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군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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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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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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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
大韓帝國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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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문서
역사·정보 군복 · 한국군 · 군부 · 좌독기 · 역사 · 군가 · 계급 · 해군무오론
편제 육군 만주군 · 해삼위군 · 지나파견군 · 몽고군
해군 제 1함대 · 북방함대 · 제 2 남방전대
공군 해상항공대 · 육상항공대 · 항공방위대 · 항공폭격대 · 항공전투대
인물 포로 · 재향군인
철도 만주철도주식회사 · 만주총독부 철도국 · 극동 시베리아횡단철도 건설회사
전술 제국결사옹위정신 · 신천지 계획 · 봉천타동 전법 · 북적정벌 작전
교육기관 대한제국육군사관학교 · 대한제국해군사관학교 · 대한제국항공사관학교 · 무관대학교
식민지 및 통치기관 만주총독부 · 연해총관부/러시아 통감부 · 몽고도독부
논란 대한제국군/문제점 · 한국의 전쟁범죄 · 애국사 ·

대한제국군
大韓帝國軍
대한제국 육군
大韓帝國陸軍
대한제국 해군
大韓帝國海軍
군기
창군 광무 1년(1894년)
해산 성덕 15년(1945년) 12월 12일
국가 대한제국
편제 대한제국 육군

• 만주군
• 해삼위군
• 중국군
• 몽고군
대한제국 해군
대한제국 공군

병역제도 모병제[1] → 징병제[2]
징집 연령 20세 남성 ~ (3년제)
후신 대한 국방군
지휘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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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 한성부 군부
최고통수권좌 광무제 이현(1894년~1907년)
융희제 이훈(1899년~1929년)
성덕제 이영(1929년~1944년)
육군대신 한성근 (초대)
노백린 (말대)
해군대신 이규풍 (초대)
신순성 (말대)
공군대신 이희두 (초대)
서왈보 (말대)

개요

대한제국의 군대이자 이전에 조선군을 개편한 한국군의 후신, 그리고 대한 국방군의 전신.

현대 대한국의 국가 방위를 책임지는 단체인 대한 국방군도 엄연히 군사조직이지만, 국방군이라는 명칭이 붙는지라 기본적으로 대한제국군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1945년 9월 9일에 공식적으로 해산된 대한제국의 군사조직을 의미한다. 종종 옛 한국의 군대라 해서 '구 한국군'이라고도 부르지만, 이 경우엔 칭제건원 하기 이전의 대한국도 포함될 수 있기에 통상적으로 대한제국군이라는 명칭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된다. 따라서, 본 문서에서 언급되는 한국군은 항복 이후 해산된 그 군대를 뜻한다고 보면 된다.

'황군(皇軍)'이라는 표현 또한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황제의 군대'라는 뜻이다. 보통 이 명칭이 자주 등장한 성덕시대, 융희시대 말기 이전에는 더 예스러운 표현인 황사(皇師: 똑같이 황제의 군대)가 더 자주 쓰였다. 제 2차 동아시아 전쟁 당시 한국군, 일본군과 싸워야 했던 중국인들은, 이 두 군대의 황군들을 누리 황(蝗)자를 써서 황군(蝗軍), 즉 '메뚜기 떼 같은 군대'라는 멸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흔히들 동시베리아 전쟁 당시 한국군이 시베리아에서 보여준 총폭탄 전법이나, 제국결사옹위정신같은 기행 때문에 한국군을 현 타이완 인민군과 같은 형편없는 수준의 군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으나, 대한제국의 서구화 직후에는 일본에 이어 가장 강력한, 특히 육군 면에선 일본을 넘는 가히 아시아 최강의 군대였다[3].

역사

최고 통수권자

광무 연호 개최 이후 지정된 대한국 국제에 따르면, 대한제국군의 최고 통수권자는 대한국 대황제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신하들로 구성된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이는 해당 방식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는 독일 제국 헌법과 같았으며, 심지어 영국도 군 통수권 자체는 국왕이 쥐는만큼, 군주제 하에서 이 조항만은 오늘날에도 의외로 보편적이다.

제정 목표는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한 광무제의 조치였다. 초기에 정치 100단인 광무제가 군권을 쥐고 있을때는 이 조항이 유효했으나, 상대적으로 카리스마가 덜했던 융희제의 대 부터는 정치인들과 군인, 공신들이 전체적인 군의 방향성을 황제에게 묻는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군을 통제한지라, 해당 조항은 그저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했다. 거기다가 최고 통수권자가 대황제라고 해서 대황제의 통제를 받았느냐하면, 아예 군과 결탁하여 집권에 성공한 김창암 내각이 들어선 성덕시대부터는 그조차도 아니었다. 물론, 유교적인 명분을 파시즘과 함께 도입한 김창암 정권인만큼 대황제의 상징성과 권위는 인정했고 실제로도 복종하는 자세를 취했으나, 실질적인 정책 추진에서는 대황제는 단지 재가만 할 뿐이고, 군부와 대한호국회의 결정에 계속 끌려다니는 모양새였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통제권의 역사가 있는 탓에, 현재 대한 국방군에서는 통수권을 내각총리대신에게 있음을 규정했다.

수뇌부

1941년, 동시베리아 전쟁 당시 기준이다.


대황제
명목상 통수권자

성덕황제

제국대호국경 겸 군부대신
실질적 통수권자
김창암

육군대신
홍범도

공군대신
이응준

해군대신
신성모

계급

군복

병과

군가

한국군/군가 문서 참조.

근대화의 선봉대 겸 출세길

해산

국방군의 차이점

여담


  1. 융희 6년(1905년)까지
  2. 융희 6년(1905년)부터
  3.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아시아에서 일본군을 제외하면 한국군을 막을 수 있는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일본군도 해군에선 압도적이었으나 육군의 무장과 위력 면에서는 한국군보다 모자랐고, 더불어 고조라는 한국사 최고의 성군 중 하나가 정부 권위의 강화를 위해 개화 과정에서 체제 및 군사력에 급진적인 변화를 준 것 또한 중요한 이유로 꼽힌다. 다만 중기부터는 늘상 압승으로 끝나는 침략전쟁만이 계속되었고, 군 내 원로들도 다 사라지고 군국주의 정신도 식민지를 넘어 전국에 퍼진데다, 소련과 시베리아에서 총격전을 주고받던 말기가 되었을때는 마치 옆나라 일본의 군대를 연상시키는 막장군대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