이었다. 귀국 이후 그는 극동군사재판에 기소되었으나 전시에 보여준 희대의 뻘짓들과 수용소에서 민간인들을 살핀 점을 근거로 들어 불기소처분 되었고 중국 측 판사 메이루아오가 중일전쟁 발발에 대하여 유죄를 주장하였으나 중일전쟁 자체는 당시 폭주하던 일본의 상황을 볼때 결국 누군가에 의해 일어났을 비극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으며 철회되었다.

불기소처분 이후 그는 별도의 군사재판을 통해 2년간 복역을 한 뒤 분단 된 남일본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당연하게도 그를 냉대하였고[8] 1950년 일본전쟁이 발발하자 위기감을 느낀 그는 수용소에서 함께하였던 몇몇 민간인들과 함께 남일본을 탈출하여 한국으로 향했다. 당시 조소앙 총리는 일본군 장성 출신에 중일전쟁의 개전자인 그가 한국으로 들어오자 부담감과 적대감을 느꼈고[9] 그를 다시 귀국시키려고 했으나 국내에서 그에게 도움을 받은 국민들의 탄원에 결국 그의 입국을 허락하였다.

한국에 들어온 무타구치는 피난온 다른 일본인들을 규합하여 공동체를 구성하였으며 자신에게 도움을 받은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한국정부의 허가하에 경남과 부산 일대에 일본인촌을 만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한국에 정착하였으며 한국국적을 취득하여 복수국적을 지니게 되었으며 당시 나진에 머무르던 도미나가 교지등과 함께 좌익/친일공 성향의 재조선일본인총연합회와 대비되는 우익/친남일본 성향의 재한 일본인 단체인 재한국일본국민단을 창설하여 초대 단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3년간의 임기를 지냈으며 임기내내 재한일본인의 권익과 한일간의 조화를 위해 힘썼다. 임기를 마친 이후에는 재한일본인들을 돕는 인권운동을 하였으며 1964년에는 재한일본인들의 지지로 부산직할시(現 부산광역시)의 관선시의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65년 건강상의 이유로 시의원직을 사임하였으며 1966년 천식 ·담낭증· 심근경색으로 인한 합병증 치료중 뇌출혈로 인해 향년 7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사후 많은 재한일본인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사망한 지 52년이 지난 2018년 이낙연 총리에 의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평가

대한민국

한국 국민 상당수는 그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가 참전한 임팔 작전과 싱가포르 전투가 한국의 독립운동사와는 크게 관련이 없기도 하고 생면부지인 버마에 낙오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책임감을 가지고 한국으로 귀국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정착이후에는 재한일본인과 한국인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고 전쟁범죄에도 크게 관련되있지 않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보는 한국인들이 많으며 이러한 기조에 이낙연 총리가 2018년 일본인으로서는 4번째로 건국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에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당연히 존재한다. 어쨋거나 그는 구 일본군의 장교였고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에 동조하였으며 매우 무능하였다. 또한 어느정도 조용히 넘어 갈 수 있던 노구교 사건을 중일전쟁으로 확대시킨 주범이라는 점에 있어서 전범으로 기소되었어야 했다는 의견이 있기도 하다. 실제로 2018년 이낙연 총리가 무타구치에게 애국장을 추서하자 많은 반발이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그의 애국장 추서는 많은 논란을 지닌 주재이다.

위의 긍정·부정 여론과는 별개로 그가 매우 무능했고 결과론적으로 볼 때 그가 추진한 임팔 작전이 일본의 패망에 매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에 그를 애국자, 어둠의 독립군 등으로 칭하는 밈이 유행하고 있으며 실제로 애국장을 추서받자 이러한 밈은 더 확대생산되고 있다.

남일본

당연하게도 좋지 않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흔히 똥별이라고 불리는 매우 무능한 장성들 중 하나였으며 전략적인 안목은 그 옛날의 당나라 시대 보다도 뒤떨어졌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부하 수만명을 사지로 내모는 죽음의 행진을 감행하였으며 죽기 직전인 1965년 5월경에 한 "유가족분들과 장병여러분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라는 내용의 사과 이외에는 유가족들에 대한 어떠한 속죄도 없었다는 점에서 일본국 내에서 비판받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는 남일본에서 도미나가 교지, 스기야마 하지메와 함께 제국군 삼대오물이라고 조롱받는 신세로 친일본국 성향의 재한일본인 상당수가 무타구치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과 대비된다. 그렇기에 구 일본군의 장성이자 민단 초대단장인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국내외의 일본인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이며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남일본 내에서도 동시기의 여러 일본군 장성들과는 달리 학살이나 비도덕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았던 그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있으며 2021년에는 이들에 의해 무타구치 렌야의 기념비가 이전에 그가 수용되어 있던 버마의 한 수용소의 터에 설치되기도 하였다.

북일본

북일본에서는 기본적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장성1' 정도로 보고있으나 정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나름 긍정적이다. 기본적으로 북일본은 제국시대의 군국주의 문화와의 단절을 주장하고 있기에 그가 몇만명 가량의 병력을 까먹은것 보다는 그의 도덕적인 면에 집중하는 편이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그를 아예 모르거나 안다고 하더라도 '무능'의 이미지가 너무 크게 남았던터라 '그냥 똥별1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보는 시선이 우세하다.

중국

남일본보다도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는 당연한 것이 노구교 사건 당시 그가 혼자 급발진 하여 불법적으로 전투를 시작한 덕에 중원을 불바다로 만든 중일전쟁이 발생하였고 이로인해 발생한 난징 대학살, 중국인 위안부, 강제노동 등의 구 일본군의 비윤리적인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때문에 중국 정부는 그에대한 언급을 피하는 편이며 역사책에는 그를 전범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연유로 2018년 무타구치가 애국장을 수여받자 중국의 반한감정이 크게 상승하였으며 한한령이라 하여 한국여행과 한국제품 판매등이 크게 감소하여 국내기업들과 자영업자들이 경제적 타격을 받기도 했다.

개인사

군사적으로 그는 매우 무능하였으나 개인적으로 그는 나쁘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섬세하지만 어딘가 교활한 인간과 같이 평가하고 있으며 이 평가는 그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문장일 것이다. 연줄과 정치력 만으로 고위 장성자리에 오른 경력에서 보이듯 그는 사람을 파악하여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를 알아내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하며 버마에서에 쓰디쓴 경험 덕분에 아랫사람이라고 깔보는 경향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아들인 무타구치 마모루쿠니(모전구위방)는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은퇴이후에는 식당을 운영했고 둘째아들인 무타구치 모토도(모전구원당)는 물류업에 몸을 담았다고 전해진다. 무타구치 렌야의 손자인 모전구조공(무타구치 테루쿄)는 현대자동차에 입사했고 현재에도 현대자동차의 임원으로 근무중이다.

어록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
무기의 부족이 패배의 원인은 될 수 없다.
식량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에 싣고 가다가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ビルマにあって、周囲の山々はこれだけ青々としている。日本人はもともと草食動物なのである。これだけ青い山を周囲に抱えながら、食料に困るなどというのは、ありえないことだ。
버마에서는 주변 산들이 이처럼 푸르다. 일본인은 원래부터 초식동물이다. 이렇게나 푸른 산에 둘러싸여 있으니, 식량이 부족하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1944년 2월, 임팔 작전을 입안하면서 보급 문제를 거론하는 참모들에게. 태평양 전쟁 - 일본의 패인 4(太平洋戦争 日本の敗因4) 147p
先の帝国主義時代の出来事については、非常に否定的に考えています。
지난 제국주의 시대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1961년 KBS의 인터뷰 中 일본 제국시대에 대한 의견을 묻자
遺族の皆様と将兵の皆様に心よりお詫び申し上げます。
유가족분들과 장병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1965년 NHK의 인터뷰 中 임팔 작전 참여 장병들과 유가족들에 대한 사과
そうだね、私のせいだよ。 二度と繰り返してはならない過ち。
그래, 내 잘못이지.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 할 잘못.
유언 中

  1. 일부 매체나 자료에서 한국에 완전히 귀화했다고 서술되어 있기도 한데 그는 죽을때까지 일본국 국적을 공식적으로 포기한 적이 없다.
  2. 牟田口衛邦, 한국식으로는 모전구위방
  3. 牟田口元堂, 한국식으로는 모전구원당
  4. 牟田口照恭, 일본식으로는 무타구치 테루쿄
  5. 첫번째는 도미나가 교지
  6. 이로 인해 남일본에서는 도미나가 교지, 스기야마 하지메와 함께 제국군 삼대오물이나 연합군의 스파이라고 조롱받기도 한다.
  7. 일설에는 복귀 후 무타구치의 생사를 묻는 상부의 질문에 15군 부사령이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전했는데 상관이 매우 환한 웃음을 지었다는답없는 일화가 전해진다.
  8. 단순하게 생각해도 무능의 극치를 달리던 낙하산 장교에다가 50,000명 가량의 자국군 장병들을 어이없는 이유로 사지로 내몰았으니...
  9. 라기 보다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의 제1교역국이자 지원국인 중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의도가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