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일 동맹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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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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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일동맹 | Anglo-Korean-Japanese Alliance | 日英同盟
그레이트브리튼-아일랜드 연합왕국 대한제국 대일본제국

개요

아,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라, 절대 서로 어울릴 수 없을지니,

천지가 하느님의 위대한 심판의 옥좌에 설 때까지 그러하리라.

그러나 동서양도 국경도, 인종도, 계급도 없으리라.

세계의 끝에서 온 가 서로 대면할 때에는!

- 러디어드 키플링의 한영일동맹 헌시 <동양과 서양의 노래(The Ballad of East and West)>

20세기 초, 대한제국, 일본제국이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과 체결한 동맹으로, 러시아 제국의 남하 저지와 한국, 일본의 동아시아에서의 세력 팽창에 영향을 끼친 동맹이다.당시 대제국이며 '영광스러운 고립'을 관철하고 있던 영국이 처음으로 동맹을 체결했다는 점과, 그 상대가 아시아의 신흥 강국인 일본 제국, 대한 제국이었다는 점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배경

19세기 말에 들어 영국과의 그레이트 게임으로 번번히 남하 계획을 저지당하던 러시아 제국은, 이내 비교적 새로 얻은 영토였던 프리모예 일대와 만주의 후금을 기반으로 남하를 시도한다. 당시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할양받은 연해주와 아관파천 이후부터는 대청제국의 광서제가 통치하고 있던 북만주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당시 만주의 대청으로부터 영토 조차를 시도하거나 아관파천, 흑룡강 위협사건 등 노골적인 내정간섭 의지를 보였다.

한편, 일본과 한국은 각각 메이지 유신과 임신개혁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당시 한일-순금전쟁(제 1차 동아시아 전쟁)을 마친 뒤 남만주 지역과 대만, 푸젠을 얻은 상황이었다. 특히 대한 제국이 이 전쟁에서 만주에 대한 순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한 시점에서 만주로 확장해나가는 한국의 대외정책 특성상 러시아와의 충돌은 언젠가 예정되어 있었고, 일본 또한 만주를 대체할 북방영토로 연해주와 사할린, 쿠릴 열도 등에 눈독을 들이면서 러시아와의 도전이 조만간 벌어질 게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남하를 지속적으로 저지하고자 했던 영국은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의 야욕을 이용해 동맹을 체결하고자 하였고, 1901년 삼국은 교섭을 시작하였다.

한편, 1900년 미국의 헤이 국무 장관 역시 문호 개방을 주장하여 당시 열강 가운데 어느 한 나라가 중국에서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려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었다. 1903년 1차 영일동맹 뒤 러일전쟁이 발생하여 1905년 일한연합이 승리를 거두자 양국은 미국과도 대러 협조를 위한 각서를 체결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완용-태프트 협의가 이것이다. 그러나 1907년 일본이 끝내 감당하기 벅찬 한러일전쟁 전쟁 비용의 충당을 위해서 만주에서 철도, 광산 등의 이권을 독점하는 조치를 취하자, 미일 협력 관계는 무산되었고, 대신 역량상의 문제로 만주 해안선 일대에서 한국과 미국의 합작자본이 유통되었으나, 얼마 못 가 군부가 만주의 통제권을 틀어잡으면서 시간만 지체되었을 뿐, 결국 한미 협력관계도 수포로 돌아갔다.

내용

1901년 한국과 일본의 입장은 러시아의 단독 극동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여타 제국주의 열강과의 협조 하에 만주, 푸젠의 지배 뿐만 아니라 중국의 이권 분할에도 참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하여 당시 순나라와 송나라에 대한 이권을 가지고 있던 영국과의 제휴를 모색했고, 여기서 3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다음과 같은 서약이 체결됐다.

1. 영·일·한 삼국은 순(順)·송(宋)·청(淸) 양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영국은 송나라에, 일본은 순나라에, 한국은 청국에 각각 특수한 이익을 갖고 있으므로, 제4국으로부터 그 이익이 침해될 때는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2. 영·일·한 양국 중 한 나라가 전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4국과 개전할 때는 동맹국은 중립을 지킨다.

3. 위의 경우에서 제4국 혹은 여러 나라들이 일국에 대해 교전할 때는 동맹국은 참전하여 공동 작전을 펴고 강화(講和)도 서로의 합의에 의해서 한다.

4. 본 협약의 유효 기간은 5년으로 한다.

영한일동맹의 체결에 대항해 러시아는 '중국 2개국과 청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강조하면서 같은 해 3월 프랑스와 함께 러시아 - 프랑스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으나, 한러일전쟁에서 입은 타격과 영토 할양 덕분에 국제 외교에서 크게 수세에 몰리는 입장이 되었다.

결과

영국 국내의 반응은 충격이었다.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후 오랫동안 초강대국 자리를 유지하며 어느 나라에 대해서든 도도한 외교적 태도를 고수하던 국가였다. 14세기 잉글랜드 왕국 시절부터 오랜 동맹 관계였던 포르투갈을 제외하고는, 근대 최강국이었던 영국이 섣불리 동맹관계를 맺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게 고고한 태도를 유지하던 자국이 동맹을 맺은 대상이 고작 국위가 부상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극동아시아의 신흥국들이라는 사실에, 한동안 자조적인 분위기가 언론을 맴돌았다. '왕자가 방앗간집 딸과 결혼하고 여관집 안주인을 고용인을 들였다'는 우스갯소리가 여기서 나왔다.

반면 일본과 한국에서는 세계를 지배하는 대영제국이 자국과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에 전국이 축제 분위기가 되었고, 자신들이 열강의 반열에 들어섰다는 분위기에 들떴다.이는 당시로서는 김칫국이었지만, 영한일동맹 이후 점차 현실이 되었다.

영한일동맹의 결과, 영국은 러한일전쟁 기간 동안 일한 양국의 국채 등을 매입하는 등 전비를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전함 미카사를 비롯한 최신예 영국제 군함을 일본이, 상당량의 맥심 기관총과 신형 엔필드 소총 등의 최첨단 총기를 한국이 수령하도록 허용했다.

이런 도움에 힘입어서 일본과 한국은 한러일전쟁(1904~1905년)에서 결국 승리하여 극동과 연해주, 만주로부터 러시아 세력을 축출하였으며, 해당 지역들에 독자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파기

삼국은 세 차례의 한영동맹, 일영동맹을 맺으며 친선 관계를 다져 나갔으나, 일본의 미-일 관계 악화와 한국의 청도 반환 문제, 광동 지방 이권 문제 등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며 결국 1921년 ~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체결과 함께 영일 동맹 파기, 1923년 청도 반환 거부와 함께 영한 동맹 파기가 결정되었다.

동맹의 파기에 대한 이유는 크게 다음으로 볼 수 있다.

1.자국이 태평양에서 일본 제국과 충돌할 경우 영국이 영일동맹에 따라 일본의 편에 서는 상황을 경계한 미국이 동맹 파기를 압박함.

2.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성립되었는데, 당시 소련 해군은 제국 시절과 달리 연안 해군으로 축소되었기에 소련과 해양 패권을 두고 충돌할 여지가 사라진 영국 입장에선 일본의 지정학적 가치 및 중요도가 하락함.

3. 연해주 일대에 수립된 트란스아무르 공화국의 대리정치에서, 양국의 공동자치령 시절에는 없었다가 건국 이후 생겨난 영국의 간섭을 경계한 한국과 일본이 손을 잡고 영국의 영향력을 축출하려한 정황이 나타남

4. 재정 상태가 악화된 영국이 불필요한 전쟁에 강제 개입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동맹 관계를 정리하려고 함.

5. 한국의 청도 반환 거부 및 일본의 중국 식민화 계획에 대한 영국의 임시견제

기타

결국에는 폐기가 되었다고는 하나 해당 동맹을 바탕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세력 균형이 일본과 한국 쪽으로 기울어, 일본의 푸젠 점령과 한국의 만주 식민화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그 이후 몽골과 장시성의 장악까지도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한국과 일본으로서는 득을 다 본 뒤, 1차 대전에서 전시 호황을 통해 채무를 완전히 청산하고, 로마노프 황가 구출을 통한 간접적인 유럽 정세 참여까지 이루어내는 행운까지 뒤따랐다. 아직 산업화의 기초가 부족했었던 일본과 토지는 넓었으나 일본보다도 끝발이 딸리던 한국에 지나칠 정도로 순조로운 사태 전개는, 후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과 대한 제국의 추축국 가담에 이르는 과도한 자만심을 낳았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군의 양대 축인 일본 해군을 세계 제3위의 해군으로 급성장시키는 원동력을 제공한 동시에 한국 육군을 장비상으로 어지간한 유럽 열강 군대 못지 않은 강군으로 만들어버리는데 기여했다. 앞서 설명했듯이 한러일전쟁에서 최신예 영국 군함과 기관총을 판매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일본 해군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적 기반은 영국 해군이 기준이 되었으며, 한국 육군의 기술적인 기반 중 하나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장비를 양산하던 영국이 되었고, 훗날 독일제 기술의 입수까지 완료한 이후부터는 아시아 기준 그 어떤 국가도 범접할 수 없는 최강의 육군이 되었다.

1931년 장시 사변 때까지만 해도 영국은 일본을 비호했고 1934년에 한국의 주도로 건국된 예케 몽골 울루스의 건국도 승인했으나, 1935년의 방공협정과 1937년 제 2차 동아시아 전쟁의 중국 전선의 시작을 기점으로 영국과 한국, 일본의 관계는 빠르게 악화일로를 걸었다. 결국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직후, 폭격을 퍼부은 뒤 홍콩 섬에 해군 육전대를 상륙시켜 구룡반도를 통해 5만 대군을 투입, 현지에 주둔한 영국군을 패퇴시키고 홍콩을 점령했으며, 마찬가지로 한국도 영국령 캐나다에 제국익문사 요원을 파견하여 장장 5개월동안 영국령 캐나다의 군사정보를 한국 본토 및 동맹국으로 누출시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일본이 싱가포르, 말라카 등의 말레이 연방 식민지들도 모두 점령함으로써, 영국은 결국 한일과 적으로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