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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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페로스벨트  ·  바네버베센  ·  투디아  ·  낸팬  ·  신디아  ·  헤르니소스  ·  바필리아  ·  펜데아시아  ·  디흐트에이븐
국가
키르수스 제국 게파르토 제국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베른하이어 베른하이어 공국  ·  에르미니아 에르미니아 합중국  ·  마그니우스 마그니우스 제국  ·  프리슬란드 프리슬란드 자유국  ·  그란치프 그란치프 국민국  ·  코르보날 코르보날 연합국  ·  크래스터프 크레스터프 왕국
사련 구성국과
혁명수도
헤스페로스벨트  ·  바네버베센
투디아  ·  낸팬  ·  신디아
헤르니소스  ·  바필리아  ·  펜데아시아  ·  디흐트에이븐
연표


-546
1423
고전고대
고대 후기
중세 초기
중세 성기
중세 말기


1423
1664
근대
현대


보편전기
연표
-546
1483
1664
고전 고대
고대 후기
중세 초기
중세 성기
중세 말기
근대
현대














보편전기
무기
권총  ·  기관단총 소총  ·  기관총 차량

게파르토 ㅔㄱㅣㅋㅔㅈㅔㅅ·ㅍㅜㅅㅡㅋㅏ 49M

게파르토 Moosmeier 32M pistol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26식 수포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엘빙거 권총



게파르토 ㅍㅜㅅㅡㅋㅏ1651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41형 표준 영도진 보병소총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이리야-야조프 45식 보병용 소총

그란치프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르브 소총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무흐타레프 장비

키르수스 Maschinen Gewehr 57

게파르토 ㅗㅌㅗㅁㅏㅌㅏ·ㅍㅜㅅㅠㅋㅏ

키르수스 Panzerabwehrkanonen 1656

게파르토 49M 6.3qb bombarde

게파르토 51M 6.3qb Bergbombarde

게파르토 52M 6.3qb bombarde

게파르토 50/54M 33qb Bergbombarde

키르수스 1656년식 야전차량 경형

키르수스 1654년식 전선장갑차량

게파르토 53M 3톤 중형트럭 어비거일



잠수함 함선 전투기 폭격기
키르수스 퇴브리크크루비엔 Ddkf.V

그란치프게파르토 가르당 17

게파르토 53M 반도르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피어스마린 F.3 키드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피어스마린 F.5 돌핀

키르수스 그니베겐 GFz.III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하디 베넷 타입P

아인종
카노쿠겔
Kanokugel
드베르그
Dweorg
리겔
Ligel
테살리데스
Teßalides
죄뢰이
Jöröi
라퓰러이
Lafülöi
오르바나 학회  ·  케네우스 의사회  ·  마법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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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파르토 ㅔㄱㅣㅋㅔㅈㅔㅅ·ㅍㅜㅅㅡㅋㅏ 49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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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파르토 ㅍㅜㅅㅡㅋㅏ1651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41형 표준 영도진 보병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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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파르토 ㅗㅌㅗㅁㅏㅌㅏ·ㅍㅜㅅㅠㅋㅏ

차량
키르수스 Panzerabwehrkanonen 1656

게파르토 49M 6.3qb bombarde

게파르토 51M 6.3qb Bergbombarde

게파르토 52M 6.3qb bombarde

게파르토 50/54M 33qb Bergbombarde

키르수스 1656년식 야전차량 경형

키르수스 1654년식 전선장갑차량

게파르토 53M 3톤 중형트럭 어비거일



잠수함 함선
전투기 폭격기
키르수스 퇴브리크크루비엔 Ddkf.V

그란치프게파르토 가르당 17

게파르토 53M 반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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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  ·  도서  ·  만화  ·  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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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베른하이어의 총리

카를 판 하이네스 무어
Karl Van Heiness Moore
.
베른하이어 제국총독
"라그렌센트어"
Foligerreichsstatthalter Wernheir
.
임기 1655년 1월 1일 ~ 현재
.
제4·5·6대 베른하이어 상원의원
"라그렌센트어"
.
임기 1648년 10월 22일~현재
이름 카를 판 하이네스 무어
Karl Van Heiness Moore
국적 베른하이어 베른하이어
출생일 1616년 2월 21일
출생지 아른하임 주 아인델 시
가문 무어가, 판 하이네스 가 (외가)
부친 제임스 무어
James Moore
모친 알다 판 하이네스
Alda Van Heiness
배우자 아이비 스펜서 무어
Ivy Spencer Moore
자녀 아델하이드 판 하이네스 무어
Adelheid Van Heiness Moore
학력 외텔슈비어 고등대학 졸업
경제학 박사
신체 신장 188cm
몸무게 78kg
정치
정당 시민당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4, 5, 6
현직 베른하이어 공국 제5·6대 총리
베른하이어 제국총독
카를무어은행그룹 총수
약력 이델스테르트(Eldelstert)

전 알레머스 대학 연구교수
전 레스터체이스 칼리지 교수
전 외텔슈비어 고등대학 교수

카를 판 하이네스 무어(라그렌센트어: Karl Van Heiness Moore, 1618년 2월 21일 ~ )는 베른하이어의 정치인, 경제학자, 기업가로서 5·6대 총리이자 이델스테르트이면서, 카를무어은행그룹의 회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키르수스의 최우방국인 동시에 세계경제를 좌우하는 베른하이어의 총리이자 세계 최대의 기업 중 하나인 카를무어은행그룹의 총수이다. 학계에서도 계산경제학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자 현대경제학의 시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이렇듯 정계, 재계, 학계에서 3관왕을 달성하고 정치적 성과도 흠잡을 데가 없어 엘리트주의가 뿌리깊은 베른하이어 내에서는 그의 장기집권에 대한 반대가 거의 없는 편이다.

가족으로는 아내 아이비 스펜서 무어(Ivy spencer Moore)와 딸 아델하이드 무어(Adelheid Moore)가 있다.

생애

유년기

카를 무어는 1618년 아른하임 주 아인델(Eindell)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무어(James Moore) 아른하임 주립대학교의 경제학 교수였으며, 어머니는 지역 고등학교 교사이자 대지주의 딸이었다. 외가와 친가 모두 유복한 가문이었으며, 특히 조부 에카르트 판 하이네스(Eckart Van Heiness)는 아인델 백작이자 베른하이어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인문학자였다. 이러한 가정환경 덕분에 카를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과 문화예술에 자연스럽게 노출되었다.

비범한 지능을 보인 카를은 두 돌이 되기 전 글을 읽기 시작했으며, 유년기 대부분을 부모와 조부에게서 교육받으며 보냈다. 어머니는 언어와 인문학을, 아버지는 수학과 경제학을 가르쳤고, 조부는 시와 수사학, 토론과 협상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인문적 교양을 전수했다. 특히 수학에서 천재적 소질을 보여, 5세 무렵에는 대학 수준의 수학을 이해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카를은 학문적 재능 외에도 뛰어난 리더십 감각을 유년기부터 드러냈다. 다섯 살 무렵, 카를은 가문의 권력 덕분에 동네 아이들과의 병정놀이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으며, 종종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과 어울렸다. 어느 날, 그보다 네 살이나 많은 프란츠라는 소년이 그의 리더십에 이의를 제기하며 대장 자리를 두고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에 카를은 프란츠가 제시한 레슬링 경기를 받아들였다. 그는 직접적인 힘의 대결 대신 기민한 움직임과 심리적 압박을 통해 상대를 지치게 만든 뒤, 기회를 포착해 승부를 뒤집었다.

경기 후 항의하는 프란츠에게 카를은 “대장은 용맹함뿐 아니라 전략적 사고와 책임감이 필요하다”며, 그에게 ‘장군’이라는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고 자신은 여전히 대장을 맡겠다고 선언했다. 이 발언은 단순한 유희를 넘어서, 상대를 모욕하지 않으면서도 질서를 재편하고, 구성원들의 자발적 충성을 유도하는 정치적 수완을 보여준 사례로 기록된다.

이 일화는 훗날 카를 무어의 지도력과 정치 감각을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되며, 그가 어린 시절부터 인간 심리와 권력 구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행동했음을 보여준다. 전략적 사고, 수사적 설득, 질서 재구성 능력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핵심 자질이었다.

외텔슈비어에서

1623년 겨울, 여섯 살이 된 카를 무어는 아버지 제임스 무어외텔슈비어 소재 대학으로부터 교수직 제안을 받으면서 가족과 함께 외텔슈비어로 이주하였다. 그는 곧바로 외텔슈비어의 상급학교에 편입하였는데, 입학 시험 전 과목에서 최고점을 기록하며 2학년으로 편입되었다. 이미 대학 수준의 수학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그는 수학 과목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고, 대신 외국어 학습에 몰두했다. 식민제국 마그니우스의 공용어인 알레니아어와, 문예 부흥과 함께 주류 언어로 부상한 그란치프어를 익혔다. 훗날 카를 무어가 언어 공부를 취미로 삼게 된 것이 이때부터였다.

학교 생활에 있어서도 그는 전 과목 수석을 유지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성숙한 언행과 교우 관계로 급우들 사이에서 존중을 받았다. 당대 베른하이어 교육 체계는 월반과 유급이 흔했기 때문에, 어린 나이가 학업에 있어 특별한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그의 학문적 여정은 교실 밖에서도 이어졌다. 아버지의 배려로 다수의 저명한 수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몇몇 학회에는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카를의 재능을 처음에는 회의적으로 바라보던 학자들도 실제 토론과 질의응답을 통해 그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특히 젊은 통계학자 프레데릭 펠슈타인은 카를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며 식사와 토론을 함께하는 등 교류를 이어갔다. 그는 카를에게 통계학 진학을 권유했으며, 이에 따라 카를은 한때 통계학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경제학을 선택하였는데, 이는 경제학에 통계적 기법을 접목하려는 관심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프레데릭과의 인연은 이후에도 이어졌으며, 그의 동생 마르크 펠슈타인은 훗날 마도공학과 전기기술의 선구자로서 카를의 정치·기술적 동반자가 된다.

추성협상

1627년 가을, 카를 무어의 상급학교 진학이 확정될 무렵, 베른하이어 사회는 중대한 정치적 지각변동을 맞이하고 있었다. 당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젊은 학자들에 의해 일종의 정치혁명이 발생했다. 그 중심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카를의 아버지 제임스 무어였다. 이들은 입헌정부 수립과 시민권 확대를 요구하였고, 1627년 10월 21일, 르니에르 1세가 입헌정 설립을 공식적으로 약속함으로써 유혈사태 없이 혁명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후 의회와 귀족계층의 반발로 인해 정치적 타협은 난항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격변 속에서도 카를 무어는 학업에 집중하여 흔들림 없는 성적을 유지했다. 일부 동급생이 그의 학업 성취가 아버지의 정치적 지위와 관련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 적도 있었으나, 해당 주장은 교사들과 다수의 학생들에 의해 곧바로 반박되며 무산되었다. 카를은 상급학교 전 과정을 단 한 차례도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고 수료하였으며, 12세에 제출한 졸업 논문에서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개념인 증권 리스크 평가를 위한 통계 기반 모델을 제안하였다. 논문은 참신성과 이론적 완성도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그는 수석 졸업자로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그가 상급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630년, 정치개혁의 성과로 초대 총선이 치러졌고, 이에 따라 초대 시민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해 시민원은 역사상 첫 시민시험을 시행했으며, 카를 무어는 이 시험에 응시해 필기 부문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로 수석 통과하였다. 그의 원점수 기록은 이후 30년 이상 깨지지 않은 채 유지되며, 제도 창설 초기의 전형적인 모범 사례로 회자된다.

이후 그는 베른하이어 최고 학문기관인 외텔슈비어 대학교 경제학과 입시에 응시해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당시 경제학과는 철학 및 정치학과를 제치고 가장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던 학과로, 이는 금융 및 통계 혁명이 한창이던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는 결과였다. 카를이 수학이 아닌 경제학을 선택한 것은 그의 지적 관심이 순수 수리학에서 사회경제 시스템 분석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결정으로 평가된다.

대학 생활과 연구

카를 무어외텔슈비어 대학교 입학은 학내외의 높은 주목을 받았다. 그는 베른하이어 시민정부 초대 총리인 레미 반스데데킨트의 최측근이자 정치적 실세였던 제임스 무어의 아들이며, 초회 시민시험에서 수석 합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해당 해 경제학과 신입생 중 최연소 입학생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학생들과 교수진의 큰 관심 속에 대학 생활을 시작한 그는, 입학 초기부터 연구에 몰두하며 학문적 진로를 빠르게 구축해 나갔다.

당시 베른하이어 정부는 금융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제임스 무어는 금융시장에 대한 국가의 규제와 감시 강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카를 무어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금융시장의 변동은 수학적·통계적 모델을 통해 예측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독자적 연구를 이어갔다. 그는 자유로운 시장 분석과 정량적 접근에 집중하였으며, 이를 통해 계산경제학의 초기 개념을 정립해 나갔다.

카를의 학문적 성장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은 펠슈타인 교수였다. 오랜 친분으로 그의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주던 펠슈타인 교수는 마침 외텔슈비어 대학교에서 계산경제학 분과 설립을 주도하고 있던 하인리히 칼 교수에게 소개하였다. 칼 교수는 무어가 제안한 금융시장 예측 가설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두 사람은 3학년 시점부터 공동연구를 본격화했다. 이들은 수학적 검증에 그치지 않고, 실제 소액 자본을 운용하여 금융시장에서 이론을 실험하였다. 그 결과 2년 반 만에 초기 자본의 10배에 달하는 수익을 실현하며 학계와 금융업계 양측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 공동연구는 계산경제학 내에서 투자 분석의 정량화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사례로 평가되며, 이후 카를 무어의 경제학 박사 논문 주제로 확장되었다. 해당 논문은 수리적 정교함과 실증적 타당성을 겸비한 작업으로 인정받아 외텔슈비어 대학교 경제학과 내부에서도 혁신적 사례로 기록된다.

마그니우스로 향하다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모교인 외텔슈비어 고등대학을 비롯해 베른하이어 내의 여러 대학에서 그를 교수로 임용하겠다는 러브콜을 보내왔으나 카를은 다름 아닌 마그니우스로 향하게 된다. 여러 나라의 학문과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자신의 투자 이론을 외텔슈비어가 아니라 마그니우스의 증권가에서 실험해 볼 생각도 있었다. 열렬히 러브콜을 보내온 베른하이어의 대학들과 다르게 마그니우스에서는 아직 계산경제학이 주류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그는 로디언 광역권 남동쪽에 위치한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알레머스 대학교에서 근무하게 된다.

알레머스 대학교에서는 계산경제학에 대한 분과가 제대로 개설되지 않았기 때문에 카를 무어는 다른 비주류경제학자들과 연구실을 공유하는 등 좋지 않은 취급을 받았지만 참신한 이론과 장악력 있는 리더쉽 덕분에 금새 인정을 받게 된다. 불과 반년만에 베른하이어 출신의 천재 경제학자가 로디언에 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고 당시 경제학 분야에서 양질의 교수진을 확충하는데 열중하던 로디언 중심부의 레스터체이스 칼리지(Lesterchase Collage)가 카를 무어를 교수로 초빙했다.

레스터체이스에서 강의를 시작한 뒤부터 로디언의 은행가를 중심으로 그의 계산경제학 이론이 실제 금융 시장에 적용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거시경제환경의 변화에 따른 채권 위험률의 재평가 모델에 대한 실증적인 검증이 이루어지면서, 그가 로디언의 사교계 행사에 초대받는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637년 겨울, 로디언 귀족사회의 전통 행사인 ‘윈터 포럼’에 학계 인사로 초청된 카를은 뜻밖에도 귀족 금융가로 명망 높은 그레이엄 로이드 백작과 인사를 나누게 된다.

행사장에서 카를은 로이드 백작이 주변인들과 나누던 ‘대륙 채권시장에 대한 불확실성’과 관련된 대화를 우연히 듣고, 조심스레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마그니우스 금리 조정의 가능성과 신디아 채권 수요 급등의 연동 효과를 들어 로디언 금융계의 과도한 낙관론을 지적했고, 이때 그의 정제된 논리와 예리한 시각은 로이드 백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백작은 대화를 이어가며 몇 가지 구체적인 투자계획을 털어놓았고, 카를은 특정 채권군의 가격 흐름을 통계적으로 예측해보는 방법을 설명하며 조언을 건넸다. 이후 몇 달 내 실제로 그 조언이 현실화되며 백작은 상당한 이익을 얻었고, 카를에 대한 관심은 우정으로 발전했다.

아이비 로이드와의 만남

카를과 백작의 친분이 깊어지던 무렵, 로이드는 자신의 딸 아이비 스펜서 무어를 소개하고자 카를을 자택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아이비는 당시 레스터체이스 부속 여학교의 수석 재학생이자, 정치철학과 경제학에 큰 흥미를 보이는 인물로, 학내에서 소수정예 토론클럽의 중심 멤버였다. 로이드 백작은 카를에게, 이 클럽의 고문교사를 맡아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아이비의 첫인상에 흥미를 느낀 그는 기꺼이 제안을 수락했고 그녀와 교류하며 깊어진 우정에, 이듬해 레스터체이스 대학에 진학하려는 아이비를 위해 직접 추천서를 작성해주기까지 했다.

1639년 봄, 아이비의 대학 입시 합격이 확정되었을 무렵, 로이드는 카를에게 자신이 공동으로 소유한 은행 로이드 & 바이런의 외부 고문직으로 추천한다. 마침 변동성이 큰 시장에서의 새로운 투자 이론을 연구하던 그는 이를 수락했고, 로이드 & 바이런 은행은 공격적인 투자전략으로 막대한 수익을 내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은 학계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레스터체이스 대학교 측은 교수직을 유지한 채 민간 금융기관의 실질적 운영에 깊이 관여하는 무어의 행보가 학문적 중립성과 윤리에 위배된다고 판단하여 수차례 공식 경고를 전달하였다. 이에 카를은 자진해서 교수직에 사임하였고, 이 시기에 카를을 더 신뢰하게 된 로이드는 그를 자신의 사업 파트너로 맞이함과 동시에 개인적 유대를 강화하고자, 딸인 아이비 스펜서 로이드와의 약혼을 추진하였다. 무어는 이를 받아들였고, 약혼 후 2년 간 로디언 내에서 전설적인 투자 기록을 남기며 명실상부한 금융계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무어에게 딸을 시집보낸 이후 그가 계속 로디언에 남아 자신의 사업을 도울 것이라 믿었던 로이드의 기대와 달리 카를은 결혼 직후 외텔슈비어로 돌아가 자신만의 투자은행을 설립하고자 했다. 로이드 백작은 그의 귀국 결정을 아쉬워했으나, 이를 존중하며 무어의 선택을 지지하였다.

카를 무어 은행 설립

1641년 4월, 카를 무어로디언에서의 성공적인 활동을 마친 후 외텔슈비어로 귀환하여 본격적인 금융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귀환 직후 투자자를 모집하였고, 이듬달인 5월, 자신의 자본금 15만 폴리거마르크에 더해 투자 클럽을 통해 추가로 15만 폴리거마르크를 유치하여 첫 투자 펀드를 출범시켰다. 당시 베른하이어에서는 투자 클럽이 낯선 개념은 아니었고, 무어의 명성은 이미 로디언에서의 기록을 통해 외텔슈비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1642년, 카를 무어 은행의 첫 투자 펀드는 약 100%에 달하는 수익률을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다. 초기 자본의 두 배에 달하는 수익 실현 소식은 외텔슈비어 전역으로 퍼졌고, 이어서 최소 납입금 10만 폴리거마르크 이상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400만 폴리거마르크 규모의 두 번째 펀드가 성공적으로 출범하였다. 이후 수년간 카를 무어 은행은 안정성과 수익률 면에서 외텔슈비어 금융계 최고 수준의 실적을 기록하며 빠르게 성장하였다.

카를 무어 은행의 고객층은 국내뿐 아니라 마그니우스, 키르수스, 프리슬란드 등지의 귀족, 고위 관료, 상업인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1647년, 창립 7년 만에 총자산 100억 폴리거마르크를 돌파하며, 국내 은행 순위 기준으로 상인조합 은행, 칼스베르펜 은행, 외텔슈비어 은행, 아커 & 바이엘 은행에 이은 제5위로 도약하였다. 특히 투자 전문 은행 중에서는 총자산 85억 폴리거마르크의 예거 투자은행을 앞지르며 시장 점유율 및 자산 규모 모두에서 독보적인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같은 해 1월, 카를 무어와 아이비 로이드 부부에게 첫 딸인 아델하이드 무어가 태어났다. 아델하이드는 1643년 유산 이후 5년 만에 무어 부부에게 찾아온 아이로, 가족의 각별한 애정 속에서 성장하였다.

1647년 12월, 이델스테르트 학자였던 비브렌 파이퍼스(Wibren Pijpers)의 별세 이후, 카를 무어는 계산경제학의 이론적 기초 확립과 실증적 업적을 인정받아 30세의 나이에 최연소로 이델스테르트의 지위에 임명되었다. 이델스테르트는 베른하이어의 학술·정책 자문기구로, 추성협성 이후 베른하이어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가진 학자 집단이다. 이 임명은 무어의 학문적 위상과 실무 능력을 동시에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사건으로 평가된다.

정계 입문과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1648년 7월, 베른하이어와 마그니우스 간의 해군 주력함 경쟁이 정점에 달하던 시기, 베른하이어 해군은 406mm 주포를 장착한 최신예 전함인 베아트릭스급 전함 14척의 완공을 기념하기 위해 해상 연회를 개최하였다. 연회는 14번 자매함인 베아트릭스급 전함 일세에서 진행되었으며, 함정은 베른하이어 오랜디 해군 기지로부터 약 138km 떨어진 해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행사 도중 일세 함과 호위함 전부가 갑작스럽게 연락이 두절되었고, 이후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는 침몰한 함체 잔해 외에 아무런 생존자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48년 참변으로 불리며, 4,000명이 넘는 사망자를 기록했다. 희생자에는 르니에르 대공, 당시 총리 및 내각 주요 각료, 해군참모총장, 전함 건조 및 설계에 참여한 정재계 인사들과 여러 내외빈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참변은 베른하이어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해군력 확장에 대한 국민적 지지 기반을 무너뜨려 이후 마그니우스와의 군비 경쟁에서 사실상 이탈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 직후 핀 하이드 내각은 총사퇴하였고, 상원 재선거가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1648년 9월 15일, 제4대 베른하이어 상원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시민당 소속으로 출마한 카를 무어는 대중적 신망과 경제 전문가로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신임 총리로 취임한 시민당의 필립 바스크는 무어에게 재무부 장관직을 제안했으나, 무어는 이를 고사하고 경제 및 시장 위원회 위원장직을 수락하였다.

1650년, 키르수스그란치프 간의 전쟁이 발발하자, 그란치프는 동맹국인 베른하이어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당시 이델스테르트로 재직 중이던 카를 무어는 참전에 명확히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무어는 그란치프 유학파 출신이자, 그란치프 정계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아버지 제임스 무어와 의견 충돌을 겪었으며, 대다수 상원의원과 장관들이 전쟁 결과에 대해 낙관론을 펼치는 가운데, 무어는 극도의 리스크를 경고하였다.

무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른하이어 정부는 1650년 11월, 공식적으로 참전을 결정하였다. 전쟁 초기, 그란치프 연합군은 키르수스를 상대로 일련의 전술적 승리를 거두며 우위를 점하는 듯 보였으나, 무어는 여전히 전쟁의 장기화와 전략적 불확실성에 주목하며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투자자로서의 신념에 따라 전쟁 기간 동안 비공개적으로 그란치프 관련 자산을 매각하고, 키르수스의 전후 회복 및 군수 기반 산업에 집중 투자하는 포트폴리오를 구성하였다. 결국, 전쟁은 예기치 못한 외교 및 군사적 변수로 인해 1654년, 키르수스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며, 연합군은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모든 것이 카를 무어가 예견한 대로 흘러갔다.

전쟁 이후, 5대 총리 임명

1654년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의 종전 직후, 베른하이어 정부는 패전 책임에 대한 협상을 위해 긴급 외교사절을 구성하였다. 베른하이어 측은 이전부터 친키르수스적 외교노선을 취해온 데다 탁월한 협상력과 대인 외교 능력을 갖춘 카를 무어를 긴급전권대사로 임명하고, 키르수스의 아우뎀에서 진행되는 평화조약 협상에 파견하였다.

협상에서 키르수스는 핵심 조건으로 500억 폴리거마르크에 달하는 전쟁 배상금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실질적인 수취 목적보다는 베른하이어 경제에 치명적 타격을 가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내포된 조치였다. 그러나 카를 무어는 배상 전액을 5년 이내에 완납하겠다는 대담한 약속과 함께, 기타 조항들에서는 베른하이어에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을 유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키르수스 황위 계승자이자 회담 당시 황제 대리로 참석한 헤르베르트 황태자는 무어의 태도와 비전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비공식 밀담을 통해 그에게 정치적 기회를 제공할 뜻을 드러냈다. 회담 이후 키르수스는 과거 관행상 사용하지 않던 ‘군주국의 제후국 총리 임명권’을 발동하기로 결정하였고, 헤르베르트의 직접 지시로 1655년 1월 1일, 카를 무어는 선거나 신임 절차 없이 제5대 베른하이어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무어는 총리 임명 직후, 여론을 뒤바꾸는 전례 없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재와 카를 무어 은행의 수익을 동원하고, 동시에 베른하이어 재계의 주요 인사들을 설득해 후원금을 모금함으로써, 초기 배상금 총액 중 145억 폴리거마르크를 일시에 납부하였다. 이는 국가 재정이 아닌 민간 자본으로 충당된 대규모 배상금 사례로, 국가적 위기를 개인의 신용과 자산 운용으로 해결한 전례 없는 사례로 기록된다.

뿐만 아니라, 키르수스는 해당 배상금을 자국의 전쟁 재건 산업에 보조금으로 투입하였고, 이로 인해 관련 기업들의 주가는 단기간에 급등하였다. 이미 키르수스의 재건 산업 부문에 대한 대규모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두었던 무어는, 이 주가 급등을 통해 다시 막대한 수익을 실현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추가 배상금 납부에 재투입함으로써, 사실상 민간 자본을 순환시켜 국가 차원의 재정 의무를 감당하는 독자적 전략을 완성하였다.

카를 무어의 이러한 행보는 국내외에서 경제 전략가로서의 역량과 정치 지도자로서의 책임감을 동시에 입증한 사례로 평가되며, 그의 총리직 정당성에 대한 여론도 점차 반전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그는 매국노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국가를 위해 배상까지 책임진 지도자’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6대 총리 재선출

선거이력

년도 선거 종류 선거구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648년 제4대 상원의원 선거 베른하이어 시민당 당선
1655년 제5대 상원의원 선거 베른하이어 시민당 당선
1661년 제6대 상원의원 선거 베른하이어 시민당 당선
1661년 제6대 총리 지명 투표 베른하이어 시민당 당선(1위)

가족 관계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