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원격제도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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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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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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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 국사
大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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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
시대
고조선(단군조선) 진국 주호국 우산국 건주위
부여 고조선(위만조선)
원삼한
시대
한사군* 마한 변한 진한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시대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탐라국
남북한
시대
발해 통일신라
후삼한
시대
태봉 후백제 후신라
고려
시대
고려
조선
시대
조선 요동도독부
광무 시대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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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 시대
연합군 군정
태시
시대
대한국
명화
시대

만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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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산융
동호
고조선 예맥 숙신
산융
동호

요동군
고리국
흉노 부여
전한
요동군 · 현도군
~4세기초 고구려 부여 읍루
(부여)
오환
선비
후한
요동군 · 현도군
동연
서진 읍루
4~6세기 전연
전진
후연 물길
북연
북위 거란 실위 고구려 두막루 말갈
(고구려)
동위
북제
북주
7~9세기
말갈
발해 말갈
(발해)
10~12세기 동란국 발해부흥운동 여진
오국부
 
 
13세기 동요
후요
동하
몽골 제국

요양행성 · 동방 3왕가 · 심왕
14~16세기 북원 여진족
고려 요동 군벌 우량카이 삼위
여진족
17~18세기 후금
조선
요동도독부
삼위시대
후금 네르친스크 조약
19세기 대한제국 대청제국 러시아 제국
20세기  
식민지 만주
대한제국
대금민국 임시정부 연해주 공동통치령
대한제국·대일본제국
트란스아무르 공화국
전러시아 극동정부
연합국 점령하 대한 소비에트 민정청 러시아 차르국 소련
대한국 | 북간 7도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현재 대금민국

틀:몽골의 역사 (아침해의 원유관)


틀:중국의 역사 (아침해의 원유관)


틀:러시아의 역사 (아침해의 원유관)


한자문화권의 황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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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제국 (야마토)

일본
대일본제국
일본국
(대월)

(대남)
(선말한초)

대한
대한제국
대한국
대금

대청
대청제국
(괄호는 외왕내제 왕조)

대한제국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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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지역 명칭 통치기관
만주 만주(满洲) 만주총독부
동몽골 몽고번(夢姑邦) 몽고도독부
프리모리예 숙신도호부(肃慎都護府) 숙신도호부
해당지역 명칭 기관
칭다오 청도 -
웨이하이 위해 -
* 숙신도호부는 1923년 나선통감부로 업무 이전
* 몽고번은 1942년 몽고목(蒙古牧)으로 편입
괴뢰국 · 군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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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제1차 세계 대전 참전국 (아침해의 원유관)


틀:제2차 세계 대전 참전국 (아침해의 원유관)


추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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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지도자
유럽 나치 독일 | 아돌프 히틀러 · 헤르만 괴링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에리히 레더 · 빌헬름 카이텔 · 하인리히 힘러

이탈리아 왕국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베니토 무솔리니 · 피에트로 바돌리오
살로 공화국 | 베니토 무솔리니
헝가리 왕국 | 호르티 미클로시
헝가리 국민단결정부 | 살러시 페렌츠
루마니아 왕국 | 미하이 1세 · 이온 안토네스쿠
불가리아 왕국 | 보리스 3세 · 시메온 2세
슬로바키아 제 1 공화국 | 요제프 티소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 에밀 하하
크로아티아 독립국 | 안테 파벨리치 · 토미슬라브 2세
노르웨이 크비슬링 정권 | 비드쿤 크비슬링
비시 프랑스 | 필리프 페탱
모나코 공국 | 루이 2세
세르비아 구국정부 | 밀란 네디치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 이반 미하일로프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 | 안드레이 블라소프
로고트 자치국 |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벨라루스 중앙 라다 | 라다슬로 아스트로스키


핀란드|그리스국 |알바니아 왕국 |핀도스 공국|류블랴나 주|덴마크 보호령
아시아 일본 제국 | 쇼와 덴노 · 고노에 후미마로 (전쟁 이전) · 도조 히데키 · 우가키 마토메 · 스즈키 간타로

대한제국 | 선종 현황제 · 김창암 · 송병조 · 이동녕
러시아 차르국 | 타티야나 1세 · 그레고리 세묘노프
대명제국 | 함화제 주자홍 · 인루겅
베트남 제국 | 바오다이 황제
캄보디아 왕국 | 노로돔 시아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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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국 | 바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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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파시즘 (아침해의 원유관)



근대원격제도(近代院格制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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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원의 명칭 및 서원격은 근대원격제도가 폐지된 1946년 3월 5일을 기준으로 함
  • 서원의 창건년도 순으로 나열 (중세 → 근세 → 근대)
사액격외
(賜額格外)
종묘
궁제정원
(宮祭擎院)
자계서원
옥동서원
소수서원
옥산서원
남계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
도산서원
도봉서원
필암서원
자산서원
무열사


포충사
심곡서원
송공사
숭현서원
문암서원
서계서원


자운서원
예성서원
운계서원
석남서원
송담서원
동명서원


칠봉서원
노덕서원
달연서원
녹동서원
경행서원
화산서원


인천 충렬서원
송악서원
해촌서원
용곡서원
문봉서원
미원서원


지건사
귤림서원
민사서원
수곡서원
창절서원
설재서원


고산서원
잠곡서원
창렬사
계림서원
청권사
삼성사


대포서원
호암서원
을진군 근산서원
임고서원
고죽서원
반암서원


옥계서원
용강서원
매봉서원
인흥서원
숭덕사
여순사


해동사(폐원)
성평서원
장백사(폐원)
선관서원(폐원)
천힐서원(폐원)
발해사(미진좌)
국제정원
(國祭擎院)
송계서원
회암서원
두암서원
오봉서원
금오서원
덕암서원
궁제부원
(宮祭副院)
국제부원
(國祭副院)
궁제참원
(宮祭參院)
창주서원
백운서원
봉양서원
병암서원
노동서원
계송서원
국제참원
(國祭參院)
별격궁제원
(別格宮祭院)
문회서원
파산서원
충절서원
용연서원
통영 충렬사
삼충사


홍암서원
사충서원
우저서원
충현서원
경광서원
청성묘


봉암서원
궐리사
매림서원
낙천사
유애서원
치신사


문헌서원
제동서원
태화서원
강천서원
충민서원
무령서원


원강서원
자암서원
태사사
한성 충장서원
언어별 명칭
한국어 근대원격제도
한자 近代院格制度
영어 Modern system of ranked Seowon

개요

1885년부터 대한제국 정부가 실시한, 재개편된 서원 시설에 등급을 매겨 관리하는 제도.

'근대원격제도'란 명칭은 당시 대한제국 정부가 사용한 단어가 아니라, 일전에 실행했던 사액서원 제도와 대조하여 '근대'에 나온 제도라고 후대에 이름을 붙인 용어이다. 이 때문에 근대원격제도란 용어에 대응하녀 19세기 이전에 사액서원 제도를 '중세서원제도'라고도 부르는 경우도 있으니, 학계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는 아니다[1]. 이마저도 19세기 이전에 일부 서원을 사액서원으로 지정하여 명예를 준 것이지, 그 이전까지 조선 왕조가 원격제도라고 부를 만큼 세밀한 위계질서를 만들어 관리한 것은 아니다.

설명

본래 대한국에서는 조선 시대 이래 유학 교육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지방 곳곳에 향교와 서원을 설치하곤 했는데, 통상적으로 규모가 있는 교육기관인 서원의 경우 성현이라 불리는 인물을 배향하고 생전 해당 인물의 사상을 반영하여 유학을 교육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성현은 단순히 한명이 아닌 여러명이 배향되는 경우들도 더러 있었으며, 이를 통해 서원 내에서 유학에 관하여 다양한 입장과 사상을 가진 분파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17세기 중후반부터는 서인, 노론의 일부 파벌을 시작으로 서원의 폐단이 발생할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유학에서 본질을 중요시 여기는 보수적인 학파들의 경우 지나치게 하나의 서원에 많은 성현이 경전을 탐구하는 것에 방해가 될수도 있다는 시각을 제기하기도 했으며, 근세에 들어서는 서원들의 폐단이 심각해지는 현상이 나타나자 성현의 배향 수를 제한해 제사에 드는 비용을 줄여야 한다고 여기는 흐름도 나타났다. 북학파, 남학파나 당시는 소수였던 개화파등도 이에 동조하였고, 세도정치 속에서 개혁을 꿈꾸는 계열의 인사들 또한 서원제도의 개혁을 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은 임신대경장 이후 서원들이 폐단이 혁파되고, 국체유학이 사상적으로 건설되면서 한국의 유학관과 혼합되기 시작했다.

1875년경부터 이미 한성과 지방의 서원들을 대상으로 기존 서원들의 폐단을 혁파한다는 명분 하에 정부의 대대적인 개입이 이루어진 데 이래, 귀정성리학의 사상적 정립이 거의 완성된 1885년에 대한국 정부는 정식으로 향원관을 창설, 중앙정부에서 서원에 개입하는 제도를 확립했다. 사실상 앞으로 중앙정부가 기존까지 향촌과 지방의 관할 업무였던 관외 서원의 관리까지 전부 책임지겠다는 의사표명이였고, 이렇게 서원에서 계속 중앙의 권위를 부각시켜 직간접적으로 백성들이 죽어서나 살아서나 오로지 나라와 황실만 바라보게 의도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시기 서원에서 지내는 제사인 향례제의 규모, 의미가 대폭 개편됐다. 대한국 정부가 향례제에 새롭게 부여한 역할은 일종의 지역축제였는데, 이는 국체유학에 대한 서민들의 거부감을 정식 선포 이전에 최대한 낮추는 한편, 행사를 늘려 유흥거리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서민들의 관심을 끌고자 했던 정부의 정책이였다. 처음엔 유생들의 반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정부 내에서도 많았으나 결과는 대성공이였고, 그렇게 '엄격한 원리와 자유로운 구조'라는 근대적인 유학의 정립이 서민 사회에도 뿌리내렸다.

1885년에 4월 중순, 대한국 정부는 공식으로 서원에 격을 매기는 '원격제'를 도입했다. 일정 격 이하의 서원에는 배향할 수 있는 현인들의 수를 제한하여 부패를 확실하게 줄이고, 대신 이를 기반으로 전국적인 소형 서원과 위상이 상승한 향교의 수를 늘려 국체유학이 빨리 퍼지도록 기능하게 했다. 당연히 유생들 사이에서는 반발도 많았지만 송시열의 이론에 따른 주자학적 논리[2]에서 봐도 문제가 없는 행위였던데다가 오히려 체제적으로는 훨씬 혁신적이였고, 떄문에 유생들이 낸 주장의 위력 본래만 못했다. 여기에 근대원격제도로 지방서원들이 전부 중앙의 관할에 들어가자 서원의 횡포로부터 숨이 트인 백성들이 스스로 나서서 이러한 유생들에게 엄포를 놓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등급

위와 같은 배경과 19세기에 들어 서양에서 과학기술이 들어오면서 교통과 통신이 발달했고, 개혁과 서구화를 거친 한국의 정치체제 또한 근대적인 재상제도를 구축했다. 과거에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지만, 변화된 사회에서는 근대원격제도를 통해 국가 차원에서의 서원의 전면적인 통제와 조직화가 가능했다. 이는 부국강병을 위해 개편한 국체유학을 가능케 하는 한 가지 제도적 기반이기도 했으며, 종전 이후 1946년 연합군 통감청 측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근대원격제도를 폐지하였지만, 격이 높았던 서원은 여전히 대우받는다. 과거에 격을 받았던 서원는 관련 자료에서 '구 서원격(舊書院格) 〇〇書院'라고 알려주는데, 바로 근대원격제도에서 받았던 등급을 말한다. 홍살문 앞 표석에 옛 서원격을 새긴 곳도 많다. 비록 제도가 폐지되긴 했어도 과거에 높은 격을 받았던 서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중요하게 대접받는다. 예시로, 현재까지도 유명했던 서원들은 수능 전인 고등학생들이 합격 기원을 위해 방문하기도 하는 등, 나름대로 인기를 가진 상태다.

아무 격도 받지 못한 작은 서원를 무격서원(無格書院)라 했는데, 혁파 이후 부패한 유생들이 많이 사라진것의 여파로 한국 전체에 있는 서원들 중 절반 이상이 무격서원였다. 무격서원이 새로이 격을 받거나, 또는 이미 격을 받은 서원이 또다시 다른 격을 받는 것을 열격(列格)이라고 하였다.

분류

궁내부에서 지정한 바에 따르면 크게 서원의 격은 국제원(國祭院)과 궁제원(宮祭院)으로 나뉘었다. 이 중 국제원은 한국 정부의 지출로 전폐(奠幣)의식을 치루어 제사를 지내는 곳이고, 궁제원은 궁(宮), 즉 황제의 일족이 속하는 한국 황실의 궁(정확히는 궁내부지만)의 내탕금을 직접 지불하여 제례에서 전폐(奠幣)의식을 거행했다.

종묘(宗廟)

가장 높게 취급된 시설은 역대 대한 황실의 황족들과 왕족들의 위패가 안치된 종묘였다. 근대원격제도 하에서 종묘는 한국과 조선의 선왕, 즉 유교에서 중시하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인을 널리 행한 인물인 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가장 존엄한 곳이라 하여 아예 서원격을 매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종묘에 서원격을 매긴다 어쩐다 하는 행동 자체를 무례하게 여겼으므로, 종묘는 '등급 외의 등급'이라고 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도 이를 증명하듯이 황실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다만 임신대경장 이전까지의 종묘는 궐 밖에서까지 그 권위가 강조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었으므로, 광무 시대 대한국 정부가 당시에 이 정책을 실시한 이유는 500년동안 내려오는 한국 황실의 지엄함과 역사를 중요시하게 만드는 풍조를 조성하려는 수단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궁국제원(宮國祭院)

궁국제원(宮國祭院)
궁제정원 국제정원 궁제부원 국제부원 궁제참원 국제참원
宮祭正院 國祭正院 宮祭副院 國祭副院 宮祭參院 國祭參院

침해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시피한 권위를 가진 종묘의 밑으로는, 크게 궁제원(宮祭院)과 국제원(國祭院)으로 나누고, 그 안에서 정(擎)·부(副)·참(參)으로 구분했다. 여기서 제(祭)는 제례(祭禮)를 뜻하는데, 한국 정부는 이 제례에서 사용되는 비용과 예물을 통틀어 전폐(奠幣)라고 칭하여 불렀다. 궁제원은 한국 황실(구체적으로는 궁내부)에서, 국제원은 대한제국 정부에서 전폐의식을 거행했다.

크게 궁제정원(宮祭正院)·국제정원(國祭正院)·궁제부원(宮祭副院)·국제부원(國祭副院)·궁제참원(宮祭參院)·국제참원(國祭參院) 등의 총 6가지의 등급으로 나누었다. 제 1차 극동전쟁이 끝나고 몇년간의 시간이 지난 1897년부터 대한제국 정부는 별개로 별격궁제원(別格宮祭院)이라는 등급을 신설하고 궁제참원에 준하여 대우하기로 했는데, 이 별격궁제원은 민족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자'를 성현, 혹은 성철로 모시는 서원 중에서 선별했다. 1946년 근대원격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총 15개 시설이 별격궁제원이 되었는데, 그 중 만주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곳이 바로 한성에 설치되어 만주 전선에서 전사한 흥안군을 배향한 한성 충장서원이다. 충무공 이순신을 성현으로 모신 현충사 또한 별격궁제원이였다.

식민지 만주의 경우 궁제정원은 경호자치도 심양부(現 묵던특별시)에 위치한 장백사관성부(現 창춘광역시)선관서원, 예허북도 합이빈부(現 하르빈광역시)에 위치한 천힐서원을 비롯한 3곳, 국제참원은 대략 31곳이 존재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졌는지 그 외에도 발해사가 천힐서원의 뒤를 이을 새로운 궁제정원으로 정해졌고 이후 착공에 돌입하였으나, 공사 도중에 대한제국이 항복하자 몇개월 뒤 근대원격제도 자체가 폐지되면서 완공하지 못한 채로 해체되었다.

게다가 선관서원은 1923년경 관성대화재로 인해 불타버렸고, 따라서 만주가 독립할때까지 실질적으로 성현에게 제사를 드리고 유학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서원은 장백사선관서원정도였다. 식민지 만주에는 궁제정원과 국제참원을 포함한 서원 31곳을 제외하면 서원이 없었고, 그마저도 한국의 서원 문화에 생소한 만주인들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하기 일수였다. 때문에 만주총독부 측에서도 만주의 각 도(道)마다 국제참원을 하나씩 두려고 노력하였으나, 계획을 완수하기 전에 한국이 항복하면서 백지가 되었다.

제원(諸院)

내지제원(内地諸院)
부원(府院) 군원(郡院) 현원(縣院)
도원(道院) 구원(區院) 방원(坊院)
목원(牧院) 면원(面院)
외지진원(外地眞院)
도진원(道眞院) 주진원(州進院) 현진원(縣眞院)
부진원(府眞院)

서원은 각각 도(道)·부(府)·군(郡)·구(區)·목(牧)·현(縣)·방(坊)·면(面),즉 각 행정구역을 대표하는 등급을 보유하고 있었다. 예시로 한성을 대표하는 서원은 한성 부원(漢城府院)인 식이다. 이러한 제원의 급은 한국 본토에서 통용되는 관계로 내지제원(内地諸院)이라고도 불렸다.

당시 식민지였던 만주의 행정체계는 대한제국 본토와 상이했으므로, 제사(諸院) 등급으로는 만주총독부가 따로 도진원(道眞院)·부진원/주진원(府眞院/州進院)·현진원(縣眞院)를 지정하여, 각 도·부/주·현이 공금으로 신사의 유지비를 지원하도록 했다. 여기서 진(進)은 '진상'이란 뜻이다. 따라서 도진원·부진원·주진원이란 명칭은 '도·부·주에서진상하는 서원'이란 뜻인 셈인데. 여기서 내지와 다르게 똑같이 제사를 지냄에도 제사의 제(諸)자가 붙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유는 현재 사학계에서 여러 의견이 오가나, 보편적인 학설은 당시 대한제국 기준 식민지인이자 미개한 민족인 만주인에게 직접 제사를 지내 성현을 불러들이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반영된 작명이라는 설이다.

치제원(致祭院)

치제원 문서 참조.


  1. 대한국 학계의 경우 주로 사액제도, 원격제도로 나누어서 부르는 경향이 크다.
  2. 애시당초 유학을 전 국민에게 보급하는것, 서원에서 배향하는 성현의 수를 한명으로 줄이자는 등의 조치를 주장하는 이론은 조선 시대의 유명한 노론 출신 거유인 송시열이 처음으로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