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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대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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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현황제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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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 제28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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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 3대 황제 선종 현황제 이영| 宣宗 顯皇帝 李鈴 | ||||||
출생 | 1897년 2월 20일 | |||||
대한제국 한성부 창경궁 명정전 | ||||||
즉위 | 1929년 2월 12일 (32세) | |||||
대한제국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 ||||||
사망 | 1984년 5월 19일 (87세) | |||||
대한국 한성부 창덕궁 관물원 | ||||||
능묘 | 위릉(威陵) | |||||
재위 | 제 28대 대조선국 국왕 | |||||
1929년 2월 12일 ~ 1944년 12월 27일 | ||||||
대한제국 황태자 | ||||||
1910년 2월 18일 ~ 1929년 2월 12일 | ||||||
대한제국 제 3대 대황제 | ||||||
1929년 2월 12일 ~ 1945년 11월 27일 | ||||||
대한국 태상황제 | ||||||
1945년 11월 27일 ~ 1984년 5월 1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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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제국의 3대 황제이자, 대한국의 초대 황제이자 상황. 또한 한국사에서 2번째로 장수한 황족이기도 하다.
한국사에서 마지막으로 태어난 광무시대 태생 황제이기도 하며, 동시베리아 전쟁 종전과 황태자 이은의 요절, 패전 등을 거친 이후 나라를 잘못 이끈 것에 대한 책임을 선언, 계승순위 2순위였던 이연에게 양위한 뒤 본인은 상황으로서 지내다 1984년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생애
유년기
광무 21년(1897년) 2월 20일 황태자 이훈과 순경효황후 최씨의 장자로 출생했다. 당시 60세를 넘긴 채 병환으로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고조는 손자의 탄생을 크게 기뻐하였다고 하며, 병든 몸을 이끌고 자라난 손자가 볼 책을 손수 필사(筆寫)할 정도의 기대를 보였다고 한다.
당시 어머니인 최씨는 잔병치레가 많은 체질이였던 탓에 아이를 직접 양육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그렇기에 그녀의 신체가 병약해지자 선종의 양육은 한동안 내명부의 여관 중 하나인 민씨가 담당했다. 이 탓에 후일 최씨의 상태가 병치레가 거의 없을 수준으로 호전되고 선종과 다시 대면했을 때 어린 선종은 그의 본래 어머니가 따로 있었음을 알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인 순종은 이현이 어느정도 성장하고 난 시점부터 유달리 애정을 쏟았다고 하며, 부친이 황제로 즉위함에 따라 3세의 나이에 황태자로 등극하여 수학원 초등과에 입학한 후부터는 황위계승을 위한 교육을 받았다. 그의 권력관은 제조상궁과 교사, 훗날 그의 교육을 완성시킨 태자시강원의 사람들을 거치묘 서서히 형성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유년 초반의 부재와 아버지에게서 받은 자상한 대우는 그의 권력욕이 옛 열성조의 군주들이 으래 가지곤 했던 권력관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단초를 제공했다.
청년기
15세가 되던 해에는 황친군무학령(皇親軍務學令)에 따라 육군무관학교에서 수료한 뒤 시위대(侍衛隊) 제 1대대에서 참위로 복무하였으며, 이때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등장했던 비행기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알려진다. 그의 동생인 예친왕 이천과는 원체 사이가 좋았던 탓에 군 내에서도 바늘에 실 가듯 서로 동행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고 하며, 성격적으로는 개방적이였지만 상대적으로 잘생긴 외모 덕에 처세법에 좀 더 능숙했던 이천이 종종 대외업무를 도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3년간의 복무를 마친 후 그는 융희 18년(1918년) 군에서 전역하였으며, 이후 양씨를 황태자비로 들였다. 이후 1년 늦게 전역한 동생인 이천이 잠시 순방차 영국에 들린 경험을 듣고 유럽 여행에 대한 꿈을 가졌으며, 때마침 3년 후인 1921년 순종은 자신의 병환이 서서히 악화될 조짐이 보이자 선종의 견문을 넓히고, 유럽에서의 관계우호를 증진시킬 의도로 선종의 유럽 여행 계획을 수립시키자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당시 신료들에 의해 반대가 일기도 하였으나, 총리대신직을 맡고 있던 서재필이 서양과의 우호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사실상 이러한 의견이 묵살되었다.[1]
이후 선종은 1921년 1월 15일 잠시 외교상의 목적으로[2] 일본에 방문했다. 황태자 시절 1907년의 방한으로 한국에 친한 감정이 있던 다이쇼 덴노는 우방국의 황태자인 선종을 극진하게 대접하였다고 한다.
3월경부터는 본격적으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유럽국가들을 순방하였다. 영국을 순방할 당시 그는 순방날짜가 겹친 히로히토를 처음으로 만났다고 하며[3], 선종은 훗날 다이쇼 덴노는 처음에 다가서기 쉬웠지만 그의 건강 탓에 다시 보지는 못했고, 쇼와 덴노는 소심한 성격 탓에 처음엔 다가서기 어려웠으나 훗날 1983년 당시에 다시 만났을때는 기이하게도 대면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순방이 종료된 이후 대한제국으로 귀국할 시점 순종의 건강이 악화되자, 그는 곧 섭정(攝政)으로 취임해 대리청정을 맡게 되었다.
섭정 시절
당시 대한국 정계에선 원훈들의 지위가 고조의 붕어 이래 시간이 흐르며 오를 대로 오른 상황이였지만, 군상대권의 직접적인 제약은 그 원훈들의 정점에 오른 김옥균에게 있어서도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일이였다. 이러한 탓에 형식상 익문사의 권한 등은 익문사를 통한 공작을 그리 적극적으로 벌이지 않은 시점에서도 여전히 황실에게 강하게 귀속되어 있었으나, 세속적인 정치에서 순종이 전면적으로 나선 경우는 박영효를 불신임한 당시를 제외하면 표면적인 행보를 크게 보이지 않은 탓에, 황제의 권위와는 별개로 신권이 개국 이래 정점에 달한 시대이기도 했다. 우선적으로는 순종이 이러한 체제를 뒤집으려 하지 않고 원훈들의 역량을 존중하였기에, 당시 아직 부황이 계속 살아있는 시점에서 섭정권을 쥔 선종은 원훈들을 존중하며 적극적으로 집무를 수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전통적인 황권에 대한 수호의식 또한 존재하고 있던 선종의 입장에서, 결국 그는 내심 황권을 띄우는 것이 옳바르다는 사고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김옥균과는 면전에서 대면한 적이 그닥 많지 않았고, 오히려 유폐당했으나 친 황실적 성향의 개화파였던 박영효와 더 사상적으로 동질감을 느꼈다. 그러던 중, 선종의 동생이였던 예친왕이 1923년 만주족 독립운동가가 던진 폭탄으로 인해 숨을 거두는 사태가 벌어졌다. 문제는, 이 행선지를 전날 따로 바꾸어 배정했던 것이 바로 김옥균이였다는 것.
이 사건을 기점으로 선종은 김옥균에 대한 거부감이 급격히 커졌다. 이는 기존에 가지던 황권에 대한 복권의식과 합쳐지며 자연스럽게 사실상 김옥균의 조율로 모든 게 결정되는 개화당의 영향력 또한 중추원과 군상대권을 통해 발휘되는 황제의 권력 아래에 들어와야 한다는 그의 결론을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마침 자식을 잃은 상실감에 순종의 병환이 심각해지면서 김옥균, 나아가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개화당의 주류 정치인들에 대한 선종의 불신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냈다.
섭정 체제가 장기화됨에 따라 그는 서서히 국사의 중대한 문제에도 손을 뻗쳤다. 수정되지 않은 채 여전히 보존된 상태를 유지하던 황권은 비록 섭정인 선종에게도 힘을 쥐어줄 수 있었고, 특히 그는 이 시기부터 개화당의 보수파들과 황국협회와의 접촉, 그리고 군부에 대한 정보 파악 등을 통해 자신만의 세력을 기르고자 하였다. 정계를 사실상 양분하다시피 한 입헌대한당과 개화당,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김옥균과 서재필을 박영효라는 또 다른 공신과 개화당 내 보수파들의 반강제적인 포섭, 필요에 따른 군부의 이용으로 견제하려 한 것이다. 여기에 1925년 벌어진 을축대홍수 당시엔 수재민들을 방문하여 대외적인 이미지를 쌓는 등, 민심을 사기 위한 노력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전부 섭정이던 시절에 이루어진 탓에 완벽하게 제 효력을 발휘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었고, 순종 시기 자유롭게 내각을 구성하여 정국을 주도하던 김옥균과 정치인들은 이러한 황제의 행동에 당황하며 끝내는 정치적인 견제를 시도하였다. 양측 모두 정식 즉위가 아니라는 한계와 결국에는 대황제의 신료라는 한계 탓에 결정적인 격변은 주지 못한 채 몇년간의 조용한 정쟁이 계속되었으나, 끝내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의회제에 대한 불신과 연달아서 사태의 수습에 실패한 개화당에 대한 비난의 쇄도, 위세가 커진 군부 내의 '대정봉환'열풍이 불기 시작하며 서서히 축이 황실에 기울기 시작했다.
즉위 이후
그러던 1929년 2월 10, 끝내 순종이 병환으로 붕어했다. 관례에 따라 세번의 거절을 표한 뒤 연호를 성덕(聖德)으로 한 선종은 이제 섭정의 자리를 탈피하여 온전한 군주로 거듭났고, 용상에 앉아 완전한 권력에 손을 댈 수 있게 되었다. 즉위식 당시, 선종은 신료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자신의 치세 기간동안에는 한 마음으로 "흥기"와 "소성"의 조화를 추구해야 할 것이라 연설하였다.
즉위 이후 김옥균이 가지고 있던 정국의 통제 능력을 사실상 거세시킬 작정을 한 선종은 내각총리대신인 홍진의 임기가 만료되자 원훈 정치인의 목소리가 정치계에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복권된 박영효를 총리대신에 임명했다. 그러나 박영효의 과거 이력 탓에 내각이 오래 가지 못하자 뒤이어 중추원 의장인 이항구 백작을 내각총리대신으로 내보내 박영효 내각의 연장선을 마련했고, 이항구의 화려한 언론플레이를 통해 남아있던 고균을 비롯한 원훈들을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러한 정쟁이 계속되던 중 헌군파의 흑막인 김옥균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기나긴 정쟁은 군상대권의 승리로 끝을 맺는 듯 했다.
하지만 2년간 지속된 이항구의 임기가 종료된 이후, 총선에서의 승리를 위해 입한당과의 연정을 시도한 개화당의 세력이 끝내 최린을 내세워 집권에 성공하였다. 수망에 올라올 정치인들이 이항구 내각 이전부터 부상하고 있던 안창호, 김규식 등의 신인들에게 밀려나버린 탓이 컸다. 이로 인해 대황제는 원하는 인사 대신 최린을 선택하여 김옥균이 준비해둔 마지막 수를 최대한 약화시키는 방안을 택해야 했고[4], 결국 예정대로 개화당과 입한당의 강력한 정당력을 기반으로 한 최린 내각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심의 의회제에 대한 신뢰도는 여전히 바닥을 치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최린 내각이 집권 시기 기준 2년 넘게 지지부진했던 몽골 출병 사태를 말끔하게 끝내지 못하자 내각을 우습게 보는 풍조가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한편 대황제는 애매모호한 보수파와 견제받고 있는 황권의 지엄함에 화력을 지원할 수단으로 두 단체에 눈을 돌렸다. 하나는 바로 당시 내각에서 꽤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충정일심회였고, 다른 하나는 유럽, 일본 등지의 영향을 받아 대권을 대황제에게 봉환하자는 주장을 펼치는 군부의 근황계 세력이였다. 이들에 대한 정보를 익문사를 통해 입수하고 있던 선종은 이들을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때마침 한편 대황제는 애매모호한 보수파와 견제받고 있는 황권의 지엄함에 화력을 지원할 수단으로 두 단체에 눈을 돌렸다. 하나는 바로 당시 내각에서 꽤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충정일심회였고, 다른 하나는 유럽, 일본 등지의 영향을 받아 대권을 대황제에게 봉환하자는 주장을 펼치는 군부의 근황계 세력이였다. 이들에 대한 정보를 익문사를 통해 입수하고 있던 선종은 이들을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일심 체제동안의 행적
사실 선종은 충정일심회의 주도로 1933년 봉기가 일어났을 당시, 초반에는 오히려 당황해했다. 그의 예상보다 일심회의 움직임이 빨랐던 탓이였다. 하지만 그들이 관료를 죽이지 않고 무력을 통한 시위만을 전개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통제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였고, 그렇게 그는 공식적으로 충정일심회와 그 계열의 군부 인사들을 충신이라 칭송, 한편 본인은 수도 황경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함으로서 기성정계를 약화시킬 발판을 마련하였다. 결국 그해 말 최린 내각은 보안절차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권을 통해 해산당했고, 임시서리에는 군부의 인사이자 노년 정치인인 조성환이 임명되었다. 선종인 훗날에도 쿠데타 세력에 대해 '충심만큼은 목숨을 걸어볼 정도로 강건했던 자들'로 술회했고, 그들의 과오는 싫어했지만 목숨을 걸고 간언하던 그 순간은 아직도 기억한다고 말하곤 했다.
한편 충정일심회의 부족한 의석을 사실상 갈아엎어져 보수파 일색의 정당으로 거듭난 개화당의 연정을 통해 지원시킨 선종은 최종적으로 자신에게 모든 통제권이 들어왔다고 판단하고, 이내 적극적인 개입에 서서히 제동을 걸었다. 명분도, 권력도 결국 황권과 밀접하게 묶여있는 충정일심회를 컨트롤 하는 데에는 굳이 일거수일투족의 감시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 탓이였고, 또 한편으로는 제 2의 원훈을 통제 과정에서 탄생시켜 권위를 위협할 것을 염려한 탓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는 1937년 한중전쟁 개전을 기점으로 역으로 선종이 군부의 여론에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며 흔들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권을 침해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으나 선종 본인이 군부의 대외정책을 자신의 친위세력이 기반을 다질 기회로 보았던지라 오히려 1934년 정리된 몽골 출병과 러시아 복고와 마찬가지로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고, 도중 전쟁이 장기화되자 잠시 반대하는 뜻을 표하기도 했으나 맹방인 일본의 참전과 함께 남경이 함락되면서 이내 의사를 철회했다.
동시베리아 전쟁과 태평양 전쟁
1941년 벌어진 한소전쟁과 1942년 알래스카 폭격계획에도 최종적인 재가를 하였으며[5], 이후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하자 끝내 김창암을 불심임하여 파직시켰고, 이후 송병조를 새로 총리로 앉혀 폭주하는 충정일심회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내놓는 한편 군부에도 영향을 발휘해 항복을 시도했다. 그러나 군부를 장악해버린 주전파들의 득세와 항복조건으로 군주제와 만주, 기존 북방 영토만큼은 지키고자 했던 대한제국 정부의 방침 탓에 항복절차는 지지부진했다.
결국 1945년 5월 경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이 항복한 시점에서도 바로 옆의 일본제국과 매한가지로 대전쟁의 수렁을 벋어나지 못한 채로 휘말린 상태를 유지했다. 그 후 바다를 건넌 미군이 끝내 한성과 부산, 나아가 평양에 대폭격을 감행하자, 파괴된 도시의 참상을 보고 공포에 사로잡힌 선종은 모든 항복여론을 뿌리치고 급히 통첩수락조서를 반포,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대한제국이 항복할 것임을 발표했다.
대한반도에 들어선 연합군 군정을 대상으로 그는 손수 맥아더를 찾아가 협상을 시도하는 등, 최대한 황실을 보존하고자 노력하였다. 무엇이든 할 테니, 권위를 전부 강탈하는 한이 있더라도 사직만큼은 잇게 해달라는 요구인 셈이였다. 이 때 먼저 굴욕적인 태도를 보인 선종을 보고 맥아더는 내심 싱거움을 느꼈다고 술회했으며, 한편으로는 제정을 폐지함으로서 한국에서 일어날 혼란이 필수적인 현상이 아니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이였다고 밝혔다. 더군다나 일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태평양 전쟁에 늦게 참전했던 대한제국의 기록 탓에 미국 정부가 상대적으로 선종에게는 관심을 덜 두게 되면서, 권한을 사실상 모두 거세당했지만 사직만큼은 대한국의 살아있는 옥새나 매한가지인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같은해 11월 경 전쟁이 사실상 종결되자 본인은 종묘에서 열성조에게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는 최후의 제례를 드렸고, 이후 패전의 책임을 진다는 명분 하에, 황윤으로 지목된 상태였던 그의 삼촌인 경친왕 이섭의 아들 경왕세자 이연에게 제위를 양위한 뒤, 본인은 태상황에 등극하여 사실상의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태상황 즉위 이후
노년기
가족관계
평가
어록
궁에서 직무를 보며 선제께 그러했듯 짐을 보필하기보다는 대청마루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편이 이제 경의 중환에는 나을 것 같소. 올해로 불유구를 넘은 걸로 아는데, 공자께서 그 이후에도 모든 행위가 법도에 어긋나지 아니한다고 논어에서 회고하신 적은 없지 않소? - 1931년, 내각해산권을 사용하려던 선종을 말리던 김옥균에게 한 말 |
경을 짐이 신임하고 있음은 잘 알 터이고, 다만 생가하건대 경이 그에 부흥하여 덕을 널리 선양하고 조종의 유범을 길이 빛낼 대업을 만세에 떨쳐 장차 아국의 자랑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 1941년 5월 6일, 김창암과의 대화에서 |
무궁한 황운을 위해 짐의 백관인 그대들이 일심단결하여 견마지로의 기세로 일조하고 있으니, 생각하건대 이 어찌 열성조의 흥복이 나의 대에 내려온 것이 아니겠는가. 아! 전세의 길함은 눈 앞에 있음이나 다름없으니, 나라의 복록이 만대에 거쳐 일신할 날이 머지 않았다. - 제 87회 제국의회 개회식 조서, 1944년 5월 27일 |
끝내 이렇게 되었군, 허나 내가 선택한 일. - 1945년, 양위식 직전 했다고 알려진 말 |
금세기의 한 시대에 폐국과 귀국 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1984년 주 대한국 대금민국 대사와의 만찬에서 |
돌이켜서 보면 내 과가 만세의 사가(史家)들이 담지 못할 정도로 크고, 그럼에도 이를 감히 거론하는 이가 없다. 너는 내가 죽더라도 울지 말거라. 그 대신, 내 지난날의 자만에 타지에서 죽어나간 백성들에게 곡해줬으면 한다. - 붕어 얼마 전 그를 평생간 모신 시종에게 하달했다고 알려진 말 |
여담
- 머리가 큰 편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시력이 약화되어 안경을 새로 맞출 때도 크기가 맞지 않아 고역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야사에 적혀있으며, 성덕제는 타고난 어깨도 좁은 편인지라 이러한 체질이 유독 두드러졌다고.
- 상대적으로 세로 세워진 건물인 경무전에 주로 머물렀는데, 이 덕에 경운궁 주변의 산들 때문에 정확한 조준이 어려워 주기적으로 오는 폭격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무사했다고 한다. 선종 본인은 경무전의 외관이 웅장하다며 꽤 마음에 들어했다는듯.
- 대한시대가 개막한 이후 한국사 최초의 태상황이 된 인물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2019년 일본에서 헤이세이 시대가 끝나고 아키히토 천황이 상황에 오르기 전까진 근현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존재했던 상황이였다.
- 선황들과 비교해서도 서양적인 것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선종이 태어난 시기엔 대한제국의 서구화가 이루어질만큼 이루어졌으니 딱히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여도 선종은 확실히 서양적인 생활을 즐기는 군주에 속했다. 공사 도중 폭격으로 사라졌지만, 본래 창덕궁에 지어질 예정이였던 만향루의 설계 또한 서양의 궁전을 연상시키는 모습을 띄었는데, 선종이 해당 공사에서 관여한 부분이 여럿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선종의 서양 애호 성향을 잘 알수 있는 부분.
- 2020년대 들어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밈에서 대한제국의 얼굴마담(...)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실 선종보다 더 전면적으로 나선 세력은 김창암등의 일심회-군부 내각이었으나,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 이들도 결국은 대황제의 위광에 의존하였기에 그대로 대한제국의 상징이 된 것. 밈으로 쓸 때는 주로 문서 상단에 나와 있는 1930년대 당시 젊은 시절의 사진을 사용한다.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의 국가원수 중 하나였다보니 당연히 매체에도 자주 모습을 비춘다. 주로 전후의 상황시절보단 황제 시절인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모습이 자주 조명되는 편.
대한국 내에선 아무래도 여러가지 의미로 민감한 인물이다보니 전면적으로 다루는 경우는 드문 편이며, 전반적으로 좋게 여기진 않으나 사회적인 풍조 탓에 존재를 최대한 외면하는 식의 연출이 잦다. 미국 등의 해외 국가에선 부정적인 묘사가 우세이긴 하지만, 김창암이 주목을 받는 경우가 더 많은 편.
반면 소련이나 대금민국의 경우, 십중팔구 잔인한 인물로 등장하는 등 부정적인 캐릭터로 묘사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 소련에서 2006년에 개봉한 《할힌골》에서 할힌골 기습을 통한 전과를 보고받는것으로 등장. 배우는 고려인 배우인 빅토르 세묘노프가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 광무 시대부터 태시 시대까지 다룬 대한국의 대하드라마 《연호의 치세》 시리즈 중 3부인 《성덕의 치세》에서도 등장. 젊은 시절의 모습은 배우 손헌수가, 노년의 모습은 송재호가 맡았다.
- 추축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전한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도 등장. 행정구역까지 바꿔놓는 등 도독부가 설치된 알래스카를 완벽하게 한국령으로 흡수하고 싶어한다는 묘사가 나왔으며, 이후 알래스카에서 들고 일어난 반군이 지속적으로 선전하자 결국 포기를 선언하고 도독부를 철수시켰다. 다만 그 와중에도 영토욕을 못 버린것인지 앵커리지를 조차지로 두는 선에서 알래스카를 돌려주겠다는 협상을 시도하는 등 끈질긴 모습을 보였으며, 결국 저항군이 김일성을 사살하고 나서야 완전히 철수했다.
- ↑ 공교롭게도 그 해 말 선종이 귀국하고 난 이후부터는 순종의 상태가 많이 악화되어 선종이 섭정을 맡아야 했으니, 선종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기회였던 시기에 꿈을 이루게 된 셈이다.
- ↑ 일각에선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던 선종을 위해 그나마 가까운 일본을 통해 일종의 예행연습을 순종이 시킨 것이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예친왕과 달리 선종은 전국순행에도 참여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
- ↑ 나이는 선종이 4살 더 많았지만, 둘 모두 당대 동아시아에 위치한 제국의 차기 황위 계승자라는 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결국 둘은 1983년 한번 더 만남을 가졌다. 한명은 상황으로, 한명은 현직 천황으로.
- ↑ 다른 대상자들을 임명할 경우 완벽하게 의회에게 주도권을 넘기는 셈이 되었고, 그렇다고 친 황실적 인사를 새로 총리에 앉히기에는 일전 2번의 서임 탓에 명분이 없었다.
- ↑ 이 당시까지 선종은 미국에 대해 '돈만이 썩어넘치면서 동양의 열국이 준비한 침공도 제대로 못 방어하는 머나먼 나라'로 여겼다고 한다. 다만 그 이후 미국의 전력이 제대로 드러나기 시작한 이후에는 태평양 전쟁에 맹방으로서 참여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