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소조정 (민국 38):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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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4" style="font-size: 10pt; background:#fecd21; color:#00386a;" | '''<big>황룡기</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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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mw-customtoggle-11" style="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 padding:6px -1px 11px; padding-left:7px; width:100%; text-align:center; background-color: transparent; color:#000;"><div style="margin: -3px 0px">'''[ 펼치기 · 접기 ]'''</div></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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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청나라의 국기 (민국 38)}} {{본문|중화민국의 국기 (민국 38)}}  
{{본문|청나라의 국기 (민국 38)}} {{본문|중화민국의 국기 (민국 38)}}  
청나라 소조정은 구 청나라의 연속을 주장하는 만큼 국가의 주요 상징 대부분을 청나라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국기또한 그중 하나이다. 구 청나라의 국기인 황룡기가 그대로 국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황제의 경우 삼각형의 황룡기가 쓰이고 있다. 민족자치법 통과 이전에는 만주족의 상징기 역할을 하기도 했다.<ref>현재 만주족의 깃발은 난화기로 선통제가 선호했던 꽃인 보춘화에 수수꽃을 더해 만든 깃발이기 때문에 소조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ref>
청나라 소조정은 구 청나라의 연속을 주장하는 만큼 국가의 주요 상징 대부분을 청나라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국기또한 그중 하나이다. 구 청나라의 국기인 황룡기가 그대로 국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황제의 경우 삼각형의 황룡기가 쓰이고 있다. 민족자치법 통과 이전에는 만주족의 상징기 역할을 하기도 했다.<ref>현재 만주족의 깃발은 난화기로 선통제가 선호했던 꽃인 보춘화에 수수꽃을 더해 만든 깃발이기 때문에 소조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ref>
=== 국장 ===
=== 국장·국새 ===
{| class="wikitable" style="width:400px; font-size:10pt; 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text-align: center; border:2px solid #00386a;"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 center; 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max-width:450px; border:2px solid #0038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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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background:#fecd21; color:#00386a;" "text-align: center;" | [[파일:청나라 용.png|50px]]<br>{{big|청실문장<br>清室紋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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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 [[파일:대청제국 국새.png|225px]]
! colspan="2" style="background:#fff; color:#fff;" "text-align:right;" | [[파일: 청황실 소조정의 국장.png|4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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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dth=30% style="background:#fecd21; color:#00386a;" "text-align:right;" | 지위
| colspan="4" style="font-size: 10pt; background:#fecd21; color:#00386a;" | '''<big>국장            국새</big>'''
| align="left" | 공식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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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fecd21; color:#00386a;" "text-align:right;" | 채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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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ign="left" | [[1947년]] [[7월 10일]]
 
원래 구 청나라는 대부분의 전근대 동양권 국가들이 그랬듯이 별도의 국장이 없었으며 황제의 직인인 국새가 국장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청 말기에 만들어진 국장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출토되기도 하였으나[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Ott%C5%AFv_slovn%C3%ADk_nau%C4%8Dn%C3%BD_-_obr%C3%A1zek_%C4%8D._0983.jpg] 실질적으로 사용되었는지는 불명이다. 위 표에서 소조정의 국장이라고 기재하고 있는 사진은 청나라 황실의 문장으로 1960년경 타국 왕실과 교류 할 때 사용하기 위한 문장의 필요성을 느낀 선통제(공종·아이신기오로 푸이)과 장제스 정부가 서양의 여러 문장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국새의 경우는 이전 청나라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국새로 평시에는 국립고궁박물원 지하보관소에 보관하고 있다가 선위나 기타 필요시마다 꺼내서 쓴다.
=== 국가 ===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 center; 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max-width:450px; border:2px solid #0038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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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fecd21; color:#00386a;" "text-align:right;" | 근거 법령
! colspan="4" | <div style="margin: -5.0px -9.0px>{{youtube|stf_9Gbqeck}}</div><div style="margin: -11.7px 0px"></div>
| align="left" | <제국상징에 대한 칙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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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fecd21; color:#00386a;" "text-align:right;" | 사용처
| colspan="4" style="font-size: 10pt; background:#fecd21; color:#00386a;" | '''<big>공금구</big>'''
| align="left" |  
*공식 문서<ref name="병용">옥새와 병용</ref>
*칙서<ref name="병용">옥새와 병용</ref>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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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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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청나라의 국장 (민국 38)}} {{본문|중화민국의 국장 (민국 38)}}
<div class="mw-customtoggle-11" style="margin-left:auto; margin-right:auto; padding:6px -1px 11px; padding-left:7px; width:100%; text-align:center; background-color: transparent; color:#000;"><div style="margin: -3px 0px">'''[ 가사 ]'''</div></div>
청황실 소조정의 국장은 1947년에 제정되었으며 [[아이신 교로 하라 (민국 38)|아이신 교로 하라]]의 문장이기도 하다.
<div class="mw-collapsible mw-collapsed" id="mw-customcollapsible-11" style="background:none; border: 1px solid transparent;width:100%; text-align:center;">
=== 국가 ===
<div class="toccolours mw-collapsible-content" style="background:none; margin: 0px -15px 0px; border: 1px solid transparent;text-align:center; ">
{|  class="wikitable" style="width:400px; font-size:10pt; 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text-align: center; border:2px solid #0038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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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background:#fecd21; color:#00386a;" "text-align: center;" | [[파일:청나라 용.png|50px]]<br>{{big|공금구<br>鞏金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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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background:#fff; color:#fff;" "text-align:right;" | {{youtube|stf_9Gbq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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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dth=30% style="background:#fecd21; color:#00386a;" "text-align:right;" | 지위
| align="left" | 공식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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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fecd21; color:#00386a;" "text-align:right;" | 채택일
| colspan="2" | '''鞏金甌,<br>承天幬,<br>民物欣鳧藻,<br>喜同胞,<br>清時幸遭。<br>眞熈皞,<br>帝國蒼穹保。<br>天高高,<br>海滔滔。'''
| align="left" | [[1911년]] [[10월 4일]]
| colspan="2" | '''공고한 황금의 구여<br>하늘이 내린 휘장이여<br>민물은 부조 즐거워하며<br>동포가 기뻐함은<br>청조의 행복에 따름이라.<br>참된 희호에<br>제국의 창궁을 지키리.<br>하늘은 높고 높으니,<br>바다는 여울에 여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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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청나라의 국가 (민국 38)}} {{본문|중화민국의 국가 (민국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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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황실 소조정의 국가는 공금구로 1911년에 제정되었다.
 
청나라 소조정의 국가인 공금구는 구 청나라 시절부터 이어져온 국가로써 중요행사때 간간히 재창된다.
==역사==
==역사==
신해혁명으로 1912년, 선통제가 퇴위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자 위안스카이의 북양정부는 청황실 측과 청실우대조건을 체결하여 선통제를 자금성에 그대로 남아 살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이 청황실 소조정의 시작이였다. 1917년에는 복벽파들이 일시적으로 선통제를 복위시킨 사건인 장훈복벽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북경정변 이후 소조정에 우호적이였던 차오쿤 정권이 붕괴되고 새로 들어선 직예군벌 정권은 소조정을 해산시켰고 선통제는 톈진의 일본 조계로 도피하였다. 이후 1931년 북벌을 마친 장제스가 푸이에게 톈진에 계속 머무른다면 청실우대조건을 복구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선통제는 이를 받아들여 1931년 12월 12일 소조정이 복원되기에 이른다.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소조정을 충칭으로 옮겼으며 전후 다시 베이핑으로 돌아왔다. 1951년에는 안전과 편의상의 이유 및 문화유산 보호를 이유로 신축된 청시궁으로 옮겼으며<ref>물론 형식상으로 소조정은 아직 자금성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ref>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본래 청나라는 중국대륙 뿐만이 아니라 몽골, 투바, 대만등 동아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대제국이었다. 그러나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의 수명이 다하자 청나라 황실은 둘 중 하나의 운명을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분노한 민중들과 한족 혁명군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초라하게 역사의 뒷편으로 퇴장하는 방식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북양의 공화정부가 재의한 청실우대조건을 받아들여 그 명맥이나마 유지해나가는 방식이었다. 청나라 황실은 후자를 택했고 1912년 2월 12일 효정경황후가 퇴위조서를 반포하며 대륙의 주인으로서의 청나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자금성 내조의 주인으로서 새롭게 시작하게 된 청나라 소조정은 초반에 대략 12년 동안 유지되었다. 대륙에 대한 통치권을 포기한 대신에 청나라 황실의 위신과 재산은 유지되었으며 자금성 내부의 구 청나라 정부기관과 연호 및 관보등은 정상적으로 운용되었다. 그러나 1917년 장훈복벽의 실패로 소조정의 입지는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1924년 친 청실(親清室)성향의 차오쿤 정권이 붕괴되고 공화파 펑위샹 정권이 들어서면서 소조정은 해체되고 황실일원들은 재산을 헌납한 채 순왕부로 그 거처를 옯겨야 했다.
 
이후 1928년 제2차 북벌로 베이양(현 베이핑)을 점령한 장제스는 일본에서 선통제를 이용해 동북에 괴뢰정권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자 1931년 선통제에게 소조정의 복구를 정식으로 제안했다. 당시 선통제는 청황실의 명예를 다시 일으켜 세울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기쁜마음으로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후 1931년 12월 12일에 핍궁사건 직후 수정되었던 청실우대조건을 원상복구 시키면서 청황실은 다시한번 자금성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소조정의 복귀이후 선통제는 이전의 사치스럽던 한량의 삶에서 나름 검소하고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갔으며 베이핑 시민들 앞에 나서는 등 황제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선양을 공격하는 와중 선양고궁의 일부가 포격으로 인해 파괴되는 일이 일어나자 선통제는 일본을 맹렬히 비난하며 일본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했고 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선통제는 결사항전을 외치며 황실의 재산을 군비에 지원했으며 일본이 베이핑을 점령할 때에도 결사항전을 외쳤으나 중국 정부의 설득으로 선통제는 충칭으로 건너가고 그의 동생인 푸제가 항전을 지휘했다. 일본정부는 일본에서 사관학교를 나오고 일본인 사가 히로와 결혼한 푸제(훗날 선풍제)를 설득하여 만주국의 수장으로 앉히려고 하였으나 푸제와 사가 히로 모두 거부하여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후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이 끝나고 안정이 찾아오자 소조정은 베이핑으로 복귀하였으며 1996년에는 자금성의 노후화와 문화재 보존을 이유로 거처를 현대적 건물인 청시궁으로 옮겼다. 격변의 중국 현대사의 파도속에서도 소조정은 유지되었으며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고 공산당이 집권하자 소조정 폐지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였으나 저우언라이 총통의 적극적인 보호로 유지될 수 있었으며 현대 중국에서는 국가의 큰어른이자 중국 근현대사의 산 증인으로서 황실은 존중받고 있다.  
==위상==
==위상==
간덴포드랑과는 다르게 만주족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신임 및 존경을 얻지는 못하고 있으나 그래도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
간덴포드랑과는 다르게 만주족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신임 및 존경을 얻지는 못하고 있으나 그래도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
==여담==
==여담==
중국의 일부 극렬 급진주의자들은 소조정을 즉각 폐지하자고 주장하는데 대표적으로는 원외 극좌정당인 중국 공산당 (2018년), 급진좌파당과 극우정당인 중화민족사회당, 중화민족통일당 등이 존재한다.
중국의 일부 극렬 급진주의자들은 소조정을 즉각 폐지하자고 주장하는데 대표적으로는 원외 극좌정당인 중국 공산당 (2018년), 급진좌파당과 극우정당인 중화민족사회당, 중화민족통일당 등이 존재한다.  


명목상으로 중국 전역을 통제하는 대청의 황제이다 보니 이들을 중심으로 한 복벽운동이 일부 존재하며 2001년에는 실제로 청황실 복벽을 주장하는 종사복벽당(宗社復辟黨)이 창당되었으나 소조정과 황실은 물론 여론의 관심조자 받지 못한 채 2014년에 해산되었다.
명목상으로 중국 전역을 통제하는 대청의 황제이다 보니 이들을 중심으로 한 복벽운동이 일부 존재하며 2001년에는 실제로 청황실 복벽을 주장하는 종사복벽당(宗社復辟黨)이 창당되었으나 소조정과 황실은 물론 여론의 관심조자 받지 못한 채 2014년에 해산되었다.

2022년 6월 15일 (수) 23:37 판

[ 국가 목록 ]
[ 세계관 소개 ]
[ 문서 목록 ]


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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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민국 38) 중화민국의 비주권 군주국
청나라 소조정(대청국)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 遜清皇室小朝廷(大清國)
국장
국기 국새
揚我黃龍帝國徽
우리 제국의 상징 황룡기를 휘날려라
상징
국가 공금구
국화 보춘화
역사
지리
수도 자금성[1]
면적 7.8km2
접경국 중화민국 (민국 38) 중화민국
인문환경
인구 총인구 213명(2022년)
인구 밀도 0.03명/km2[2]
출산율 0명(2021년)
언어 공용어 만주어(명목상), 중국어
공용문자 만주 문자(명목상), 한자
국교 티베트 불교
군대 금위군[3]
정치
정치체제 절대군주제, 비주권 군주제, 중국의 소조정
황제
(국가원수)
광희제
정부
요인
내각의정대신 아이신기오로 헝전
금위군 단장 류더진
연성공 쿵추이창[4]
경제
공식 화폐 중국 위안(CNY)[5]
국고 약 $1,520만[6]
단위
법정 연호 광희(光熙)
시간대 UTC+8
도량형 SI 단위
위치

개요

1.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존호는 계속 유지되며, 폐지되지 아니한다.」 중화민국은 대청 황제를 '외국 군주를 대하는 예'로 우대한다.
一 大清皇帝辭位之後,“尊號仍存不廢”。中華民國以“待各外國君主之禮”相待
황실 우대 조건 제1조

동아시아에 위치한 도시국가이자 중국 베이핑시에 둘러싸인 내륙국. 명목상 청나라 황제이자 아이신기오로 가문의 수장인 황제를 국가원수로 한다.

워낙 작고 특수성이 강한 국가이다 보니 정치 체제 역시 독특한데, 중국에 존재하는 유이한 비주권 군주국이다.[7]

국가 상징

국명

공식적인 국호는 신해혁명 이전과 마찬가지로 대청국이며 이는 1616년 청나라가 건국될 때 부터 유지되어오던 명칭이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고 현재의 비주권 군주국인 소조정 형태로 개편된 이후로는 혁명이전의 청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청나라 소조정(혹은 청황실 소조정)과 같은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이외에도 베이핑 조정, 자금성 조정등의 이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국기

황룡기
지위 청나라의 국기
비율 2:3

청나라 소조정은 구 청나라의 연속을 주장하는 만큼 국가의 주요 상징 대부분을 청나라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국기또한 그중 하나이다. 구 청나라의 국기인 황룡기가 그대로 국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황제의 경우 삼각형의 황룡기가 쓰이고 있다. 민족자치법 통과 이전에는 만주족의 상징기 역할을 하기도 했다.[8]

국장·국새

국장            국새

원래 구 청나라는 대부분의 전근대 동양권 국가들이 그랬듯이 별도의 국장이 없었으며 황제의 직인인 국새가 국장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청 말기에 만들어진 국장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출토되기도 하였으나[1] 실질적으로 사용되었는지는 불명이다. 위 표에서 소조정의 국장이라고 기재하고 있는 사진은 청나라 황실의 문장으로 1960년경 타국 왕실과 교류 할 때 사용하기 위한 문장의 필요성을 느낀 선통제(공종·아이신기오로 푸이)과 장제스 정부가 서양의 여러 문장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국새의 경우는 이전 청나라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국새로 평시에는 국립고궁박물원 지하보관소에 보관하고 있다가 선위나 기타 필요시마다 꺼내서 쓴다.

국가


공금구
[ 가사 ]
鞏金甌,
承天幬,
民物欣鳧藻,
喜同胞,
清時幸遭。
眞熈皞,
帝國蒼穹保。
天高高,
海滔滔。
공고한 황금의 구여
하늘이 내린 휘장이여
민물은 부조 즐거워하며
동포가 기뻐함은
청조의 행복에 따름이라.
참된 희호에
제국의 창궁을 지키리.
하늘은 높고 높으니,
바다는 여울에 여울진다.

청나라 소조정의 국가인 공금구는 구 청나라 시절부터 이어져온 국가로써 중요행사때 간간히 재창된다.

역사

본래 청나라는 중국대륙 뿐만이 아니라 몽골, 투바, 대만등 동아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대제국이었다. 그러나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의 수명이 다하자 청나라 황실은 둘 중 하나의 운명을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분노한 민중들과 한족 혁명군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초라하게 역사의 뒷편으로 퇴장하는 방식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북양의 공화정부가 재의한 청실우대조건을 받아들여 그 명맥이나마 유지해나가는 방식이었다. 청나라 황실은 후자를 택했고 1912년 2월 12일 효정경황후가 퇴위조서를 반포하며 대륙의 주인으로서의 청나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자금성 내조의 주인으로서 새롭게 시작하게 된 청나라 소조정은 초반에 대략 12년 동안 유지되었다. 대륙에 대한 통치권을 포기한 대신에 청나라 황실의 위신과 재산은 유지되었으며 자금성 내부의 구 청나라 정부기관과 연호 및 관보등은 정상적으로 운용되었다. 그러나 1917년 장훈복벽의 실패로 소조정의 입지는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1924년 친 청실(親清室)성향의 차오쿤 정권이 붕괴되고 공화파 펑위샹 정권이 들어서면서 소조정은 해체되고 황실일원들은 재산을 헌납한 채 순왕부로 그 거처를 옯겨야 했다.

이후 1928년 제2차 북벌로 베이양(현 베이핑)을 점령한 장제스는 일본에서 선통제를 이용해 동북에 괴뢰정권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자 1931년 선통제에게 소조정의 복구를 정식으로 제안했다. 당시 선통제는 청황실의 명예를 다시 일으켜 세울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기쁜마음으로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후 1931년 12월 12일에 핍궁사건 직후 수정되었던 청실우대조건을 원상복구 시키면서 청황실은 다시한번 자금성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소조정의 복귀이후 선통제는 이전의 사치스럽던 한량의 삶에서 나름 검소하고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갔으며 베이핑 시민들 앞에 나서는 등 황제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선양을 공격하는 와중 선양고궁의 일부가 포격으로 인해 파괴되는 일이 일어나자 선통제는 일본을 맹렬히 비난하며 일본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했고 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선통제는 결사항전을 외치며 황실의 재산을 군비에 지원했으며 일본이 베이핑을 점령할 때에도 결사항전을 외쳤으나 중국 정부의 설득으로 선통제는 충칭으로 건너가고 그의 동생인 푸제가 항전을 지휘했다. 일본정부는 일본에서 사관학교를 나오고 일본인 사가 히로와 결혼한 푸제(훗날 선풍제)를 설득하여 만주국의 수장으로 앉히려고 하였으나 푸제와 사가 히로 모두 거부하여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후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이 끝나고 안정이 찾아오자 소조정은 베이핑으로 복귀하였으며 1996년에는 자금성의 노후화와 문화재 보존을 이유로 거처를 현대적 건물인 청시궁으로 옮겼다. 격변의 중국 현대사의 파도속에서도 소조정은 유지되었으며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고 공산당이 집권하자 소조정 폐지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였으나 저우언라이 총통의 적극적인 보호로 유지될 수 있었으며 현대 중국에서는 국가의 큰어른이자 중국 근현대사의 산 증인으로서 황실은 존중받고 있다.

위상

간덴포드랑과는 다르게 만주족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신임 및 존경을 얻지는 못하고 있으나 그래도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

여담

중국의 일부 극렬 급진주의자들은 소조정을 즉각 폐지하자고 주장하는데 대표적으로는 원외 극좌정당인 중국 공산당 (2018년), 급진좌파당과 극우정당인 중화민족사회당, 중화민족통일당 등이 존재한다.

명목상으로 중국 전역을 통제하는 대청의 황제이다 보니 이들을 중심으로 한 복벽운동이 일부 존재하며 2001년에는 실제로 청황실 복벽을 주장하는 종사복벽당(宗社復辟黨)이 창당되었으나 소조정과 황실은 물론 여론의 관심조자 받지 못한 채 2014년에 해산되었다.

중국의 원외 군소 극우정당인 중화제국당의 당수 마오칭위안은 스스로를 '대중화제국의 천자'라고 지칭하고 청황실 소조정은 만주 오랑캐 사이비 왕조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소조정 측은 "그런 정신나간 무리들에 대한 관심은 일체 없으며 조정과 황실에 대한 모욕에 대해 법적 대응 할 것."이라는 성명을 이례적으로 발표했다. 이후 어떻게 됬는지는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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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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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 (大清)
초대 제2대 제3대
태조 천명제 태종 숭덕제 세조 순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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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제8대 제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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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제11대 제12대
목종 동치제 덕종 광서제 공종 선통제
청황실 소조정 (遜清皇室小朝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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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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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황실 일원들의 실제 생활은 청시궁에서 이루어지나 주요행사는 자금성에서 이루어진다.
  2. 자금성에서 공동경비를 서는 금위군 인원과 자금성 면적을 포함한 결과로 실재로는 이보다 인구밀도가 크다.
  3. 100여명의 규모로 사실상 경호조직이다.
  4. 중화민국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 및 총통 국책고문 겸임
  5. 자금성이나 청시궁을 방문하면 기념품 용도로 '청나라 위안'이라는 화폐를 주기는 한다... 교환비는 중국 위안과 1대1
  6. 청나라 황실이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 주식등의 총합이다.
  7. 다른 하나는 간덴포드랑
  8. 현재 만주족의 깃발은 난화기로 선통제가 선호했던 꽃인 보춘화에 수수꽃을 더해 만든 깃발이기 때문에 소조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