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명제국 (아침해의 원유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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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제국(大明帝國)''', 또는 위명정권'''(偽明政權)'''은  1932년에 일본 제국이 중국 장시성을 위시로 한 남부 지방에 세운 괴뢰국이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약 13년간 존속하였으며, 일본이 내세운 왕도정치 사상의 거대한 실험실로서 기능했다.  
'''대명제국(大明帝國)''', 또는 위명정권'''(偽明政權)'''은  1932년에 일본 제국이 중국 장시성을 위시로 한 남부 지방에 세운 괴뢰국이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약 13년간 존속하였으며, 일본이 내세운 왕도정치 사상의 거대한 실험실로서 기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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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는 명목상으로는 제국을 선포하였으므로, 이후 역사를 감안하면 중국사의 마지막 군주국이라고 볼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완전한 주권국이 아닌 일본의 괴뢰국에 불과했다. 만주국의 설립주체는 대만군과 후쿠쇼군이었고, 일본인과 대만인, 푸젠인들을 이주시켜 대명제국의 토지와 물산들을 관리하게 하고 일본인들이 모든 관공서에서 활동하였으며, 푸젠인과 대만인을 제외한 중국인들은 대부분 관직에서 배제되었다. 치안 또한 일본군과 푸젠 출신 하급관료들이 전담했으며, 중국인은 철저하게 피지배층으로서 통치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대명제국의 정체를 중국 왕조의 역사에 산입하지 않으며, '괴뢰'라는 뜻의 '거짓 위(伪, 僞)' 자를 붙여 '위명국(伪明國)', 줄여서 '위명(伪明)'이라고 주로 부른다.  
명나라는 명목상으로는 제국을 선포하였으므로, 이후 역사를 감안하면 중국사의 마지막 군주국이라고 볼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완전한 주권국이 아닌 일본의 괴뢰국에 불과했다. 만주국의 설립주체는 대만군과 후쿠쇼군이었고, 일본인과 대만인, 푸젠인들을 이주시켜 대명제국의 토지와 물산들을 관리하게 하고 일본인들이 모든 관공서에서 활동하였으며, 푸젠인과 대만인을 제외한 중국인들은 대부분 관직에서 배제되었다. 치안 또한 일본군과 푸젠 출신 하급관료들이 전담했으며, 중국인은 철저하게 피지배층으로서 통치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대명제국의 정체를 중국 왕조의 역사에 산입하지 않으며, '괴뢰'라는 뜻의 '거짓 위(伪, 僞)' 자를 붙여 '위명국(伪明國)', 줄여서 '위명(伪明)'이라고 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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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1|장시성 침공을 주도한 일본푸젠군 고급참모인 이시하라 간지 등은 애초에 남중국영유계획(南中國領有計劃)에서 대만과 푸젠처럼 총독부를 설치하여 해당 지역에 대한 식민 지배를 구상했지만, 국제적 역학 관계상 어쩔 수 없이 별개의 독립국 수립 구상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중략)...하지만 대명국은 비록 '독립 국가'의 형태로 출범했지만 실제상 일본군이 '독립국이라는 형식을 통한 독특한 지배 전략'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는 식민지 괴뢰정부, 즉 기존 대한제국의 예케 몽골 울루스와 같이 주권을 형태적으로만 가지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였다.|리룽타오 교수, 위명국의 국적법을 둘러싼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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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이유가 사라진 대명제국에선 대규모 학생운동과 시위가 빈번히 일어나기 시작했고 결국 그해 6월  [[중화민국 (아침해의 원유관)|중국]] 국민당이 입성, 주자홍이 공식적으로 퇴위를 선언하며 대명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이후 국공내전을 거친 뒤 당시의 대명제국의 영토는  [[중화인민공화국 (아침해의 원유관)|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존재 이유가 사라진 대명제국에선 대규모 학생운동과 시위가 빈번히 일어나기 시작했고 결국 그해 6월  [[중화민국 (아침해의 원유관)|중국]] 국민당이 입성, 주자홍이 공식적으로 퇴위를 선언하며 대명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이후 국공내전을 거친 뒤 당시의 대명제국의 영토는  [[중화인민공화국 (아침해의 원유관)|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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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8일 (목) 22:43 기준 최신판

 [ 국가 목록 ] 
 [ 소개 ]  
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대한국

일본국

대금민국

러시아 차르국

중화민국

티베트 왕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마다가스카르 왕국

몽골

타이완민주주의인민공화제국

대한제국

대한 공화국

예케 몽골 울루스

대청제국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대명제국
大明帝國 | Empire of Ming | Mingkuo
일본 제국의 괴뢰국
국기 국장
왕도낙토
王道樂土
장시사변 이전 해체 이후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상징
국가
경운가
국화
수선화
역사
[ 펼치기 · 접기 ]
1932년 대명제국 건국
1937년 방공협정 가입
1945년 남방 대공세와 그로 인한 멸망
지리
수도
난창시
최대도시
난창시
연호
함희(咸熙)
위치
중국 동남부 장시성 및 그 주변의 영토들
주변국
일본 제국, 중화민국,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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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공용 문자
가나 문자, 한자
민족
야마토족, 한족 등
국교
국교 없음 (정교분리)
종교 분포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 신토 등
군대
명국군
정치 및 경제
[ 펼치기 · 접기 ]
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중국식 왕도정치(명목상)

전제군주제, 괴뢰국, 과두제, 일당제(사실상)

정부 수반
최고국무대신
국가 원수
(황제)
함희제 주자홍
여당
국무의회(명목상)

애국회(사실상)

통화
일본 엔, 대명제국 화 (貨)[1]
당시 함화제의 거처였던 위명황궁

개요

대명제국(大明帝國), 또는 위명정권(偽明政權)은 1932년에 일본 제국이 중국 장시성을 위시로 한 남부 지방에 세운 괴뢰국이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약 13년간 존속하였으며, 일본이 내세운 왕도정치 사상의 거대한 실험실로서 기능했다.

명나라는 명목상으로는 제국을 선포하였으므로, 이후 역사를 감안하면 중국사의 마지막 군주국이라고 볼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완전한 주권국이 아닌 일본의 괴뢰국에 불과했다. 만주국의 설립주체는 대만군과 후쿠쇼군이었고, 일본인과 대만인, 푸젠인들을 이주시켜 대명제국의 토지와 물산들을 관리하게 하고 일본인들이 모든 관공서에서 활동하였으며, 푸젠인과 대만인을 제외한 중국인들은 대부분 관직에서 배제되었다. 치안 또한 일본군과 푸젠 출신 하급관료들이 전담했으며, 중국인은 철저하게 피지배층으로서 통치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대명제국의 정체를 중국 왕조의 역사에 산입하지 않으며, '괴뢰'라는 뜻의 '거짓 위(伪, 僞)' 자를 붙여 '위명국(伪明國)', 줄여서 '위명(伪明)'이라고 주로 부른다.

역사

장시성 침공을 주도한 일본푸젠군 고급참모인 이시하라 간지 등은 애초에 남중국영유계획(南中國領有計劃)에서 대만과 푸젠처럼 총독부를 설치하여 해당 지역에 대한 식민 지배를 구상했지만, 국제적 역학 관계상 어쩔 수 없이 별개의 독립국 수립 구상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중략)...하지만 대명국은 비록 '독립 국가'의 형태로 출범했지만 실제상 일본군이 '독립국이라는 형식을 통한 독특한 지배 전략'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는 식민지 괴뢰정부, 즉 기존 대한제국의 예케 몽골 울루스와 같이 주권을 형태적으로만 가지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였다.
리룽타오 교수, 위명국의 국적법을 둘러싼 딜레마

수립 배경

존속 자체의 기간은 13년정도로 짧았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푸젠 조차, 이후의 식민지화로 남중국 일대로 갈 발판을 마련한 일본에 의해 식민화 작업이 준비되고 있었다. 즉, 중국을 향한 교두보 마련을 위한 남방점령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대중국 정책과 깊은 연관이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하 남방해운회사, 남방철도주식회사 및 후쿠쇼, 대만군 또한 자세히 다뤄지고 있다.

일본령 후쿠쇼

일본제국은 제 1차 동아시아 전쟁을 통해 푸젠 지역 일대를 조차했었고, 이후 의화단 전쟁때 이 지역을 기반으로 대규모 파병을 진행시켜 직속식민지로 편입시키는 성과를 낸 전적이 있었다. 특히 한러일 전쟁의 종결 이후 한국의 식민범위가 만주, 몽골 및 화북을 포함한 북방 지역으로 확정되는 듯 보이자 일본의 국가정책은 남쪽 방면으로 확장하는 것임이 기정사실이 되었고, 이에 따라 남중국 일대에 확보한 식민지들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2개의 국영기업이 새로이 신설되었는데, 남방척식기업으로 묶여서도 불리는 남방해운회사와 남방철도주식회사가 바로 그것이다.

남방척식기업과 푸젠군

남방해운회사와 남방철도주식회사는 쉽게 말해 일본제국 당국이 남중국 일대의 식민화를 위해 새로이 만든 기업으로, 단순 기업 수준이 아닌 광업, 해운, 항만, 부두, 발전, 숙박, 창고업, 제철, 조사 활동에 이르며, 출자 회사, 조성 회사, 지방 시설, 교육시설까지 포함한 초거대 국책 기업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해운회사의 경우 일본제국의 육군보다는 해군에 좀 더 가까운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남중국 지방에 닿는 영향력이 푸젠을 제외하면 내륙, 혹은 육군이나 철도의 영향력이 더 큰 지방이라 사실상 일본제국의 육상식민활동을 위한 기업들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 외에도 당시 푸젠 지방의 일본령 후쿠쇼 일대를 전담하던 푸젠군의 경우 일전부터 중국의 코앞이라는 지형적 특징과 일본 최대 식민지 중 하나라는 특징 때문에 대만군, 남양군이나 우로지요군보다 많은 지원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러한 환경은 푸젠군이 단순한 푸젠 관할 이상의 권력과 무력을 쥐게 해주는 발판이 되었다. 중국이 내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1910년대 말기 부터는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군비를 더 증강했고, 군부의 입김이 강해지기 시작한 뒤에는 마침내 그 영향력을 푸젠 밖으로 뻗치는 사건이 발발한다.

장시사변, 그리고 건국

1927년, 일본군은 국민당의 1차 서진으로부터 일어날 수 있는 마찰로 인해 피해를 볼 수 있으니 푸젠 일대에 거주하는 일본 거류민과 권익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1차 남중국 파병을 단행했다가 외교적인 문제로 철수했으나, 국민당의 2차 서진이 진행되던 와중인 1928년에 2차 남중국출병을 단행,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을 습격하면서 주장 사건을 일으켰다. 주장 사건 자체는 흐지부지하게 끝났으나, 일본은 남중국진출정책을 추구하면서 장시성과 그 일대 지방을 중화민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분리하여 일본의 권익 영역으로 삼으려 했다. 고모토 다이사쿠 등 강경파는 퇴각하던 오성연군의 총사령관 쑨촨팡을 암살하는 등 극단적 수단까지 서슴지 않았으나,오히려 지도자가 비어버린 오성연군이 장개석의 세력에 복수를 위해서 입조하고, 남방진출정책을 추진하던 다나카 기이치 수상도 황고둔 사건을 처리하다가 덴노의 분노를 사서 사임해야 했다.

하지만 푸젠군의 일부 과격파 장교들은 여전히 추가적인 중국 진출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과격파 장교들은 일본 제국의 내부적인 문제로 당면한 경제 위기와 국내의 사회 혼란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 바로 대외를 대상으로 한 모험적 정책을 통해 그 출구를 찾게 되었다. 이때 대공황으로 도탄에 빠진 농민들에게 육군이 추진하고 있던 '국방사상 보급 운동'을 통해 남중국의 기름진 땅과 벼농사에 제격인 기후, 풍부한 자원들을 보라며 "국내에서 눈을 외부로 돌려야 한다.", "남의 것을 탐내는 것을 칭찬할 수는 없지만, 사느냐 죽느냐 하는 마당에 그 남중국의 비옥한 토지를 좀 달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고 선동했고, 국가적으로는 일본 농민 50만 명과 기타 광부들이 남중국으로 이주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하는 시기였다. 1930년 말에는 중국 동남 지역의 재류 일본인의 수가 20만 6,700명에 달해 해외에 거주하는 최대 일본인 집단이 되어 사실상 일본 내지의 과잉인구를 배출하는 배출구 구실을 하였고[2], 그들은 이미 동남지역의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상태였다.

일본의 중국 동남부 점령 계획은 어디까지나 북수남진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일본의 대외 정책에 대한 일본군의 전반적인 작전 계획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 중 하나일 뿐이였다. 이를 위해 푸젠군 작전주임 참모 이시와라 간지가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결탁, 이미 침략 준비를 완료해 놓은 상태였고, 1931년 9월 18일 푸젠군의 음모로 광청사건[3]이 일어났는데 육군 중앙부에 통보된 것은 18일 심야의 일이었고,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은 19일 아침 식사를 하며 신문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건의 발생을 알았다. 푸젠군은 사건 발생 18시간 만에 장시성을 비롯한 남부 지방의 중요 지점을 모조리 석권해 버렸고, 지원 요청을 받은 데라우치 히사히치의 대만군은 국경을 넘지 말라는 중앙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21일 남중국 일대로 상륙한 뒤 본격적으로 진입하였다. 일본 정부는 초기에는 사변 불확대와 국지 해결 방침안을 결의하였으나, 사건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지경으로 진행되어버려 어쩔 수 없이 추후 승인하는 형태로 푸젠군과 대만군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1932년 1월 28일에, 상하이에서 일본인 승려들이 습격을 받는 마옥산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세계 각국의 관심을 동남지방에서 떼어내 상하이로 옮겨놓은 사이에 추가적인 화둥 지방 점령을 통한 대명제국의 건국을 촉진하려는 계략이었다. 푸젠군의 의뢰를 받은 상해주재 무관 보좌관 다나카 소령에게 매수 당한 중국인들이 범인이었다.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고 각국의 시선이 세계적인 경제 대도시인 상하이에 집중된 사이에, 대명국의 건국에 착수했다.

1932년 2월 난창시에서 이름하 '국가 재건위원회'를 조직, 국호는 최종안으로 중국사에서 가장 정통성 있던 왕조국가인 명나라의 후계를 잇는다는 뜻으로 '대명제국'이 선택되었고, 당시 장시성 일대의 거물이었던 주원장의 후송 주자홍이 황제로 선출된 뒤, 연호는 함희(咸熙)로 정해졌다.또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패도정치 및 일본 당국에서 오염되었다고 주장한 중화민국의 삼민주의와 대응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정치적인 실현을 국가적인 슬로건으로서 내세웠다.

이리하여, 1932년 4월 1일 대명제국의 성립을 선언하면서 난창을 수도로 삼았다. 근방 호텔에 머물고 있던 주자홍(함희제)는 3월 9일 기차를 타고 난창에 도착한 뒤, 이 날 오후 시청에서 열린 명나라 재건국대전(大典)에서 장징후이로부터 량훙즈로부터 구 송나라에서 보관중이던 순금의 옥새를 봉정받고 집정 취임을 선포하였으며, 중화민국으로부터 결별과 독립을 선언하고 오후 5시에 의식을 마쳤다.

수립 이후

신흥 대명제국은 일본 이하 17개국에 대해 승인을 요구하는 대외통고를 발했다. 그러나 열강 대부분은 그저 통보를 받았다는 응답으로만 일관했고, 영국은 이마저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일본 정부가 정식으로 대명제국을 승인한 것은 1932년 9월 15일이었지만 이에 이르기 위해서는 5.15 사건에 따른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의 암살이라는 불상사를 거쳐야만 했다.

같은 해 9월, 일본은 일명의정서(日明議政書)에 조인하고 대명제국을 정식으로 승인하였으며, 이어서 대한제국, 엘살바도르, 바이마르 공화국, 폴란드, 이탈리아 왕국, 코스타리카, 불가리아 왕국, 스페인, 헝가리 왕국, 도미니카 공화국 등의 일부 나라가 승인하였다. 당연히 국제 연맹의 승인은 받지 못하였고, 얼마 안 가 배후의 푸젠군과 대명제국은 1933년 광둥사변을 일으켜 중국 광둥성의 일부마저 병탄했다.

이듬해 3월 1일에는 재건국 1주년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고, 4일에는 난창에서 열병식을 가졌다. 이는 대명제국이 국가라는 것을 입증하려던 일본의 시도로서 현대 사학계에서는 분석하고 있으며, 이를 증명하듯 산업화와 농지 개간도 확장되어 1941년에 가면 대명제국의 인구는 총 5000만명으로 증가했다.

멸망

하지만 문자 그대로 중국인들이 채워져 있던 토지에 세운 전제정권에 기반한 괴뢰정부인 대명제국의 국정 운영은 절대로 쉽지 않았고, 태평양 전쟁기와 중일전쟁기에 접어들어서는 극도로 통제력이 불안정해졌다. 결국, 본국에서 사용할 석유의 양조차 불안정해진 일본제국은 외지인 푸젠의 방위를 위해 공식적으로 1945년 4월 7일에 대명제국에서 정식으로 철수했다.

존재 이유가 사라진 대명제국에선 대규모 학생운동과 시위가 빈번히 일어나기 시작했고 결국 그해 6월 중국 국민당이 입성, 주자홍이 공식적으로 퇴위를 선언하며 대명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이후 국공내전을 거친 뒤 당시의 대명제국의 영토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기타


  1. 화화의 낮은 가치 때문에 주로 일본 엔화가 통용되었고, 한국의 점령지였던 청도와 가까운 지역에서는 원화도 가끔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은화의 발행 또한 이루어졌으나, 1940년대에 공출이 명나라에서도 이루어지면서 해당 제도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2. 우로지요와 사할린은 척박한 기후 탓에 진출도 힘들었고, 이중 우로지요를 위시로 한 프리모예나 그 근처인 만주는 한국의 이권이 깊게 얽혔던 곳이라 일본의 영향력이 비교적 약한 편이었다. 결국 자연스레, 일본인들은 가장 비옥한 식민지인 푸젠을 통해 중국 동남부로 진출할수밖에 없었다.
  3. 광청 일대의 조선업 부품 공급처와 철도를 폭파시켜 이를 중국의 음모라고 주장한 자작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