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아침해의 원유관)

커피와 사탕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2월 16일 (금) 02:17 판

대한제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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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의 역사
大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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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민족: 예맥, 삼한, 한민족

상고
시대
고조선(단군조선) 진국 주호국
부여 고조선(위만조선)
원삼국
시대
한사군* 마한 변한 진한
고구려 옥저 동예
삼국
시대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탐라국
남북국
시대
발해 통일신라
후삼국
시대
태봉 후백제 후신라
고려
시대
고려
조선
시대
조선
대한제국
시대
대한제국
현대
시대
대한국
*: 한국사에 포함되는지 아닌지에 대해 학술적인 논쟁이 있음.

대한제국의 식민지 · 자치령 및 조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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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지역 명칭 담당기관
북만주 만주 만주총독부
동몽골 제국 몽고주 몽고도독부
프리모예 연해주 자치령 연해총관부
해당지역 명칭 기관
칭다오 청도 청도행정부
* 자치령은 1920년대 괴뢰국으로 [1]승격
괴뢰국 · 군정청
한자문화권의 황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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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제국 (야마토)

일본
대일본제국
일본국
(대월) → (대남) 대한
대한제국
대한국
대한제국
大韓帝國 | Empire of Korea
국기 국장
광명천지
(光明天地)
칭제건원 이전 동시베리아 전쟁 이후
조선 대한국
대금민국
상징
국기
태극기
국화
무궁화, 오얏꽃
황실 상징
이화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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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대조선국 건국
1875년 대한제국 선포
1904년 한러일전쟁 승전
1930년 한성 진군
1937년 제 2차 동아시아 전쟁
1941년 동시베리아 전쟁
1944년 한성 내전, 헌정 복귀
지리
수도
한성부
최대도시
한성부
위치
동북아시아 한반도 일대, 만주,
시베리아 일대 등
주변국
중화민국, 러시아 , 대일본제국,소비에트 연방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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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약 5600만(본토)
공용어
한국어
공용 문자
한글, 한자
민족
한국인, 러시아인, 만주인 등
국교
명목상 없음, 사실상 국체유학
종교 분포
20% 무교, 30% 유학, 12% 천주교, 5% 불교, 그 외 33%
군대
대한제국군
정치 ·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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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양원제→일당독재, 군사독재, 입헌군주제→환태평양 사령부 통감청
정부 수반
내각총리대신→제국대호국경
국가 원수
공종 성덕제 이영[2]
행정 수반
김창암[3]
여당
대한호국회
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계획경제
통화
대한제국 원 (圓)
구 경성 한성부 제국은행 앞 거리


개요

대한제국, 통칭 대한 혹은 제국주의 한국은 신미개혁을 시작으로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그 식민지들을 통치했던 제국주의 열강이다. 1875년 7월 3일부터 1945년 4월 4일까지 유지됬으며, 대일본제국과 더불어 동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성공한 유이한 국가였다. 현대까지 아시아 북부와 시베리아 일대에 남아있는 영향력을 끼쳤으며, 이후 헌법의 개헌으로 기존의 제국 체제가 붕괴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역사

극동의 여명

당시 조선의 실질적인 집권층은 안동김씨 세도가였으며, 이들은 만주의 후금이라는 방패로 순나라의 마수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노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식적인 관계가 매우 경직된 상태였던 대순[4]에 대한 대체제로 네덜란드, 일본, 후송과 러시아와의 제한적인 무역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홍경래의 난 이후 세가 약해진 안동 김씨 세력의 권력 확보를 위한 조치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남만주로 농민들을 보내 농지를 확보하거나, 명의 붕괴 이후부터 대대적인 순나라와의 밀무역과 새로운 교역국들과의 거래로 세를 얻은 보부상 등의 상인 세력들의 포섭을 통해서 안정적인 정치를 했던 안동김씨 세도가였으나, 19세기에 들어서는 더이상 권세를 그대로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고있는 상황이었다.

이러는 사이 성장하고 있던 근왕파 세력, 훗날 왕도개화파라불리는 세력이 존재하였는데, 음지에서 암약하던 이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얻게 된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였다. 당시 왕이었던 고조는 안동김씨가 보지 않는 곳에서 서학을 통해 익힌 세계에 대한 식견, 흥선군과 풍양조씨 등과의 동맹을 통해 인형사마냥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짜가고 있는 상황이었고, 고의적으로 안동김씨가 개항을 망설일 때 은근한 동의의 시선을 보내 개항을 하도록 만들었다. 해당 사건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바라지 않던 안동김씨는 이 기회에 프랑스의 세력을 기반으로 개화와 권력 유지를 동시에 이루어내려고 하였으나, 프랑스 측의 무력에 제대로 된 대항도 안하고 문을 연것에 대해 백성들의 민심이 극도로 나빠졌고, 결정적으로 당시 한국 내의 유교적 민족주의자로 평가받는 최익현이 전면적으로 개혁을 실시할것에 대한 지부상소를 올렸다가 진압 도중 사망하는 '궁내사대부박해'가 일어나면서, 변화를 바라지 않는 유교적 사대부들의 등까지 돌린 안동김씨의 명분이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결국 이 때를 노린 당시 국왕이자 훗날 대한제국 초대 황제가 되는 고조 이현은 왕도개화파를 선동하여, 훗날 신미사화로 불리게 되는 정치적인 숙청을 감행, 몇백년만에 다시 조선의 세도가에게서 권력이 왕을 위시한 근왕 대신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천지가 개벽하다

실권을 잡은 근왕 세력과 고조는 이후 서양 문물에 대해서 내부적으로 조사하는 기간을 가졌고, 이때 순나라와 후송나이 각각 버마전쟁과 아편전쟁으로 몰락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최종적으로 정치적 숙청이 끝난 조선에 때마침 다시 돌아온 조선통신사가 당시 비슷한 일을 겪고 있던 일본의 내부상황을 알리면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한 개화에 대한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개혁의 방향성을 정하기 위해 조선은 서방에는 보빙사를 파견했고, 일본, 중국 2개국에는 통신사를 개편한 수신사와 영선사를 파견하여 동아시아적 개혁에 어울리는 방향성의 모델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당시 서양, 일본 등을 방문한 유교적 인사들은 안동김씨가 자신들의 사비로 들여오던 문물 일부와 제물포의 네덜란드발 문물들만 보다가, 완전히 드러난 서양의 발달된 모습에 크게 자극받았고, 여기에 중국으로 방문한 이들이 수도까지 꼴이 말이 아니라는 정보를 공유하면서 그들의 기존 천하관이 마치 징을 울리듯이 흔들렸다. 결정적으로 중국에 파견된 완흥군이 흥선군에게 보고를 올리면서, 그를 많이 믿고 있던 흥선군 또한 개화의 필요성을 단순히 군사력 뿐만이 아닌 모든 면에서 느끼게 됬고, 이를 통해 개혁인사, 보수인사 모두 개화에 관심을 가지고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조선의 근대화 조건의 최소가 충족되었다.

한편, 이 무렵 조선은 두가지의 수확을 거두었는데, 첫째는 여진정벌 이후 지속적으로 농민을 보내던 남만주 일대를 완전히 조선의 땅으로 편입하여 새로운 3개의 도로 삼았으며, 두번째는 홍삼과 인삼무역을 통한 상당한 무역 수익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을 통해 근대화를 위한 설비들을 구매할 수 있었고, 임신개혁을 단행하여 '관복개편'으로 관복을 서구화하고, 원격제도를 시행하여 국유화한 서원을 통해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단 또한 마련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국의 문명개화를 서로 지켜본 한국과 일본 사이에 묘한 동지의식이 꽃피면서, 외교관계가 상당히 돈독하게 발전했다. 일본 측은 한국의 존재로 육군 주력의 조슈 번의 대륙확장 계획을 무모한 일로 치부하며 폭주를 막을 수 있으니 좋았고, 한국은 해양세력 동맹이라는 특징 덕에 자국의 새로운 3도 내에서 나는 철광석들 중 남은 것들을 쌀과 함께 팔 수 있었고, 사이가 좋지 않은 금나라와 순나라에 같이 대항해 줄 수 있는 국가의 존재를 좋게 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개혁을 계속하면서 힘을 더 키운 한국은 기세를 몰아 1885년 금나라에 통상을 요구한 뒤 거절당하자 북진하여 남만주 영토를 더 접수했고, 90년대에 들어 순나라와의 관계가 개혁문제로 험악해지자[5], 서서히 일본과 손을 잡고 각각 북방과 남방에서 중국,만주를 공략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영광과 전성기

위기, 그리고 파시즘의 대두

그가 나타나다

제국의 끝

의의

식민지

현대의 평가

한국 내에서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복잡미묘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래도 부정적인 인식이 강한 편이다. 이런 평가에는 대한제국이 추축국으로서 아시아 지역의 파시즘[6]과 군국주의의 선봉에 섰고, 시베리아에서 수백만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야기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내전이 나 수뇌부가 한 번 갈아엎어졌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당대에는 아시아의 주요 강대국 중 하나였지만, 만주족의 동화를 명분으로 만주 지역에 경찰통치를 시행하는 등 극단적 집단주의를 내세우며 인권과 같은 현대적 가치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현재에는 평가가 나쁘다.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현재까지도 분명 근대사에서 상당히 대단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일이다. 이 시기 한국에 대한 세계의 평가는 서구에서는 정치적으로는 대륙에서의 러시아 패권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을 중세적,중화중심적인 세계관을 버리고 혁신적인 개방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문명국이라며 찬사를 거듭하였고, 당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동아시아를 여행한 서양인들도 중국인의 성격과 생활습관, 문화와 역사에 대해 혹평을 내린 것과는 반대로 비슷하게 일본인, 한국인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문호 개방의 과정에서 물질적인 계몽에는 성공했을지언정, 사상, 사회, 정치의 자유와 국민 계몽에는 도달하지는 못했다. 대한제국은 오히려 신장한 국력을 통해 주변 국들을 합병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제국에 비견되는 수많은 전쟁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의 식민지배, 혹은 내정간섭을 받은 나라들의 한국에 대한 평가는 복잡한 편인데,연해주의 러시아 차르국의 경우에는 애초에 국체인 차르부터가 한국의 금관작전으로 구조된 로마노프 왕가 황통들이고, 소련을 바로 코 위에 두고있는 상황에서 사실상 한국 외 선택지는 아예 괴뢰국으로조차 남겨두지 않겠다는 인식이 있던 일본제국 이었던지라 친한 여론이 진작에 형성되었으며, 전후에도 소련으로 인해 강도높은 친미, 친영 및 친한 정책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던지라 감정회복이 빠르게 된 편에 속한다. 이 외에도 국가는 아니지만 대금민국의 간도지역에서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높은 편으로, 방언 등에서 한국어의 깊은 영향들을 볼 수 있고 현대에 영유권 분쟁이 계속 발생할 정도로 한국의 영향력이 강한 편이다. 반면, 만주에 위치한 대금민국의 경우 그 사이가 최악으로 자국의 과거 집권 세력인 공산주의 세력부터가 한국의 지속적인 탄압을 받은 데다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금나라인들은 식민통치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도 한국에게 사과와 배상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인식 때문에 반한감정이 상당히 강한 편에 속한다.

동시베리아 전쟁 중 한국군의 폭격을 받은 동구권 국가들도 어느정도 감정의 골이 있었으며, 이를 회복하기까지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다만 이들은 냉전이 시작된 이후 소련의 영향력을 벋어나기 위한 용도로 한국에도 어느정도 줄을 대기 시작하였으며, 현대에는 한국 기업들이 많이 진출해있을 정도로 사이가 좋아진 편들에 속한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2차 대전당시 대한제국이 나치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약속을 하였고, 독소전쟁 당시에 원조도 한지라 평가가 매우 좋은 편. 한국군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적도 없던지라 현대에도 우크라이나에서는 한국에 대해서 좋은 평가가 강세다.

서양, 구미권에서는 한국에 의해 유럽 본토 및 미국 본토가 입은 피해는 전무한지라, 제국주의시기 일본을 대하는 것처럼 다소 무관심한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동아시아의 또다른 제국으로서 소련의 공산주의와 전면적으로 호각을 다퉜다는 점 때문에 좋아하는 경우도 존재하며, 몇몇은 케케묵은 과거사로 싸우는 걸 건설적이지 못하게 여겨 중국이나 대금민국 등이 한국의 만행을 규탄하는 것을 '이미 다 끝난 일들을 저열하게 물고 늘어지는 행태'라 여기는 경우도 존재한다.

하지만 아직 소련에서는 할힌골 사변 등으로 독소전쟁과 한소전쟁을 동시에 경험한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전쟁범죄를 겪기도 하였고, 이전부터 소련과 한국의 관계가 러시아 차르국 문제 등으로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였던지라 반한 감정이 종종 남아있는걸 볼 수 있다. 다만, 젊은 세대들은 이러한 인식이 부족한지라 자국 내에서의 이런 주장을 케케묵은 주장으로 보는 경우도 종종 존재한다.

대금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등의 거센 반한에 회의적인 사람이 많은 이유는, 이들은 현재의 대한국을 구 대한제국과 정권, 이념 등 모든 면에서 다른 국가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2차대전 말미에 민주세력이 내전으로 다시 돌아온지라 이 인식이 더 강한것도 있고.

동시기 일본제국과의 비교

10년 정도의 차이긴 하지만, 당시 한국은 가장 가까운 동양권 나라인 일본을 개화의 모델 중 하나로 삼았던지라 의외로 비슷한 면들이 많이 존재한다. 주로 동아시아적인 가치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 따오기의 기여가 상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한국의 근대시기 한자어 용어(재벌, 경제 등) 중 일본에서 들여온 것들이 꽤 보이는 편이다. 실제로 19세기, 20세기 그리고 현재까지 두 나라의 관계가 상당히 좋은편이기도 했고, 지리상 가깝다는 점과 비슷한 외교적 상황 등이 이러한 교류를 촉발시킨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차이점도 분명했다. 한국은 일본에 비해 만주라는 거대한 땅이 있어서 농민들의 생활수준은 더 높은 편이었고[7], 전통적인 이유로 군주의 권한이 일본보다 강해서 한국 정치는 황제의 의사가 상당히 중요했다.


  1. 연해주 자치령에서 극동 공화국으로, 극동 공화국에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환.
  2. 1922년 3월 2일 즉위
  3. 1944년 기준.
  4. 다만 중국의 압도적인 인구수 때문에 초기 순나라때처럼 공식적인 무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지는 않았다.
  5. 당시 순나라는 가뜩이나 전통적으로 조선의 번국 자리가 진실로 자신들에게 있는지도 애매한 상황에서, 서양식 관복을 입고 동등한 외교관계를 요구하는 대한국으로 변모하자 조정 입장 자체를 금하는 듯 강경대처를 보여줬다.
  6. 전간기의 대한제국은 현대에도 평가가 복잡한 일본과 다르게 확실하게 파시즘 국가로 평가받는다. 이탈리아처럼 황제는 최소한의 명분과 권력만 가지고 실질적인 지도와 국가정책등을 유일한 정당의 지도자이자 총리를 대체한 제국대호국경이 전부 집행하는 구조였기 때문.
  7. 당시 한국 농민의 생활수준은 중화민국, 소련, 이탈리아, 일본보다 높고 프랑스 바로 아래인 수준이었다. 다만 이건 만주로 건너간 농민들이 주를 이루는지라, 본토에서 계속 농사를 짓던 이들은 일본 농민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고, 오히려 세력다툼에서 가격이 싼 농산물 상당량을 들여오는 만주쪽 농민들에게 밀릴 때였다. 때문에 1920년대 대공황 이후 문자 그대로 궁지까지 내몰린 농민들이 만주로 대거 상경하기도 했었고, 이 과정에서 만주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토지를 강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