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총독부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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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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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식민지 · 자치령 및 조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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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지역 명칭 담당기관
북만주 만주 만주총독부
동몽골 제국 몽고주 몽고도독부
프리모예 연해주 자치령 연해총관부
해당지역 명칭 기관
칭다오 청도 청도행정부
* 자치령은 1920년대 괴뢰국으로 [1]승격
괴뢰국 · 군정청
만주총독부
滿洲総督府
출범
1908년 2월 4일
해산
1945년 5월 6일
청사
경호도 심양부 건명로
주요 총독
이용익 (초대)
윤치호 (말대)
업무
대한제국의 식민지 만주에 대한 전반적인 통치
상부
대한제국 정부

개요

만주총독부는 1908년부터 1945년까지 47년간 만주를 통치한 식민기구로, 1907년 한만합방으로 인해 만주 식민지를 통치하기 위한 기구로 1908년 2월 4일 설치되었다. 공관은 애신각라 왕가의 황궁 근방에 지어졌다.

군사 세력의 중심부라고도 할 수 있는 만주의 총독은 사실상 대한제국 내의 또다른 작은 정부의 수장으로, 총독에 대한 군의 신임도 필요했던데다가 3천만명에 달했던 만주인들을 통치했기 때문에 본토의 내각총리대신 다음가는 권력과 지위를 가졌다. 경우에 따라선 총독들이 총독직을 거치고 유력 정치인, 드물지만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되기도 하였으며, 예시로 3대 총독이었던 이동휘는 공을 인정받아 실제로 총리를 역임했다.

업무

주로 만주 식민지에 대한 업무, 즉 정부 업무를 수행했다. 이 외에도 적백내전 이후부터는 소련과 러시아 차르국과의 경계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으며, 경우에 따라선 군의 주둔지로서 사용되기도 했다.

만주 총독

만주 총독은 만주 식민지 정부인 만주총독부의 수장으로, 위세가 정점에 달했을때는 내지에 있지 않을 뿐이지 내각총리대신과 거의 비슷한 권력을 가지기도 했다.

역대 총독


역대 만주 총독
대수 개인정보 임기 설명
초대

이용익
李容翊
1908년 2월 4일~1914년 10월 12일
함경북도 출신이자 제 1대 총독. 이전에는 군부대신을 역임했으며, 이완용이 사망한 이후 잠시 임시 통감직을 맡은 경험에 따라 초대 총독직을 역임하였다. 대표적인 정책으로는 만주에서의 무단통치 실시가 있으며, 이후 6년간의 임기를 끝내고 본격적인 정계 진출을 위해 본토로 귀국했다.
제 2대

이병무
李秉武
1914년 1월 12일~1919년 3월 21일
충청남도 출신의 2대 총독으로, 사찰조사사업을 완료하였으나 3월 1일 만세운동을 탄압하면서 무자비한 통치로 인해 비판받았고, 결국 결정적으로 진압 과정에서의 뇌물 의혹이 번지면서 5년 만에 총독직을 사임했다.
제 3대

이동휘
李東輝
함경남도 출신의 총독. 역대 최장기 총독이자 최초의 평민 출신 총독으로 총 8년간 총독으로 재임했으며, 만주에서의 지배를 형식상의 교화 통치 정책을 추진하여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방향을 돌렸다.
제 4대

권중현
權重顯
충청북도 출신으로, 재임기간동안 관료들의 근무기강을 개선해 제대로 된 행정을 구현했고, 총독부 조직을 개편하고 농업진흥정책과 수력발전소 건설 등 공업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여 '만주의 가한'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임기 이후 노환으로 사망하여, 가장 오래 산 총독 출신 인물이 되었다.
제 5대

이윤용
李允用
전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의붓형이자 최초의 문관 총독. 총독이 되기 이전 교육과학대신직을 잠시 역임했으며, 금권비리로 대표되는 부패한 통치로 식민지 만주 내에서 악명을 떨치다가 총독 임기 도중 노환으로 인해 사망했다. 또한, 마지막으로 선출된 유교 파시즘 정당과 무관한 총독이기도 하다.
제 6대

지청천
池靑天
몽골 출병 당시 제 19사단의 사령관이자 초대 몽고주 도독으로, 김창암의 신임을 받아 얻은 명망으로 총독 자리를 역임했다. 재임 기간동안 지원병 제도 등을 시행하여 만주인들을 시베리아 전선, 중국 전선 등으로 차출 시켰고 서원참배, 창성개명 등의 정책과 전쟁을 위한 강제징용을 실시했다. 말기에는 악명 높은 학도병 모집을 진행하였고, 한성 내전 직후 김창암 정부가 붕괴하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 집무실에 있던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제 7대

윤치호
尹致昊
마지막 만주 총독. 명목상으로 적당한 문민정치인을 선정하려다 거물 외교관 출신인 그가 얻어걸린 게 컸던지라 본인도 임명에 냉소했고 임기도 짧았지만, 재임 시작부터 독립 당일까지의 임기 기간동안 만주가 독립 이후에도 기강을 제대로 펼치치 못하도록 연합군에게 제제당하지 않고 가능한 선에선 총력을 다해 방해, 특히 경제적으로 압박하는 정책을 펼쳤다. 종전 이후 총독부가 폐지됨에 따라, 종전문서에 서명한 뒤 총독직을 사임함으로서, 공식적으로 한국 역사상 최후의 총독이 되었다.

기타

당시 관계자였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넓은 토지때문에 농업 장려를 통한 수익이 엄청난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만주의 관외 지역은 한국의 역량상 한계로 인해 무법지대나 다름없었다고. 이후 해당 치안문제는 1920년대즈음부터 개선되었고, 30년대부터는 관외에서의 치안 문제가 확실하게 안정화되었다고 한다.


  1. 연해주 자치령에서 극동 공화국으로, 극동 공화국에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