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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 {{아침해의 원유관}} | ||
{{대한국 황상}} | {{대한국 황상}} | ||
{{대한국 황실 (아침해의 원유관)}} | |||
{{아침해의 원유관 벽지}} | {{아침해의 원유관 벽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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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 class="wikitable" style="float: right; border:2px solid #e3ba62;max-width:450px;" | {| class="wikitable" style="float: right; border:2px solid #e3ba62;max-width:450px;" | ||
! colspan="5" width="450px" style="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 color: #b22222; font-size: 12pt; line-height: 1.7em" | 대한제국 제 2대 황제<Big><br>순종 효황제 이훈| 高祖 孝皇帝 李塤</Big> | ! colspan="5" width="450px" style="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 color: #b22222; font-size: 12pt; line-height: 1.7em" | 대한제국 제 2대 황제<Big><br>순종 효황제 이훈| 高祖 孝皇帝 李塤</Bi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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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4" style="font-size: ; | 1874년 3월 5일 | | colspan="4" style="font-size: ; | 1874년 3월 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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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4" style="font-size: | 조선 한성부 | | colspan="4" style="font-size: | 조선 한성부 계동궁 태경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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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rowspan="2" style="font-size: ; color: #b22222; background: #e3ba62;" | 즉위 | ! colspan="1" rowspan="2" style="font-size: ; color: #b22222; background: #e3ba62;" | 즉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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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6" style="font-size: ;" | 1899년 12월 27일 ~ 1929년 12월 13일 | | colspan="6" style="font-size: ;" | 1899년 12월 27일 ~ 1929년 12월 1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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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6" style="font-size: ; color: # | | colspan="6" style="font-size: ; color: #280e80; background: #E3BA62;"| '''초대 대한제국 황태자''' | ||
|- | |- | ||
| colspan="6" style="font-size: ;" | 1894년 5월 3일 ~ 1899년 12월 5일 | | colspan="6" style="font-size: ;" | 1894년 5월 3일 ~ 1899년 12월 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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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6" style="font-size: ; color: # | | colspan="6" style="font-size: ; color: #b22222; background: #e3ba62;"| '''대한제국 제 2대 대황제''' | ||
|- | |- | ||
| colspan="6" style="font-size: ;" | 1899년 12월 27일 ~ 1929년 2월 10일 | | colspan="6" style="font-size: ;" | 1899년 12월 27일 ~ 1929년 2월 1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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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colspan="1" width="24%" style="font-size: ; color: #b22222; background: #e3ba62;" | 부모 | ! colspan="1" width="24%" style="font-size: ; color: #b22222; background: #e3ba62;" | 부모 | ||
| colspan="4" align=left style="font-size: ; | | | colspan="4" align=left style="font-size: ; | 부황:[[이현 (아침해의 원유관)|고조 광무제 이현]] 모친:[[범성태황후 (아침해의 원유관)|범성태황후]] | ||
|- | |- | ||
! colspan="1" width="24%" style="font-size: ; color: #b22222; background: #e3ba62;" | 부인 | ! colspan="1" width="24%" style="font-size: ; color: #b22222; background: #e3ba62;" | 부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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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style="font-size: ; color: #b22222; background: #e3ba62;" | 연호 | ! colspan="1" style="font-size: ; color: #b22222; background: #e3ba62;" | 연호 | ||
| colspan="4" style="font-size: | 융희(隆熙) | | colspan="4" style="font-size: | 융희(隆熙) | ||
|- | |||
! colspan="1" style="font-size: ; color: #b22222; background: #e3ba62;" | 절일 | |||
| colspan="4" style="font-size: | 건원절(乾元節) | |||
|} | |} | ||
|} | |} | ||
{{목차}} | {{목차}} | ||
</div> | |||
<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 개요 = | = 개요 = | ||
조선의 27대 국왕이자,[[대한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한제국]]의 2대 황제. | 조선의 27대 국왕이자,[[대한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한제국]]의 2대 황제. | ||
고조가 59세때 본 늦둥이 동생이인 공친왕 [[이원 (아침해의 원유관)|이원]] | 고조가 59세때 본 늦둥이 동생이인 공친왕 [[이원 (아침해의 원유관)|이원]]과 차남인 예친왕을 동생으로 둔 장남이었기에 안정적으로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아버지인 고조의 뒤를 이어 제 2대 황제로 즉위했다. 막후공작, 권모술수에 능했던 선황에 비하면 너그러운 면모가 강했으며, 그의 치세에 대한제국은 호황과 불황을 동시에 맞았다. | ||
젊은 나이에 즉위한데다가, 아버지에 비하면 권모술수에 능한 공신들을 통제하기 힘들었던지라 이 시기 자연스레 왕권에 약화가 생기기도 하였고, 이는 이후 공신들의 정치독점에 반발하여 일어난 융희년 민권운동을 통해 입헌군주제가 확립되는 배경에 기여하기도 했다. | 젊은 나이에 즉위한데다가, 아버지에 비하면 권모술수에 능한 공신들을 통제하기 힘들었던지라 이 시기 자연스레 왕권에 약화가 생기기도 하였고, 이는 이후 공신들의 정치독점에 반발하여 일어난 융희년 민권운동을 통해 입헌군주제가 확립되는 배경에 기여하기도 했다. | ||
</div> | |||
<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 생애 = | = 생애 = | ||
== 유년기 == | == 유년기 == | ||
1874년 3월 5일, 고조와 순경효황후 조씨의 | 1874년 3월 5일, 고조와 순경효황후 조씨의 장남으로서 태어났다. 이후 유아기 시절은 조선의 방식대로 교육을 받았으나, 12살이 되던 해 부터는 초빙된 서양 교사들 또한 교육에 참여했고, 이후 수학원에서의 학습을 완료했다. | ||
당시 그를 가르치던 사람들은 주로 프랑스와 독일 출신 교사들이었는데, 이 여파로 아버지인 고조보다는 진보적인 면이 강한 군주로 성장하게 되었다. | 당시 그를 가르치던 사람들은 주로 프랑스와 독일 출신 교사들이었는데, 이 여파로 아버지인 고조보다는 진보적인 면이 강한 군주로 성장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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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29년, 가족들과 친척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감기의 악화로 인해 숨을 거두었다. 사후 묘호는 순종(順宗)으로 결정되었으며, 능묘는 유릉으로 결정되어 그곳에 묻혔다. | 결국 1929년, 가족들과 친척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감기의 악화로 인해 숨을 거두었다. 사후 묘호는 순종(順宗)으로 결정되었으며, 능묘는 유릉으로 결정되어 그곳에 묻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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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 가족관계 = | = 가족관계 = | ||
*부인 순경효황후(純慶孝皇后) | *부인 순경효황후(純慶孝皇后) | ||
*장남 [[이영 (아침해의 원유관)|이영]] 황태자 | *장남 [[이영 (아침해의 원유관)|이영]] 황태자 | ||
*차남 순친왕 [[이곤 (아침해의 원유관)|이곤]] | *차남 순친왕 [[이곤 (아침해의 원유관)|이곤]] | ||
</div> | |||
<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 평가 = | = 평가 = | ||
{| class="wikitable" style="border:2px solid #dcdcdc; border-left:6px solid #000;" | | {| class="wikitable" style="border:2px solid #dcdcdc; border-left:6px solid #00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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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비상한 두뇌와 정치력, 음험할 수준의 막후공작을 보여줬던 고조 광무제에 비하면 정치가적인 면모는 적은 편이었으나, 온화한 성격 속에서도 부친의 통찰력만큼은 확실하게 물려받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대외 정책에서는 대체적으로 중신들의 의견을 따르고 가끔 소소한, 그러나 통찰력이 느껴지는 조언을 내기도 하였었고, 잘못했다면 한국을 폐전으로 추락시킬 수 있던 동맹국과의 협조 여론도, 황제의 권위를 이용해 위험부담이 크다는 우려를 보냈고, 이는 협상국 동조파에 무게를 실어 동맹국 동조파들의 의견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그러는 한편 백성들의 목소리였던 민권운동에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 한국에 본격적인 입헌군주제의 정착이 이루어지게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 비상한 두뇌와 정치력, 음험할 수준의 막후공작을 보여줬던 고조 광무제에 비하면 정치가적인 면모는 적은 편이었으나, 온화한 성격 속에서도 부친의 통찰력만큼은 확실하게 물려받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대외 정책에서는 대체적으로 중신들의 의견을 따르고 가끔 소소한, 그러나 통찰력이 느껴지는 조언을 내기도 하였었고, 잘못했다면 한국을 폐전으로 추락시킬 수 있던 동맹국과의 협조 여론도, 황제의 권위를 이용해 위험부담이 크다는 우려를 보냈고, 이는 협상국 동조파에 무게를 실어 동맹국 동조파들의 의견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그러는 한편 백성들의 목소리였던 민권운동에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 한국에 본격적인 입헌군주제의 정착이 이루어지게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당대에는 그저 순간의 민주주의 열풍으로 끝났다는 비판도 있었으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 헌전인사들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한국 사회에 남겨두어, 다음 치세에서 일어날 독재행위에 저항의 씨앗을 조금이라도 뿌려놓을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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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 어록 = | = 어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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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담 = | = 여담 = | ||
유교가 주 사상인 한국 황실에서 의외로 불교에 대해 학문적인 흥미가 있었다고 하며, 실제로 고려시대 불경을 몇 개 구입하기도 하는 등 연구도 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개중 | 유교가 주 사상인 한국 황실에서 의외로 불교에 대해 학문적인 흥미가 있었다고 하며, 실제로 고려시대 불경을 몇 개 구입하기도 하는 등 연구도 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개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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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희실록에 따르면, 언어덕후였다고 한다. 유년시절부터 영어와 프랑스어를 우수한 성적으로 익혔으며, 중년이 됬을때는 혼자서 영어, 일본어, 만주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 7개국어가 가능한 수준이라 통역이 필요없을 수준이었는데, 때문에 황제의 통역이 되면 돈 벌 일은 없으니, 황실 측의 제의는 최대한 피하라는 농담이 당시 통역가 직종 사이에 번지기도 했다. | 융희실록에 따르면, 언어덕후였다고 한다. 유년시절부터 영어와 프랑스어를 우수한 성적으로 익혔으며, 중년이 됬을때는 혼자서 영어, 일본어, 만주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 7개국어가 가능한 수준이라 통역이 필요없을 수준이었는데, 때문에 황제의 통역이 되면 돈 벌 일은 없으니, 황실 측의 제의는 최대한 피하라는 농담이 당시 통역가 직종 사이에 번지기도 했다. | ||
구 대청제국 황족들과 한국 황족들과의 결혼 당시, 융희제는 혜양공주를 부이의 신붓감으로 정하고, 덕혜의 아버지인 | 구 대청제국 황족들과 한국 황족들과의 결혼 당시, 융희제는 혜양공주를 부이의 신붓감으로 정하고, 덕혜의 아버지인 완흥군 이재황을 불러서 직접 명령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완흥군은 "내 막내딸을 갑자기 부르기에 기대했더니, 그런 책임을 떠맡아야 하냐"고 멘붕했다고. 그의 우려대로, 덕혜는 부이와 잘 어울리지 못했고, 상심 때문에 약한 정신병을 앓기도 했다. | ||
비록 몰락했으나, 황태자 시절부터 대표적인 공신인 박영효와 꽤 친한 사이였다. 종종 후원에서 같이 시를 쓰기도 했다는데, 가끔은 벌주규칙을 도입해서 박영효를 골탕먹였다는듯. | 비록 몰락했으나, 황태자 시절부터 대표적인 공신인 박영효와 꽤 친한 사이였다. 종종 후원에서 같이 시를 쓰기도 했다는데, 야사에 따르면 가끔은 벌주규칙을 도입해서 박영효를 골탕먹였다는듯.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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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 | |||
2008년부터 2009년까지 방영한 드라마 《광야》에서 순박한 모습의 황제로 등장. 작중 정계 내 강경인사인 이완익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듯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그의 악행들이 드러나고 의회에서 그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하자 이완익의 본성에 분노하며 승인했다. | |||
《응답하라 1924》에서 가출 후 잠시 사찰에 중으로 들어갔던 김정봉이 불경을 보고 있던 융희제와 마주치며 등장했다. | |||
드라마 《왕조의 세월》에서 대한황실의 황제였던 그의 인생에 대해서도 다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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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아침해의 원유관]] | [[분류:아침해의 원유관]] |
2024년 4월 24일 (수) 19:0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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