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요약 없음 |
편집 요약 없음 |
||
115번째 줄: | 115번째 줄: | ||
1919년에 금관작전의 일부로서 소련군의 시선을 끌기 위해 캄차카 반도를 일본군이 접수했고, 이후 금관작전의 성공과 역량이 바닥난 소련과의 협상으로 최종적으로 캄차카를 약간의 대금과 함께 할양받는 데 성공했다. 워낙 사람이 없던 지역이다보니 인프라를 까는 데 시간이 꽤 걸렸고, 그렇게 몇년간의 군정을 거친 뒤 1921년에 히코리야마 총독부가 설치됐다. | 1919년에 금관작전의 일부로서 소련군의 시선을 끌기 위해 캄차카 반도를 일본군이 접수했고, 이후 금관작전의 성공과 역량이 바닥난 소련과의 협상으로 최종적으로 캄차카를 약간의 대금과 함께 할양받는 데 성공했다. 워낙 사람이 없던 지역이다보니 인프라를 까는 데 시간이 꽤 걸렸고, 그렇게 몇년간의 군정을 거친 뒤 1921년에 히코리야마 총독부가 설치됐다. | ||
이후 이 지역을 점거한 일본에 대한 반감은 상당히 컸다. 그러나 워낙 오지기도 하고 시베리아인들이 가진 정체성으로 인해 러시아인들을 중심으로 한 저항운동은 금새 모습을 감추었고, 애초에 본토라 부를만한 소련이나 러시아 차르국이 타지에 남아있었으니 이념에 따라 다른곳으로 이사간다는 선택지도 충분히 있었다. | 이후 이 지역을 점거한 일본에 대한 반감은 상당히 컸다. 그러나 워낙 오지기도 하고 시베리아인들이 가진 정체성으로 인해 러시아인들을 중심으로 한 저항운동은 금새 모습을 감추었고, 애초에 본토라 부를만한 소련이나 러시아 차르국이 타지에 남아있었으니 이념에 따라 다른곳으로 이사간다는 선택지도 충분히 있었다. 아이누를 위시한 다른 민족들은 저항하긴 했으나, 구심점도 없었고 그 세력도 미약했다. | ||
인구수가 적다는 특징은 결과적으로 일본인 인구가 타 민족을 압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히코리야마는 일본 통치시기동안 사할린과 더불어 가장 내지와 비슷하게 취급받았으며, 때문에 인구의 이동도 활발한 편이었다. 다만 히가시코를 제외하면 기타 지역들은 개발도가 미비했고 살기도 거친 환경이었다보니 대부분의 인구는 히가시코에 모여서 살았다. | 인구수가 적다는 특징은 결과적으로 일본인 인구가 타 민족을 압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히코리야마는 일본 통치시기동안 사할린과 더불어 가장 내지와 비슷하게 취급받았으며, 때문에 인구의 이동도 활발한 편이었다. 다만 히가시코를 제외하면 기타 지역들은 개발도가 미비했고 살기도 거친 환경이었다보니 대부분의 인구는 히가시코에 모여서 살았다. | ||
121번째 줄: | 121번째 줄: | ||
그러나 히가시코 밖에서 살아야 했던 가난한 소수민족과 일본인들은 문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준으로 스스로 자신들의 생활 터전을 건설해 나가야 했다. 이 과정에서 풍토병과 불곰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기도 했으며, 때문에 히코리야마 향촌의 경우 상대적으로 안전한 히가시코보다 곰을 잘 다룰 줄 아는 아이누가 일본 타지보다는 대우받을 수 있는 풍조가 나타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일본 제국 정부도 히코리야마의 불곰 통제를 위해 아이누들의 이주와 활동을 보장하기도 했으며, 개중 실력이 뛰어난 일부는 부를 쌓거나 신분이 상승할 기회도 있었다. | 그러나 히가시코 밖에서 살아야 했던 가난한 소수민족과 일본인들은 문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준으로 스스로 자신들의 생활 터전을 건설해 나가야 했다. 이 과정에서 풍토병과 불곰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기도 했으며, 때문에 히코리야마 향촌의 경우 상대적으로 안전한 히가시코보다 곰을 잘 다룰 줄 아는 아이누가 일본 타지보다는 대우받을 수 있는 풍조가 나타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일본 제국 정부도 히코리야마의 불곰 통제를 위해 아이누들의 이주와 활동을 보장하기도 했으며, 개중 실력이 뛰어난 일부는 부를 쌓거나 신분이 상승할 기회도 있었다. | ||
군 통치가 얼마 못 가 종결된 이후엔 사이토 마코토 전 후쿠슈 총독이 잠시 총독직을 맡았으며, 이 때 상대적으로 유화 통치가 진행됐다. 사실 인구의 절반 이상은 일본인이다보니 실질적으로 그닥 유의미한 차이는 없었으나, 이 시기동안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아이누인, 러시아인 등의 전용 거주지가 확대되거나 그들의 풍속에 대한 탄압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등의 변화는 있었다. | |||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내지로 취급받게 되었으며, 때문에 소련의 침공을 대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반도 내부에 남아있는 비일본인 인구에 대한 동화정책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그 예시로 1934년 최대도시인 히가시코에 히가시코 제국 대학이 신설됐으며, 황국신민화통치, 일본어 보급의 급진화와 더불어 나중에는 국민금품지원대라는, 캄차카 일대의 금을 전쟁자금으로서 채굴하여 공출하는 제도 또한 도입됐다. 그러나 결국 히코리야마도 타격을 안 입은 건 아닌지라 미군의 공습과 대한제국의 전세 악화로 인해 동진을 시작한 소련군과의 대립이 간간히 발생했고, 결국 1945년 8월 15일에 쇼와 덴노의 항복선언(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식민지배도 종료되었다. 이후 9월 16일부터 소련군이 다시 진주를 시작했고, 10월 25일에 러시아인 거주지의 인원들을 제외한 일본인과 아이누인들이 모두 일본 본토로 귀국하면서 일제의 캄차카반도 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 |||
</div> | </div> | ||
<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2024년 5월 15일 (수) 04:15 판


![]() | |
[ 국가 목록 ]
[ 소개 ]
|
일본령 히코리야마 관련 틀 | ||
[ 펼치기 · 접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