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두꽃 핀 하룻밤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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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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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자두꽃 핀 하루밤
또 하나의 유신

1944년의 연초, 아직 꽃샘추위의 바람이 불고 있던 대한제국 한성. 성덕 12년 3월에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당당히 선언한 제국 육해공군이 용전한지 어언 3년이 지난 해였다. 석재 건축과 한옥, 서서히 피어나고 있는 복숭아꽃이 한 데 어우러지고 있는 심야의 거리에선 사람들이 서서히 일어나 활동을 시작하려는 시기였고, 이에 맞추듯 각 집의 라디오에선 잡음과 함께, 개전 이래에 늘 그래왔듯이 방송을 내보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상제는...우리 황제를 보우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시고....."

이 라디오가 재생되던 여러 집들 중, 한성부 중심부의 거대한 석재 건축물에서 일어난 한 명의 시청자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노심초사하며 의자에 의지한 채 앉아 있었다.

땀으로 젖은 이마와, 마치 악귀나찰처럼 일그러진 면상에 어울리지 않게 이 남자의 방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 화려한 금장식의 향연 한 가운데, 방 한구석에는 태극기가 걸려있었다. 오랜 시간, 남자의 권위와 힘, 그리고 위상을 세워 준 깃발이었고, 그가 헌신을 바친 깃발이었건만, 이상하게도 지금의 태극기는 위법자를 심판하는 재판관처럼 차갑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이 남자의 주위에서 깔끔하게 정장, 혹은 군복과 한복을 차려입은 이들이 더 서있었다. 이들의 경우, 표정에 아까 그 남자의 표정과 같은 고뇌라보다는, 차라리 공포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수준으로 비틀린 인상이 새겨져 있었다. 어색하고 또 딱딱하기 그지없는 화합의 장, 이 방의 공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침묵일 뿐이었고, 그 외에는 어떠한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소파에 앉은 남성이 무거운 목소리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자...솔직히들 말해보시게.."

그의 목소리는 마치 뱀이 먹잇감을 옭아매듯, 자신의 육신 주위에 서 있는 모든 이를 옭아매는 한마디의 음성으로서 방출되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 소리에 듣기 거슬리는 라디오 소리가 마치 아녀자의 노랫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필사적으로 대답을 피하고픈 욕구를 갈증처럼 느끼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우리가, 대한이...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뒤의 음성은 뜻밖이었다. 그가 내뱉은 말은 개전 이후 빈번하게 그랫듯이 노망난 것 처럼 사람들을 추궁하는 일도 아니였고, 역정을 내며 지옥불마냥 분노를 방출하는것도 아니였다. 지금 이 순간, 방안의 사람들은 느낄 수 있었다. 집권 이래 마치 기관차처럼 멈추지 않고 행진해 왔던 이 남자의 행보에, 끝내 브레이크가 걸렸다는 것을. 그것도 패배에 대한 공포의 브레이크가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침묵했다. 그야, 두려웠으니까. 신처럼 떠받들어지는 건 황제였지만, 실질적인 권력을 다 가진 것은 이 남자라는 것을 그들은 언제나, 그리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오히려 긴장까지 공기를 가득 메우는 수순이었다.

"용감한 제국 남아들은...시비련에서 계속 진군하여 저 소비에트의 모스크바에 마침내 한 발자국 더...."

탁, 남자가 라디오를 껐다. 마치, 더이상 듣기 싫다는듯이. 그 스스로가 방송국의 이들에게 시켜 만든 선전방송을 꺼버린 뒤, 그는 다시 입을 열었으나, 이번엔 방도를 찾은 것 같이,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나도 알고는 있소. 지금 이대로면 우리가 버티지 못하리라는 걸. 하지만..지금 우리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전쟁의 패전이 아니요. 바로, 저 전쟁을 그만둠으로서 이 나라에 닥칠 혼란을 염려하는 것이지. 이 시련과 고난 앞에 굴복하려는, 일민주의의 패배와 나아가서는 제국의 처참한 패배일 뿐이요."

몇몇 사람들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군복을 입은 자들과 한복을 입은 자들은 조금 더 그 말이 이해되었다. 이 남자가 권좌에 앉은 방법, 해결책, 그리고 또 한번의 기적, 그것이 뜻하는 바는, 지금 여러 정치인들과 각료들이 그들의 사임을 요구하고, 시비련에서의 전선은 고사하고 외지인 만주와 번국인 제정노서아가 위험한 이 시점에서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들도 애써 부정하고 싶었고, 문자 그대로 모 아니면 도인 선택지였다.

"무릇 유신을 하는 사나이의 가슴에는 나라를 살릴 의무가 있고, 그에 따른 책임을 시행할 의무가 늘상 불타고 있는 것이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나와 이 세월을 함께하였으니 다들 이해하리라 나는 믿고, 지난날의 변치않는 의분을 다시 한 번 불태울 각오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소."

이 말을 끝마친 뒤, 만인지상은 좀 더 직접적인 질문을 던졌다.

"자,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아는 한, 가장 위대한 대한의 애국자들이자 나의 긴밀한 벗들에게 묻겠소. 생각하건데, 우리 공동체의 운명은 유신이요, 패망이요?"

이젠, 더 이상 의심을 품을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주 직설적으로 요구했고, 선택을 독촉했으니까.

반역이었다. 지난 유신은 아마 어린아이의 놀음으로 보일 유신, 아니, 어쩌면 혁명. 저 이태리의 두체라는 자가 그랬듯, 자신의 주도권이 전부 받아들여지는 정부를 만들 생각을 품고 있었다. 집권기에 8천만 신민들의 우레와 지엄하신 황제폐하의 조서와 함께, 화려하게 연단에 오른 그의 황금기에 그랬듯이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움에 빠졌다.

분명 이 선택이 대한을 어떤 결과로 이끌지는 그들도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에서의 시비련의 전과는 절대로 일민주의가 제국에서 그 위세를 지키지 못하리라는 것을 내심 직감하고 있었다. 이제는 저 덕이지도 밀리는 판국에, 덕이지에 한참 모자란 제국이 소비에트를 상대로 지금까지 버티는것도 굉장히 버거웠으니까.

그리고 지금, 이자, 호국경, 최대연임총리, 영도자, 전 신민의 벗은 모두에게 묻고 있었다. 긍지를 가지고 이전과 같이 유신하여 생존할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겁을 먹어 멈출것인지.

하지만, 이들의 선택지는 어쩌면 이 질문이 나온 시점에서 정해져 있었다. 그들에겐, 겁보다 더 강한 자부심이라는 것이 있었으니. 사족으로서의 품격이나 신경쓰는 귀족들이나, 탁상공론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자들이 가지지 못한 대의가 있다는 자부심. 그래서, 또 한번의 기적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일말의 믿음이, 이 현실과 합쳐지면서 서서히 각자의 마음에서, 마치 강한 채취의 향처럼 우러나오기 시작했다.

소파에 앉은 남자도 대부분이 동조하리라는 것을 느낀것인지, 이제는 미소를 지었다. 과연, 그의 능력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며, 이 남자는 소파에서 일어난 뒤 다시 말을 내뱉었다. "해서, 대업을 위해서라면...전부 다 모아야 할게요. 호국회 당원들은 물론이고, 그대들이 통제할 수 있는 군 인사들까지. 아, 그리고 제국 익문사는...확실하게 미리 손을 봐둬야겠지. "

시계는 이제, 밤 10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새해가 오기까지 2시간 만이 남은 지금, 소파에서 일어난 남자는 잠시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내다봤다. 새로운 한 해가 곧 시작되는 이날의 밤 이제 자신은, 곧 있으면 결단을 내릴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나라를 옳바르게 인도하고, 또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마수로부터 아주를 탈환하는 성전의 말뚝을 확실히 박을 혁명이.

마침내, 그는 결심을 하며 돌이킬 수 없는 명령 하나를 전달했다. "광화문 앞으로, 우선 당원들을 전부 다 집결시키고, 신호가 가면 군도 움직이시오. 이 나라의 기강이 떨어진 지금에는 또 한번의 유신이 필요하니."

성덕 15년 최대의 변, 백범 김창암의 유신은 이리하여 새해의 종과 함께 그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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