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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4" width="100%" style="background-color:#16124a;color:#fff;" |<big>'''만주'''</big><br/>滿洲 | Manchuria under the Korean rule | ! colspan="4" width="100%" style="background-color:#16124a;color:#fff;" |<big>'''만주'''</big><br/>滿洲 | Manchuria under the Korean rul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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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대청제국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대청제국 아이신(₳)→ 대한제국 원 (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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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무단통치·헌병경찰대통치) 1910년~1919년'''<br> | '''제1기(무단통치·헌병경찰대통치) 1910년~1919년'''<br> | ||
대개 정미늑약 발효 직후부터 1919년까지 보는데, 해외발 민족자결주의의 대두와 만주에 입국한 백계 러시아인들까지 자신들을 차별하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3.1 운동의 영향으로 인해 이동휘가 총독으로 지명되면서 통치의 방향성이 바뀐 것을 종료시점으로 본다. 경제적으로는 회사령, | 대개 정미늑약 발효 직후부터 1919년까지 보는데, 해외발 민족자결주의의 대두와 만주에 입국한 백계 러시아인들까지 자신들을 차별하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3.1 운동의 영향으로 인해 이동휘가 총독으로 지명되면서 통치의 방향성이 바뀐 것을 종료시점으로 본다. 경제적으로는 회사령, 천막조사사업등의 실시와 정주령등이 있다. 이 시기,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만주인, 중국인을 대상으로 태형을 실시하는 태형령이 공표되었고, 대한제국군 육군 소속 헌병들이 만주 내에서의 치안 업무에 투입되는 헌병경찰제도가 운영되는 동시에 교원(학교 교육자)들이 서양식 세이버를 차고 다녔다. | ||
'''제2기([[교화통치 (아침해의 원유관)|교화통치]]·[[씨족분열통치 (아침해의 원유관)|씨족분열통치]]) 1920년~1931년'''<br> | '''제2기([[교화통치 (아침해의 원유관)|교화통치]]·[[씨족분열통치 (아침해의 원유관)|씨족분열통치]]) 1920년~1931년'''<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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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역사= | ||
==초기== | ==초기== | ||
1909년 9월 30일 한만병합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대청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청제국]]의 대표로 참석한 총리대신 돤치루이와 대한제국 측의 대표로 온 | 1909년 9월 30일 한만병합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대청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청제국]]의 대표로 참석한 총리대신 돤치루이와 대한제국 측의 대표로 온 당시 시종무관부대신 [[이용익 (아침해의 원유관)|이용익]]과 이지용 구 청국통감부 최고 고문이 협상에 임했다. 이는 각국의 황제와 가한이 마주보며 날인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대한제국 측에서 일개 대리인을 보냈는데 대청제국은 가한이 직접 대면하는 것이 의전상으로도 맞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이 과정에서 한만병합조약을 공표하여, 대청제국이 다스리던 모든 영토를 식민지로 강제로 편입한 뒤 옛 대청제국 황실은 지방왕족인 애신각라왕가(愛新覺羅王家)로 격하시켜 한국 황실에 아예 편입시켰다. | ||
그리하여, 1909년 한만병합조약 체결 이후로 35년간의 식민지배가 시작되었고 1919년 삼일 운동이 발발하기까지 1910년대의 대한제국 정부는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이 시기는 헌병경찰대원들이 치안업무를 담당하였기에 헌병경찰통치기로도 불리며, 만주인의 집회 결사 언론 출판 등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았으며, 형벌 등을 통한 매우 폭압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 폭압적인 통치가 이루어진 것은 만주인의 단합과 저항을 강하게 묵살하기 위함도 있지만, 경제적인 측면도 강했다. 몇몇 연구에 따르면, 한국은 애초에 완전한 근대국가였던 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다르게, 근대화를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해서 대한제국 본토 이상의 영토 규모를 가진 대청제국을 식민통치할 만한 여력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다시 북상한 러시아의 반격에 대한 고려와, 한국 육군의 지속적인 대륙, 시베리아 진출 야욕과 내각 내 대청 강경론의 부상 등으로 급하게 식민지배를 시작하였다. 본래 이완용 내각총리대신은 좀더 점진적인 병합을 준비하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예정과 달리 이완용 총리가 중태에 빠지면서 그의 점진론 또한 힘을 잃어 급격론이 대두됬고, 합병 이후에는 결과적으로 경제적인 문제가 심한 편이었다. 이에 따라, 초대 총독 [[이용익 (아침해의 원유관)|이용익]]은 최대한 만주가 본토의 원조를 받지 않는 자급자족의 자립적인 체제를 세우기에 이른다. 그러기 위해서 저렴한 비용과 약간의 노력으로 통치를 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으로 공포정치, 이른바 무단통치를 실시한 것이다. 이를테면 아예 식민지인의 기본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시위를 진압할 필요도 없고, 검열을 할 필요도 없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1910년대는 식민통치를 위한 철도 등의 인프라 건설과 치안유지를 병행하면서도 다른 시기와 다르게 적자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고, 그럭저럭 자체적인 운영이 가능했었다. | 그리하여, 1909년 한만병합조약 체결 이후로 35년간의 식민지배가 시작되었고 1919년 삼일 운동이 발발하기까지 1910년대의 대한제국 정부는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이 시기는 헌병경찰대원들이 치안업무를 담당하였기에 헌병경찰통치기로도 불리며, 만주인의 집회 결사 언론 출판 등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았으며, 형벌 등을 통한 매우 폭압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 폭압적인 통치가 이루어진 것은 만주인의 단합과 저항을 강하게 묵살하기 위함도 있지만, 경제적인 측면도 강했다. 몇몇 연구에 따르면, 한국은 애초에 완전한 근대국가였던 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다르게, 근대화를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해서 대한제국 본토 이상의 영토 규모를 가진 대청제국을 식민통치할 만한 여력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다시 북상한 러시아의 반격에 대한 고려와, 한국 육군의 지속적인 대륙, 시베리아 진출 야욕과 내각 내 대청 강경론의 부상 등으로 급하게 식민지배를 시작하였다. 본래 이완용 내각총리대신은 좀더 점진적인 병합을 준비하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예정과 달리 이완용 총리가 중태에 빠지면서 그의 점진론 또한 힘을 잃어 급격론이 대두됬고, 합병 이후에는 결과적으로 경제적인 문제가 심한 편이었다. 이에 따라, 초대 총독 [[이용익 (아침해의 원유관)|이용익]]은 최대한 만주가 본토의 원조를 받지 않는 자급자족의 자립적인 체제를 세우기에 이른다. 그러기 위해서 저렴한 비용과 약간의 노력으로 통치를 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으로 공포정치, 이른바 무단통치를 실시한 것이다. 이를테면 아예 식민지인의 기본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시위를 진압할 필요도 없고, 검열을 할 필요도 없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1910년대는 식민통치를 위한 철도 등의 인프라 건설과 치안유지를 병행하면서도 다른 시기와 다르게 적자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고, 그럭저럭 자체적인 운영이 가능했었다. |
2024년 5월 10일 (금) 17:12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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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해주 자치령에서 극동 공화국으로, 극동 공화국에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환.
- ↑ 만주한치시기 만주 지역이나 만주총독부 그 자체를 상징하는 깃발은 따로 없었으며, 본국인 한국의 깃발인 태극기만이 공식적으로 통용되었다. 다만, 만주총독부의 전신인 청국통감부의 상징 깃발은 존재했으며, 깃발은 없지만 만주총독부의 공식 문장과 이를 응용한 봉함지에 쓰이는 문양 정도는 있었다. 자세한 정보는 만주총독부 문서 참조.
- ↑ 내지(한국)와 만주는 하나의 몸이라는 뜻의 표어로, 민족말살 통치기 당시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 ↑ 일본령 후켄쇼의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가 처음 사용했던 문화통치라는 말을 따온 것으로도 알려져있다. 실제로 이 시기 두 제국의 식민지(만주, 대만과 푸젠) 유화 정책의 시작이 비슷한 편이기도 하고.
- ↑ 만주총독은 당시 공을 크게 세운것이 대한제국군이었던지라, 500년간 이어진 한국 내 문민통치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의 배려로 군에서 주로 인사가 배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소련과 접경해 있다는 특징과 맞물려, 만주지역은 한국 내에서 가장 엄격한 군국주의의 온상이기도 했다.
- ↑ 해외여행을 따지지 않더라도 미국 자본, 일본 자본이나 소련발 사상등이 많이 연류되어서 여러 정보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 ↑ 개중 스탈린주의자들의 비율이 은근 적은 편이었는데, 이유는 다들 스탈린 주의가 노선이 아니었거나 그로 인해 피해를 볼 뻔 하면서 노선을 변경한 케이스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스탈린주의자도 없던 것은 아니다.
- ↑ 특히 철강과 석유의 소비량이 상상 이상이었는데, 대규모 생산지인 만주와 동맹국 일본의 남양 석유를 수입하기도 했음에도 여전히 독소전쟁에서 승기를 잡아 제 힘을 발휘하는 소련을 막기에는 부족했다.
- ↑ 그나마 덕종이 자살로 저항을 하긴 했으나, 이 자살조차도 한국군이 꾸며낸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