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임신개혁을 단행한 이후, 유교적 보수파의 불만 감소와 황실의 권위 향상등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 대한제국 정부가 기존의 유교를 개량해 만든 사상, 학문 혹은 성리학 분파의 일종이다. 대한제국 시기 당시엔 국체학(國體學)이라고 주로 불렸다.
1945년 대한제국 정부가 연합국으로 넘어와 항복했고, 이후 군정 체제에서 연합군 총사령부에 의해 유학순정지령이 발표되면서 사실상 소멸하였지만, 서원본청은 민간종교법인으로 분리되어 개개별로 한국 각지의 서원을 관리하며 지금도 존재한다.
설명
임신개혁을 시작할 무렵부터 성리학을 완벽하게 배제하고 근대화를 진행한다는 선택지는 주도층인 권력자들에게 모두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권력의 수단으로서 성리학을 이용하고자 개혁을 진행하는 동안 서서히 기존 성리학에 대한 개조 및 개량을 진행했고, 그 형태는 대한국으로의 국위 교체가 이루어질 무렵 등장한 '귀정성리학'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몇년 뒤인 1877년에는 국학선포(國學宣布)의 칙령이 하달되었고, 이는 사실상 지금부터 조선 정부가 경전에 얽메이지 않고 성리학, 나아가서는 유학 자체를 통제하고 개조해 부국강병에 일조시키겠다는 의사표명을 뜻했다. 이후 1885년 경부터 정부가 관할하는 모든 서원에는 원격이 붙기 시작했고, 그렇게 폭력적인 단일화가 동원된 근대원격제도의 시행에 박차가 올라간 시점부터 '귀정성리학'은 국체유학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종교인가 국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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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 합사 논란이 있는 한성 충장서원 (舊 충장단). 과거에는 국체유학적 행정 아래 면세와 보조금 등 혜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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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유학은 종교라기 보다는 학문에 더 가까웠고, 국체유학은 이것을 전신인 귀정성리학을 넘어 모든 기준을 포용할 수 있는 한편 국가에 이바지 할 수 있게 선진화시킨 시킨 학문이라고 정의되었다. 중요한것은 '종교라기보다는 학문'이라는 표현인데, 융희시대 당시 제국정부와 제국 정부를 옹호한 지식인들은 국체유학을 종교는 당연히 아니고, 기존의 여러 갈래로 해석이 가능하던 유교가 아닌 지금 시대에서 대한제국의 주요 사상이 되는 이념 중 하나이자 문화 그 자체, 혹은 국시라고 주장했고 그렇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래대학의 종교학자 강병균 교수 등은 국체유교가 전형적인 교리(dogma)적 형태를 표방하고 있다고 비판하였으며, 실제로도 황제에 대한 신성성, 충성심과 유교적 전통의 것에 대한 무비판적인 옹호를 중시한 대한제국 말기의 사회상, 전쟁 수행에 있어서 군종 프로파간다 역할을 수행했고, 대한호국회 또한 이 사상을 사실상 파시즘적으로 개량한 일민주의를 이념으로 내세운 점으로 미루어봤을 때 대한제국 내에서 하나의 강력한 정신적 지배체계로 작용했음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전의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국체유학은 종교가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해 왔다. 그 이유는 대한국 국헌은 외견상으로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를 표방했고, 이는 만약 국체유학이 종교라면 정부 차원에서 헌법을 어기는 것을 뜻했기 때문. 유학이 괴력난신을 부정하고 서원 또한 오로지 성현의 말씀과 혼을 기릴 뿐이며, 그나마 존재하는 조상숭배 또한 그저 대대로 내려져온 전통일 뿐이니 종교가 아니라고 우김으로써 제국헌법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선전했다. 또한 종교가 아니라 일종의 사상, 관념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개개인의 종교와 상관없이 (식민지 만주인과 연해주 거주 러시아인을 포함하여) 모든 한국인들에게 충성과 애국을 위해 국체유학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이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국체유학을 기존 유학을 넘은 것이자 모든 신민들의 도리인 국가의 근본이 되는 사상, 즉 국본학(國宗敎)라고 주장하며,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비국민으로 낙인찍혀서 탄압받기 일수였다.
대한 민족주의와의 연관성
원래 유학의 개념은 근대적 국수주의 사상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동아시아의 성현들의 말에 기반한 전통적 통치 이데올로기와 문화 등을 엮어서 정의한 것이 더 가까웠다. 사람들이나 집단들 간의 상호작용 형식을 정하는 학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올바른데, 유교의 예를 정하는 이유는 존재하는 사람 간이나 집단간의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한 사회관습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으로써 쉽게 말하면 서로 존중하는 관습을 만드는 학문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다. 당연하지만 유교는 자연상태의 힘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강자와 약자간의 평등을 전제하지 않으며, 따라서 강자는 약자에게 자비와 관용을 베풀 것을 강조하고 약자는 정당한 강자를 향하여 존경과 순종을 할 것 요구한다. 즉, 단순히 복종이 아닌 상호작용을 통하여 집단에서 상위층의 자비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화를 시작한 이래 대한제국 정부는 폐단 혁파라는 명목 하에 기존 유교의 고대적 개념을 일부 무시하고 성향 자체를 국가의 정책 방향성에 부응할 수 있게 바꾸어 왔다. 하나는 군주에 대한 충성에 부흥하여 존경 대상인 상위 계층이 자비를 배풀 의무를 근대화와 국가발전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에 약화시켜버린 것이고, 휴머니즘적 색채를 약화시키고[1], '명나라의 망국 이래 천하통일조차 이루지 못하는 중국의 양 왕조가 아닌, 진정한 천조질서의 유복자인 대한'이라는 민족주의적 자부심과 군주의 의무를 왜곡시킨 제정 옹호의 성향을 지닌 학문에 더 가깝게 바꿔버린 것이다. 또한 민족주의와 합쳐지면서 기존 유교와 어울리지 않는 근대 민족주의적인 요소도[2]이 많이 추가되었다.
대한제국이 제국주의의 길로 나선 이후부터는 식민지 각지에 서원을 세웠고, 식민지인들에게 국체유학 사상을 강요했다. 실제로 이 잔재가 상당히 많이 남아있던 러시아 차르국에서는 군사두마 시기 사교 척결 운동을 통해 연해주 일대에 세워진 수많은 서원, 신사 등에 제제를 가하기도 했었다.
항복 이후
국체유학은 한국의 항복과 연합군의 간섭 이후, 맥아더에게 한국 파시즘의 사실상 모태라고 판단되어 당시 내각총리대신인 이승만과 합의 후 제거하였다. 어찌 보면 대한제국 민족주의에 의해 왜곡된 껍질을 벋겨내고 다시 원래의 모습인 유학으로 돌아갔다고도 볼 수 있으며, 이후 냉전기에는 폭주의 잠재적 원인 중 하나였던 성리학적 정서도 시대에 맞게 씻겨나가면서, 현대 한국에서 유학은 기존의 보수적인 본질과 국체유학에 의해 만들어진 민족주의적 면모를 거두고, 좀 더 대중친화적인 모습으로 변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교양만화가이자 한성대학 출신인 이원복 교수는 2000년에 낸 저서 <새 먼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편에서, 국체유학의 몰락이 한국의 일시적인 정신적 방향상실을 가져왔다고 주장했는데, 패전 후 민주주의가 꽃피자 국민들, 기존에 탄압받던 공산주의자들과 자유 민권 인사들이 각기 다른 지향점을 제시하고 정치적 상황까지 겹치면서 공동의 가치관이 결여되어 1950에서 60년대동안 정신적으로 한국 사회를 표류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유교가 국체유학으로 변모한 기간동안, 옛 개념과 근대적 내용이 상당히 뒤섞인 탓에 꼬여 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서구에서 들여온 근대의 국민개념을 황실과 정부에 충성하는 신민개념으로 바꾸어, 중세 국가에서 근대 국가로의 이행을 꾀하는 대한제국의 시도였다[3].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태화황제의 국민선언 이후 현재 국체유학은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한국 내 극우세력 중 일부는 아직도 국체유학을 신봉한다. 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절정을 달리던 때에는 '국체유학은 종교가 아니라 학문이자 문화다'라고 주장했고, 원본 유교도 현대에 와서는 보수적인 면이 많이 사라지고 대중들에게 한국 전통 문화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으니, 어쩌면 종교란 표현 자체가 이상할지도 모른다.
국체유학을 제정하면서 대한제국 정부는 전국의 서원 중 일정 규모 이상의 서원들, 혹은 새로이 새워진 서원들을 모두 국유화했다. 그리하여 서원의 관리체계가 만들어졌고, 이에 따라 방문자들도 급증하면서 현대에는 에노리안들과 오덕, 시험을 앞둔 학생과 수험생 및 동아시아 문화 중 한국 문화에 관심이 생긴 자들의 돈을 끌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체유학의 내부구조를 들여다 보면 전통적인 유학의 체계가 무시당하는 기묘한 현상이 종종 벌어지곤 하는데, 국체유학이 가장 기승을 부리던 대한제국 중기 동안에는 황제 관련 예식에서도 유교적 논리가 무시당하여 근대화 과정에서 중앙 정계에서 나가떨어진 유림 세력들이 발끈하곤 했다.
환태평양 총사령부 통감청과 황실 인사 몇몇이 없애긴 했지만, 국가의 건국 이념인 유교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어서 완전척결이 불가능했는지는 몰라도 그 영향력이 서원본청이라는 모습으로 상당부분 살아 남았다. 서원본청의 김형석을 비롯한 고위직 간부 몇몇은 한국 우익계 인사 몇 명과 활동한 전적이 있고, 극우정당 태극을 위한대안의 네임드 당원이기도 하다. 서원본청에 등록된 서원 또한 국체유학의 유행시기에 등록된 서원들을 그대로 가져오기도 했다. 막 국체유학이 귀정성리학에서 피어오른 당시 복권이 거부된 서원들이 서원본청 측에게 복권을 거부당하는것 또한 이 이유에서 기인하며, 그래서인지 광천서원같이 전후 복권된 서원들은 서원본청과의 사이가 상당히 안 좋은 편이다. 관련 주제가 나오면 대놓고 말하는 경우도 있고 정부기관이다보니 돌려서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의견은 일단 '그딴 사이비 국가주의자들과 우리는 다르다' 하는 뉘앙스로 통일된다.
지배자에게 시선을 집중시킨다는 의미에서는 스탈린주의와 비슷하지만, 스탈린주의의 경우 중심이 되는 인물을 '만인의 모범'이자 '만인의 선생'으로 여기기에 필요하다면 대체될 수 있지만 국체유학은 문자 그대로 '하늘의 명을 받아 성현과 유학의 덕을 퍼트리는 군주의 혈통'이기에 대체할 수 없단 점에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공산주의의 광기를 막아서고 민족을 위해 전진하는 제국 제 1의 선봉장'이라는 민족주의적 우상화와, 근본적으로 방공의 성전에서 대황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2인자'에 그친 김창암은 내심 황제의 권위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비록 국체유학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 특성 중 일부는 현대까지도 한국의 유교에 남아있다고 평가받고 있따. 그 예시로 근대를 기점으로 생겨난 수많은 성현 기념일들과 이에 따르는 축제 등 본래 유학과 이질적인 몇몇 문화가 그 예시로 뽑힌다. 이는 냉전기간의 기존 조선 내 성리학의 변화도 한 몫했지만, 결국 근본적인 시작은 국가 통합을 위해 대한제국 정부가 다양한 방법을 써가며 서원 참배와 국체유학 신봉을 민중들에게 적극 장려하던 것이 시초인지라 국체유학의 대표적인 잔제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일각에선 조선시대부터 나라의 주 근본 중 하나인 성리학이 한국이 변화함에 따라 단순히 새로운 방향으로 대중화되면서 생긴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들며, 지나치게 유학 근본주의적으로 분석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 또한 제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