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크 프로젝트 세계관역사 문서이다.

린크:근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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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크 세계의 역사(고대~중세)

해당 문서에서는 모든 국가에 대한 역사를 다루지 않고 중점적인 국가에 대해서 다룬다. 또한 연도에 관해서는 린크 프로젝트에서 다루었던 가장 큰 재앙인, 바다숲의 활화산폭발 이전을 기점으로 하며, 기년법으로는 잿빛을 기점으로 분류하여 사용한다.


이 시기의 린크 월드(From ancient times to the Middle Ages)
기원전 1300년 경부터 기원전 1년까지의 시기를 학문적 편의를 위해서 중세 이전으로 지칭한다. 린크 세계의 고대에서 중세이전의 시기에는 각 지역의 고유한 문화권이 발달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시가 로기라(Rogira)[1]이다. 그 외에도 수헤일베르테르, 아상테, 투스 등이 발전했다. 특히 투스 왕국의 경우 서부 문화권의 중추로서 작용했으며 국지적인 전투를 비롯해 대외적으로 외부 세계에 문명을 파종하는 기여를 했다. 그럼에도 투스의 고유한 사회체제는 내부로서의 공고화를 만들었으며, 로기라의 역동적인 변화와 정반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오랜 고대

  • 거인 문명권의 발달
  • 고대말로의 자연화
  • 판구조론적 이동에 의한 오늘날의 대륙형성

인간이 헤아리기 어려운 고대부터 활발한 지각활동이 일었다. 판구조론적 운동에 의해서 오늘날의 린크 세계의 형태가 완성됐다. 다양한 생물군계가 나타나고 자연 생태계가 형성되었으며, 인류의 모체가 되는 타바리반데르트(Tavarivandert, 인류의 원형이란 뜻)는 이로부터 100억년 전 형성되었던 초대륙인 파노티아에서 서로 분리되어 발바라, 퀘샤 대륙, 린크 대륙 전부에 인류가 존재하게 된다. 고대에도 말로는 존재했으나, 중세 시대의 린크만큼의 발생량은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역경의 시간을 겪은 말로는 자연과 결합하여 자연의 일부로서 변화하였다. 이후 몇백여년 간 흉의 발생은 점진적으로 증가했으며 문명의 발생을 저해했다. 그 중 흉에게서 노출된 상태에서도 문명을 보존한 존재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거인이고 후에 린크에서의 문명 기저와 토대가 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기원전 3300년 경이다.

벽아랫세계의 초기 문명

  • 거인 문명의 남하와 인간의 문명 계승
  • 인간 중심세계의 형성(벽아랫세계)

오늘날 롯사 구릉소소니아 일대(릴시온 반도로기라 북부지방의 경계가 되는 대산맥지대)에서 활발하게 문명을 일군 거인들은 점차 퍼졌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부분은 공통된 문화를 가진 것으로 보였다. 릴시온 반도로 향한 거인들은 그곳에 기원전 1100년 즈음 파르네임을 건설했고, 일부는 북부로, 또는 남하하여 시가나시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원시적인 인류와 접촉(First contact)했고, 인간문명은 거인을 통해서 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기술을 습득[2]했다. 거인은 몇 세기 지나지않아 빙하기 등의 환경적인 문제로 도태되었으나[3], 발전된 인류문명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적응하여 살아남는다. 이후 문명의 기반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 인간 중심세계의 근간을 이룩한다. 이것을 미래의 로기라어로 린크(Rink) 내지는 벽아랫세계[4]라고 지칭했다.

문명의 첫걸음

  • 고대 문명의 건설
  • 아사마르[5] 왕국의 형성

기원전 1000년 경 당대 자원이 풍부했던 아사마르(닻말:axamar, 시게니에라와 맞닿아 있는 거대한 영역) 지방에서는 거대한 왕국이 건설됐다. 제정일치가 이루어진 아사마르 왕국은 강력한 왕권으로 결합된 권력을 행사했는데, 덕분에 초기에 문명을 입은 시가나시 지방을 정복했으며, 남하하려고 하던 프레브 문명권프레배잔을 물리쳤다. 안정된 사회에서는 다양한 문화가 발달했고 특히 거인 문명을 숭상하며 지어진 거상들은 수십세기 후에도 일부 형태가 잔존할 수 있었다. 아사마르는 지속적으로 확장 정책을 통해 많은 지역을 정복했으며, 다양한 인종들이 문명을 얻을 수 있는 거름으로서 일조했다. 이런 경향은 아사마르가 멸망하기 전까지 이어진다.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왕조였으나 동시에 식인에 대한 문화가 남아있는 야만적인 문명이기도 했다.

한편, 타라 모르티에서 나타난 모종의 거인들은 도바신 반도에 정착했다. 인간들은 그 거인들을 불렀다. 설화에 따르면 그 거인들의 자손은 점점더 크기가 작아졌고 결국 고로스의 조상[6]이 되었다고 알려져있다. 도바신 반도에는 다른 지역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흉들이 득실거렸고, 인간들은 조상들이 세워준 거대한 성을 기점으로 흉들을 사냥하여 거기서 나오는 마석을 기반으로 문명의 초석을 다지기 시작했다.

분화의 과정

  • 아사마르 왕국의 멸망
  • 대초원에서 나타나는 아상테 세계
  • 호숫가에서 형성된 로기라 세계

아사마르 왕국은 진취만의 동부 끝자락부터 게니에라 섬의 일부까지 넓게 자리잡았으나, 실질적으로 전부 군림하지는 못했다. 왕은 대를 지나며 혈연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었고, 그마저도 외곽에서는 정복을 당했을 뿐이지 여전히 독립적으로 자치했다. 그러던 중, 기원전 890년 즈음 수도 변두리에서 말로가 나타나는 비운의 사건이 일어난다. 아사마르 일대를 풍부하게 하던 거대한 수원들이 순식간에 증발했으며, 아사마르의 근간이던 도시들이 철저히 사막화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피지배자들은 아사마르의 속박에서 풀려났으며, 유민들은 각각 호숫가대초원로 대이주하면서 더 넓은 세계로서의 파종이 이뤄졌다. 이후 로기라에서는 수많은 왕국이 건국되었으며, 아상테에서는 다양한 부족들이 나타났다. 소수의 유민들은 아사마르의 문화가 남아있는 게니에라 섬로 건너갔다.

  • 투스 도시국가의 건국

고로스인들은 성들의 토대로 도시국가가 건설되었지만 단독 국가만으로는 지속적인 생활이 힘들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그들은 필사의 각오로 다른 국가들과의 연락을 수 많은 시도 끝에 성공하였고, 점차 교류를 늘려갔고 도시연합을 결성하게 된다.

  • 수헤일의 고대문명 발흥

비슷한 시기에 수헤일은 대 루비아 섬에서 처음으로 큰 마을이 세워졌고, 바위에는 원시적인 문자가 쓰였다. 각각의 섬에서는 몇 천명 단위의 청인들이 생활했는데, 이들이 이후에 수헤일 문명권의 핵심 인종이 된다.

아사마르의 유산

  • 아상테 부족들의 중흥
  • 여러 인종의 소왕국
  • 로기라 왕국의 건설

아사마르 왕국의 멸망은 많은 유준 유민(아사마르 난민 이들을 로기라에서는 유준이라고 표현) 집단을 형성했다. 그들은 대이동 후 원주민과 결합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타인종과 혈전을 벌였다. 특히 대초원으로 이동했던 유준인들은 그곳의 원주민(홍인이라고 불리는 인종)들과 동화되어서 아상테라는 유례없는 인종과 민족[7]으로서 성장했다. 반면 호숫가에 자리잡은 유준인 집단은 아사락에서 남하한 인종 계통(빙족, 반족, 시가나시족 등)르에뤼 지방 계통(청인, 카라스인 계통)으로 섥혀있어 갈등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유준인들은 세력을 확대했고 마침내 호숫가의 반도처럼 튀어나온 지방에서 로기라라는 왕국을 건설한다. 이 시기에 로기라는 시가나시 문화권과 긴밀한 공조를 통해 일련의 연합을 이루기도 하였다.

로기라는 인근 세력의 위협[8]으로부터 벗어나야 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력한 단합을 이뤘다. 불과 이백여년 만에 인근의 작은 마을들을 정복했으며,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시가나시와 동맹함으로서 마침내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오히려 전운을 드리운 것은 공통조상을 가진 아상테였다. 각각 로기라아상테는 서로가 같은 민족이란 추상적인 이해는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북부에 있던 아상테 부족들은 안정된 로기라의 지방을 가능한 만큼 약탈하고 공격했으며, 이런 대외적인 세력의 등장이 자신들이 로기라라는 공통된 의식을 심는데 일조했다. 그런 흐름에 따라 각 지방에서는 독립 이전에 아상테의 습격을 막는데 집중하고, 세력 강화에 힘쓰게 된다.

  • 투스 왕국의 건설과 왕권 강화

도바신 반도에 각 도시의 총력을 다한 노력 끝에 흉의 몰아내는 파장을 뿜어내는 도로 화이트 라인이 모든 도시를 연결하게되었다. 이를 통해 그들의 유대는 더더욱 강해졌고 결국 투스연합국이 건설되었다. 초창기에는 최초의 7 도시간 발언권의 크기는 다를지언정 위치는 동등한 연합왕국의 형태였지만, 도바신왕국의 튜토러스 가문이 영혼석의 개발을 통해 완전히 주도권을 가지고 왕가가 왕국으로 바뀌게 되었고, 나머지 6도시는 국가회의에 참석할 권한을 가진 베치 신시(Vechi Cinci)가 되었다.

로기라의 발흥

  • 로기라의 대제국화
  • 벽아랫세계의 완성
  • 아상테 문명화
  • 수헤일 문명권의 개발
  • 베르테르 문명의 개발
  • 이 시기에 발바라의 문명이 시작되었음

호숫가 일대를 평정한 로기라는 국경이 안정되었으며, 풍부한 자원량을 통해 인구가 증가했다. 앞서서 아상테로 인한 지속적인 침입이 큰 문제였으나, 후방의 인구증가와 군단의 증설 등으로 더 이상 이민족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로기라는 증강된 군사력으로 후방의 동맹이던 시가나시를 침공하고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반발할만한 일이었으나, 정복 이후 시가나시의 체제를 인정하고 지역의 권력자를 인정하는 등의 유화적인 정책을 펴 반발심을 억제했다. 이후 오래전 유준인과의 숙적이던 청인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르에뤼 지방을 침공하면서 본격적인 정복전쟁에 나섰다. 로기라는 몇 년만에 르에뤼를 비롯한 수헤일 전체를 정복했고, 베르테르에 도달했으며. 북쪽으로는 릴카 반도의 릴시온[9]을, 서쪽으로는 시게니에라 일부까지 도착[10]했다. 최후에는 아상테의 북쪽 영역까지 정복해 약탈을 원천차단하면서 마침내 제국과 황제를 표방하게 된다.

로기라 대제국의 건설은 내부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결과를 만들었다. 보르미아 지방의 미개했던 아르인에게도 문명이 전파되었고, 베르테르에 건설된 퍼밀 항구도시를 통해서 새로운 문화가 싹트게 된다. 로기라의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세력이 약했던 지역의 귀족들은 아예 오늘날의 투스 샤프테 노이의 영역까지 이주했는데, 이것이 오로시족혼혈고로스를 만드는 기원으로 작용한다.[11] 북부의 릴시온에선 릴족이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냈다. 즉 이때문에 벽아랫세계 전체에서 로기라가 가지는 의미와 정체성이 매우 중요하게 자리잡는다. 또한 고대 아사마르의 종교 계통이었던 영혼교가 로기라 제국 시절에 크게 전파되면서 훗날 로기라상테에서 영혼교가 크게 성행한다.

  • 보르미아의 문명화
  • 투스의 샤프테 노이

투스 왕국은 오랜 기간동안 오지 개발에 노력했지만 많은 문제에 봉면했다. 인구는 자연증가했지만 주택 문제와 식량 문제가 반복됐으나, 더 거대한 성벽을 지을수록 많은 노동력과 자원이 소모됐다. 이 때문에 튜터러스 왕가테토르 튜터러스는 굳이 도바신 반도 내부에서 확장하기보단, 흉 등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나은 외부세계로 향했다. 테토르메라닌 반도 일대의 아르인 마을을 정복했으며 서부로는 장대한 평원을 향해 대확장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테토르 왕을 따라 나선 일곱 신하가 바로 칠신, 사프테 노이(Șapte noi)다. 키가 장신으로 유명했던 킨트 자마스로(자마스 가문의 첫번째 선조)를 비롯해서 우트란, 효아란, 페레느, 바트킨, 노스트, 고트라는 각 지역에 투스의 이름으로 정복했으며, 마침 정착을 시도하려던 로기라 무리와의 국지적인 전투도 벌어졌다. 불안정한 국경이지만 투스 이름 하의 광대한 영토가 생겨났고, 이것을 투스에서 대확장이라고 일컫는다.

전쟁사의 첫걸음

  • 로기라 대제국의 분열
  • 아상테의 위대한 부족 소사의 진격

여러 문명과 세계에 걸친 로기라 대제국은 비약적으로 성장했으나, 지나치게 거대하여 중앙집권화가 어려웠다. 쥰[12] 로도론이 죽고 후계자 문제가 발생했고, 약해진 중앙집권으로 로기라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수헤일에서는 무역로에 해적이 들끓으며 베르테르와의 연결이 약화됐고, 아상테에서는 새로이 부족연합이 탄생하면서 로기라 제국의 권역을 벗어났다. 이런 침체에서 벗어나고자 로기라의 황실에서는 세 왕자들이 각각 서로기라 제국, 중로기라 제국, 동로기라 제국으로 분할한다. 자연스럽게도 이러한 분리는 대를 지나 혈통적 유대가 희미해졌고, 서로간의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알력다툼을 하며 크고 작은 갈등이 벌어졌다. 그러던 사이 아상테에서는 소사족이 성장했고, 그의 후손은 부족들을 결집시켜 로기라 대원정을 일으키고 만다. 불과 300년 만에 로기라 제국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아상테소사족은 5만에 가까운 대군(영웅 소사의 손자인 탐단을 주축으로 한 기마군단)으로 중로기라의 남부를 침공한다. 중로기라는 호숫가 남부의 대다수 영역이 파괴되었지만 위대한 명장인 냉철한 하문탐단을 막아내면서 로기라 전체의 멸망을 막아내는데 성공[13]한다. 그러나 서로기라에는 진작에 반란의 수렁에 흔들렸으며, 결국 가장 첫번째로 멸망하고 그 위로 수헤일 삼왕국루비아, 이다, 르에뤼 왕국이 건설된다. 결국 냉철한 하문의 사후 중로기라 역시 처절하게 멸망했으며, 남하한 아사락의 빙족이 그곳을 철저히 정복하고 새로운 문화를 세운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동로기라 제국이었다.

  • 로기라 대제국의 멸망

동로기라 제국의 쥰(황제)빙족의 침입으로 중로기라의 멸망을 보았고, 마찬가지로 남하해 올 프레베잔을 경계했다. 따라서 경계를 위해 거대한 장벽을 건설했는데,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강제노역은 지친 백성들에게 달가운 행사가 아니었으며, 결국 이 역시 농민반란으로 무너지고 시가나시 연합이 세워지면서 로기라 제국의 모든 후신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 시기 로기라의 판도는 이민족이 정착한 호수혈맹과 고대 시가나시 문화를 계승하는 시가무르 왕국연합, 아상테의 수만 패잔병들이 원주민들과 정착한 사가사등 이전의 형세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모양세를 갖추게 된다.

호수혈맹의 대두

  • 호수혈맹의 형성
  • 시가무르 연합의 형성
  • 하운 자유도시 연합 선포

수많은 유준인, 남하한 빙족, 일부 청인과 사가사(아상테 출신의 혼혈 로기라인), 아주 소수의 아르인 등 호숫가에서는 역사상 이례적으로 혼합된 문화의 세력이 형성되었다. 지배층은 빙족이 중심이었고, 반면 가장 많은 수의 유준인들이 피지배층이 되었다. 호수혈맹은 르에뤼 일부 지방을 포함해서 여러 지역에 걸쳤으나, 로기라 제국 시절마냥 통일된 권력이나 정복전쟁을 피지는 않았다. 또한 동부의 시가무르 연합은 시가나시, 나시롱, 사이아, 유준 왕국 등으로 구성[14]되었으며 의외로 안정적인 시기가 되었다. 아상테 역시도 한 세기 전의 로기라 대원정으로 인해 전쟁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이례적인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같은 시대, 혼혈로고스 등이 투스 사회에서의 지속적인 경쟁을 도피하고자 수 세기동안 하운으로 이주했다.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큰 도시를 이룩한 하운은 주로 투스와 밀거래하거나 아르인과 무역하는 등 세력을 확장했고, 피라페 위주의 해적들을 배제하면서 많은 투스 상인들에게 환대를 받았다. 특히 기술의 발달로 선박 건조와 항해기술의 발달이 무역을 확장시키자 큰 이점이 있던 하운은 크게 발달하게 된다. 결국 하운 인근의 도시들이 자유도시를 결성하면서 정식적으로 나자운을 수도로 하는 연합체가 탄생했다.

  • 베르테르 공화정의 건설과 전쟁

로기라 대제국의 분할 이후 독립한지 3백여년이 지난 베르테르는 수도 퍼밀 항을 중심으로, 베르테르 공화정이 건설됐다. 베르테르 공화국은 이베르 고원의 중턱부터 푸른 평원 대다수를 차지했으나, 반 세기정도 지나 섬 반대편에 말로가 태어나면서 재앙을 겪게됐다. 베르테르의 말로는 스스로를 분화시켜 짐승 형태의 여러 괴물들을 만들어냈는데, 이로 인해서 베르테르는 전쟁의 참상이 벌어진다. 그러던 중 대륙에서 온 어느 학자가 나타나 원로원의 고문이 되기를 간청했다. 학자의 등장 이후 베르테르는 고도로 발전했으며, 말로와의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었다.

사관은 논한다.

집정관으로서 가장 합당한 자는 옳은 말을 하나, 나쁜점을 보지 못하고 기교가 넘쳐나나 외길밖에 걸어보지 못했으며 재주가 뛰어나나 관계가 좁고 신실하나 관대하지 못하며 대범하나 섬세하지 못한 자여야 한다.

허나 지도자로서 가장 피해야할 자는 옳은 것을 말하고 그른것을 관조하며, 기교가 넘치고 수많은 길을 걸었으며 뛰어난 재주와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신실하며 관대하고 대범하며 섬세한 자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존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멀리해야 한다.

-공화 집정의 뿌리가 내린지 반갑자가 흘러, 해지는 쪽에서 현명한자가 나타나니, 그는 스스로를 메르쿠리우스 라고 일컬었다. 원로원이 그의 재주를 물으니 "저는 군대를 양성하고 나라의 망치소리를 끊기게 하지 않으며 백성들이 뻗어누울 자리를 만들 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원로원과 집정관이 이에 감복하여 그를 고문으로 삼고 나라의 대계를 맡겼다.

투스 왕가의 변혁

  • 투스 사회 전반의 경쟁심화와 지배층 고착화
  • 베치 신시(Vechi Cinci)와 샤프테 노이((Șapte noi))의 안정화

건국 이래 천년이 가까워진 투스는 그들이 모시는 조상들의 영들이 교체되지않아 변화가 적어지기 시작하였고, 귀족과 평민과의 격차가 너무 심해져, 따라잡지 못하게 되어 계층간의 반발이 심해지던 시점에서, 강력한 마약을 제조한 웃음이라는 단체에 의해 황제가 조종당하게 되어 국가체계가 흔들렸고, 그러던중 고대에 봉인된 말로가 봉인에서 나와 대규모의 흉 군세를 이끌고 나라를 유린하던 중, 평민 출신의 영웅과 그의 동료들이 돌격대를 편성 말로를 처치하였고, 황제를 교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평민들과 귀족간의 지식 격차를 줄이기 위해 각 성에 대학이라고 불리는 신분과 상관없이 시험을 통과하면 들어갈 수 있는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수헤일 문명의 성장

  • 삼왕국의 발전
  • 수헤일 - 베르테르 - 보르미아의 연결

서로기라 제국의 멸망 이후 세워진 수헤일루비아 왕국, 이다 왕국, 르에뤼 왕국은 활발하게 발전했다. 선박과 항해 기술의 발전은 더 광범위한 무역을 가능케했는데, 먼 육로로는 아상테오로시족, 최장 항로로는 그 하운도두담에 이르렀다. 당시 수헤일과의 무역 대상은 베르테르포트 항, 보르미아레라스리움, 투스포트 가문 등이다. 이례없는 대무역이 성행했으며 투스의 선진적인 마법 문물은 다시 수헤일에서 로기라로 퍼지는 여파를 만들었다. 아르인 원주민들이 운영하는 레라스리움[15]에서는 향목이라 불리는 독특한 기호품이 재배되었는데 이것은 루비아 왕국을 비롯한 수헤일의 큰 상징 중 하나로 자리잡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수헤일 세계와 오랜시간을 무역한 베르테르도 잘 알고 있었다.

메르쿠리오스 재상에 의해서 안정된 베르테르는, 삼왕국의 발전과 더불어 이러한 세계를 정복하기를 원했다. 일찍이 섬에 제약된 베르테르는 말로와의 전쟁 후 남아있던 군사력을 소비할 대상이 없었으며 나아가 육지와의 직접적인 거래를 원했다. 베르테르의 입장에서는 이런 수헤일의 성장이 더 성장한다면 주체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으므로, 언제든 식민 도시로서 가능한 보르미아보다는 미래의 적인 수헤일을 앞서 공격하고자 계획토록 만들었다. 그렇기 위해서 베르테르의 세작들은 루비아 왕국 곳곳에 자리잡았으며 베르테르의 귀한 정보원으로서 활동한다.

2차 로기라 대원정

2세기 전에 벌어진 로기라 대원정의 실패는 아상테 내부에서 소사의 입지를 크게 위협했다. 특히 소사족의 원로족장[16]들은 과거의 훼손된 명예를 수복해야 한다고 믿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큰 힘이 무너진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했다. 곧 아상테칠회(아상테의 회의기관)에서는 로기라 2차 대원정이 대두되었으며, 하산족을 제외한 부족들의 동의로 출사표가 허락되었다. 이듬해 소사는 5천의 (벵가족)돌격대를 선두에 두었으며 4만의 본대(구낭 게르히족, 소사족)가 소사의 명예를 위해서 출전했다. 지휘관은 소사의 손자인 탐단의 증손자 카스토시[17]였으므로 가히 역사의 재현이었으며, 패전하리라곤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예상 외로 호수혈맹은 맹렬히 저항했으며, 이례적인 폭우와 향토병이 소사족의 군대에게 큰 피해가 되었다. 그럼에도 소사족은 승기를 잡아 마침내 여러도시를 파괴하고 호숫가사이아 평원에 도착하게 된다. 양측의 전황은 호수혈맹 측(빙족, 르에뤼 용병, 유준인 집단 자경대 등)이 불리했으며, 아상테(소사족, 벵가족, 구낭 게르히족) 역시도 녹록치는 않았다. 이내 대전투가 벌어졌고 호수혈맹 측이 상양에게 압사당하며 대열이 무너지던 때, 역사상 로기라상테의 전쟁에 개입한 적 없던 시가무르 연합이 소사족의 후방을 기습했다. 호수혈맹의 간절한 요청에 전쟁에 참여한 시가무르 연합은 소사족을 후퇴시켰으며, 전투를 포기할 수 없었던 카스토시는 자신의 나소즈 친위대와 함께 전사했다.

릴시온 내분, 파르네임의 붕괴

아상테의 내분과 구낭 게르히

  • 구낭 게르히의 집권
  • 원로들이 살해당하다
  • 하산의 중재

2차 로기라 원정(로기라상테 전쟁)으로 크게 입지를 잃은 소사는 그 권위가 흔들렸는데, 무려 원로가 전쟁의 책임을 물어 식음을 전폐하고 자살할 정도였다. 500년에 걸친 대초원의 확장 이후 아상테족은 더 이상 나아갈 땅이 없었으며 나아가 삼면[18]이 틀어막힌 아상테 초원에서의 해답이 로기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정세 속에서 소사의 패전은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어려운 시기 속에서 새롭게 나선 건 구낭 게르히 부족으로, 소사와 같은 씨족인 그들은 소사 대신 전면에 나선다. 부족장인 말레사는 로기라가 아니라 후에자 산맥을 우회하여 보르미아를 공격하거나 아예 사가사[19]를 공격해서 부족한 자원과 식량을 조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사의 대원로들이 꿋꿋이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티사무르 신전에서 홧김에 원로들을 살해한다.

이내 말레사는 반정을 일으키고, 이 과정에서 나소즈[20]와 충돌한다. 하지만 다수의 나소즈가 패전으로 인해 축소됐고 결국 버틸 수 없었으므로 이내 소사의 지배층은 몰살당했다. 과거 부족전쟁의 풍습처럼 구낭 게르히 부족이 소사를 통제했으며 하루가 지나 소식을 전해들은 하산족이 그나마 설득하자 이 날서린 혼란이 진정되었다. 곧 말레사는 이러한 분열된 형태의 아상테는 혼란스러운 정세에서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라 주장하며 강력한 집권에 대해서 주장하기 시작했다.

하산은 소사보다도 지나친 공격적 행보에 말레사와 구낭 게르히에게 계속 진정서를 보냈다. 반면 말레사는 회담에 진전이 없자 사신을 살해하였고, 동족을 살해했다는 충격적인 사건에 대부분의 부족들이 분개한다.

드리우는 전운

  • 투스 황실의 재편
  • 투스의 두번째 확장정책

몇 년 전 발생한 사생아 사건을 발단으로, 황태자는 그 자리를 뺏기고 동생인 엘스피어가 대신 그자리에 오른다. 위중한 병안에 있던 황제는 엘스피어에게 그 자리를 맡겼으며, 황제가 된 그는 투스에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서 일전의 샤프테 노이처럼 새로운 정복계획을 꿈꾼다. 그 대상은 아상테와의 전쟁으로 심히 약해진 로기라와, 아직 거대한 세력이 없던 보르미아 등지였다. 몇몇 가문은 황실의 결정에 반대했으나, 강력한 왕권과 이를 지탱하는 가문들을 통해서 전쟁 준비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전쟁 직전, 아이러니하게도 엘스피어가 실종되면서 대혼란이 벌어졌고, 대가문들은 이러한 사태의 인과관계를 고튼 가문에게 덮어씌우므로서, 가장 강력한 대가문이 일부분 몰락[21]하게 되었다. 위대한 조상들은 이런 결정에 반대했지만, 로스 가문은 새로운 시대를 강조하며 계획을 강행했다.

황제의 자리에서는 황실의 적자가 아닌 외족의 혈통을 들이므로서 그 적통성을 무시받았으며, 이 때문에 테토르 튜터러스가 끌어올린 황실의 권위가 추락하게 된다. 베치 신시의 로스 가문은 다섯 가문 중 조율자로서의 역할을 자처해 투스 사회를 정비하였으며, 더 이상 외부로서 확장하지 않더라도 이 이상이면 투스가 더 안정적이고 발전할 수 있다고 설득[22]했다. 또한 로스 가문은 대중에게서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 귀족이 아닌 이들도 정치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관을 설립했다.

베르테르의 대혼란

  • 베르테르 구 공화국 멸망
  • 말로, 샌크라드의 집권과 영역확장
  • 투스의 베르테르 정벌 결의

베르테르는 오랜 말로와의 전쟁을 끝내고 섬의 통일을 이루었다. 원로원은 이같은 승리를 이끈 메르쿠리오스에게 '존엄한자'의 칭호를 내린다. 하지만 말로와의 오랜전쟁으로 베르테르 내부의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총력전을 위해 소모된 자원과 인력은 베르테르가 병영국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고 비대해진 군대는 원로원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전방 군단장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메르쿠리오스의 힘이 강화되어 공화정의 권력구도를 무너뜨리자. 원로원은 메르쿠리오스를 고문에서 해임하고 만장일치로 집정관직에서 파문하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메르쿠리오스는 전방에 배치된 군대를 퍼밀항으로 끌어들여 원로원을 장악했고 스스로 '왕'을 칭하며 정체를 드러냈다.

그의 정체는 바로 베르테르의 '말로'였다.

스스로 '샌크라드'라 칭한 말로는 곧장 비대해진 군대를 통솔해 보르미아 지역에 대한 확장을 꾀한다. 오랫동안 흉과의 전투로 강력해진 베르테르군은 보르미아 해안지방을 점령하고 베르테르섬과 양안을 아우르기 시작했다. 침략군이 대륙 본토에서 행한일은 주로 전쟁으로 소모된 자원과 인력, 즉 노예노동의 수급이었다. 이로인해 해안과 인근 내륙지방이 거의 초토화 되기 시작했고 해안 난민들이 남하하여 '투스'의 영역까지 내려갔다.

유래없는 난민들의 이동에. 투스 내부에선 자체적인 조사에 들어갔고. 일부 난민들을 증인으로 내세워 사태의 전말을 조사했다.

그당시 투스는 겨우 엘스피어 국왕의 부재를 이겨내고 혼란을 수습한 상황이었다. 투스의 집정가인 로스가문은 외세로부터 촉발된 이 혼란을 하루빨리 잠재우고자 했고 결국 다섯가문을 설득해 베르테르 원정을 강행했다.

마왕 토벌

  • 투스의 베르테르원정
  • 베르테르 부왕령 성립

투스의 연합군이 북진하기 시작한 것은 원정을 결의한지 반년이 흐른 뒤였다. 린크 북부에 모습을 드러낸 투스의 군대는 그당시 린크에서 볼 수 있었던 군세중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무력이었다. 기록상에는 5천명으로 조직된 군단 40개가 동원되었고 그들이 입은 갑주와 투구의 반사광이 수십리 떨어진 곳에서도 목격될 정도였다고 한다.

북상한 투스군은 북부에 설치된 베르테르의 식민지를 점령해나갔다. 베르테르군은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투스의 군단병은 중과부적의 상대였다. 결국 전쟁이 발발한지 한달만에 베르테르의 모든 북부 거점에 투스의 깃발이 휘날리게 되었고 연합군은 베르테르 본토 공략에 착수했다.

선봉 군단이었던 제 6군단 7천명의 병력을 시작으로 베르테르에 상륙한 연합군은 포트 퍼밀을 점령하고 나아가 샌크라드의 본거지인 아씨르 블랑 공단까지 진군했다.

연합군은 공단을 점령하기 위해 2년간의 공성전을 이어나갔다고 전해진다. 비단 이 공성전은 요새 하나를 함락시키는 것이 아닌 베르테르의 최종방어선을 분쇄하기 위한 소모전이었다. 공방의 방어군은 '화약병기'의 사용과 말로의 기술을 통해 숫적 열세에도 분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투스 연합군이 전선을 무너뜨리고 공방을 포위하는데 성공하면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전투의 막바지에 이르러 투스 연합군은 샌크라드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그를 도바신의 본토로 압송했다. 남은 베르테르 섬에는 투스의 부왕령이 설치되었고 이후 수백년간 세습 부왕에 의해 섬은 통치되었다.

이후 말로 샌크라드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현재 투스에서도, 베르테르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화산 폭발

  • 린크 세계의 신세기
  • 소빙기의 시작
  • 린크의 뜨거운 전황을 식히다.
  • 고대와 중세를 나누는 기점으로 작용하다.

세계 곳곳의 혼란이 계속되던 와중, 우연스럽게도 린크 대륙의 중부에서 거대한 화산이 폭발했다. 이 화산은 며칠만에 로기라에 닿았으며, 한달 후에는 린크 전지역을 덮어 범지구적 재앙으로 자리잡았다. 아상테의 경우 이례없는 저온과 추위에 목축 환경의 근간이 무너졌고, 그나마 숲과 자연의 요람이었던 로기라에 다시 엄청난 수의 유목민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반면 바다에 접경이 많은 하운, 수헤일, 베르테르 등은 그러한 피해가 덜했으며 발전한 투스마저도 저온에 의한 작물 피해로 빈곤층이 크게 무너져내렸다.

몇년 뒤 메라닌 반도의 아르인들은 투스의 약세를 틈타 독립했으며, 강한 적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메라닌 동맹을 결성했다. 이들은 보르말로 산맥 북쪽에 있던 투스 왕국의 3개 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투스인들의 군량미를 빼앗았다. 불과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투스에게는 정복전쟁을 위한 정비된 군대가 있었으나, 로스 가문으로 인해 조직적으로 해체되어 힘을 쓸 수 없었다. 결국 이곳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고튼 가문은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고 궁극적으로 두 가문 사이에는 메우기 어려운 깊은 갈등이 형성되었다.

린크세계의 역사 (중세~근세)

역사 기여자: 용용이 리반 아우르반딜 에씨비

린크 세계의 화산 폭발 이후의 시기를 다루는 역사 문서다. 근대 직후의 시기부터 인더스트리얼 타임즈로 지칭된다. 소빙기로 인해 역동적으로 변화한 린크 세계를 비추며, 그 과정에서 세력 간의 관계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중세 이전의 린크는 단순히 각 지역의 세력들이 과 대적하는 것도 버거웠으나, 중세 이후의 시기부터는 흉의 발생이 안정적으로 변하고 마석 수급이 줄어들면서 다소 현실적인 국제관계 면모가 강하게 나타난다.

세계의 재편, 잿력

기원전 1년, 세계 각지에 나타난 기온 저하는 생산작물의 저하와 흉작을 일으켰다. 그 파급력은 기아는 물론 세력 균형 자체를 무너트렸으며, 존립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학문기관인 스콜라 엘레멘타라는 이것을 소빙기로 규정했다. 도바신 반도의 중심인 투스 왕국은 회의를 열어 재난에 대해 토의했고, 위대한 조상들은 이것이 신에 의해 일어난 재앙이라고 해석하여 몇백년 간 있었던 린크의 대전란을 의식했다. 때문에 튜터러스 왕가는 제사를 위해서 많은 자원을 소모하는 한편, 대외적으로 점령하고 있던 베르테르에 대한 자원조달을 줄이고, 나아가 고로스의 영역이 아닌 땅에 대해 지원을 중단한다.[24] 황실에서는 속죄와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자는 뜻에서 기원년을 제정하고, 이것이 로기라와 보르미아를 포함한 각지에 퍼지게 된다. 이것이 린크 역사의 기원법으로 작용했다. 투스왕가는 소빙기를 극복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으나 중상층과 하층민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해진다. 이때 (스트라모시, strămoși)의 말씀을 담은 경전(Blent)이 널리 유행하는데, 위대한 조상들에 대한 적대감이 맞물려 서부 전체에 퍼지게 된다. 이것이 종교 항교도(抗敎徒)의 기원이 된다.


  • 아상테의 붕괴와 대이동(Coming of the Asante / Asante Invasion)

소빙기로 인한 흉작은 투스의 많은 하층민들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했으나, 그것은 로기라상테보다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급속한 기온저하는 대초원의 초목의 성장에 방해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점진적으로 유목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하필 구낭 게르히의 내분 이후 아상테의 체계는 엉망이었으므로, 기원후 10년 경 북부의 작은 소부족들은 다시 로기라 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구낭 게르히가 과거의 소사와 같은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시사했다. 결국 근 몇십년 만에 수많은 아상테의 부족들(대부족을 포함한)이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 로기라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로기라 역사에서는 대이주(Coming of the Asante / Asante Invasion)라고 표현하며, 사가사[25]에서 그 유래를 따 사가리아(Sagaria)라고도 일컬었다. 로기라는 대혼란에 물들었고 로기라상테 전쟁으로 흔들리던 호수혈맹은 사가리아로 인해 무너지게 된다. 그나마도 상황이 나은 시가무르 연합의 경우엔 소빙기로 촉발된 이 상황으로 인해 그 위세를 잃었으며, 소빙기 말기에는 식인 사례마저 보고되었다. 로기라의 대혼란은 로기라의 영웅 디스페일이 나타나기 전[26]까지 반복되었다.


슬픈 바다(린크 대륙의 서해)의 경우 어획으로 인해 식량 수급은 덜했으나, 오히려 내지에서 발생한 난민들이 해적이 되는 경우가 잦았다. 주로 이러한 해적들이 노린 대상은 투스의 교역선단이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보르미아의 작은 어선들도 포함될 만큼 악질적이었다. 소빙기 이전 시기에는 해협(Strait)에는 투스베르테르 해군이 이를 차단한 반면, 기원후 각 정치적인 문제로 해군이 부재하자 이런 해적이 더 기승을 부렸다. 하운은 해적들이 얻은 재물 따위를 암거래하여 다시 오로시족이나 보르미아 등에 거래하기도 했다. 이로부터 약 백년 동안이 소빙기의 대해적시대로 인식되었다. 해적들의 대다수 근거지는 전통적으로 피라페 제도의 파이러시 섬 이었지만, 해적동맹의 출현으로 규모가 커지면서 열도 북섬인 후클에도 몇몇개의 마을이 형성된다. 베르테르수헤일은 이런 해적들이 큰 문제였으나 투스에 종속된 식민지로서 자국의 해군을 양성하지 못했다. 이때문에 무능한 정권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했으며, 조상에 대해서 다루는 종교 항교도가 이곳에도 전파된다.

새로운 시대로

소빙기가 내륙은 물론 린크의 전지역을 혼란에 빠트린 와중, 하운은 지속적인 교역·무역과 이윤 추구를 통해 세력의 존속을 유지했다. 그러나 기원전 12년에 안테르 가르가로 보낸 개척선단과 개척민들은 안타까운 최후를 피할 수 없었다. 하운은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아르인 개척선단을 세 차례 더 보냈으며, 마침내 기원후 35년 경에는 그곳에 5백여명 정도의 마을인 도로몬드(보르미아어로 개척이란 뜻)가 형성되었다. 투스도로몬드새로운 하운이라고 일컫었으며, 그곳에는 해안가로 침입해오는 해적도 없었으므로 일종의 낙원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안테르 가르가의 독특한 생태계 때문에 해안가 너머의 탐험은 어려웠으며, 따라서 해안가의 형태를 따라 작은 식민도시를 만드는데 그쳤다.

하운은 이 개척 경험을 통해서 이 세계가 인지하는 영역보다 훨씬 더 넓을 수 있다라는 개방적인 사고가 만들어졌는데,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나자운에선 도로몬드 항로회사가 조직되었다. 하운의 여러 선단장(무역선단의 장)들은 이 항로회사에 투자했으며, 회사는 그 자본을 바탕으로 범선 조선인력을 채용[27]하여 이후 기원후 100년 즈음이 되면 안테르 가르가의 대략적인 윤곽이 잡히게 된다. 그러나 항로회사의 지속적인 정착 실패와 이윤 창출 문제, 수익성 등의 문제로 불과 몇십여년 만에 사라진다. 그러나 그 토대정보는 하운의 여러 항해조합을 통해서 유용하게 활용된다. 이시기에는 장기간 항해를 위한 보급식량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아상테의 유목민들이 먹던 우사로라는 말린 작물이 널리 보급되는 계기가 된다.

소빙기의 해체

  • 기원후 200년 중반 소빙기로부터의 점진적 회복
  • 로기라 문화권의 정체성 형성(민족정체성의 형성)
  • 108개 왕국의 시대(Age of Hundred Eight Kingdoms)[28]
  • 수헤일 연합왕국의 결성과 북쪽 바다의 통일

기원후 220년 즈음 소빙기로 인한 기온변화가 차츰 회복[29]되었다. 이 소빙기로 로기라상테의 전체 인구가 25% 줄어들었으며, 방대한 대초원의 초목의 토대가 파괴되었다. 여전히 카잔 호에는 하산족의 후예가 정착하였으며, 기후의 회복에 따라 유목민이 점차 생겨났다. 그러나 그 기세는 과거와는 달랐으므로, 더 이상 아상테로기라의 대외적인 경쟁세력이 아니었다. 그 유민들은 약 200년이 넘는 기간동안 로기라상테로 몰려들었고, 수없이 많은 민족과 문화가 엉켰으며, 아울러 혼재된 상태로 거듭났다. 이런 문화의 융합은 로기라인이라는 공통된 민족관념 형성에 토대가 되었지만 동시에 여러 세력의 후신을 자처하는 왕국들이 나타나고 말았다. 불과 백여년 만에 로기라에는 108개의 소왕국이 난립했고, 이 난세에 사이에는 로기라 대제국의 후손인 로도론 왕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 수헤일에 있는 루비아, 르에뤼, 이다 3개 왕국은 혼란스러운 시기(기원후 80년 경)에 연합하였으며, 피라페의 해적과 투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했다. 소빙기 시기에 오히려 하운은 발전하였으므로 수헤일 연합왕국도 그 수혜를 입었다. 이들의 동맹은 기원후 100년 시기에는 견고하였으나 후계들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분란이 일어났는데, 이를 북쪽 바다 전쟁이라고 불렀다. 이 전쟁의 결과로 세 왕국의 권력은 이다의 왕 잉부르가 차지하게 된다. 또한 북쪽 바다의 군소 세력을 통합했으며, 릴시온다레나 섬까지 무혈입성한다. 이 왕국이 수헤일 연합왕국[30]다. 통합 과정에서 르에뤼의 대륙 세력은 로기라상테로 도피했는데, 이들은 108개 왕국의 시대 중에서도 7대 왕국에 속하게 된다.


기원후 200년 말기에 보르미아의 일부는 차츰 건조기후에서 온대기후자연변화하였는데, 그로 인해 기존보다 작물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한다. 보르미아 중부에서는 얇은 강의 수원이 높아졌으며 소빙기 말기에 이르러 따뜻해지는 기후 덕분에 농사가 윤택해졌다. 주로 메리나 해안에 도시를 이루고 살던 아르인들은 서서히 중부 진출을 하게되고, 지정학적으로도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나 기존에 보르미아에서 농사에 적합한 영역은 대부분 타국(베르테르, 르에뤼, 일부 로기라, *카라스인 촌, 투스-메라닌 목성 등)이 점거했었으나, 소빙기로 그런 선점이 사라지자 보르미아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적은 같은 아르인 집단인 메라닌 동맹이었는데, 그들은 기원후 10년 경에 이미 무장집단으로 성장해 반도를 점거하고 성을 축조했기 때문이었다. 메리나의 소왕국들과 메라닌 동맹은 이해관계가 달랐으므로, 동맹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서 소왕국들을 공격하게 된다. 이때 레라스리움[31]의 용병대인 베르테베르 용병이 참전하여 극적으로 승리를 이끈다.


오라시는 기원전 100년 경의 아상테 내전 당시 구낭 게르히로의 지원을 통해 독립한 아상테의 부족이었다. 그들은 일찍이 중개무역업[32]에 종사하며 부를 성장했는데, 특유의 유목민족 기개와 결집, 유대를 통해서 약탈을 최대한 피할 수 있었다. 특히 교역상단에는 같은 민족인 소사인이 늘 있었으므로, 소사의 나소즈만큼의 강함은 아니더라도 늘 강력한 우군이 되었다. 하지만 소빙기로 상업이 주춤해지자 많은 인구가 유출되었고 이에 오라시는 투스인들의 어업 방식을 따라 소다로스 강 상류에서 식량을 수급했다. 그 과정에서 아상테의 대이주가 벌어졌고, 살아남기 위해 많은 아상태 부족이 오라시에 합류하면서 오라시의 규모는 한츰 더 커졌다.

소빙기의 완화와 하운의 발전은 육로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하운은 이따금 마차를 통해서 오라시 인근의 육로를 가로질러 적은 물자나 사람을 운송했는데 이것에 아이디어를 얻은 오라시는 투스와 하운 사이의 소다로스에 투스의 도로를 더 발전시킨 형태의 포장도로를 잇기 시작했다. 이 포장도로는 기원후 230년 즈음이 되면서 소다로스 대부분의 지방에 연결되었고, 오라시에 의해서 보호받았다. 이곳을 오가는 양국의 상인들로부터 통행료로 마분, 소금, 은 따위를 받았는데 이것을 “상양이 다니는 길”이라고 하여 상양로(또는 지명을 따 소다로스 포장도로)라고 불렀다. 이 길은 기존 투스의 기술이었지만 더 나아가 마차의 규격에 맞춰 홈을 파고 특정 거리마다 새가 오갈 수 있도록 연락장을 만드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샤프테 노이의 고트라 가문은 상양로를 통해서 하운과 가장 큰 거래를 성사시키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보르미아의 세계

  • 보르미아의 변화
  • 보르미아로 드라펜트 왕국의 건국

보르미아 지방에서 꾸준히 증가한 아르인들의 인구는 어느덧 로기라 지방 인구의 서너배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꾸준히 강력한 국가가 등장하지 않은 것은 피라페, 투스, 베르테르, 수헤일, 르에뤼등 다양한 세력들이 그곳에 발을 딛었기 때문인데, 소빙기 이후 타문화권의 간섭이 줄어든 보르미아는 마침내 왕권과 정당성을 앞세워 통일을 시도하는 왕국이 등장한다. 보르미아로 드라펜트는 보르미아 중부 일대를 평정[33]했으며, 약화된 르에뤼 왕국과 강화를 맺고 내정을 다졌다. 왕 드라펜트는 다른 강국으로부터 침략당하지 않기 위해서 보르미아에 있는 다양한 소왕국들과 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본래였으면 투스가 이러한 실정을 개입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샤프테노이고튼 가문킨트 가문의 개입 안건을 부정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오히려 보르미아로 드라펜트의 적은 피라테 해적으로

독립과 공화국

  • 베르테르 왕국의 멸망
  • 신 공화국의 건설

동시간대 베르테르는 투스에게의 독립 후에도 소빙기의 여파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곳곳에 걸린 투스의 깃발이나 고로스에 대한 우대, 정치사회적인 다양한 문제는 투스에 대한 반감을 증대시켰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베르테르 대중의 종교적 색채가 강해졌는데, 나아가 새로운 나라를 주창하기 시작했다. 투스에 의해 세워진 베르테르 왕정은 이런 백성들의 웅성거림에 귀를 닫고 무시했지만 그 여파는 더더욱 커져, 결국 기원후(A.D.) 190년에 대대적인 반정과 함께 새로운 정권이 세워진다. 이들은 엄중한 종교생활과 성실함을 주창했으며, 나아가 투스계 공왕가를 끌어내리고 린크 처음으로 공화국을 건설한다. 이러한 베르테르의 새로운 종교가 향교도다.

투스

  • 오라시가 귀의해오다
  • 튜터러스 왕가의 새 수도
  • 이십인의 위대한 조상들
  • 로스 가문의 비극적인 사건

아상테의 내전과 구낭 게르히의 분란 이후 오로시족은 아상테에서 독립했다. 그리고 불과 350여년 만에 정착문명으로서 하사람 강을 주변으로 3,4개의 도시국가가 세워졌으며, 특히 소빙기로 밀려든 일부 아상테인을 흡수하면서 그 세력이 굳건해졌다. 이들을 오라시라 불렀는데, 기존부터 오라시는 투스의 샤프테 노이와 신뢰관계엾으므로, 큰 적대가 없었다. 하지만 오라시의 호족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어쩌면 메라닌 반도와 비슷해질 것[34]이 두려워 일찍이 투스에 귀의하는 결정을 내린다. 투스 내부에서는 튜터러스 왕가가 이를 환영했는데, 샤프테 노이의 성장을 방지할 수 있는 방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결정은 약 700년 후 투스 왕가에 가장 큰 문제가 된다.

그 무렵 투스엔 이십인의 위대한 조상들이 현신[35]하고 있었으나, 투스의 귀족사회는 이러한 우롯[36]를 더 이상 마땅치 여기지 않았다. 늘 투스의 지배층들은 이러한 조상들이 고질적인 문제라고 여겼으며, 그들을 그저 조상으로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투스 세계의 확장

투스 지배층의 치열한 권력투쟁에도 불구하고, 투스의 대외적 세계는 소빙기 이래 최대의 호황을 맞이한다. 특히 베치 신시포트 가문은 고튼 가문의 후원 하에 본격적으로 성장했고 황실의 칙령 아래에 피라페 열도를 소탕하기 시작한다. 기원후 280년 경에는 피라페의 저항이 막심했으나, 이내 피라페의 양 섬인 후클파이러시가 점거당하면서 근거지를 두고 있던 대부분의 해적들이 항복하였다. 이들의 출신성분은 온갖 혼혈로 복잡했으므로 그들의 우두머리는 모두 제거하고, 다시 해적질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대다수의 배는 빼앗았다. 일찍이 피라페에는 식량이 나지 않았으므로, 투스가 떠나자 그들 사이에 식량을 두고 내분이 벌어져 참혹한 살육의 땅이 된다.

해적 소탕의 잔인함과는 별개로, 메라닌 일대에 성행하던 해적질이 줄자 큰 무역로가 연결되었다. 소빙기 직후 약화되었던 수헤일 해역과의 무역로가 연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드라펜트의 항구들과 메라닌 동맹의 항구도시에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낙후되어 있던 보르미아 지방에는 수헤일투스의 자본들이 들어오며 번영을 누리게 된다. 또한 역으로 최남단의 하운 역시 이익을 위해서 무역에 나섰으므로, 무려 하운나자운베르테르 공화국퍼밀 시를 잇는 거대한 무역로가 완성되었다. 투스에서 제작된 다양한 제작품, 예술품들은 하운포트 가문의 무역선단에 실려 고가에 거래되었으며, 상업이 고도로 발전하자 수학과 조선술, 항해술 역시 발전되었다.

투스 내부에서는 하천과 육로망 역시 활발해졌는데, 샤프테 노이에서는 오라시가 기반 건설의 대다수에 참여했다.


로기라상테 통일, 로도론 왕국

진취만의 황금시대

  • 로기라의 식량생산량 증대로 인한 인구증가
  • 수헤일 연합왕국과의 친선과 활발한 문화증가
  • 진취만 전역에 무역도시 형성과 비약적 성장

조상의 종말

다레나 섬의 낭중지추

로도론 탐험대

마석 고갈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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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기서 이르는 로기라는 넓은 의미의 로기라로, 즉 로기라상테를 비롯해 벽아랫세계의 중심이 되는 땅 전역을 이른다. 이러한 지칭은 후에 발생하는 로기라 대제국아사마르 계통 문화에 근거하며, 나아가 중세 이후에 생기는 로기라 왕국들을 이르러 총칭하는 표현이다.
  2. 로기라상테(벽아랫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거인과 나무에 대한 구설과 언급은 이러한 거인문명의 기원을 적시할 수 있는 근거다.
  3. 신장이 인간의 열배 이상이기 때문에 척박한 기후환경에서 열량을 보충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몇몇 거인들은 깊은 동굴로 숨어들어 오랜 잠을 청하거나, 아예 몇 세기의 기간동안 작아지기 위한 환경적 진화를 선택했다.
  4. 거대한 프레브 대협곡 지대 아래에 광활하게 펼쳐져있기 때문이다.
  5. 아사락-아사마르에서 지칭되는 그 사막이 맞다.
  6. 이러한 이야기는 설화에서 근거하지만 실제로는 몸에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마석이 흡수되어 인간을 변형시킨 것이라고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7. 인종이 꼭 문화를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으나, 같은 인종으로서의 동질감과 사회를 구성함에 있어 인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8. 호전적인 아사락 계통의 부족들은 원시적인 문명 형태로, 외교의 대상으론 부적합했다. 또한 청인들 역시 자신들만의 문화를 위협할 거라 믿었기 때문에 로기라에게 관대하지 않았고, 로기라의 건국 이후 지속적으로 로기라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런 적대감 치고는 청인 내부에 단합을 하지 않아 소규모 왕국들에 그쳤으며, 결국 차례차례 로기라에게 합병당하면서 로기라 인근의 청인 세력은 모두 사라졌다.
  9. 실질적으로 정복한 것이 아니라 카미야 유격대에 의해서 패전했다. 그러나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다고는 할 수 있다.
  10. 정착하지는 않았다. 우람한 성채에 접근을 꺼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11. 이 과정에서 투스에서 존재하던 종이가 린크 전역에 문명의 기술로서 퍼졌다.
  12. 고대 로기라 제국에서 지칭하던 황제를 이르는 표현
  13. 이 전투가 1차 사이아 전투이며, 훗날 그들의 조상이 같은 장소에서 다시 격전을 벌인다. 또한 냉철한 하문의 승리방법은 적의 전략을 일찍이 확인하고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는 전법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력차이는 극심했으며, 대열이 무너졌을 때 그들의 사령관인 탐단을 죽임으로서 전쟁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14. 연합의 기인 사슴은 룰라반도라는 이름의 신성한 사슴이다.
  15. 아르인들이 운영하는 대규모 모 집단 농장, 엄청난 인력을 필요로 하는 향목 재배를 마침 아르인의 강점인 인구로 유지한 대농장이다. 이후 이러한 유형의 농장들을 린크 세계에서는 레라스리움이라고 일컫었다.
  16. 아상테에 존재하는 관례로 대족장들에게 대대로 예우를 갖추고자 각각의 부족들은 원로들을 모시고 그 의견을 수용했다.
  17. 소사의 먼 후손인 카스토시는 소사족 순혈이 아닌 오로시족과의 혼혈이었으며, 전쟁을 부정했고 여행을 하길 바랬다. 자세한 것은 이토의 여행기
  18. 남부에는 가르가(바다숲), 동부에는 사막, 서부에는 [투스]가 있었다.
  19. 150여년 전 1차 로기라 원정 당시 패전 후 로기라에 자리를 튼 소사인들
  20. 소사의 정예 전사집단
  21. 완전히 멸족당하지는 않았다.
  22. 로스 가문의 경우 가장 내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지와 군사력의 부분에서 가장 미흡했다. 실제로는 투스가 더 성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으나, 만약 다른 가문원이 개선영웅 등의 명성과 지위를 얻는 것 보다는 현재를 유지하는 것이 더 안정적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23. 소빙기를 기점으로서 린크 전체의 기원전후를 나눈다.
  24. 훗날 이 결정은 투스의 식민지들이 독립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25. 로기라 지역에 사는 아상테인
  26. 대략 기원 후 400년 경
  27. 주로 하운의 무역선단에 탑승하는 이는 아르인이거나, 아니면 로기라인이었다. 린크의 고대사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노예 행위가 드물었지만 이들의 생활수준은 노예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므로 동일시해도 큰 차이는 없다.
  28. 얼음과 불의 노래의 오마주이다.
  29. 그러나 여전히 기온 차이는 존재했으며, 작물에 피해가 되었다.
  30. 수도는 프로헴스비냐 제 2의 도시는 게일이다.
  31. 아르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보르미아 대규모 농사단지, 고대부터 외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상주한 공간이다.
  32. 주로 샤프테 노이-하운, 하운-아상테, 샤프테노이-아상테, 로기라-하운 등
  33. 일부 레라스리움은 수헤일 왕국들의 비호로 정복당하지 않았다. 보르미아에서는 이들이 같은 아르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오직 자신들만의 영위를 위해서 경제활동을 한다는 부정적인 시선이 한데 섞여있었기에 이는 더더욱 부정적인 입장이 되었다.
  34. 메라닌 동맹이 세워진 이후로 투스는 메라닌 동맹으로 향하는 모든 교역을 끊어냈다.
  35. 영혼석에 남아 투스 사회의 명예로운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것
  36. 위대한 조상들의 회의
  37. 자세한 것은 투스 대혁명 참고, 이 사건에는 베르테르 공화국과 오라시온, 샤프테 노이가 관계되어 있다.
  38. 린크 근세와 근대의 기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