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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color:#ca9b0a; background:#1b0e64;" | 재임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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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6월 25일 ~ 1924년 6월 29일
| 1923년 1월 17일 ~ 1925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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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한제국]]의 제 13대 내각총리대신.
[[대한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한제국]]의 제 13대 내각총리대신.
1872년 경기도에서 출생한 뒤 당시 한국에 불어오던 서구화의 물결을 타고 열렬한 개화 지지자로서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이후 1921년에 불어온 젊은 정치인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도의 상승으로 성공가도를 달린 끝에, 마침내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여 한국의 국가정책을 지휘했었다.
1872년 경기도에서 출생한 뒤 당시 한국에 불어오던 서구화의 물결을 타고 열렬한 개화 지지자로서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이후 1915년에 전시체제와 함께 불어온 젊은 정치인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도의 상승으로 성공가도를 달린 끝에, 마침내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여 1차 대전기동안 한국의 국가정책을 지휘했었다.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대대적인 개발 산업의 진행과, 막 건국된 트란스 아무르 공화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한 점 등이 있다.
1872년 경기도에서 출생한 뒤 당시 한국에 불어오던 서구화의 물결을 타고 열렬한 개화 지지자로서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이후 1915년에 전시체제와 함께 불어온 젊은 정치인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도의 상승으로 성공가도를 달린 끝에, 마침내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여 1차 대전기동안 한국의 국가정책을 지휘했었다.
생애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기타
심양부 천도론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정확상 그의 정책적 이상을 채울 장소로서 심양부가 저격이라고 봤던 듯. 그러나 그의 재임기간 내에서 해당 정책을 실현되지 못했고, 끝내 심양으로의 천도는 대한제국이 패망할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엄청난 양의 토지를 소유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그의 땅투기 욕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만주에 드넓은 토지를 소유했었는데 현재도 그 땅에 대한 지분이 후손들에게 남아있다고 평가받을 정도. 물론, 대금민국 당국은 박중양의 후손들이 자국 영토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년에 들어서는 개화장(開化杖)이라는 서양풍의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고 한다. 가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경우 지팡이로 구타하기도 했다고 하며, 때문에 한 번은 호국회의 집권시기 마음에 안든다고 고위 당원을 구타했다가, 벌금을 거하게 물고 옥살이 신세를 몇칠간 한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대에 붙은 그의 별명이 '박 작대기 대신'이였다.
어록
국가가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국가에는 충성할 이유가 없다.《술회 (述懷)》 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만큼만 노력하고 큰 결과물을 바라는 것은 망상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만큼의 노력하지 않았으면서도 불평불만을 품는 자들이 종종 있습니다.
애국심을 핑계로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애국심만 있으면 뭐든 용서된다고 믿는 얼간이들이 많다.한성일보에 실은 칼럼. 우회적으로 당대에 아직 정권을 잡기 전이었던 백의단을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