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파르토 제국

Enzo2015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6월 15일 (일) 00:1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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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페로스벨트  ·  바네버베센  ·  투디아  ·  낸팬  ·  신디아  ·  헤르니소스  ·  바필리아  ·  펜데아시아  ·  디흐트에이븐
국가
키르수스 제국 게파르토 제국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베른하이어 베른하이어 공국  ·  에르미니아 에르미니아 합중국  ·  마그니우스 마그니우스 제국  ·  프리슬란드 프리슬란드 자유국  ·  그란치프 그란치프 국민국  ·  코르보날 코르보날 연합국  ·  크래스터프 크레스터프 왕국
사련 구성국과
혁명수도
헤스페로스벨트  ·  바네버베센
투디아  ·  낸팬  ·  신디아
헤르니소스  ·  바필리아  ·  펜데아시아  ·  디흐트에이븐
연표


-546
1423
고전고대
고대 후기
중세 초기
중세 성기
중세 말기


1423
1664
근대
현대


보편전기
연표
-546
1483
1664
고전 고대
고대 후기
중세 초기
중세 성기
중세 말기
근대
현대














보편전기
무기
권총  ·  기관단총 소총  ·  기관총 차량

게파르토 ㅔㄱㅣㅋㅔㅈㅔㅅ·ㅍㅜㅅㅡㅋㅏ 49M

게파르토 Moosmeier 32M pistol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26식 수포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엘빙거 권총



게파르토 ㅍㅜㅅㅡㅋㅏ1651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41형 표준 영도진 보병소총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이리야-야조프 45식 보병용 소총

그란치프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르브 소총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무흐타레프 장비

키르수스 Maschinen Gewehr 57

게파르토 ㅗㅌㅗㅁㅏㅌㅏ·ㅍㅜㅅㅠㅋㅏ

키르수스 Panzerabwehrkanonen 1656

게파르토 49M 6.3qb bombarde

게파르토 51M 6.3qb Bergbombarde

게파르토 52M 6.3qb bombarde

게파르토 50/54M 33qb Bergbombarde

키르수스 1656년식 야전차량 경형

키르수스 1654년식 전선장갑차량

게파르토 53M 3톤 중형트럭 어비거일



잠수함 함선 전투기 폭격기
키르수스 퇴브리크크루비엔 Ddkf.V

그란치프게파르토 가르당 17

게파르토 53M 반도르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피어스마린 F.3 키드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피어스마린 F.5 돌핀

키르수스 그니베겐 GFz.III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하디 베넷 타입P

아인종
카노쿠겔
Kanokugel
드베르그
Dweorg
리겔
Ligel
테살리데스
Teßalides
죄뢰이
Jöröi
라퓰러이
Lafülöi
오르바나 학회  ·  케네우스 의사회  ·  마법
무기
권총  ·  기관단총 소총  ·  기관총

게파르토 ㅔㄱㅣㅋㅔㅈㅔㅅ·ㅍㅜㅅㅡㅋㅏ 49M

게파르토 Moosmeier 32M pistol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26식 수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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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파르토 ㅍㅜㅅㅡㅋㅏ1651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41형 표준 영도진 보병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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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파르토 ㅗㅌㅗㅁㅏㅌㅏ·ㅍㅜㅅㅠㅋㅏ

차량
키르수스 Panzerabwehrkanonen 1656

게파르토 49M 6.3qb bombarde

게파르토 51M 6.3qb Bergbombarde

게파르토 52M 6.3qb bombarde

게파르토 50/54M 33qb Bergbombarde

키르수스 1656년식 야전차량 경형

키르수스 1654년식 전선장갑차량

게파르토 53M 3톤 중형트럭 어비거일



잠수함 함선
전투기 폭격기
키르수스 퇴브리크크루비엔 Ddkf.V

그란치프게파르토 가르당 17

게파르토 53M 반도르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피어스마린 F.3 키드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피어스마린 F.5 돌핀

키르수스 그니베겐 GFz.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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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okugel
드베르그
Dweorg
리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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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  ·  도서  ·  만화  ·  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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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파르토
Geparto
게파르토 제국
Geparto Birodarom

560년 - 1663년
국가 게파르토 광찬가
표어 Ewiger Blut, Höchster Sein, Heiligster Linie, Ungeteilter Birodarom
( 일종만세 제일세계 신성일가 치국합일 )
100%
수도 신성수도 모지리
최대 도시
면적 856,375 km²
황제
560년 - 590년 다카리바고 1세
704년 - 728년 페테르 2세
868년 - 890년 니시마티오 1세
936년 - 974년 쿠레 1세
1450년 - 1492년 쿠레 3세
1620년 - 다카리바고 3세
게파르티아 개척 560년
게파르토 왕국 건국 585년
제정 선포 720년
왕위계승전쟁 784년 - 798년
독립전쟁 868년 - 974년
아슈트카이트-게파르토 전쟁 1004년 - 1012년
대분열 1064년
대통합 1450년 - 1530년
에세르 배역 1652년 7월
인문 환경
인구 전체 인구 202,0__,___명
민족 구성 인간 91.8%
기에른 민족 59.4%
에세르 민족 20.8%
슈베른-게이만 민족 8.9%
기타 1.6%

제국구성민족 18.2%

출생률 3.53명
출생 인구 약 92만명
사망률 5.5명
사망 인구 약 28만명
기대 수명 79
성비 0.93
공용어 게파르토어
게파르토식 키르수스어
그란치프어
에세르어
레란스토비어
공용 문자 라틴 문자
종교 게파르토 황제교 92%
게파르토 토착종교 7%
기타1%
군대 게파르토 제국군
세부 군대 육군 게파르토 육군
해군 게파르토 육군 예하 강상함대전투단
기타군 게파르토 황실군
신성주 방위군
행정구역
행정
구역
신성주 1개의 신성수도
1개의 중앙신성주
15개의 신성주
도시 _개의 주도시
84개의 도시
___개의 군
____개의 구
_____개의 리
정치
경제
명목
GDP
1인당 GDP 132 Sͪ (176ℳ)
화폐 공식 화폐 슈바이허 (Sͪ)
폴리거마르크 (ℳ))
(1Sͪ = 1.33ℳ
코드와 단위
단위 법정연호 건국력
날짜형식 YYYY-MM-DD
운전석
(통행방향)
좌측
(우측)

게파르토 제국(게파르토어: Geparto Birodarom 게파르토 비로다롬, 게파르토식 키르수스어: Gepartoer Foligerreich 게파르토어 폴리거라이히, Gepartoer Birodareich 게파르토어 비로다라이히) 혹은 게파르토(게파르토어: Geparto 게파르토)는 헤스페로스벨트에 위치한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서쪽으로 키르수스, 남쪽으로 코르보날, 동쪽으로 크레스터프, 북쪽으로 그란치프,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과 접한다. 1663년 기준 2억 20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인구의 81.78%인 1억 6,520만 명이 인간으로 주류 민족인 기에른 민족이 59.4%(약 1억 200만 명), 슈베른-게이만 민족이 8.9%(약 1천 800만 명), 에세르 민족이 20.8%(약 4,200만 명), 크레스터프인코르보날인을 포함한 기타 민족이 약 1.6%(약 320만 명)를 구성하고 있다. 이외에도 제국구성민족(준인)가 3,680만 명(전체 인구 중 약 18.2%)에 달한다. 수도는 신성수도 모지리시이며, GDP는 ___헤스페로스벨트 6위에 달한다. 공용어는 게파르토식 키르수스어, 그란치프어, 레란스토비어, 남부 그란치프어를 사용한다. 문자로는 게파르토 문자와 슈베른 문자를 공용 문자로 채택했다.

585년, 슈베로니아 제국 아벨티아 속주의 귀족인 다카리바고 1세에 의해 건국되었다. 신성석판에 따르면, 다카리바고 1세는 자신의 성을 게파르트로 고치고 영토인 현 노르트란트를 포함한 일대를 게파르티아라 칭하였다. 720년, 페테르 2세게파르티아의 황제를 칭하며 제국을 선포했다. 페테르 2세 사후 제1차 변경백 왕조로 제위가 이어졌으나, 784년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했다. 802년, 발키로르 제국에 의해 정복당했고, 970년대까지 발키로르 제국의 봉신이자 부마국으로 존재했다. 868년부터 니시마티오 1세에 의해 독립전쟁이 이루어져 970년대게파르티아에서 발키로르 제국을 축출했다. 그러나 야니미츠가 외부로 하여 왕을 자칭하면서 황제의 권위가 추락하였고, 1065년부터 1121년노보히온의 치기, 그의 불경한 행적에 각 신성주가 독립을 선포하면서 대분열이 발생하였다. 1100년, 페렌츠에 의해 제2차 변경백 왕조로 제위가 이어졌으나, 이 또한 몰락하였고, 1450년부터 1530년까지 쿠레 3세서보에 의해 대통합이 이루어지며 혼란기가 막을 내렸다(대통합 왕조). 1652년, 에세르 배역을 통해 에세르를 합병하고 광란의 시대를 거쳤으나, 광란의 시대가 끝나며 키르수스-게파르토 국경전쟁에세르 소요, 사련의 압박을 겪고 있다.

게파르토는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게파르티아의 황제를 국가원수로 한며, 신성석판제국헌법에 따라 행정권, 사법권, 임법권, 외교권, 군권의 주체성을 지닌다. 이에 원리해 양의정승이 주도하는 흑실 대신내각, 백실 대신내각에서 올려진 안건의 인가권, 수정권, 취소권, 선포권을 지닌다. 또한 제국귀족들을 모집해 의견을 묻는 제 가회의諸家回議 구성권을 지닌다.

국명

게파르토의 국명은 공식적으로 제국헌법에서 의해 "신성수도와 신성주를 대표하는 황제 폐하의 통치령"이다. 칭제 이전에도 동일한 국명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슈베로니아 제국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페테르 2세가 선포한 "제국Birodarom" 지위에도 불구하고 "개척령Marchiom"으로 규정된 국명은 변함없이 약 1000년간 유지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국명 상에서 게파르토가 제국임을 암시하는 부분은 "황제 폐하의 통치령Birodaimium" 부분 뿐이다. 제정 선포 이후에도 대외에는 오랜 기간동안 왕국을 자처해온 게파르토의 특성상 타국에게는 일반적으로 "게파르토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 또한 일종의 전통으로 자리잡아 게파르토인들 또한 외국인에게는 정식 국명보다 "게파르토 제국Birodareich" 혹은 "게파르토 왕국Realm"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더 선호한다.

"게파르토Geparto"는 황실인 게파르트가에서 유래했다. "게파르트Gepart"의 기원에 대해 유력한 두 가지 가설이 존재하는데, 첫 번째 가설은 "조피로Gopiro[1]"라는 인물에서, 두 번째 가설은 "사성자Hofig"에서 왔다는 가설이다. 조피로신성석판에 기록된 인물로, 전설상 다카리바고 1세의 아내로 여겨진다. 다카리바고 1세가 그녀와 결혼하면서 성을 "게파르트"로 바꿨다는 게파르토 황제교 전설이 존재한다―추가적으로, 이를 통해 슈베로니아 제국 동부 변경이 모계 사회였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두 번째 가설은 페테르 2세의 칭제를 통한 제국의 지위에서 유래했는데, 그 신성을 인정받은 자를 의미하는 "사성자"가 Gofig-Gopir-Goper의 음운변동을 거쳐 최종적으로 "게파르Gepar"라는 개념으로 정착했다는 주장이다. 게파르토의 역사적 기록 상에서 "게파르트"를 언급하는 서적 대다수가 진위가 의심되는 서적이고, 종종 문헌 상에서 "사성자"의 개념을 언급할 때 Gofia 혹은 Goporo 등의 용례가 존재하는 게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조피로"의 언급이 신성석판을 제외하면 전무하기 때문에 "조피로"가 일종의 종교적 개념을 의미한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언어별 명칭
게파르토어 Geparto Birodarom
게파르토식 키르수스어 Geparto
Gepartoer Foligerreich
Gepartoer Birodareich
그란치프어 Tesud
Gepur
Empire d Gepor
알레니아어 Gepartia
Gepartian Foligerrealm
에세르어 Gepurus
Gepuruské Foligerříšský
키르수스어 Geparto
Gepartoer Hofigsreich

역사

건국 이전

560년 이전까지 게파르티아 일대에는 인간과 준인종의 씨족 사회가 혼재했다. 인간과 준인종의 유물이 혼재돼 있어 게파르티아의 고고학계는 정체 상태에 놓여 있다. 인간의 가장 오래된 흔적은 암흑력 20만년 전의 것이며, 인간과 준인종의 구분이 불명확한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암흑력 40만년 전의 것이다. 현재 존재하는 문헌 상에서 게파르티아가 처음으로 등장한 사례는 200년대 경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벨 사본이다. 현 키르수스 오타카레주의 고대 민가 유적에서 출토된 아벨 사본은 당대 개척자인 아벨 로티아누스을 다루는 전기로, 다음 구문을 통해 게파르티아 일대를 아벨리아라 칭했음을 알 수 있다.

아벨리아에는 두 개의 강이 흐른다. 이 강은 산들을 끼고 있는데, 미개한 씨족들이 비인들과 섞여산다. 이들은 주기적으로 강의 신선한 물로 북쪽 산맥에서 흘러나오는 보랏빛 색채를 씻어낸다.

작가 미상, 『아벨 사본』 중

게파르티아라는 단어는 560년 슈베로니아 제국의 동부 변방의 시파르마 다카리바고 혹은 다카리바고 페르티나키아[2]노르트란트로 유입한 직후 세운 신성석판을 통해 처음 언급된다. 오늘날 게파르토의 국권을 상징하는 신성석판에서 다카리바고 1세는 자신의 성을 "시파르마"에서 "게파르트"로 개칭하는 동시에 정복지의 이름을 "게파르티아"로 명명하였다. 게파르토는 공식적으로 수도를 신성수도 모지리로 옮긴 585년을 건국년도로 규정하였으나, 일부 및 민간에서는 신성석판이 설립된 560년을 건국년도로 여긴다.

개척 왕조

550년대 슈베로니아 제국의 몰락이 가시화되자, 560년, 시파르마 다카리바고는 자유인과 해방노예, 노예, 피난민을 이끌고 노르트란트 지방에서 게파르트 왕국을 선포하여 다카리바고 1세(560년-590년)로 즉위했다. 왕국은 이후 농지를 찾아 남진을 계속했는데, 다카리바고 1세부터 페테르 2세(704년-728년)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개척 왕조라 칭한다. 이 시기에 관한 여러 언급은 전설로서 구전되어 게파르토의 건국신화로 자리잡았다. 개척에 큰 공을 세운 귀족에게는 그들이 직접 개척한 영지가 하사되었는데, 이는 현재 신성주의 근원으로 취급된다. 현 게파르티아의 여러 지명이 귀족들 간의 영지 분배 과정에서 확립되었다. 또한 페테르 2세는 『황제의 약조』를 통해 개척지의 준인종 원주민 집단을 흡수했다.

왕과 신성

페테르 2세의 치세에 이르면 게파르토는 오늘날 게파르티아 전역을 아우른다. 슈베로니아 제국 멸망 이후 슈베른란트의 혼란상에서 게파르토는 슈베른인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또한 슈베른란트게이만족의 침입으로 슈베로니아 명맥이 끊어진 데 비해 게파르토는 슈베로니아의 직접적인 후예로 자칭되었기에 황제교 신성의 계승자라 인식되기 시작했다. 신성의 중심은 노르트란트의 변경백이었고, 이에 따라 720년 페테르 2세황제를 칭하며 제정을 선포한다.

황제교황제를 종교적 수장이자 창조주의 신성의 계승자로 보았다. 슈베로니아 제국의 멸망 이후 아슈트카이트 황제교슈베로니아 황제의 신성이 슈베르부르크 최고대사교(교황)으로 위임되었음을 주장했는데, 페테르 2세가 제정을 선포하면서 슈베로니아 황제교의 창립자 가스트 왕조의 창조신으로서의 신성을 직접적으로―가스트 왕조 이후 왕조의 슈베로니아 황제는 창조주 레윅(=가스트 왕조)이 직접 신성을 위임하여 그 대리인으로서 신성이 인정되었는데, 게파르티아의 황제가스트 왕조와 같이 창조주 레윅의 화신임을 주장했다― 계승하였다 주장했다. 이를 통해 아슈트카이트 황제교에서 분리된 게파르토 황제교가 설립되고 페테르 2세게파르티아의 황제로서 게파르토 황제교의 수장을 겸임한다.

게파르토 황제교에서는 아슈트카이트 황제교에서 이어지는 키르수스 황제교, 그란치프 황제교(-1654년)의 신성은 창조주로부터 위임되므로 신성됨이 약화되는 데 반해 게파르티아의 황제는 신본(神本)으로 신성의 불변함을 주장한다. 더해 키르수스의 황제가 창조주 레윅의 화신을 주장하는 키르수스 황제교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으며, 양국 간 외교의 갈등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페테르 2세게파르티아의 황제를 칭하면서 슈베른란트에로의 정복을 구상하였으나, 728년 노환으로 붕어하며 이는 백지화된다.

제1차 변경백 왕조

페테르 2세가 후사 없이 붕어하며 그 후계 문제로 약 3개월에 걸친 정치적 혼란을 겪는다. 이러한 상황에 게파르토 황제교는 「신성논고」를 통해 게파르티아의 황제의 신성은 신본으로서 가장 가까운 혈육에 계승되었음을 주장하였다. 후계자 논의가 '지루하게 지속'되던 상황 속에 사성자와 귀족들은 게파르토 황제교의 주장을 지지하며 기록상 2개월 18일에 걸친 족보와 페테르 2세의 생전 발언을 종합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작업의 결과로 페테르 2세의 신성은 자베르코 신성주(현 오스트자베르코 신성주 일대)의 방패지기(Scutui) 비서임 편력기사(Erruntui)의 시종 게파르트 라슬리시에로 계승됨이 판명되었다. 게파르트 라슬리시페테르 2세와 13촌 관계로, 집에 벼락이 떨어져 부모를 잃고 자베르코 신성주를 방랑 중이었다. 부모가 사망하면 가장 가까운 항렬의 나이 차가 나는 친척의 양자로 들어가는 게파르토 관습법에 따라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페테르 2세의 양자가 되었다. 게파르트 라슬리시보다 계승순위가 앞서던 58명의 친척들은 계승 이전 전원 사망했기에 그는 즉시 신성수도로 이성되어 급히 변경백(Dozsa) 작위를 수여받았다. 작위 수여 직후에는 신성주 소유귀족/왕실직계 친인적의 지위인 브린쿱서이(Brinkubsui)에 봉해진다. '신본을 알아보지 못한 벌'로 자베르코 신성주는 반으로 분할되었고, 오스트자베르코 신성주게파르트 라슬리시신성주로 진상되었다.

728년이 끝나기 전에 게파르트 라슬리시를 즉위시키려던 귀족들의 공통된 합의에 의해 연말 직전에 이르러 대관식을 통해 라슬리시 1세로 즉위한다. 그러나 정치적 기반이 전무했던 라슬리시 1세는 극도로 불안한 치세를 지속하였고, 정권을 공고히 하고자 귀족들 간 견제를 부추겼다. 이를 통해 제위 후반에 이르러선 신성주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라슬리시 1세 이후 즉위한 잉게르는 그의 정책을 계승하며, 오늘날 신성수도의 권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라슬리시 1세의 첫 작위가 변경백임에 기인해 이 두 황제의 치기를 제1차 변경백 왕조라 칭한다.

왕위계승전쟁

784년, 잉게르의 뒤를 이어 라슬리시 2세게파르티아의 황제로 즉위하였으나, 자신을 페테르 2세의 사생아라 주장하는 페테르 3세노르트란트 지역을 중심으로 봉기한다. 신성주의 권력 약화에 반발한 일부 귀족이 이에 호응했고, 페테르 3세의 뛰어난 지도력에 게파르토는 페테르 3세를 지지하는 북부와 라슬리시 2세를 지지하는 남부로 갈라진다. 페테르 3세에 의해 발발된 게파르토 왕위계승전쟁은 14년 간 이어져 게파르티아가 황폐화되었고, 이를 틈타 발키로르 제국게파르티아를 침공한다. 페테르 3세베스트자베르코 신성주에서 발키로르 제국의 군대에 돌격한 것을 마지막으로 기록이 끊겼고, 라슬리시 2세발키로르 제국에 항복하면서 게파르토 왕위계승전쟁이 종전한다. 라슬리시 2세발키로르 제국의 공주와 결혼해 낳은 벨로리 1세를 시작으로 발키로르 제국의 부마국이 되어 이들의 간섭을 받게 된다.

니시마티오 논쟁

802년, 3살에 불구한 벨로리 1세의 즉위를 시작으로 864년까지 발키로르 제국의 간섭기가 이어졌다. 어린 벨로리 1세의 섭정을 맡은 __ 공주를 통해 발키로르 제국의 게파르토 정치 장악이 이루어졌고, 벨로리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벨로리 2세의 치기 동안 게파르토에 본격적으로 발키로르 제국 인구집단과 문화가 유입되었다. 게파르토 동부에 서식하는 두발낙타가 그 대표적인 사례로, 호칭으로 노르트란트의 변경백을 칭하는 등 게파르토 역사상 최대의 치욕스런 시대로 평가받는다. 벨로리 2세 말기 850년, 앙기리변경백을 양위를 통해 계승했으나 5년 만에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으며 벨로리 2세가 재집권한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벨로리 2세발키로르 제국 출신 왕후 사이에서 다카리바고 2세를 출산했고, 게파르토 출신 측실 사이에서도 게파르트 니시마티오를 출산한다.

벨로리 2세의 두 번째 집권기 후반에 이르자 점차 발키로르 제국의 몰락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유목 국가에서 정주 민족에로의 과도기와 유목 민족 전통의 왕위 다툼, 여러 국가와의 전쟁 등 위기가 발생하였다. 발키로르 제국의 수탈로 피폐해진 게파르토에서 반발이 들끓기 시작했고, 게파르토인 사이의 적자인 게파르트 니시마티오가 그 총명함으로 이들을 결집하였다. 게파르트 니시마티오가 10살이 채 넘기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게파르토 토착세력을 중심으로 유의미한 지지 세력이 형성되었고, 864년다카리바고 2세가 즉위하였음에도 그 세력이 증대하였다. 결국 868년, 다카리바고 2세가 즉위 4년 만에 게파르트 니시마티오에게 변경백 작위를 양위하면서 니시마티오 1세가 즉위한다.

니시마티오 1세게파르티아의 황제를 칭하며 발키로르와의 전쟁을 개시했다. 독립전쟁은 간섭기 동안 발키로르 제국의 감독관인 __과 그 일파에 의해 정권에서 배제된 게파르토인 귀족의 호흥을 얻으어 이루어졌다. 얼라리요, 미시미바, 쿠레 1세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독립전쟁은 마침내 ―사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나―970년대에 이르러 발키로르 제국게파르티아에서 축출한다.

누니무츠와 아슈트카이트-게파르토 전쟁

게파르토가 발키로르 제국으로부터 자유로워진 974년, 성군 쿠레 1세의 붕어 이후 야니미츠게파르티아의 황제로 즉위한다. 야니미츠독립전쟁의 공신인 신성주 귀족 가문들의 권력을 경계했다. 야니마츠는 대표적으로 타 황제교 국가와의 관계를 우려해 대외적으로 게파르티아의 왕을 칭하던 상황에서 대외적으로 황제를 칭하는 "대외제국화" 등과 같은 행보를 보이며 황권의 강화를 도모했다. 그러나 이는 귀족들과 기득권의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이 권력투쟁의 증거로서, 야니미츠쿠레 2세의 재임기간은 20년에 이르지 못할 정도로 난전을 겪는다. 그러나 1004년, 쿠레 2세의 형제인 누니무츠가 즉위하며 상황은 급격하게 반전된다.

쿠레 2세게파르티아의 황제로서 즉위하자 아슈트카이트 영방국가연합오타카레 왕국이 게파르토를 침공한다. 당시 아슈트카이트 영방국가연합플라니아 왕국황제교 교황의 대관을 통해 최고왕을 독점하다가 황제교 교황의 대관 없이 영방국가 간의 협의에 의해 최고왕을 선출하면서 권력의 집중이 약화되었다. 그러한 배경에서 오타카레 왕국디트리히 3세아슈트카이트 영방국가연합의 동부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황제를 자칭하는 게파르티아의 황제를 굴복시키고자 했다.

강력한 디트리히 3세의 군대는 바르투강을 따라 신성수도 모지리로 진격했고, 노르트란트 신성주는 순식간에 함락된다. 열세에 황제와 권력다툼을 일삼던 귀족들은 디트리히 3세에로 전향했고, 누니무츠는 열세인 상황 속에서 군대를 이끌고 아르트노이세 신성주에서 디트리히 3세와 격돌한다. 누니무츠준인종 부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예상을 깨고 디트리히 3세의 군대를 격파한다. 디트리히 3세의 군대를 격파한 누니무츠의 권위가 천정부지하면서, 동시에 디트리히 3세에 전향한 귀족을 제거하면서, 귀족에 대한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1010년, 아슈트카이트 최고왕으로 발프리트 2세가 즉위하면서 교황의 대관을 받기 위해 디트리히 3세를 비롯해 여러 왕국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이끌고 다시 게파르토를 침공한다. 이에 누니무츠는 다시금 준인종을 대대적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전간기 동안 조직한 강력한 군대를 통해 발프리트 2세의 군대와 맞섰다. 전쟁은 수 년간 이어졌으나, 결국 1012년 폴크스 신성주보켄타르데 전투를 마지막으로 아슈트카이트 영방국가연합의 침공을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대분열과 제2차 변경백 왕조

누니무츠 이후 약 60년 동안 태평성대를 이뤘다. 그러나 1060년 즉위한 니시마티오 2세는 자신의 어머니인 도틀리히 황후를 강간하며 파문이 일렀다. 니시마티오 2세의 비도덕적인 행패에 파문이 인 1065년부터 각 신성주들이 산발적으로 신성수도로부터 독립을 선포하면서 대분열이 이루어진다. 대분열 결과 황제의 권위는 무너졌고, 1100년대에 들어서 게파르토의 실질적인 영향력은 신성수도뵐케 신성주에 한정됐다.

황제의 이름에 의해 신성주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으나, 신성주 간의 충돌을 중재하는 데에 그 역할이 제한되었다. 대분열 이후 1121년까지 게파르티아의 황제의 기록이 소실되어 그 신성의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 미상의 황제가 붕어한 1121년, 신성수도게파르트가 구성원을 중심으로 다시금 라슬리시 1세의 전례가 남은 "신성 찾기"가 주목받았다. ―당대 귀족 사이의 편지를 통해―이견이 없던 신성 찾기의 결과, 쿠레 1세와 그 두 번째 측실 사이의 후손으로 가장 적법한 계승자인 게파르트 페렌츠게파르티아의 황제로 즉위한다.

페렌츠 2세황제의 위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압감에 시달렸다. 페렌츠 2세는 최소한의 업무만을 처리했고, 그의 뒤를 이은 야미레야느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페렌츠 2세에서 이어지는 제2차 변경백 왕조야느시1181년에 그의 아들인 예카네리에게 황제를 양위하여 방탕한 생활을 보내자 예카네리가 정신병을 얻어 야느시를 살해하고 자신 또한 음독자살하며 종말을 고한다.

도시왕조 시대와 대통합

1203년 예카네리의 자살 이후 1450년까지 게파르티아 전역이 도시 단위로 분열하는 도시왕조 시대를 겪는다. 도시왕조 시대 동안 신성수도 모지리는 총 15차례의 전투가 발생했으나, 그 중 10건은 신성수도 내의 내란으로 황제에 대한 존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신성수도뵐케 신성주의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기어코 신성수도 외성의 일부에 대해 통제력이 닿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1450년, 예카네리의 사생아라 주장한 쿠레 3세가 62세의 나이로 황제로 즉위한다. 당시 강력한 신성주 세력인 슈탄다르테 신성주쿠레 3세와의 협상의 결과로 그를 지지했다. 1470년대에 들어서는 게파르티아 남부의 농촌을 중심으로 신성수도에 대한 권위수복운동이 발생한다. 쿠레 3세는 즉위 직후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하며 신성주신성수도 간의 관계를 재편하고 군 체제를 정비했다. 신성수도슈탄다르테 신성주의 결집을 견제한 신성주에 의해 슈탄다르테 신성주에 대한 전쟁이 발발했고, 일부는 신성수도 모지리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기도 했다.

신성수도 모지리는 총 32차례의 공성전과 19차례의 포위전, 3차례의 최전과 2차례의 화전을 겪었다. "광명왕" 서보1492년 90세의 고령에도 알트버이스키 야카보쉬가 주도한 제13차 신성수도 공성전에서 군대를 이끌던 쿠레 3세가 전사하면서 황제로 즉위하고, 전쟁 기간 동안 약 200만 명의 인구가 사망하는 등 대통합 과정은 혼란스러웠다. 1530년, 서보에 의해 게파르티아 전국 통일령이 선언되며 대통합이 마무리 되었다.

대통합 왕조

자연환경

지리

게파르티아의 전통적인 권역은 노르트란트 신성주에서 다사르 신성주에 이른다. 1652년 에세르 배역을 통해 그란치프 제국의 영토인 에세르 지방이 게파르토의 일부로 편입되었는데, 역사적으로 게파르티아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1650년대 이후부터 에세르 신성주 일대를 노르더란트(Norderland), 게파르티아쥐들란트(Südland)라 부르는 경우가 발생했다.

게파르토에는 크게 4개의 강이 흐른다. 이 중 2개 뵈낙쉬트강(게파르토어: Bönaksüt, 에세르어: Puwinachswut 푸위낙스우트)과 드거저이강(게파르토어: Duguzui, 에세르어: Dugazek 두가젝)은 에세르 신성주에 위치해 있으며, 이 사이에는 부르두지에 내해(게파르토어: Wurduzie, 에세르어: Bardodużie 바르도두지에)가 형성되어 있다. 게파르티아에는 두 개의 강이 흐르는 데, 중부와 서부에 흐르는 벌러이강(게파르토어: Bului), 동부를 흐르는 바르투강(게파르토어: Wartu, 키르수스어: Warte 바르테)이 존재한다.

게파르토에는 크게 부더니골 산맥(게파르토어: Budanigor, 에세르어: Poudnigor 포우드니고르), 궤굴루티 산맥(게파르토어: Göguluti), 누를로터 산맥(게파르토어: Nurloter)이 존재한다. 궤굴루티 산맥게파르티아 북부에서 중부에 이르는 지역에 형성되어 있는데, 신성수도 모지리를 감싸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신성수도 모지리궤굴루치 산맥 중심에 운석이 낙하해 형성된 두르너 분지(게파르토어: Durner)에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성수도의 고도는 외곽일수록 높고, 내부로 갈수록 낮아지는 형성을 취한다. 궤굴루티 산맥 바로 남쪽에 누를로터 산맥이 형성되어 이들이 게파르티아를 동서로 가르는 경계선을 가진다. 대중문화에서는 이 두 산맥을 묶어 "형제의 산맥"으로 자주 의인화된다. 이러한 영향에 의해 만평과 시사 등지의 게파르티아는 주로 쌍둥이로 묘사된다.

기후

게파르티아 전역은 온대 기후에 해당한다. 신성수도뵐케 신성주를 중심으로 남북에 이르기까지 장마없는 사계절이 이어지며, 아열대 연중습윤 기후(Cfa)와 서안해양성 기후(Cfa)가 공존하는 "제국의 빵바구니" 지역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게파르티아 중부에서 에세르 지방에 이르기까지는 냉대 습윤 기후(Dfa), 아극냉대 기후(Dfa)에 해당하기 때문에 모두가 자라기 적합한 환경을 지녔다. 때문에 게파르티아귀리, 청보리, 수수 등 여러 작물과 사과, 등 온갖 과일의 산지로서 기능해왔다. "제국의 빵바구니"에서는 사실상 헤스페로스벨트에서 나는 작물들 대부분이 자라기 적합한 환경을 지니고 있어 게파르토 남부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체케데모어에는 헤스페로스벨트 최대의 곡물 거래소가 세워져있다.

게파르토의 평균기온은 모지리 기준 최난월 섭씨 20°C에서 최한월 영하 -3°C를 오간다. 에세르 신성주마가드를 기준으로 최난월 섭씨 24°C, 최한월 영하 –6°C를 오간다. 북서부의 하이츤 신성주, 폴크스 신성주, 아르트노이세 신성주, 노르트란트 신성주게파르티아에서 평균 기온대가 가장 낮은 지역으로, 농업 자체는 가능한 기후이나 남부의 신성주들에 비하면 경제적 활동이 공업과 금융거래에 치중되어 있다.

자원

벌러이강바르투강 사이의 슈탄다르테 신성주, 다사르 신성주, 지바레테 신성주, 슈라프트 신성주게파르티아의 전통적인 농업 중심지이다. 4개의 신성주는 에세르 배역 이전까지 게파르토 농업생산량의 50%를 담당하고 있었고, 이들을 합친 모양이 마치 그릇과 닮아있어 게파르토의 농업 종사자 사이에선 4개의 신성주를 합쳐 "제국의 빵바구니"라 일컫는다.

궤굴루티 산맥누를로터 산맥이 지나는 비르셰 신성주, 모페스크 신성주, 슈탄다르테 신성주, 다사르 신성주, 뵐케 신성주 일부는 광업과 공업이 발달돼있다. 특히 쌍둥이 산맥에서는 질 좋은 크로뮴, 황동, 구리, 이 생산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석탄, 이 매장되어 있으며, 특히 노르트란트 신성주에는 석유가 매장되어 있어 정유 시설이 발달해있다.

정치

황제


Gepartiui Biroda
게파르티아의 황제
Kure III
쿠레 3세
Subo
서보
Mikai
미하이
재위
1450년 __월 __일 ~ 1492년 __월 __일
재위
1492년 __월 __일 ~ 1534년 __월 __일
재위
1534년 __월 __일 ~ 1578년 __월 __일
생몰
~ 1492년 __월 __일
생몰
~ 1534년 __월 __일
생몰
~ 1578년 __월 __일
Se Biroda
Puszki
푸슈키
Orbana
오르바나
Dakaribago III
다카리바고 3세
재위
1578년 __월 __일 ~ 1609년 __월 __일
재위
1609년 __월 __일 ~ 1620년 __월 __일
재위
1620년 __월 __일 ~ 현재
생몰
~ 1609년 __월 __일
생몰
~ 1620년 __월 __일
생몰
~ 현재

게파르티아의 황제는 게파르토의 국가원수이다. 585년 다카리바고 1세가 왕국을 선포한 이래 약 108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게파르티아를 통치하고 있다.

대신내각

귀족

사법

행정 구역


Heiligenland
게파르토의 신성주
Heiligenstadt Moziri
신성수도 모지리
Zezöpheiligenland Bölke
뵐케 중앙신성주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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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파르토의 행정구역은 대통합 왕조 들어 이전까지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신성주들의 행정체계를 통합적으로 개편하며 확립되었다. 행정구역 개편은 뵐케 신성주신성수도 모지리 간의 관계에 영향을 받았다. 각 신성주를 지배하던 귀족의 정치적 영향력을 거세시킴이 목적으로 행정개편을 기점으로 귀족의 권력은 신성수도의 대신내각에 종속되었다.

게파르토의 행정 구역은 1개의 신성수도(게파르토어: Heiligenstadt 하일리겐슈타트), 1개의 중앙신성주(게파르토어: Zezöpheiligenland 제죄프하일리겐란트), 15개의 신성주(게파르토어: Heiligenland 하일리겐란트)로 구성된다. 신성수도 모지리중앙신성주 뵐케 신성주와 독립된 행정을 지닌다. 각 신성주 안에는 평균 1-2개의 주도시(게파르토어: Brovinz 브로빈츠)가 존재한다. 주도시는 게파르토의 권력구조가 귀족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으로, 대통합 왕조 이전에는 모든 신성주마다 도시주 중에 주시(게파르토어: Brovinzui 브로빈처이)가 하나씩 존재해 해당 신성주의 정치적 의견을 대표했다. 귀족의 정치적 영향력이 거세된 현재에 이르러 주시는 하나의 신성주에 경제적·행정적 중심지로 기능한다. 이외에도 주도시를 제외하면 84개의 도시(게파르토어: Brovin 브로빈)이 존재한다.

신성수도 모지리와 각 도시의 하위 행정은 (게파르토어: Hentai 헨타이), (게파르토어: Jarasy 야라시), (게파르토어: Borno 보르노)가 존재한다. 게파르토의 행정체계에서는 타국과 달리 대도시 특례가 적용되지 않아 1655년 이후 인구 이동, 출산율 증가 등으로 인구가 증가해도 이나 에로 변경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제

국방

사회

문화

대외 관계

같이 보기

  1. 북부 신성주의 방언을 분석해 문자의 발음이 /고피로/, /조파이로/라는 의견도 있다.
  2. 게파르토 사학계는 신성석판에 근거해 다카리바고 1세의 성을 "시파르마"라 주장하나, 키르수스 사학계는 그가 페르티나키아 씨족이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