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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 | <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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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개요= | ||
119번째 줄: | 119번째 줄: | ||
이 시기 동안, 만주족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일부는 당시의 외국에 잘 알려진'만추'라는 명칭이 한국령 식민지 '만주(Manchuria)'로서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였기에 이를 버리고 대청제국의 '제국'을 공화국의 옛말인 '민국'으로 바꾸고, 중화적인 느낌을 제거하고 민족주의를 더 부각한 '대금민국', 또는 '금나라'라는 이름으로 해외에 널리 알리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중 한 사례인 대금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대표를 맡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은 편이었고,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과 일반인들은 여전히 청나라, 혹은 그 당시 사용 비율이 상당히 늘어났었던 만주라는 국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 이 시기 동안, 만주족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일부는 당시의 외국에 잘 알려진'만추'라는 명칭이 한국령 식민지 '만주(Manchuria)'로서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였기에 이를 버리고 대청제국의 '제국'을 공화국의 옛말인 '민국'으로 바꾸고, 중화적인 느낌을 제거하고 민족주의를 더 부각한 '대금민국', 또는 '금나라'라는 이름으로 해외에 널리 알리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중 한 사례인 대금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대표를 맡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은 편이었고,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과 일반인들은 여전히 청나라, 혹은 그 당시 사용 비율이 상당히 늘어났었던 만주라는 국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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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 | <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시대= | =시대= | ||
133번째 줄: | 133번째 줄: | ||
몽골 출병이 일어난 1932년부터 제3기의 전기로 보며, 1937년에 발발한 [[제 2차 동아시아 전쟁|제 2차 동아시아 전쟁]]의 영향으로 1938년부터 1945년까지를 제3기 후기로 본다. 경제정책으론 전기의 남면북양을 통한 공업 원료 증산, 후기는 국가총동원법이 발효된 병참기지화 정책이 있다. | 몽골 출병이 일어난 1932년부터 제3기의 전기로 보며, 1937년에 발발한 [[제 2차 동아시아 전쟁|제 2차 동아시아 전쟁]]의 영향으로 1938년부터 1945년까지를 제3기 후기로 본다. 경제정책으론 전기의 남면북양을 통한 공업 원료 증산, 후기는 국가총동원법이 발효된 병참기지화 정책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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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 | <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역사= | =역사= | ||
==초기== | ==초기== | ||
175번째 줄: | 175번째 줄: | ||
여담이지만, 당시 대한제국은 황궁 이전을 포함해서, 제국의 수도를 심양 근처로 옮기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대한 제국의 영토였던 러시아 차르국, 만주, 대한 제국과 몽골을 전체적으로 볼 때, 심양부 정도가 거리 관념으로 대략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천도 찬성파들은 제국의 수도를 심양부로 옮긴 다음, 한성, 평양에서부터 시작되는 대규모 인구 이동을 계획했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정치적으로 중심지가 될 예정인 만주로 대거 이주시키고, 만주인들은 시베리아로 강제로 추방시켜 머릿수를 감소시키는 안이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도시 건설 계획을 위한 측량 작업까지 했지만, 동시베리아 전쟁에서 졸전하다가 수도에서 내전이 일어나면서 민주화가 되었고, 이후 11도의 유지와 직접통치 무효를 조건으로 항복하면서 모든 계획은 당연히 백지화되었다는 것. | 여담이지만, 당시 대한제국은 황궁 이전을 포함해서, 제국의 수도를 심양 근처로 옮기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대한 제국의 영토였던 러시아 차르국, 만주, 대한 제국과 몽골을 전체적으로 볼 때, 심양부 정도가 거리 관념으로 대략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천도 찬성파들은 제국의 수도를 심양부로 옮긴 다음, 한성, 평양에서부터 시작되는 대규모 인구 이동을 계획했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정치적으로 중심지가 될 예정인 만주로 대거 이주시키고, 만주인들은 시베리아로 강제로 추방시켜 머릿수를 감소시키는 안이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도시 건설 계획을 위한 측량 작업까지 했지만, 동시베리아 전쟁에서 졸전하다가 수도에서 내전이 일어나면서 민주화가 되었고, 이후 11도의 유지와 직접통치 무효를 조건으로 항복하면서 모든 계획은 당연히 백지화되었다는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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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 | <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평가= | =평가= | ||
==동화주의== | ==동화주의== | ||
동화정책은 식민제국이라면 누구나 다 시행했던 정책이었고,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지였던 | 동화정책은 식민제국이라면 누구나 다 시행했던 정책이었고,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남아있던 일본의 식민지였던 후쿠슈와는 다르게, 근대에 들어서도 자신들을 하나의 여진으로 아직 보지 못하던 여진족은 마치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한국에게 빠른 속도로 동화당했으며, 1930년대가 되었을때 이미 만주어 자체가 한국어 어휘와 문법이 상당히 섞인 무언가로 개조당했고, 이 때문에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던 만주 독립운동가들은 졸지에 국가 내부에서 러시아어 사용을 장려하여 통합을 꾀하고 한국의 잔재를 청산해야 했다. | ||
==사회적 분위기== | ==사회적 분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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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한치시기 당시 한국이 만주를 지배하면서 받은 영향에 대해선 여러 가지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해석 역시 방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한제국 중앙정부가 만주총독부 측에게 지급한 재정 보충금이나 식민지 만주의 경상수지의 수치, 한국과 만주의 민간 교역 내용 등을 보면 '만주를 착취했지만, 한국이 일방적으로 이익만을 얻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도의 해석도 있고, 농지강탈을 통해 얻은 막대한 이익으로 사실상 손해가 무의미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다만 식민지 통치는 자국의 경제에 어느 정도 부담을 주는 정책이기도 하였는지라, 여기서 한국이 손해가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사관은 다들 공유한다. | 만추한치시기 당시 한국이 만주를 지배하면서 받은 영향에 대해선 여러 가지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해석 역시 방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한제국 중앙정부가 만주총독부 측에게 지급한 재정 보충금이나 식민지 만주의 경상수지의 수치, 한국과 만주의 민간 교역 내용 등을 보면 '만주를 착취했지만, 한국이 일방적으로 이익만을 얻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도의 해석도 있고, 농지강탈을 통해 얻은 막대한 이익으로 사실상 손해가 무의미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다만 식민지 통치는 자국의 경제에 어느 정도 부담을 주는 정책이기도 하였는지라, 여기서 한국이 손해가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사관은 다들 공유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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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 | <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역대 만주 총독= | =역대 만주 총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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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 | <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역대 애신각라왕= | =역대 애신각라왕= | ||
애신각라왕(덕종 → 부의)은 황제가 하사한 작위일 뿐, 만주 내에서의 통치권은 전무했다. 만주한치시기 동안 지속된 애신각라왕의 존재는 나라를 판 장본인은 황가라는 논란을 야기시켰고, 독립계열 인사들 중 청 황실을 복권시키려던 근왕파를 소멸시키고 사회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그리고 실제로, 애신각라 왕가에서는 재풍이나 푸제 등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순순히 대한제국에 순응했으며<ref>그나마 덕종이 자살로 저항을 하긴 했으나, 이 자살조차도 한국군이 꾸며낸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ref> 적극적인 친한파도 제법 나왔다. 이것은 대청제국 황실 복원론에 대해 사람들이 시큰둥해 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 애신각라왕(덕종 → 부의)은 황제가 하사한 작위일 뿐, 만주 내에서의 통치권은 전무했다. 만주한치시기 동안 지속된 애신각라왕의 존재는 나라를 판 장본인은 황가라는 논란을 야기시켰고, 독립계열 인사들 중 청 황실을 복권시키려던 근왕파를 소멸시키고 사회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그리고 실제로, 애신각라 왕가에서는 재풍이나 푸제 등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순순히 대한제국에 순응했으며<ref>그나마 덕종이 자살로 저항을 하긴 했으나, 이 자살조차도 한국군이 꾸며낸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ref> 적극적인 친한파도 제법 나왔다. 이것은 대청제국 황실 복원론에 대해 사람들이 시큰둥해 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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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아이신기오로 푸이(왕): 1906년 2월 7일 ~ 1969년 10월 18일 | *2대 아이신기오로 푸이(왕): 1906년 2월 7일 ~ 1969년 10월 1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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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 | <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기타=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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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아침해의 원유관]][[분류:아침해의 원유관/국가]] | [[분류:아침해의 원유관]][[분류:아침해의 원유관/국가]] |
2024년 3월 28일 (목) 22:5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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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해주 자치령에서 극동 공화국으로, 극동 공화국에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환.
- ↑ 만주한치시기 만주 지역이나 만주총독부 그 자체를 상징하는 깃발은 따로 없었으며, 본국인 한국의 깃발인 태극기만이 공식적으로 통용되었다. 다만, 만주총독부의 전신인 청국통감부의 상징 깃발은 존재했으며, 깃발은 없지만 만주총독부의 공식 문장과 이를 응용한 봉함지에 쓰이는 문양 정도는 있었다. 자세한 정보는 만주총독부 문서 참조.
- ↑ 내지(한국)와 만주는 하나의 몸이라는 뜻의 표어로, 민족말살 통치기 당시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 ↑ 일본령 후켄쇼의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가 처음 사용했던 문화통치라는 말을 따온 것으로도 알려져있다. 실제로 이 시기 두 제국의 식민지(만주, 대만과 푸젠) 유화 정책의 시작이 비슷한 편이기도 하고.
- ↑ 만주총독은 당시 공을 크게 세운것이 대한제국군이었던지라, 500년간 이어진 한국 내 문민통치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의 배려로 군에서 주로 인사가 배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소련과 접경해 있다는 특징과 맞물려, 만주지역은 한국 내에서 가장 엄격한 군국주의의 온상이기도 했다.
- ↑ 해외여행을 따지지 않더라도 미국 자본, 일본 자본이나 소련발 사상등이 많이 연류되어서 여러 정보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 ↑ 개중 스탈린주의자들의 비율이 은근 적은 편이었는데, 이유는 다들 스탈린 주의가 노선이 아니었거나 그로 인해 피해를 볼 뻔 하면서 노선을 변경한 케이스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스탈린주의자도 없던 것은 아니다.
- ↑ 특히 철강과 석유의 소비량이 상상 이상이었는데, 대규모 생산지인 만주와 동맹국 일본의 남양 석유를 수입하기도 했음에도 여전히 독소전쟁에서 승기를 잡아 제 힘을 발휘하는 소련을 막기에는 부족했다.
- ↑ 그나마 덕종이 자살로 저항을 하긴 했으나, 이 자살조차도 한국군이 꾸며낸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