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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 생애 == | ||
=== 평범한 어린시절 === | === 평범한 어린시절, 그리고 교사생활 === | ||
=== | 1876년 8월 29일 대한국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순영, 모친은 곽낙원. 방계 조상 김자점 때부터 몇 대가 지나도록 숨어지내야 했던 아픈 과거가 있다. 인조 대의 영의정 김자점은 효종과의 갈등 끝에 북벌론을 청나라에 누설했고, 하마터면 만주로 압송될 뻔한 효종은 김자점을 처형했다. 동시에 김자점의 후원자였던 소용 조씨(인조의 후궁), 김자점의 손자이자 조귀인의 사위 김세룡 등도 함께 처형됐고, 김구의 11대조 김대충은 당시 개성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해주 텃골로 낙향해 양반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 이 때문에, 1880년대에 사족제도가 제정되고 난 이후에도 사족이 되기를 거부하고, 계속 신분을 숨긴 상태로 살아왔다. | ||
이후 출세를 위해 계속 공부하였고 처음에는 신식교육에 잘 적응하는 듯 했으나, 한계로 인해 결국 고등학교 졸업에서 끝을 맺고 목표로 하던 한성제국대한 입성은 포기했다. 대신 이후 학교에 일시적으로 취학하여 교사를 맡기도 했으며, 그에게 수강을 받은 학생들에 따르면 꽤 엄한 교사였다고. | |||
또한, 서양 서적에 관심이 많아 여러가지 책들을 종종 유교서적과 섞어서 읽곤 했다고 한다. 사회주의의 이념적 추구에도 어느정도 관심이 있어서, 자본론 등을 읽기도 했는데, 훗날 이 경험이 그의 사상에 영향을 끼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 |||
=== 병역 === | |||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김창암은 나라를 위해 이 전쟁에 참전할 것에 동조하며 교사직을 사퇴한 뒤, 군인이 되었다. 얼마 뒤 그는 육군 보병으로서 독일령 칭다오에 파견되었고, 이곳에서 상등병까지 진급했다. | |||
=== 변심과 창당 === | === 변심과 창당 === | ||
=== 만인지상이 되다 === | === 만인지상이 되다 === |
2024년 3월 3일 (일) 17:45 판
[ 국가 목록 ]
[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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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역대 내각총리대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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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 22,23대 내각총리대신 대한제국 제국호국경 겸 구국자 김창암 金昌巖 | Kim Changa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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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6년 8월 29일 |
대한국 황해도 해주목 백운방 텃골 | |
사망 | 1945년 10월 3일 |
대한국 한성부 파고다공원 | |
국적 | 대한제국→ 대한 공화국 → 대한국 |
최종 당적 | 대한호국회 |
재임 기간 | 1931년 7월 28일 ~ 1944년 12월 12일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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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제국의 정치인, 군인, 호국경, 독재자 겸 사상가.
아돌프 히틀러, 도조 히데키, 베니토 무솔리니와 함께 추축국 대표하는 인물이자, 한국 파시즘의 '마왕'이기도 했던 인물이다.
1931년부터 1944년까지 총 13년동안 한국의 정권을 잡고 있었으며, 첫 임기와 두번째 임기가 끝난 이후엔 아예 총리직을 폐직하고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전시체제를 명분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 짧게나마, 죽기 전까지 1년 간 일본 제국이 지원했던 대한 공화국 정부의 대막리지 또한 겸임했었고, 이후 파고다 공원에서 총살됬다.
위의 이력과는 별개로 현대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가 극에 당했을 당시의 시기를 상징하는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악명과 이름이 동시에 알려진 유명 정치인이자 업적에 비해 허무한 죽음, 한국 민족주의의 총본산이라 불릴 만한 해동성맹 계획을 위해서 추축국 가담을 지도하고, 소련과의 전쟁도 불사르지 않은 점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는 확고하다.
생애
평범한 어린시절, 그리고 교사생활
1876년 8월 29일 대한국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순영, 모친은 곽낙원. 방계 조상 김자점 때부터 몇 대가 지나도록 숨어지내야 했던 아픈 과거가 있다. 인조 대의 영의정 김자점은 효종과의 갈등 끝에 북벌론을 청나라에 누설했고, 하마터면 만주로 압송될 뻔한 효종은 김자점을 처형했다. 동시에 김자점의 후원자였던 소용 조씨(인조의 후궁), 김자점의 손자이자 조귀인의 사위 김세룡 등도 함께 처형됐고, 김구의 11대조 김대충은 당시 개성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해주 텃골로 낙향해 양반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 이 때문에, 1880년대에 사족제도가 제정되고 난 이후에도 사족이 되기를 거부하고, 계속 신분을 숨긴 상태로 살아왔다.
이후 출세를 위해 계속 공부하였고 처음에는 신식교육에 잘 적응하는 듯 했으나, 한계로 인해 결국 고등학교 졸업에서 끝을 맺고 목표로 하던 한성제국대한 입성은 포기했다. 대신 이후 학교에 일시적으로 취학하여 교사를 맡기도 했으며, 그에게 수강을 받은 학생들에 따르면 꽤 엄한 교사였다고.
또한, 서양 서적에 관심이 많아 여러가지 책들을 종종 유교서적과 섞어서 읽곤 했다고 한다. 사회주의의 이념적 추구에도 어느정도 관심이 있어서, 자본론 등을 읽기도 했는데, 훗날 이 경험이 그의 사상에 영향을 끼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병역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김창암은 나라를 위해 이 전쟁에 참전할 것에 동조하며 교사직을 사퇴한 뒤, 군인이 되었다. 얼마 뒤 그는 육군 보병으로서 독일령 칭다오에 파견되었고, 이곳에서 상등병까지 진급했다.
변심과 창당
만인지상이 되다
그의 계획
폭주, 그리고 최후
평가
의의와 영향력
평가
기타
어록
동시베리아 전쟁 개전 이후 광화문 광장에서
백범일지, 나의 조국에 대한 바람 中
팔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