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한치시기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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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대한국

일본국

대금민국

러시아 차르국

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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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민주주의인민공화제국

대한제국

대한 공화국

예케 몽골 울루스

대청제국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만주한치시기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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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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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산융
동호
고조선 예맥 숙신
산융
동호

요동군
고리국
흉노 부여
전한
요동군 · 현도군
~4세기초 고구려 부여 읍루
(부여)
오환
선비
후한
요동군 · 현도군
동연
서진 읍루
4~6세기 전연
전진
후연 물길
북연
북위 거란 실위 고구려 두막루 말갈
(고구려)
동위
북제
북주
7~9세기
말갈
발해 말갈
(발해)
10~12세기 동란국 발해부흥운동 여진
오국부
 
 
13세기 동요
후요
동하
몽골 제국

요양행성 · 동방 3왕가 · 심왕
14~16세기 북원 여진족
고려 요동 군벌 우량카이 삼위
여진족
17~18세기 후금
조선
요동도독부
삼위시대
후금 네르친스크 조약
19세기 대한제국 대청제국 러시아 제국
20세기  
식민지 만주
대한제국
대금민국 임시정부 연해주 공동통치령
대한제국·대일본제국
트란스아무르 공화국
전러시아 극동정부
연합국 점령하 대한 소비에트 민정청 러시아 차르국 소련
대한국 | 북간 7도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현재 대금민국

틀:몽골의 역사 (아침해의 원유관)


대한제국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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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지역 명칭 통치기관
만주 만주(满洲) 만주총독부
동몽골 몽고번(夢姑邦) 몽고도독부
프리모리예 숙신도호부(肃慎都護府) 숙신도호부
해당지역 명칭 기관
칭다오 청도 -
웨이하이 위해 -
* 숙신도호부는 1923년 나선통감부로 업무 이전
* 몽고번은 1942년 몽고목(蒙古牧)으로 편입
괴뢰국 · 군정청

틀:무신국치 (아침해의 원유관)


틀:한만관계 관련 문서 (아침해의 원유관)


만주[1]
滿洲 | Manju
대한제국의 식민지
국기[2] 휘장
내만일체
(內滿一體)[3]
1909년 10월 24일~1945년 6월 15일
(35년 8개월 22일)
성립 이전 해방 이후
대청제국 소비에트 민정청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4]
외지 정보
국가(國家)
대한제국
국가(國歌)
애국가(愛國歌)
국화
오얏꽃, 무궁화
치소
(治所)
경호특별도 심양부(京胡特別道 瀋陽府)
면적
약 821,145km²
언어
한국어(사실상 공용어)
만주어
문자
한글, 한자, 만주 문자
종교
유교(국체유학) (사실상 국교)[5][6], 유교(성리학), 만주 무교, 불교,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천교도, 도교, 원불교, 샤머니즘 등
군대
만주군
민족구성
만주인, 한국인, 중국인, 몽골인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7]
→대한식 입헌군주제 · 군정(1909~1933)
→군사독재 · 일심 체제(1934~1945)
국가 원수
대한제국 대황제[8]
통치 기관
만주총독부
통치 수반
만주총독
애신각라왕
청녕궁 애신각라왕 애신각라 부의
주요 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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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용익
제 3대 이동휘
제 6대 지청천
제 7대 윤치호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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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융희(1900~1929)
성덕(1930~1945)
행정구역
1 특별도 13도 18부 6주 군현읍
통화
대청제국 아이신(₳)→ 대한제국 원 (₩)
구 만주총독부 청사의 전경
만주의 최대도시 심양부 건명로의 사진

개요

만주한치시기(滿洲韓治時期), 또는 한국통치시대(韓國統治時代)는 대한제국대청제국을 상대로 정미늑약을 발효한 1909년 10월 24일부터 1945년 6월 15일까지 북만주 일대가 대한제국의 식민지로서 존속했던 기간을 의미한다.

1909년 대한제국에 의해 대청제국의 주권이 강탈당하자, 대한제국은 같은 해(융희 10년) 칙령 제308호 「대청국의 국호를 폐하고 만주로 그 이름을 바꿀것」을 공포하여, 공식적으로 자국 내로 편입한 북만주의 명칭을 '만주(滿洲)'로 바꾸었다. 또한 「융희 제령 3호」를 통해 '청국통감'을 '만주총독'으로, '청국'을 '만주'로, '대청법규'를 '구청국법규'로, '청국형법대전'을 '형법대전'으로 고침으로써, 기존의 국체인 대청국 혹은 금나라를 나타내던 명칭을 제거하였다. 이후 보호국에 시행되던 통감제는 해외 속령인 총독 제도로 개편됬고, 공식적으로 만주는 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 동안, 만주족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일부는 당시의 외국에 잘 알려진'만추'라는 명칭이 한국령 식민지 '만주(Manchuria)'로서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였기에 이를 버리고 대청제국의 '제국'을 공화국의 옛말인 '민국'으로 바꾸고, 중화적인 느낌을 제거하고 민족주의를 더 부각한 '대금민국', 또는 '금나라'라는 이름으로 해외에 널리 알리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중 한 사례인 대금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대표를 맡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은 편이었고,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과 일반인들은 여전히 청나라, 혹은 그 당시 사용 비율이 상당히 늘어났었던 만주라는 국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시대

한국 통치시기는 그 성향이 약 10년을 주기로 총 3번 바뀌는지라, 이 시기를 설명할 일이 있을 때는 일반적으로 3분법을 사용한다. 주로 10년을 주기로 끊어 1910년대~1920년대~1930년대 순으로 보는데, 그 증거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제1기(무단통치·헌병경찰대통치) 1910년~1919년
대개 정미늑약 발효 직후부터 1919년까지 보는데, 해외발 민족자결주의의 대두와 만주에 입국한 백계 러시아인들까지 자신들을 차별하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3.1 운동의 영향으로 인해 이동휘가 총독으로 지명되면서 통치의 방향성이 바뀐 것을 종료시점으로 본다. 경제적으로는 회사령, 천막조사사업등의 실시와 정주령등이 있다. 이 시기,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만주인, 중국인을 대상으로 태형을 실시하는 태형령이 공표되었고, 대한제국군 육군 소속 헌병들이 만주 내에서의 치안 업무에 투입되는 헌병경찰제도가 운영되는 동시에 교원(학교 교육자)들이 서양식 세이버를 차고 다녔다.

제2기(교화통치·씨족분열통치) 1920년~1931년
제1기의 종막 직후부터 세계 대공황이 본격적으로 발발한 1929년까지를 일반적으로 보며, 흔히들 '교화통치기'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경제적으론 농지개간 계획과 산미증식계획이 실시되었다. 헌병이 일반경찰로 바뀌었고 언론·출판의 자유가 반체제적이지 않은 이상 제한적으로 허용되었으며, 회사령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억압보다는 회유책을 쓰던 시기인지라 친한반민족행위자들이 이 시기에 대거 등장하기도 하였다.

제3기(제국신민화통치·민족말살통치) 1931년~1937년/1938년~1945년
몽골 출병이 일어난 1932년부터 제3기의 전기로 보며, 1937년에 발발한 제 2차 동아시아 전쟁의 영향으로 1938년부터 1945년까지를 제3기 후기로 본다. 경제정책으론 전기의 남면북양을 통한 공업 원료 증산, 후기는 국가총동원법이 발효된 병참기지화 정책이 있다.

역사

초기

1909년 9월 30일 한만병합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대청제국의 대표로 참석한 총리대신 돤치루이와 대한제국 측의 대표로 온 당시 시종무관부대신 이용익과 이지용 구 청국통감부 최고 고문이 협상에 임했다. 이는 각국의 황제와 가한이 마주보며 날인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대한제국 측에서 일개 대리인을 보냈는데 대청제국은 가한이 직접 대면하는 것이 의전상으로도 맞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이 과정에서 한만병합조약을 공표하여, 대청제국이 다스리던 모든 영토를 식민지로 강제로 편입한 뒤 옛 대청제국 황실은 지방왕족인 애신각라왕가(愛新覺羅王家)로 격하시켜 한국 황실에 아예 편입시켰다.

그리하여, 1909년 한만병합조약 체결 이후로 35년간의 식민지배가 시작되었고 1919년 삼일 운동이 발발하기까지 1910년대의 대한제국 정부는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이 시기는 헌병경찰대원들이 치안업무를 담당하였기에 헌병경찰통치기로도 불리며, 만주인의 집회 결사 언론 출판 등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았으며, 형벌 등을 통한 매우 폭압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 폭압적인 통치가 이루어진 것은 만주인의 단합과 저항을 강하게 묵살하기 위함도 있지만, 경제적인 측면도 강했다. 몇몇 연구에 따르면, 한국은 애초에 완전한 근대국가였던 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다르게, 근대화를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해서 대한제국 본토 이상의 영토 규모를 가진 대청제국을 식민통치할 만한 여력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다시 북상한 러시아의 반격에 대한 고려와, 한국 육군의 지속적인 대륙, 시베리아 진출 야욕과 내각 내 대청 강경론의 부상 등으로 급하게 식민지배를 시작하였다. 본래 이완용 내각총리대신은 좀더 점진적인 병합을 준비하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예정과 달리 이완용 총리가 중태에 빠지면서 그의 점진론 또한 힘을 잃어 급격론이 대두됬고, 합병 이후에는 결과적으로 경제적인 문제가 심한 편이었다. 이에 따라, 초대 총독 이용익은 최대한 만주가 본토의 원조를 받지 않는 자급자족의 자립적인 체제를 세우기에 이른다. 그러기 위해서 저렴한 비용과 약간의 노력으로 통치를 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으로 공포정치, 이른바 무단통치를 실시한 것이다. 이를테면 아예 식민지인의 기본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시위를 진압할 필요도 없고, 검열을 할 필요도 없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1910년대는 식민통치를 위한 철도 등의 인프라 건설과 치안유지를 병행하면서도 다른 시기와 다르게 적자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고, 그럭저럭 자체적인 운영이 가능했었다.

이 시기에 기존 ‘국어’의 지위가 바뀌는데, 만주어는 ‘여진어 및 한문’으로 바뀌어서 격하되었으며, 한국어는 ‘국어’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중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발언에서 유래한 민족자결주의가 만주 민중들 사이에 퍼지게 되었고, 망명으로 내려온 백계 러시아인들마저 자신들을 차별하며 러시아인 거주 구역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자, 이에 만주인들이 분노하면서 3.1 운동이 발생, 전국적인 시위가 계속되었다. 동시기 대한제국에서 융희 헌정시대가 개막하면서 유화책을 실시하자는 목소리도 커졌고, 결국 이 시기 무단통치는 그 끝을 고했다.

이후, 대한제국 내에서 비교적 온건파로 평가받는 이동휘 제 3대 만주총독이 새로 부임하면서, 이른 바 강압적인 지배가 아닌 교화 통치를 표방하기 시작한다. 3·1 운동을 계기로 비대한 만주 지역의 행정이 연달아 마비되자 만주총독부 측도 크게 놀라 완화조치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고, 민심을 추스리는 데 노력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동안 관례상 무관만이 임직했던[9] 만주총독에 문관(文官)도 오를 수 있음을 내걸고 치안을 헌병이 아닌 경찰이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한국 정부의 약속과 심하게 달랐는데, 교화 통치, 왕도 정치를 내세운 첫 해인 1920년만 해도 경찰서의 수는 1918년보다 3.8배, 경찰관의 수는 3.5배에 달했고 경찰 예산도 3배 이상 늘어난 상황이었다. 게다가 고등경찰제도를 신설해 더 악랄하게 만주인들의 사회를 감시하고 독립운동을 탄압하였으며, 경제적으로 회사령을 철폐하여 만주인의 사업에 대한 규제를 푸는 등의 유화책을 펼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대동상회, 주식회사 태극광공업이나 만철같은 한국 기업의 만주로의 진출을 쉽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회사 설립 조건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변경하였던 것이다. 언론 면에서는 교화통시 시기에 묵던일보(ᠮᡠᡴ᠋ᡩᡝ᠋ᠨ ᠢᠨᠡᠨᠬᠬᠢᠰᠡᠷᠺᠢᠨ), 전국일보(ᠠᠹᠠᠨᠳᠤᠷᠡᠬᠤᠷᠤᠨ ᠢᠨᠡᠨᠬᠬᠢᠰᠡᠷᠺᠢᠨ), 다라마신보(ᠳᠠᠷᠠᠮᠠ ᠢᠨᠡᠨᠬᠬᠢᠰᠡᠷᠺᠢᠨ) 등 만주인이 세운 언론사도 여럿 창간되었다.

교화통치의 본 목적은 회유정책을 바탕으로 만주인들의 사회,문화적 기반을 한국의 것으로 흡수하고 나아가서는 만주인을 완전히 동화시켜 한(韓)화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만주인들의 언론과 사회 운동이 허용되었지 실제로는 검열, 양속법 제도 등을 통해 언론과 사회활동을 변함없이 제한하고 탄압했으며, 만주인들의 사회 활동을 자신들의 완벽한 통제 아래 두려고 했었다. 또한 무단통치시기에는 예허나라 힝전이나 돤치루이 같은 지위와 권위에 의존한 친한반민족행위자들을 내세웠다면, 이 시기에는 '자치론'이라는 떡밥을 내걸어 그에 끌린 친한 지식인들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기도 했다. 심양제국대학 등 대대적으로 교육 시설을 정비하고 극히 제한된 인원에게만 중고등교육을 제공하면서, 광범위한 대중이 정규 교육 속에서 친한적인 요소를 터득하도록 환경적으로 유도했다.

이 시기는 3.1 운동의 직접적 영향으로 독립운동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펼쳐지던 시기였다. 만주 임정, 만주 공산주의자들 등 다양한 이들이 독립을 위해 분투했으며, 유명한 사건 중 하나로는 완화군 이선 대역 미수사건이 있다.

다만 이 시기에도 제국보안법을 개정하여 공산주의자 등의 사상운동가와 총독부에 반대하는 인물을 탄압하는 것은 여전했으며, 이 시기에 지방선거가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실상은 만주 내에 거주하는 한국인, 아니면 만주 황족 혹은 부유층들이나 투표할 수 있었기에 기득권층들로 채워졌고, "무관 출신이 아닌 문관 출신도 총독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공표하였으나, 실제로는 문관 출신이 총독 자리에 오른 사례는 2번을 제외하고 단 한번도 없었고, 그마저도 그 두명은 사리사욕을 위해 역대 통치 중 최악의 통치를 벌였다. 또한 각종 친한파 양성 정책 등을 통해, 실제로 이는 한국 입장에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라오서, 인닝 등의 민족개량과 자치를 내세우는 타협적 인사들을 지원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 및 가장 세력이 컸던 사회주의자들과 갈등을 빚게 하였고, 이런 갈등 속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결집하여 만주회의를 창립하였다.

한편으론 그동안 유목민임에도 불구하고 애매무리한 중앙집권제의 정착, 그리고 러시아와 전쟁을 했던 경험으로 인해 생긴 반외세 정서로 극도로 폐쇄적이었던 만주인의 세계 인식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만주인들은 역설적으로 이후 시대보다 사상적, 이동적으로 개방적이었다. 만주가 비록 식민지 체제에 속해 있었지만 세계와의 교류는 활발하였으며[10] 만주인들의 세계 여행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오히려 냉전 때의 사회주의 정부 시절의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이 전쟁 직후 개방정책 시행 이전까지는 더 폐쇄적이었던 편. 이 당시에 만주에 수입된 대표적인 사상이 사회주의이며, 반제국주의 사상으로서 만주의 해방에 매우 크게 기여하였다. MAPF와 같은 사회주의 문학 단체도 활동하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 감명을 받아 생겨난 수많은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은 만주공산당을 창당하였으나, 한국 관헌의 탄압과 내부 분파투쟁으로 와해와 재창당을 반복했다. 그러던 도중, 대숙청의 여파로 일부 러시아계 공산주의자들[11]이 망명하고 그 중 거물들을 중심으로 이들이 결집하였고, 이 상태로 은둔하며 지내면서 서서히 힘을 키웠다.

30년대인 성덕 시대에 들어 본토에서 일민국가 시스템이 대두되면서 만주에도 변화가 몇몇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 몇몇곳에 김창암 정권의 상징과도 같은 콘크리트제 거대 건축물들이 들어섰고 만주인들에게 이념적, 민족적 동조도 전보다 심하게 강요되었으며, 몽골 출병과 제 2차 동아시아 전쟁이 발발한 중기부터는 서서히 공출(주로 작물, 강철이나 양모 등등)도 시작됬다. 이 때부터 불만이 다시 커진 만주인들이 반제국주의 활동을 하면 극심하게 탄압하는 등, 전반적으로 말기 수준은 아니지만 그 이전보다 훨씬 암울했던 시기로 평가받고 있다.

후기

1940년대가 되자, 한국은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고 동시베리아 전선을 시작했다. 총력전의 특성상 한국군의 전력이 부족해지자 대한제국은 외지와 내지를 완전히 통합하는 강압적인 흡수통합정책, 이른바 민족말살정책을 강제로 수행하였다. 본래 한국의 통치목적은 동화정책의 수행을 통한 점진적인 영구병합이었으나, 1941년 동시베리아 전쟁의 발발로 흡수정책이 더욱 가속화되어 삼성, 시베리아 주식회사 등의 새로운 기업이 더 활발하게 진출함은 물론, 만주어를 사용하는 매체를 완전히 금지하고 창성개명을 시행한데다가 징병제까지 도입했다. 그 직전까지만 해도, 만주의 지식인층과 지배계층의 상당수가 친한으로 전향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어찌 보면 만주족은 꾸준히 점진적으로 번져왔던 영구병합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당면하게 되었다.

교화통치의 상징이었던 전국일보와 다라마신보는 1940년 물자 부족 및 만주어 매체 금지로 인해 강제 폐간되었으며, 만주 전역에서 경복궁이 있는 방향을 향해 절하는 황궐망례(皇闕望禮)가 강제되었다. 게다가 동시베리아 전쟁의 발발로, 한국의 물자[12]와 인력 공출, 이른바 병참 기지화 정책은 만주민중을 이전에 겪지 못한 유례없는 고통에 빠지게 하였다. 원래 계획에는 없었던 만주인에 대한 강제징용이나 징병 계획도 군부의 강력한 반대를 거스르고 실시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전쟁의 성과가 나빠지자, 한국은 전쟁물자 공급에 더욱 사력을 가하게 된다.

그리하여, 대한제국 정부와 충정일심회는 만주에서 공출제를 실시했다. 부설된 전차, 철도 선로를 도로 뜯어가고, 금속으로 된 밥그릇과 숟가락, 젓가락은 물론, 철제 악기를 비롯하여 낫이나 호미 또는 쟁기 같은 농기구, 심지어는 요강까지 빼앗아 갔으며, 공출에 저항하면 백의단, 혹은 경찰을 동원하여 구타했다. 그러나 소련군에 제해권과 제공권을 빼앗기는 바람에 실제 공출된 물자가 내지인 대한반도로 이송되지는 못하였고, 더 큰 문제는 물자를 거둬들인 후 다시 마구잡이로 분배하는 통에 시장과 유통체계가 완전히 마비되어 극심한 혼란상황이 빚어졌다.

이 시기는 독립운동사의 암흑기 그 자체로, 이미 1930년대를 경유하여 대한제국의 탄압이 더욱 심해진 상태였다.

그렇게 서서히 민중에서도 한국의 전쟁에서의 패배에 대한 소문이 돌던 중, 삼부 대공습을 기점으로 한국군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끝내 더 이상의 피해를 감내하지 못한 대한제국은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였고, 약 2달 후 일본 제국의 항복을 끝으로 추축국의 패망이 확실해지자, 본격적인 소련군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이반 치스차코프 장군 휘하의 소련군이 만주 북부에 진공하였으며 이들과 협력한 만주 독립군이 수도인 심양부에서 조우했고, 최후의 만주 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나서야 모든 것이 끝을 맺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36간 지속되었던 만주한치시기가 막을 내리고, 소련과의 추후 전쟁으로 피해를 입고 강대국들의 눈치를 봐야 했으나 만주족에 의한 자주적인 정부가 만주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베리아 전쟁 개전때부터 해방 직후까지 한국의 수뇌부들과 부자들은, 이 시기에도 자기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혼란 상태였던 만주에 위폐(가짜 화폐)를 뿌리며 인플레를 일으키는 등 만주의 경제를 막장으로 몰아넣었으며, 한국에서 상경한 일반적인 한국인들을 반쯤 방기하고, 소련군에게는 여러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등 떠날 때까지도 끝까지 민폐를 끼치고 떠났다.

이렇게 만주는 독립을 맞았으나 현재까지도 사회에 뜨문뜨문 남은 계엄문화 내지 군국주의 문화, 민족주의나 왜곡된 문화 등 만주한치시기의 체제의 잔재가 완전히 청산되지 않고 있으며, 문화적, 사회적 악영향과 공산주의를 피해 해외로 망명한 친한파 민족배반자의 완전한 색출은 해소되기까지 아직은 갈 길이 먼 상황이다.

여담이지만, 당시 대한제국은 황궁 이전을 포함해서, 제국의 수도를 심양(現 묵던) 근처로 옮기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대한 제국의 영토 및 영향권이였던 러시아 차르국, 만주, 대한제국과 몽골을 전체적으로 볼 때, 심양부 정도가 거리 관념으로 대략 중심이었기 때문. 천도 찬성파들은 제국의 수도를 심양부로 옮긴 다음 한성, 평양에서부터 시작되는 대규모 인구 이동을 계획했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정치적으로 중심지가 될 예정인 만주로 대거 이주시키고, 만주인들은 시베리아로 강제로 추방시켜 머릿수를 감소시키는 안이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도시 건설 계획을 위한 측량 작업까지 했지만, 이후 포츠담 선언을 수용한 뒤 항복하면서 모든 계획은 당연히 백지화되었다는 것. 다만 일각에서는 서경천도를 주장했던 박중양이 정치적 공세를 맞은 이유 중 하나가 천도 시도로 꼽힐 정도로 수도 이전에 보수적이였던 대한제국이, 과연 그래도 한반도 내 권역이기라도 한 평양을 넘어 아예 심양으로 천도할 구상을 했겠느냐는 회의론도 존재한다.

평가

동화주의

사회적 분위기

차별

악습 유입

우선, 가장 대표적으로 한국의 정채으로 인한 현대 대금민국 내의 군사주의 문화를 꼽을 수 있다. 당시 한국근대화를 겪으면서 그 여파로 군의 크기가 비대해지자 목줄이 상대적으로 느슨해진 상황이었는데, 옛 조선시대처럼 무관을 천시하기도 힘들어진 근대 국가에선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고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군의 눈을 만주와 북방으로 돌려 그곳에서의 무제한적인 영향력 확대를 보장, 사실상 만주를 정치적으로 제국군, 그중에서도 육군의 영지로 만들어 버린 뒤 의정부의 관할 하에만 있는 방식으로 정치적 권한을 위임했다. 이는 추후 해방 이후 소련과의 대리전쟁에서 얻은 국제적인 포위에 대한 두려움이 군사문화가 사회에서 청산되게 하지 못하게 되며 제거가 애매하게 되어버렸고, 때문에 공산당 1당독제 체제가 끝난 이후에도 대금민국 사회에 서열주의의 유리장벽과 군 내부 부조리가 번지게 만들었다.

게다가 초기 만주의 정치적 혼란에도 영향이 꽤 컸는데, 당시 만주인들의 국가 운영 참여 경험이 무려 반세기 가까이 차단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본격적인 근대 국가 운영 경험은 아예 제로였던 점이 엄청난 악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광복 당시 만주의 정치인이란 사람들은 하나같이 공산주의 운동가나 소련의 후원을 받거나 몽골, 시베리아 등지에서 활동하던 반군, 현장에서 뛰어다니던 파르티잔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이지 제대로 된 정치적 경험과 경륜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고, 계파 간 협상과 논의를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제도권 정치에 매우 미숙했으며, 여기에서 해방공간의 온갖 비극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소련에서 정식으로 정치학을 공부한 이들 중 지나치게 원론적인 이론에 매료된 이들은 사실상 소련과의 합방을 주장하자는 스탈린주의 노선으로 인해 '민족적 사회주의'를 강조하던 다른 정치인들과 갈등을 빚었던지라, 사실상 국부인 니오후루 우미예순이 주최한 하르빈 대합의가 없었다면 애써 확보한 소련 군정 외 남만주 지역도 언제 분열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작 한국은 대한제국 패망 이후로 연합군 군정 시절 민주주의가 도입되었고, 징병제 등 군사주의적인 문화와 만기찬람하던 황권에 대한 헌법 차원에서의 재약으로 제국 시절 정국을 파국으로 이끌고 간 요소들을 청산한 뒤 국공내전, 파르티잔 특수진압작전 직후 러시아로의 경제적 진출 등을 통한 특수로 경제가 발전해 호랑이가 금덩이를 물고 일어섰다는 말이 돌 정도로 생활수준이 아시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높아졌지만, 정작 이후 전쟁에 대해서 잊어버린 세대가 늘어나면서 현재 대한국의 국민들이 대한제국의 지배가 만주에 어떤 악영향을 끼쳤는지 모르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도리어 일시적인 만주의 분단과 내분, 사회적 군사주의로 인한 악습을 부족사회의 열등함, 자연환경으로 인한 지배층의 무능 등 식민사관의 논리로 오해하며, 조선시대부터 만주에 대해 가지던 오랑캐 인식이 대한제국 시기와 현대를 거쳐 악화되어 민족성 자체가 미개하기에 생겨나는 문제로 여기고 일반화하여 비하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대한제국의 군국주의나 일민주의, 황권에게 무력할 정도로 스러지는 정권 등 극단적인 체제들을 경험한 한국 노년층이나 중장년층 일부는 이해하거나 동감하는 경우도 있다.

구 만주 귀족들의 특권 유지와 권위주의적 풍조

문화와 경제

한국에 끼친 영향

역대 만주 총독

역대 애신각라왕

애신각라왕(덕종 → 목종)은 황제가 하사한 작위일 뿐, 만주 내에서의 통치권은 전무했다. 만주한치시기 동안 지속된 애신각라왕의 존재는 나라를 판 장본인은 황가라는 논란을 야기시켰고, 독립계열 인사들 중 청 황실을 복권시키려던 근왕파를 소멸시키고 사회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그리고 실제로, 애신각라 왕가에서는 재풍이나 푸제 등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순순히 대한제국에 순응했으며 적극적인 친한파도 제법 나왔다. 이것은 대청제국 황실 복원론에 대해 사람들이 시큰둥해 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심양궁 애신각라왕

  • 1대 아이신기오로 자이톈(덕종 광서제): 1871년 8월 15일 ~ 1911년 1월 24일
  • 2대 아이신기오로 푸이(목종 선통제): 1906년 2월 7일 ~ 1969년 10월 18일

기타


  1. 대청제국 병합 직후 칙령(勅令) 제 308호'청국의 국호를 낮추어 만주로 개칭하는 건'이 발령되면서 이름이 '만주'로 개칭되었다. 이후 만주는 대한제국의 행정구역(외지)으로서의 이름으로 간주되었다.
  2. 만주총독부를 상징하는 깃발은 몽고번이나 연해주 철도수비대 및 숙신도호부와 달리 딱히 별개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당시 대한제국의 국기였던 태극기를 그대로 사용했다. 깃발은 아니지만 만주총독부의 공식 문장과 이를 응용한 봉함지에 쓰이는 문양도 있었다. 자세한 정보는 만주총독부 문서 참조.
  3. 내지(한국)와 만주는 하나의 몸이라는 뜻의 표어로, 민족말살 통치기 당시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4. 엄밀히 말하면 만주 전략공세를 통해 만주에 입성한 소련군의 민정보조기관이 첫 입성지인 북부에서 더 오래 잔존하며 생긴 현상으로, 애초에 남부의 만사공정부도 성향상 친소련적이였던 관계로 계획상 민정청이 종료되는 대로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측에 북만주 지방은 반환될 예정이였다. 그러나 청년혁명파로 알려진 임정 내 인사들은 이 현상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수립, 내전을 거쳐서라도 만주를 모두 집어삼켜 연속혁명을 이루고자 하였고, 결국 이 갈등이 고조되던 중에 터진 사건이 1954년의 만주전쟁이다.
  5. 불교, 만주 무교, 도교, 동방정교 등의 종교는 종교는 직간접적으로 탄압과 차별이 가해졌다.
  6. 흠정대한국 국헌은 겉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지만 외지(식민지)에는 사실상의 군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관계로 국헌이 적용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국헌이 적용된 내지에서조차 대황제의 권위를 신과 같을 수준으로 올려치는 귀정유학으로 인해 종교의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없었다.
  7. 본국과 달리 만주는 파견된 종친계 인사들과 총독이 입법, 사법, 행정의 전권을 행사했다. 인원 중 종친이 포함되어 있기도 했고, 총독을 임명하는 권한이 대황제에게 있다보니 국회의 통제도 미미했다.
  8. 본국의 왕작인 대황제 외에도 만주의 왕작인 가한을 겸직했다.
  9. 만주총독은 당시 공을 크게 세운것이 대한제국군이었던지라, 500년간 이어진 한국 내 문민통치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의 배려로 군에서 주로 인사가 배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소련과 접경해 있다는 특징과 맞물려, 만주지역은 한국 내에서 가장 엄격한, 어떤 면에서는 본토인 대한반도를 능가하는 군국주의의 온상이기도 했다.
  10. 해외여행을 따지지 않더라도 미국 자본, 일본 자본이나 소련발 사상등이 많이 연류되어서 여러 정보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11. 개중 스탈린주의자들의 비율이 은근 적은 편이었는데, 이유는 다들 스탈린 주의가 노선이 아니었거나 그로 인해 피해를 볼 뻔 하면서 노선을 변경한 케이스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스탈린주의자도 없던 것은 아니다.
  12. 특히 철강과 석유의 소비량이 상상 이상이었는데, 대규모 생산지인 만주와 동맹국 일본의 남양 석유를 수입하기도 했음에도 여전히 독소전쟁에서 승기를 잡아 제 힘을 발휘하는 소련을 막기에는 부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