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체유학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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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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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에 포함되는지 아닌지에 대해 학술적인 논쟁이 있음.

대한제국의 식민지 · 자치령 및 조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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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령은 1920년대 괴뢰국으로 [1]승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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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한국어 국체유학
한자 儒學國體
영어 National Korean Confucianism(NKC)

개요

임신개혁을 단행한 이후, 유교적 보수파의 불만 감소와 황실의 권위 향상등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 대한제국 정부가 기존의 유교를 개량해 만든 사이비 종교, 학문 혹은 유교적 분파의 일종이다.

임신개혁 시작 당시부터 흥선군 이하응을 위시한 개량보수파는 유교를 정계에서 완전히 밀어낼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었으나, 유교 권위의 유지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변형을 가할 의사가 있었다. 때마침, 사상과 제도적 탐구를 위해 일본으로 파견갔던 박영효가 돌아온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유교의 획일화를 통한 부국강병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1890년 제정된 대한국 헌법으로 한국의 주요 이념으로 유교를 공식적으로 명시하면서 구체화되었다.

1944년에 한국 정부가 연합국으로 넘어와 항복했고, 이후 통감청 체제에서 환태평양 총사령부에 의해 유교지령이 발표되면서 사실상 소멸하였지만, 서원본청은 민간종교법인으로 분리되어 개개별로 한국 각지의 서원을 관리하며 지금도 존재한다.

설명

본래 유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학문에 더 가까웠고, 국체유학은 초기엔 이것을 근대식으로 선진화 시킨 학문이라고 정의되었다. 여기서 '종교라기 보다는 학문'이라는 표현이 중요한데, 융희시대 당시 제국정부와 제국 정부를 옹호한 지식인들은 국체유학을 종교는 당연히 아니고, 기존의 여러 갈래로 해석이 가능하던 유교가 아닌 지금 시대에서 대한제국의 주요 사상이 되는 이념 중 하나이자 문화 그 자체라고 주장했고, 그렇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종대학의 종교학자 강병균 교수 등은 국체유교가 전형적인 교리(dogma)적 형태를 표방하고 있다고 비판하였으며, 실제로도 황제에 대한 신성성, 충성심과 유교적 전통의 것에 대한 무비판적인 옹호를 중시한 대한제국 말기의 사회상, 전쟁 수행에 있어서 군종 프로파간다 역할을 수행했고, 대한호국회 또한 이 사상을 사실상 파시즘으로 개량한 유교 파시즘을 주요 사상으로 내세운 점으로 미루어봤을 때 대한제국 내에서 하나의 강력한 정신적 지배체계로 작용했음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전의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국체유학을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대한제국 헌법은 외견상으로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를 표방했고, 이는 만약 국체유학이 종교라면 정부 차원에서 헌법을 어기는 것을 뜻했다. 게다가 유교 자체가 원래 학문에 더 가깝다는 이론에 따라서, 유'학'이니 종교가 아니라고 우김으로써 제국의 헌법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선전했다. 또한 종교가 아니라 일종의 사상, 관념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개개인의 종교와 상관없이 (식민지 만주인과 연해주 거주 러시아인을 포함하여) 모든 한국인들에게 충성과 애국을 위해 국체유학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이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국체유학을 기존 유학을 넘은 것이자 모든 신민들의 도리인 국가의 근본이 되는 사상, 즉 국본학(國宗敎)라고 주장하며,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불충민으로 낙인찍혀서 탄압받기 일수였다.

원래 유교의 개념은 근대의 국수주의 사상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이나 집단들 간의 상호작용 형식을 정하는 학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올바른데, 유교의 예를 정하는 이유는 존재하는 사람 간이나 집단간의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한 사회관습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으로써 쉽게 말하면 서로 존중하는 관습을 만드는 학문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다. 당연하지만 유교는 자연상태의 힘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강자와 약자간의 평등을 전제하지 않으며, 따라서 강자는 약자에게 자비와 관용을 베풀 것을 강조하고 약자는 정당한 강자를 향하여 존경과 순종을 할 것 요구한다. 즉, 단순히 복종이 아닌 상호작용을 통하여 집단에서 상위층의 자비를 촉구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 때까지만 해도 이 사상은 꽤 철저하게 지켜진 편이었으나, 중국의 실상을 보고 경악한 보수파들도 학문적 사고에 유연한 틈을 줘버리게 되었고, 그렇게 임신개혁 이후 대한제국 정부는 기존 유교의 고대적 개념을 일부 무시하고 성향 자체를 국가의 정책 방향성에 부응할 수 있게 바꾸어 왔다[2]. 하나는 군주에 대한 충성에서 자비를 배풀 의무를 약화시켜버리고, 휴머니즘적 색채를 약화시키고 기독교적 성향과 군주의 의무를 왜곡시킨 제정 옹호의 성향을 지닌 학문에 더 가깝게 바꿔버린 것이다. 또한 국체유교는 새천명을 얻은 대한 고유의 것이므로, 이미 천자국이 된 상태에서 근본을 해치지 않는 이상 기존 천자국인 중국의 것만 따를 필요가 없다고 정부 차원에서 주장했고 이 과정에서 근대 민족주의의 입맛에 어울리는 것들[3]이 상당히 많이 추가되었다.

대한제국이 제국주의의 길로 나선 이후부터는 식민지 각지에 서원을 세우고, 식민지인들에게 국체유학 사상을 강요했다.

항복 이후

국체유학은 한국의 항복과 통감청 설치 이후, 맥아더에게 한국 파시즘의 사실상 모태라고 판단되어 당시 내각총리대신인 이승만과 합의 후 제거하였다. 어찌 보면 대한제국 민족주의에 의해 왜곡된 껍질을 벋겨내고 다시 원래의 모습인 유학으로 돌아갔다고도 볼 수 있으며, 이후 냉전기에는 폭주의 잠재적 원인 중 하나였던 성리학적 정서도 시대에 맞게 씻겨나가면서, 현재 한국에서 유학은 좀 더 대중친화적인 모습으로 변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교양만화가이자 한성대학 출신인 이원복 교수는 2000년에 낸 저서 <새 먼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편에서, 국체유학의 몰락이 한국의 일시적인 정신적 방향상실을 가져왔다고 주장했는데, 패전 후 민주주의가 꽃피자 국민들, 기존에 탄압받던 공산주의자들과 자유 민권 인사들이 각기 다른 지향점을 제시하면서 공동의 가치관이 결여되어 1950에서 60년대동안 정신적으로 한국을 표류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유교가 국체유학으로 변모한 기간동안, 옛 개념과 근대적 내용이 상당히 뒤섞여 꼬여 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서구에서 들여온 근대의 국민개념을 황실과 정부에 충성하는 신민개념으로 바꾸어, 중세 국가에서 근대 국가로의 이행을 꾀하는 대한제국의 시도였다[4].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태화황제의 국민선언 이후 현재 국체유학은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한국 내 극우세력 중 일부는 아직도 국체유학을 신봉한다. 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절정을 달리던 때에는 '국체유학은 종교가 아니라 학문이자 문화다'라고 주장했고, 원본 유교도 현대에 와서는 보수적인 면이 많이 사라지고 대중들에게 한국 전통 문화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으니, 어쩌면 종교란 표현 자체가 이상할지도 모른다.

국체유학을 제정하면서 대한제국 정부는 전국의 서원을 부활시킨 뒤 국유화했다. 그리하여 서원의 관리체계가 만들어졌고, 이에 따라 방문자들도 급증하면서 현대에는 에노리안들과 오덕, 시험을 앞둔 학생과 수험생 및 동아시아 문화 중 한국 문화에 관심이 생긴 자들의 돈을 끌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체유학의 내부구조를 들여다 보면 전통적인 유학의 체계가 무시당하는 기묘한 현상이 종종 벌어지곤 하는데, 심지어 한때는 황제 관련 예식에서도 유교적 논리가 무시당하여 유림 세력들이 발끈하곤 했다.

환태평양 총사령부 통감청과 황실 인사 몇몇이 없애긴 했지만, 국가의 건국 이념인 유교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어서 완전척결이 불가능했는지는 몰라도 그 영향력이 서원본청이라는 모습으로 상당부분 살아 남았다. 저 서원본청의 고위직 간부 몇몇은 한국 우익계 인사 몇 명과 활동한 전적이 있고, 극우정당 태극을 위한대안의 네임드 당원이기도 하다. 서원본청에 등록된 서원 또한 국체유학의 유행시기에 등록된 서원들을 그대로 가져오기도 했다.

지배자에게 시선을 집중시킨다는 의미에서는 스탈린주의, 국가신토와 비슷하지만 스탈린주의의 경우 중심이 되는 인물을 '만인의 모범'이자 '만인의 선생'으로 여기기에 필요하다면 대체될 수 있고, 국가신토의 경우 그대로 '천황이란 절대신 아래의 여러 신들'이기에 '성현의 뜻을 전부 이어받은 절대적 지도자'인 한국 황제의 시스템과는 일부 눈여겨볼만한 차이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인간의 육신으로 나타난 대한 민족의 의지'라는 민족주의적 우상화와 유교계 인사들과의 타협을 통해서 자신의 지위를 정의했던 김창암도, 결국은 '대한 신민의 위대한 의지'라는 자신의 한계를 알았기에, 대체불가적인 황제의 권위를 빌려서 일을 집행하는 경우도 꽤 많이 있었고, 그의 회고록인 백범일지에서도 이에 대한 선망이 드러나곤 했다. 다만, 사상적으로 국체유학은 국가신도를 본딴 면이 많은지라 공통점이 많은 편인데, 둘 모두 군주의 권위를 정당화하고 국민의 충성심을 강여했다는 점, 근대 국민주의의 어설픈 모방작이라는 점 등이 있다. 각각 신토, 불교와 변질된 유교라는 이미 정착되어 널리 퍼진 토착적 가치를 이용한것도 동일하다.

비록 국체유교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 특성 중 일부는 현대 한국의 유교에 남아있다고 평가받는데, 그 예시로 길일이나 중요한 날을 앞두고 서원 등에 방문하는 한국의 문화가 그 예시로 뽑힌다. 이는 유교의 냉전기간의 변화도 한 몫했지만 근본적인 시작은 국가 통합을 위해 대한제국 정부가 서원 참배를 민중들에게 적극 장려하던 것이 결국 근본적인 시초인지라 국체유학의 대표적인 잔제라고 할 수 있는 편. 다만, 일각에선 조선시대부터 나라의 주 근본 중 하나인 성리학이 한국이 변화함에 따라 단순히 대중화 되면서 생긴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조선시대부터 유교의 총본산이었던 한국의 수도권을 위주로 주로 나타나는 여전히 제사를 중요시하는 풍습을 들어 제기중이다.


  1. 연해주 자치령에서 극동 공화국으로, 극동 공화국에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환.
  2. 본격적인 시작은 박영효를 위시한 진보적 개화파 몇몇이 일본 순방을 끝내고, 그곳에서 신토의 변화를 본 뒤, 대원군과의 밀담으로 체계화하여 황제에게 진상한 '서원과 문명개화의 연관성에 관한 건'으로 국체유학 정립의 초석을 다졌다. 다만, 이 당시까지만 해도 대중적인 유교 학파 중 하나로 분류된지라 대한제국 시기의 위상은 아니였으나, 이후 헌법 제정과 국위 상승 등이 겹치면서 압도적 지지 아래에 안정적으로 한국 사회에 자리잡았다.
  3. 고대 성현이 아닌 이를 모신 서원, 한국 거리에서 가끔 보이는 석재, 혹은 콘크리트제 홍살문 등 대부분 이 사상에 기반하여 설치된 시설들이 많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지금보다 제사가 더 화려했다고도 나오니 말 다한 셈.
  4. 당시 옆나라인 일본 제국 또한 국가신토라는 이름의 비슷한 정책을 시행했고, 신토라는 이미 존재하던 기반에 유교의 특징까지 흡수한지라 한국보다 더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