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 (아침해의 원유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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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4일 (수) 19:0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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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개 ]  
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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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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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 2대 황제
순종 효황제 이훈| 高祖 孝皇帝 李塤
출생 1874년 3월 5일
조선 한성부 계동궁 태경실
즉위 1899년 12월 5일 (25세)
대한제국 한성부 경운궁 환구단
사망 1929년 2월 10일 (55세)
대한제국 한성부 구로구 어용저
능묘 유릉(裕陵)
재위 제 27대 조선국 국왕
1899년 12월 27일 ~ 1929년 12월 13일
초대 대한제국 황태자
1894년 5월 3일 ~ 1899년 12월 5일
대한제국 제 2대 대황제
1899년 12월 27일 ~ 1929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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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의 27대 국왕이자,대한제국의 2대 황제.

고조가 59세때 본 늦둥이 동생이인 공친왕 이원과 차남인 예친왕을 동생으로 둔 장남이었기에 안정적으로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아버지인 고조의 뒤를 이어 제 2대 황제로 즉위했다. 막후공작, 권모술수에 능했던 선황에 비하면 너그러운 면모가 강했으며, 그의 치세에 대한제국은 호황과 불황을 동시에 맞았다.

젊은 나이에 즉위한데다가, 아버지에 비하면 권모술수에 능한 공신들을 통제하기 힘들었던지라 이 시기 자연스레 왕권에 약화가 생기기도 하였고, 이는 이후 공신들의 정치독점에 반발하여 일어난 융희년 민권운동을 통해 입헌군주제가 확립되는 배경에 기여하기도 했다.

생애

유년기

1874년 3월 5일, 고조와 순경효황후 조씨의 장남으로서 태어났다. 이후 유아기 시절은 조선의 방식대로 교육을 받았으나, 12살이 되던 해 부터는 초빙된 서양 교사들 또한 교육에 참여했고, 이후 수학원에서의 학습을 완료했다.

당시 그를 가르치던 사람들은 주로 프랑스와 독일 출신 교사들이었는데, 이 여파로 아버지인 고조보다는 진보적인 면이 강한 군주로 성장하게 되었다.

청년기

수학원을 졸업한 이후 공식적으로 황태자에 책봉됬고, 1890년대부터는 쇠약해진 고조 대신 대리청정을 통해 국정에 일부 개입했으나, 공신들에 비하면 권력을 다루는 능력이 미숙하여 아버지에 비견될 수준의 재능은 보이지 못했다. 이때부터 종종 주변인물들에게 정치의 고단함에 대해 털어놓았던 것으로 기록되었다.

정치 100단인 아버지의 동료진들 사이에서 고독한 심정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는지, 여동생들과 막둥이인 그의 동생 공친왕을 많이 귀여워했고, 자주 놀아줬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3년에는 그의 식사에 만주족 애국자가 독을 탄 커피를 섞어서 올렸으나 몰래 훔쳐서 마시던 시종이 즉사하는 바람에 음모가 발각되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오히려 황실 측에서 만주에 대한 압박용으로 그를 1895년 심양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이후 1899년, 고조가 병사하자 공식적으로 즉위했으며, 세계 각국에서 그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을 파견했다.

즉위 이후

30년 동안 이어진 긴 치세동안 여러 일이 발생한것으로 유명하며, 의화단 전쟁 - 한러일 전쟁 -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 금관작전과 시베리아 출병 - 한일동맹 체결 - 미리견 위기 등 국내외를 포함하여 굵직한 사건사고가 있었다. 만주사에서는 만주한치시기 무단통치 - 3.1 운동 - 이동휘 총독의 문화통치를 겪었던 기간이며, 일본사에서는 역시나 중요하게 취급되는 메이지 시대 말기와 다이쇼 시대가 겹치는 기간이다.

광무제에 비하면 황제로서의 권위는 약했으나, 공신들과 의회의 결정에 충분히 반대할 수 있었음에도 대부분의 안건에 동의하였다. 오늘날까지 학자들은 이를 두고 그가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다는 증거라고도 하고, 공신들과 정치인들에게 눌려서 아무것도 못하는 신세였던 것의 증거라 주장하는 등 많은 논의가 오고가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확실한 결론은 내려지지 못하고 있다.

확실하게 그의 왕권이 약해진것은 1913년 박영효 내각의 비리가 밝혀지면서부터로, 이때 내각총사퇴를 기점으로 민주주의 열풍이 불어오자 신료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실질적인 입헌군주제 정착에 나섰다. 이 개정으로 바뀐 최종안은 황제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업무의 범위를 줄이고, 중추원이 지명하지 않은 국회의원도 총리대신이 될 수 있는 개정안이었고, 이 제도와 연전연승을 통한 경제적 대호황으로, 융희 낭만이라는 말이 생길정도로 그의 치세 중말기는 밝은 편이었다.

다만, 종종 공신들에게 조언과 자신의 의견을 말하곤 했다고 한다. 예시로 의화단 전쟁 당시엔 영토는 영유권을 확고히 하는 정도와 거액의 배상금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1차 세계대전 당시엔 협상국 참저론을 지지하면서 결과적으로 대한제국이 열강으로 진입할 길을 마련하게 해주었다.

중년기

중년에 접어든 기간은, 그의 치세에서 대한제국이 안정기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는 시대였다. 민권운동을 시작으로 기존의 개화당 공신정치가 종료되고 정당이 활성화되었으며, 선거권 확대를 위한 목소리, 그리고 노동자 계급의 투쟁 격화 등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후 공무로 인해 늘상 유약한 성격 탓에 신료들과 정치인, 공신들에게 전과 같이 억눌렸으며, 이는 융희제 대에서 황제의 권력이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1차대전으로 인해 공무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그의 정신적 압박 또한 더 가중화되었다.

결국, 1921년부터 결핵을 앓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황태자인 이영에게 섭정을 맡긴 뒤 활동을 자제했다.

노년기

노년에 들어서는 병세가 악화되었다가 겨우 회복에 성공했고, 요양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때 전면에서 활동하던 때와 달리 많이 편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정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그의 병세는 악화되었고, 하필 이 과정에서 감기에 걸린 총리대신이 올린 문서로 옮는 바람에 병세가 확연히 악화되었다.

결국 1929년, 가족들과 친척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감기의 악화로 인해 숨을 거두었다. 사후 묘호는 순종(順宗)으로 결정되었으며, 능묘는 유릉으로 결정되어 그곳에 묻혔다.

가족관계

  • 부인 순경효황후(純慶孝皇后)
  • 장남 이영 황태자
  • 차남 순친왕 이곤

평가

순종의 치세는 광무 대제가 쌓아올린 것들을 지키고, 그를 해하려는 방해물들을 부수는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음험하고 탁월했던 고조의 수족들과 동료진들을 휘어잡을 수는 없었으나, 작지만 예리했던 통찰력을 가진 그가 중신들에게 해준 일련의 조언들은 임신년 이래의 성과들이 완전히 형태를 잡을 수 있게 하였고, 더 나아가 한국을 열강으로서 거듭날 수 있게 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사에 길이 남을 탁월한 업적들 사이에 순종 그 자신이 직접 빛난 적은 한없이 미미했지만.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순종 실록' 편

비상한 두뇌와 정치력, 음험할 수준의 막후공작을 보여줬던 고조 광무제에 비하면 정치가적인 면모는 적은 편이었으나, 온화한 성격 속에서도 부친의 통찰력만큼은 확실하게 물려받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대외 정책에서는 대체적으로 중신들의 의견을 따르고 가끔 소소한, 그러나 통찰력이 느껴지는 조언을 내기도 하였었고, 잘못했다면 한국을 폐전으로 추락시킬 수 있던 동맹국과의 협조 여론도, 황제의 권위를 이용해 위험부담이 크다는 우려를 보냈고, 이는 협상국 동조파에 무게를 실어 동맹국 동조파들의 의견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그러는 한편 백성들의 목소리였던 민권운동에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 한국에 본격적인 입헌군주제의 정착이 이루어지게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당대에는 그저 순간의 민주주의 열풍으로 끝났다는 비판도 있었으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 헌전인사들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한국 사회에 남겨두어, 다음 치세에서 일어날 독재행위에 저항의 씨앗을 조금이라도 뿌려놓을 수 있었다.

어록

여담

유교가 주 사상인 한국 황실에서 의외로 불교에 대해 학문적인 흥미가 있었다고 하며, 실제로 고려시대 불경을 몇 개 구입하기도 하는 등 연구도 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개중

정치에 관심이 적어서인지는 몰라도, 비교적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 예시로 전국순방 당시 서경 평양부의 유명 음식점을 잠시 방문해 직접 음식을 시식하기도 했으며, 주한일본공사로 새로 임명된 하라 다카시를 손수 환영하기도 하는 등의 행동이 있었다.

영덕이라고 이름붙인 개 한마리를 키웠는데, 한러일 전쟁 승전 이후 영국 왕실에서 왕실 웰시코기의 새끼들 중 한마리를 선물한 것이 이 강아지다. 집무 시간이 아닐 때 순종이 직접 놀아주기도 하는 등 그의 사랑을 받았다고.

융희실록에 따르면, 언어덕후였다고 한다. 유년시절부터 영어와 프랑스어를 우수한 성적으로 익혔으며, 중년이 됬을때는 혼자서 영어, 일본어, 만주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 7개국어가 가능한 수준이라 통역이 필요없을 수준이었는데, 때문에 황제의 통역이 되면 돈 벌 일은 없으니, 황실 측의 제의는 최대한 피하라는 농담이 당시 통역가 직종 사이에 번지기도 했다.

구 대청제국 황족들과 한국 황족들과의 결혼 당시, 융희제는 혜양공주를 부이의 신붓감으로 정하고, 덕혜의 아버지인 완흥군 이재황을 불러서 직접 명령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완흥군은 "내 막내딸을 갑자기 부르기에 기대했더니, 그런 책임을 떠맡아야 하냐"고 멘붕했다고. 그의 우려대로, 덕혜는 부이와 잘 어울리지 못했고, 상심 때문에 약한 정신병을 앓기도 했다.

비록 몰락했으나, 황태자 시절부터 대표적인 공신인 박영효와 꽤 친한 사이였다. 종종 후원에서 같이 시를 쓰기도 했다는데, 야사에 따르면 가끔은 벌주규칙을 도입해서 박영효를 골탕먹였다는듯.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2008년부터 2009년까지 방영한 드라마 《광야》에서 순박한 모습의 황제로 등장. 작중 정계 내 강경인사인 이완익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듯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그의 악행들이 드러나고 의회에서 그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하자 이완익의 본성에 분노하며 승인했다.

《응답하라 1924》에서 가출 후 잠시 사찰에 중으로 들어갔던 김정봉이 불경을 보고 있던 융희제와 마주치며 등장했다.

드라마 《왕조의 세월》에서 대한황실의 황제였던 그의 인생에 대해서도 다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