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령 히코리야마 (아침해의 원유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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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이전부터 캄차카 반도에 대한 야심을 품어오고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캄차카 반도의 항구도시에서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여 일시적으로 침투를 한 적도 있었다. 결국 전후 협상에서 캄차카 반도가 할양되는 일은 없었지만, 캄차카까지 삼켜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어 동쪽으로 러시아가 남하할 일 자체를 없게 만들기 위해 언젠가는 제대로 러시아를 강하게 압박하겠다는 일본의 속내가 있었고, 훗날 이를 위해 기회가 되면 캄차카를 정복하고 말겠다는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
일본은 이전부터 캄차카 반도에 대한 야심을 품어오고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캄차카 반도의 항구도시에서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여 일시적으로 침투를 한 적도 있었다. 결국 전후 협상에서 캄차카 반도가 할양되는 일은 없었지만, 캄차카까지 삼켜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어 동쪽으로 러시아가 남하할 일 자체를 없게 만들기 위해 언젠가는 제대로 러시아를 강하게 압박하겠다는 일본의 속내가 있었고, 훗날 이를 위해 기회가 되면 캄차카를 정복하고 말겠다는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


1919년에 금관작전의 일부로서 소련군의 시선을 끌기 위해 캄차카 반도를 일본군이 접수했고, 이후 금관작전의 성공과 역량이 바닥난 소련과의 협상으로 최종적으로 캄차카를 약간의 대금과 함께 할양받는 데 성공했다. 워낙 사람이 없던 지역이다보니 인프라를 까는 데 시간이 꽤 걸렸고, 그렇게 몇년간의 군정을 거친 뒤 1921년에 히코리야마 총독부가 설치됐다.
1919년에 금관작전의 일부로서 소련군의 시선을 끌기 위해 캄차카 반도를 일본군이 접수했고, 이후 금관작전의 성공과 역량이 바닥난 소련과의 협상으로 최종적으로 캄차카를 약간의 대금과 함께 할양받는 데 성공했다. 워낙 사람이 없던 지역이다보니 인프라를 까는 데 시간이 꽤 걸렸고<ref>이마저도 캄차카 반도의 큰 크기에는 충분치 않아서, 실질적으로 일본인들이 거주한 캄차카 반도의 지역은 남부와 대도시인 히코리야마가 대부분이었다.</ref>, 그렇게 몇년간의 군정을 거친 뒤 1921년에 히코리야마 총독부가 설치됐다.


이후 이 지역을 점거한 일본에 대한 반감은 상당히 컸다. 그러나 워낙 오지기도 하고 시베리아인들이 가진 정체성으로 인해 러시아인들을 중심으로 한 저항운동은 금새 모습을 감추었고, 애초에 본토라 부를만한 소련이나 러시아 차르국이 타지에 남아있었으니 다른곳으로 이사간다는 선택지도 충분히 있었다. 아이누를 위시한 다른 민족들은 저항하긴 했으나, 구심점도 없었고 그 세력도 미약했다.  
이후 이 지역을 점거한 일본에 대한 반감은 상당히 컸다. 그러나 워낙 오지기도 하고 시베리아인들이 가진 정체성으로 인해 러시아인들을 중심으로 한 저항운동은 금새 모습을 감추었고, 애초에 본토라 부를만한 소련이나 러시아 차르국이 타지에 남아있었으니 이념에 따라 다른곳으로 이사간다는 선택지도 충분히 있었다. 아이누를 위시한 다른 민족들은 저항하긴 했으나, 구심점도 없었고 그 세력도 미약했다.  


인구수가 적다는 특징은 결과적으로 일본인 인구가 타 민족을 압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히코리야마는 일본 통치시기동안 사할린과 더불어 가장 내지와 비슷하게 취급받았으며, 때문에 인구의 이동도 활발한 편이었다. 다만 히가시코를 제외하면 기타 지역들은 개발도가 미비했고 살기도 거친 환경이었다보니 대부분의 인구는 히가시코에 모여서 살았다.
인구수가 적다는 특징은 결과적으로 일본인 인구가 타 민족을 압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히코리야마는 일본 통치시기동안 사할린과 더불어 가장 내지와 비슷하게 취급받았으며, 때문에 인구의 이동도 활발한 편이었다. 다만 히가시코를 제외하면 기타 지역들은 개발도가 미비했고 살기도 거친 환경이었다보니 대부분의 인구는 히가시코에 모여서 살았다.
그러나 히가시코 밖에서 살아야 했던 가난한 소수민족과 일본인들은 문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준으로 스스로 자신들의 생활 터전을 건설해 나가야 했다. 이 과정에서 풍토병과 불곰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기도 했으며, 때문에 히코리야마 향촌의 경우 상대적으로 안전한 히가시코보다 곰을 잘 다룰 줄 아는 아이누가 일본 타지보다는 대우받을 수 있는 풍조가 나타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일본 제국 정부도 히코리야마의 불곰 통제를 위해 아이누들의 이주와 활동을 보장하기도 했으며, 개중 실력이 뛰어난 일부는 부를 쌓거나 신분이 상승할 기회도 있었다.
군 통치가 얼마 못 가 종결된 이후엔 사이토 마코토 전 후쿠슈 총독이 잠시 총독직을 맡았으며, 이 때 상대적으로 유화 통치가 진행됐다. 사실 인구의 절반 이상은 일본인이다보니 실질적으로 그닥 유의미한 차이는 없었으나, 이 시기동안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아이누인, 러시아인 등의 전용 거주지가 확대되거나 그들의 풍속에 대한 탄압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등의 변화는 있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내지로 취급받게 되었으며, 때문에 소련의 침공을 대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반도 내부에 남아있는 비일본인 인구에 대한 동화정책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그 예시로 1934년 최대도시인 히가시코에 히가시코 제국 대학이 신설됐으며, 황국신민화통치, 일본어 보급의 급진화와 더불어 나중에는 국민금품지원대라는, 캄차카 일대의 금을 전쟁자금으로서 채굴하여 공출하는 제도 또한 도입됐다. 그러나 결국 히코리야마도 타격을 안 입은 건 아닌지라 미군의 공습과 대한제국의 전세 악화로 인해 동진을 시작한 소련군과의 대립이 간간히 발생했고, 결국 1945년 8월 15일에 쇼와 덴노의 항복선언(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식민지배도 종료되었다. 이후 9월 16일부터 소련군이 다시 진주를 시작했고, 10월 25일에 러시아인 거주지의 인원들을 제외한 일본인과 아이누인들이 모두 일본 본토로 귀국하면서 일제의 캄차카반도 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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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내에서 일본 통치 시기 캄차카반도의 평가는 통상적으로 부정적이나, 캄차카 반도의 주민들의 경우 소련군이 다시 주둔하고 나서부터 캄차카 일대가 급격히 군사회되었고, 또 일본을 좋게 보지 않았던 소련군에게 반쯤 일본인으로 여겨져 차별의식을 보인 적도 있던지라 일본 통치 시대를 그리워하는 경우도 소수나마 존재했다.
실제로 소련이 다시 캄차카 반도를 지배하게 된 이후에도 딱히 캄차카인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는데, 당시 소련이 일본에게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감정과 반제국주의 정서가 합쳐져 현지 주민들을 인종을 가리지 않고 배신자, 혹은 제국주의 부역자로 보는 정서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캄차카 일대에서 미약하지만 반역활동을 이어갔던 이들은 종종 일본어를 이용하여 아군여부를 파악하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세대가 지나고 캄차카가 소련에게 지배당한 기간이 더 길어지면서 이러한 정서는 차차 사라지는 중이다.
또다른 당사국인 일본 내 극우 세력을 비롯한 일부에선 타 외지들과 더불어 캄차카까지 소련에게 환원 요청을 하고 있다. 2차 대전 이전의 영토로 돌아가길 요구하는 것이나, 당연히 현재 실효지배국인 소련과 캄차카를 사실상 목숨값으로 팔아치운 러시아 차르국 정부는 물론, 일본 정부 역시 이러한 주장을 무시한다. 극우들과는 별개로 일본인들은 가라후토의 상실을 아쉬워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나, 몇몇 자금을 가진 이들이 옛 히코리야마였던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 등의 도시개발에 투자하며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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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4일 (금) 05:42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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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개 ]  
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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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지역 명칭 담당기관
대만 섬 타이완 타이완 총독부
푸젠 성 후쿠슈 후쿠슈 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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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군도 남양군도 남양청
캄차카 반도 히코리야마 히코리야마 총독부
해당지역 명칭 기관
샤먼 아모멘 -
하이난 카이난 -
* 자치령은 1920년대 괴뢰국으로 [1]승격
* 가라후토는 1943년 이후 본토로 편입
괴뢰국 · 군정청
히코리야마
火氷山|Hikoriyama
일본 제국의 식민지
국기 휘장
적백내전 이전 해방 이후
러시아 제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상징
국가
기미가요
(君が代)
지리
최대도시
히가시코 시(東港市)
위치
캄차카 반도
국가
일본 제국
면적
약 270,000km²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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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약 5만
공용어
일본어 (사실상 공용어)
러시아어
아이누어
공용 문자
가나 문자, 키릴 문자, 아이누 문자
민족
야마토 민족, 러시아인, 아이누인 등
국교
국가신토
종교 분포
신토, 불교, 천주교, 동방정교
군대
히코리야마군
정치 ·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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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군사독재 → 입헌군주제 → 군사독재 · 익찬 체제
국가 원수
대일본제국 천황
통치 수반
히코리야마 총독
통치기관
히코리야마 총독부
연호
다이쇼 (1920-1926)→ 쇼와 (1926-1945)
통화
히코리야마 엔
구 히코리야마 총독부 청사의 전경

개요

일본령 히코리야마(日本領火氷山)는 1918년 캄차카 반도가 일본 제국에 의해 점거되고, 1919년 3월 5일부터 시작된 군정에서 시작하여 1945년 10월 25일까지 캄차카 반도 일대가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서 존재하였던 기간을 가리킨다.

통상적으로 소련에서는 캄차카반도 일본통치시기(Период японского правления на Камчатке)라고 부르며, 일본령 시절 당시엔 불과 얼음의 산이라는 뜻을 가진 일본식 이름 히코리야마(火氷山), 또는 그냥 캄차카 반도로 불렸다. 현대 일본에서는 이 시기를 이를 때 당대 푸젠성처럼 일본통치시대(日本統治時代)라는 용어를 쓰며, 영어에서도 일반적으로 당대 푸젠처럼 'Kamtchaka peninsula under Japanese Rule'이라는 용어를 쓴다.

상세

일본은 이전부터 캄차카 반도에 대한 야심을 품어오고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캄차카 반도의 항구도시에서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여 일시적으로 침투를 한 적도 있었다. 결국 전후 협상에서 캄차카 반도가 할양되는 일은 없었지만, 캄차카까지 삼켜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어 동쪽으로 러시아가 남하할 일 자체를 없게 만들기 위해 언젠가는 제대로 러시아를 강하게 압박하겠다는 일본의 속내가 있었고, 훗날 이를 위해 기회가 되면 캄차카를 정복하고 말겠다는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

1919년에 금관작전의 일부로서 소련군의 시선을 끌기 위해 캄차카 반도를 일본군이 접수했고, 이후 금관작전의 성공과 역량이 바닥난 소련과의 협상으로 최종적으로 캄차카를 약간의 대금과 함께 할양받는 데 성공했다. 워낙 사람이 없던 지역이다보니 인프라를 까는 데 시간이 꽤 걸렸고[2], 그렇게 몇년간의 군정을 거친 뒤 1921년에 히코리야마 총독부가 설치됐다.

이후 이 지역을 점거한 일본에 대한 반감은 상당히 컸다. 그러나 워낙 오지기도 하고 시베리아인들이 가진 정체성으로 인해 러시아인들을 중심으로 한 저항운동은 금새 모습을 감추었고, 애초에 본토라 부를만한 소련이나 러시아 차르국이 타지에 남아있었으니 이념에 따라 다른곳으로 이사간다는 선택지도 충분히 있었다. 아이누를 위시한 다른 민족들은 저항하긴 했으나, 구심점도 없었고 그 세력도 미약했다.

인구수가 적다는 특징은 결과적으로 일본인 인구가 타 민족을 압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히코리야마는 일본 통치시기동안 사할린과 더불어 가장 내지와 비슷하게 취급받았으며, 때문에 인구의 이동도 활발한 편이었다. 다만 히가시코를 제외하면 기타 지역들은 개발도가 미비했고 살기도 거친 환경이었다보니 대부분의 인구는 히가시코에 모여서 살았다.

그러나 히가시코 밖에서 살아야 했던 가난한 소수민족과 일본인들은 문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준으로 스스로 자신들의 생활 터전을 건설해 나가야 했다. 이 과정에서 풍토병과 불곰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기도 했으며, 때문에 히코리야마 향촌의 경우 상대적으로 안전한 히가시코보다 곰을 잘 다룰 줄 아는 아이누가 일본 타지보다는 대우받을 수 있는 풍조가 나타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일본 제국 정부도 히코리야마의 불곰 통제를 위해 아이누들의 이주와 활동을 보장하기도 했으며, 개중 실력이 뛰어난 일부는 부를 쌓거나 신분이 상승할 기회도 있었다.

군 통치가 얼마 못 가 종결된 이후엔 사이토 마코토 전 후쿠슈 총독이 잠시 총독직을 맡았으며, 이 때 상대적으로 유화 통치가 진행됐다. 사실 인구의 절반 이상은 일본인이다보니 실질적으로 그닥 유의미한 차이는 없었으나, 이 시기동안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아이누인, 러시아인 등의 전용 거주지가 확대되거나 그들의 풍속에 대한 탄압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등의 변화는 있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내지로 취급받게 되었으며, 때문에 소련의 침공을 대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반도 내부에 남아있는 비일본인 인구에 대한 동화정책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그 예시로 1934년 최대도시인 히가시코에 히가시코 제국 대학이 신설됐으며, 황국신민화통치, 일본어 보급의 급진화와 더불어 나중에는 국민금품지원대라는, 캄차카 일대의 금을 전쟁자금으로서 채굴하여 공출하는 제도 또한 도입됐다. 그러나 결국 히코리야마도 타격을 안 입은 건 아닌지라 미군의 공습과 대한제국의 전세 악화로 인해 동진을 시작한 소련군과의 대립이 간간히 발생했고, 결국 1945년 8월 15일에 쇼와 덴노의 항복선언(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식민지배도 종료되었다. 이후 9월 16일부터 소련군이 다시 진주를 시작했고, 10월 25일에 러시아인 거주지의 인원들을 제외한 일본인과 아이누인들이 모두 일본 본토로 귀국하면서 일제의 캄차카반도 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평가

소련 내에서 일본 통치 시기 캄차카반도의 평가는 통상적으로 부정적이나, 캄차카 반도의 주민들의 경우 소련군이 다시 주둔하고 나서부터 캄차카 일대가 급격히 군사회되었고, 또 일본을 좋게 보지 않았던 소련군에게 반쯤 일본인으로 여겨져 차별의식을 보인 적도 있던지라 일본 통치 시대를 그리워하는 경우도 소수나마 존재했다.

실제로 소련이 다시 캄차카 반도를 지배하게 된 이후에도 딱히 캄차카인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는데, 당시 소련이 일본에게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감정과 반제국주의 정서가 합쳐져 현지 주민들을 인종을 가리지 않고 배신자, 혹은 제국주의 부역자로 보는 정서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캄차카 일대에서 미약하지만 반역활동을 이어갔던 이들은 종종 일본어를 이용하여 아군여부를 파악하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세대가 지나고 캄차카가 소련에게 지배당한 기간이 더 길어지면서 이러한 정서는 차차 사라지는 중이다.

또다른 당사국인 일본 내 극우 세력을 비롯한 일부에선 타 외지들과 더불어 캄차카까지 소련에게 환원 요청을 하고 있다. 2차 대전 이전의 영토로 돌아가길 요구하는 것이나, 당연히 현재 실효지배국인 소련과 캄차카를 사실상 목숨값으로 팔아치운 러시아 차르국 정부는 물론, 일본 정부 역시 이러한 주장을 무시한다. 극우들과는 별개로 일본인들은 가라후토의 상실을 아쉬워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나, 몇몇 자금을 가진 이들이 옛 히코리야마였던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 등의 도시개발에 투자하며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역대 히코리야마 총독

기타


  1. 연해주 자치령에서 극동 공화국으로, 극동 공화국에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환.
  2. 이마저도 캄차카 반도의 큰 크기에는 충분치 않아서, 실질적으로 일본인들이 거주한 캄차카 반도의 지역은 남부와 대도시인 히코리야마가 대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