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묘개화 (위망매영재)|정묘개화]] 1867년 5월 18일<br>[[내외칭제 (위망매영재)|내외칭제]]의 대호령 및 [[대게림제국 (위망매영재)|대계림제국]] 출범 1868년 1월 15일<br>[[폐주구도령 (위망매영재)|폐주구도]](藩州具道)령 반포 1870년 6월 4일<br>대계림제국 국헌 시행 1890년 7월 17일<br>[[연합군 점령기 (위망매영재)|연합군의 점령]] 1945년 9월 3일<br>[[계림국 국헌 (위망매영재)|계림국 국헌]] 공표 1946년 10월 3일<br>계림국 국헌 시행 및 계림국 출범 1947년 8월 15일<br>[[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위망매영재)|국권회복]] 1952년 4월 18일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병마도원수 (위망지매영재)|병마도원수]]<ref>대외적으로는 병마도원수 집안이 대대로 임금에게 하사받은 왕작을 근거삼아 계림의 국왕(國王)을 자처했다. 다만 세정 말기에 이르러 본가의 종통 단절과 병약한 도원수의 취임 등이 이어졌으며, 이 탓에 도원수를 보좌하여 정무를 담당하는 체찰사들의 권력이 커지는 현상이 벌어졌다.</ref>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해동중보, 상평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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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한성 시대 (위망지매영재)|한성 시대]]에 [[계림국 (위망지매영재)|계림]]을 통치했던 [[세정 (위망지매영재)|세정]]으로, 계림사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세정인 한편, 최후의 무신정권이다. 이 시대를 호칭할 때에는 주로 당대 중심지였던 [[한성 (위망지매영재)|한성]]의 이름을 따서 한성세정으로 부르지만, 당시 덕풍왕이자 병마도원수였던 인물들의 성씨인 [[새당 덕문 (위망지매영재)|덕씨]]를 따 [[덕문세정 (위망지매영재)|덕문세정]]이라고도 부른다.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파일:신라국 국기.svg|30px|border]] [[계림국 (위망지매영재)|계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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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1867년에서 1868년 사이 [[계림국 (위망지매영재)|계림]] [[제남목 (위망지매영재)|제남목]] 일대에 세정수군통제사 [[신헌 (위망지매영재)|신헌]]의 주도로 덕문세정의 남별초들이 필두로 세워졌던 정권이다. '''계림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공화국'''이기도 하다.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해동중보, 상평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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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진훤 (위망지매영재)|진훤]]이 937년에 개창한 계림 최초의 세정.
실질적으로 세정이 개막된 시기는 여러 관직들을 겸직하고 있던 [[진훤 (위망지매영재)|진훤]]이 신라 조정에 입조하여 병마도원수에 임명된 시기인 937년이지만, 그 이전부터 896년에 일어난 [[적고적의 난 (위망지매영재)|적고적의 난]]을 진압한 견훤의 권세는 여전히 커지고 있었기에, 실질적으론 그가 신라 서면도통에 임명된 뒤 [[태봉국 (위망지매영재)|태봉]]을 평정한 918년부터를 실질적인 진씨세정의 시작으로 본다.
계림사 역사상 최초의 세정인 동시에 국호의 개칭, 금성 금씨 종묘신궁의 종주의 명칭을 성황으로 하는 한편 병마도원수의 종씨들이 대대로 왕작을 하사받도록 하는 등, 훗날 이어질 계림의 문화적 제도들을 정비하였으나 말대에 이르러 고려왕을 겸직한 병마도원수들 섭관청정사들의 종횡이 이어지던 중, 결국 또 다른 유력가인 개성 왕씨 출신의 섭관청정사이자 무인인 [[왕희 (위망지매영재)|왕희]]가 정변을 통해 임금에게 왕작을 하사받아 고려왕으로서 등극한 뒤, 새로운 세정을 개막하면서 1097년에 멸망했다.
한국어: 한소전쟁, 북방전선, 동시베리아 전쟁
러시아어: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대조국전쟁)
영어: Far East Front (극동전선), Great Patriotic War (대조국전쟁), East Siberian War (동시베리아 전쟁)
날짜
1940년 3월 30일 ~ 1945년 6월 16일
장소
아시아 · 시베리아 · 북태평양 및 사할린 해역
원인
2차 동아대전으로 대표되는 대한제국의 팽창정책으로 인한 국제적인 제제와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합쳐진 대한제국의 소련 침공
교전국
연합국
추축국
소비에트 연방 미합중국 몽골 인민공화국 투바 인민 공화국 (~1944) 중화민국 └ 중국 공산당 멕시코
대한제국 └ 전 러시아 극동정부 └ 예케 몽골 울루스 └ 중화민국 남경정부 └ 후송 임시조정 └ 아합국(1942~) └ 의제아번(1943~) └ 적탑번(1943~) └ 젤레나 우크라이나 임시정부(1943~)
536,743명 전사 및 실종 1,240,000명 부상 민간인 16,000명 사망 9,780~12,031명 전사 및 실종 24,425명 부상 9,780~12,031명 전사 및 실종 24,425명 부상 민간인 20,000~30,000명 사망 9,780~12,031명 전사 및 실종 민간인 약 1,700만 명 사망
680,397명 전사 및 실종 1,304,200 부상 민간인 약 550,000 ~ 1,000,000명 사망 중한전선 제외 총 1,485,397명 전사 및 실종
결과
연합국의 승리
영향
연합군에 의한 대한제국 강제 해체 소련의 초강대국 등극 아시아 북부전선 종결 만주를 비롯한 여러 민족의 독립과 점령으로 인한 러시아 차르국 0호 체제의 종식
젊은 시절 러시아 파시스트당 내 온건파였으며, 이후 콘스탄틴 로자예프스키의 측근으로서 활동하던 중 1973년 12월 24일을 기해 드바리에츠의 안전가옥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연회에서 콘스탄틴 로자예프스키 내각총리와 알렉세이 바크셰프 전 수상경호부장을 권총으로 저격해 살해한 피의 이브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틀 후인 1973년 12월 26일 체포되어 1974년 6월 24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했다.
장장 50년 가까이 중화민국 산시성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사로 군림했으며, 오늘날 산시성에 본사를 둔 염계재벌의 창업주도 옌시산이다. 이 탓에 그에게 붙은 별명이 바로 산서의 토황제. 군벌 시절부터 당대 중국의 여러 군벌들 중에서는 드물게 경제성장, 사회개혁에 적극 힘썼기 때문에 모범 장관으로 불렸고, 정계에서 은퇴하여 재계활동에 몰두한 말년에도 막대한 이득을 벌어들이는 한편 양심적인 경영정책 덕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노환으로 인해 자신의 사저인 염가대원에서 병사했다.
외부 통상국 주사 주미공사관 서기관 외부 교섭국 주사 주미공사관 참서관 주샌프란시스코 영사관 부영사 외부 교섭국장 외부 참서관 (의정관방 비서과장) 주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총영사 제 N대 외부협판 제 23,24대 외부대신 주미공사관 특명전권공사 중서원 외무위원회 사무장 초대 자유당 총재 제 30-32대 대한국 내각총리대신 제 N대 의정총서
1911년 1월 3일 경, 당시 황경부윤직을 지내던 중 '한불우호(韓佛友好)'를 기념하여 파리에 대한제국 황실 명의로 오얏나무 2300여 그루를 기증하였다. 파리 시 측에선 이렇게 심어진 오얏나무들이 개화하는 시기인 3월 말~4월 말이 되면 파리 오얏꽃 축제(Festival Paris fleur de prunier)를 개최하고 있으며, 해마다 80만명 정도의 방문객이 방문하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어,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 등 다양한 언어에 능했으며, 숙달도 약 2달만이 걸릴 정도로 빠르게 했다고 한다.
법부대신 재임기간동안 내각에 머무르던 시절, 가갸날을 공휴일로 지정하여 언문에 대한 관심을 높이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실제로 김가진은 퇴임 이후 한글학교를 세우기도 하는 등 한글 교육의 보급에 열성적인 인물이였다.
1915년에는 당시 애신각라왕이였던 푸이의 한성 방문 당시 만난 적도 있었다고 하며, 푸이의 일기에 따르면 냉담한 반응이 주류를 이룬 다른 방문객들과는 달리 나름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던 듯 하다.
유승민 전 총리가 존경하는 정치인 중 하나가 바로 김가진이라고 알려져 있다. 유승민 왈, 흠정헌법 시기에도 두각을 드러내던 의회정치의 신과도 같은 위상을 본받고 싶다고.
화서도독부(和嶼都督府,Hwaseo Commandary-General)는 대한제국이 1951년부터 1987년까지 일본 열도의 규슈, 시고쿠 및 주고쿠 남부에 설치했던 지배기관 내지 군정부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한 후, 워싱턴 조약을 통해 일본열도의 처분권에서 대한제국이 우위를 점하게 되며 성립되었다.
상세
부호
1945년 일본제국 규슈 지방에 상륙한 뒤 점령을 완료한 대한군은 남일본군정부(南日本軍政府)를 설치하여 일대 지역을 다스렸다. 이후 1951년 경 남일본에 대해선 사실상 합병을 진행시켜도 무리가 없을 수준의 재량권이 대한제국 측에게 주어졌으나, 당시 내각총리대신직을 지내고 있던 김규식의 의중에 따라 합병은 무르되, 사실상 직속군정을 통한 합방이나 매한가지인 체제의 성립이 결정되면 남일본군정부라고 불리던 지배기관의 명칭은 곧 화서도독부(和嶼都督府)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화서도독부의 점령지, 혹은 그 밖인 일본국의 영토에서 거주하던 일본인들에게는 한정도(韓政洲,칸테이슈) 내지 한령지구(韓令地區,칸레이치쿠)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당시 서구권에선 흔히 남일본 사령정부(Commandary government of South Japan)정도로 불렸다.
권위주의
기업 실험기지로서 당대 대한제국의 수많은 상품시장들이 자리잡기도 했지만, 지배기간 내내 군정이 유지된 탓에 화서도독부는 잦은 반란에 시달렸다. 한편으로는 모순적인 체제 탓에 주고쿠 북부부터 이어지는 일본국 정부 내의 반한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고, 이는 치안의 악화로 이어지는 현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역사
성립 배경
제 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김규식 내각의 대외방침은 크게 친서방, 그중에서도 친미 및 실용주의적 외교, 그리고 그 틀 안에서의 현상유지 및 패권의 확보로 귀결되고 있었다. 이에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제국 정부가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하자 대한제국군은 일본제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감행하였고, 4번 작계 낙일(落日)이 쓰시마에서부터 대성공을 거두는 데 성공한 한편, 한국은 미국과 일본 양국이 모두 전쟁으로 여력을 소진해가던 시점에 공격을 감행하며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 한편,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규슈를 향한 상륙을 감행했다. 결국 1945년 경 일본이 항복하였고, 이후 워싱턴 조약에서는 전후 일본에 대한 재량권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지게 된 것은 단연컨대 한군정을 통해 일본 지역 대부분을 관리하고, 또 근거리에서 전과를 세운 대한제국 측이였다. 하지만 미국을 위시한 서방 진영의 강대국들 측에선 대한제국이 일본의 부재를 틈타 완벽하게 태평양의 패권을 장악하는 것을 암암리에 우려하는 중이였고[6], 결국 대안으로 대하넺국 측은 일본열도의 완전한 합방 대신 분할과 지배를 택하게 되었다.
1951년, 오키나와와 구 일본령 대만 및 가라후토에 유구목,대만도독부와 고엽도독부가, 하이난 조차지,복건성과 남양군도는 각각 중국 측을 향한 반환과 미국의 편입이 이루어진 한편, 쿠릴열도는 천도라는 이름으로 대한제국령이 되며 최종적으로 구 일본의 식민지 청산은 끝을 맺었다. 이후 홋카이도와 일본 열도의 기타 지방을 비롯한 본토는 크게 두개로 분할되었으며, 하나는 기존 한군정의 방식대로 대한제국 측의 영향력이 짙게 발휘되는 화서도독부, 다른 하나는 대한제국 측의 일본통감부와 미국의 간섭을 받는 일본국 정부였다. 기획대로 정부수립이 완료된 이후 일본국 정부 측이 도독부의 지배 하에 들어간 지역에 대한 권리 포기를 선언하면서, 공식적으로 한 군정은 종료, 한성과 대한제국군의 지배를 받는 화서도독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전성기
화서도독부는 군정 치하에 들어갔지만, 기존 일본 제국 측의 인프라와 대한제국 정부의 주도에 따른 적극적인 개발정책, 그리고 폭발적인 기업 및 재벌들의 진출 탓에 막대한 시장적, 경제적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일본의 산업화 기반 및 항구들이 모여있던 규슈 지방이 포함되어 있었던 만큼 시작부터 높은 가능성을 보이던 도독부에서의 개발정책은 자연스럽게 한국의 자본들을 이끌었으며, 덕분에 규슈 지방은 역설적이게도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결과를 맞았다.
뒤이어 1960년대부터는 군정정책이 어느정도는 완화되며 발전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고도로 발전한 황경이 네온 사인으로 가득한 빛의 도시로 변모해갔듯, 그와 마찬가지로 돈과 기술의 집중공세를 맞았던 도독부도 자연스럽게 발전한 셈이였다. 금융적인 발전과 시장으로서의 입지, 그리고 태평양을 향한 군사기지라는 특성과 군국주의적 문화가 공존하는 화서의 문화는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자리잡아갔고, 이 거대한 흐름에 묶인 새로운 세대는 서서히 일본에 대한 존재를 망각하기도 하였다.
멸망
그러나 이러한 발전과 풍요 뒤에는, 모순적이기 그지없는 군정 체제의 지속과 황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채 무분별하게 사업을 확장한 사업체들, 대한제국 정부의 기만과, 그 모든 불합리를 지켜보며 조용히, 그러나 맹렬하게 복수와 탈환의 다짐을 불태우고 있던 일본인들, 그리고 아직 형체는 남아있던 일본국 정부가 있었다. 1969년 대한제국과 미군 사이의 해양국경 문제가 벌어진 이후 대한제국과 미국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달렸고, 뒤이어 일어난 경진사태와 강북의 봄은 서서히 대한제국의 질서에 균열이 나고 있음을 증명했다.
온갖 경제위기와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화서도독부 내에서는 다시 억압적인 분위기가 강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이는 대규모 일본인 봉기와 전국적인 파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대한제국 정부 내에서는 1979년 기미정변으로 세력을 잡은 전두환 세력이 대황제에게 정치적인 숙청을 당하면서 큰 혼란에 휩싸였으며, 결국 1987년 벌어진 8.15 봉기로 이미 해외 영향력을 상실해 가던 대한제국 정부의 방관 끝에, 화서도독부는 반쯤 내전상태에 돌입했고, 끝내 도독이 도망치듯 동래로 가는 배에 몸을 싫은 후, 화서도독부는 붕괴되었다.
경제
사회
황금만능주의와 군사사회
도독부라는 특성상 군사문화가 팽배하였던 화서도독부에는 한편으로는 여러 기업의 진출정책이 정부에 의해 적극 지원되었다. 수립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진행된 시장 장악정책의 결과 화서진출정책에 조기부터 참여했던 기업들의 연간 성장률이 비대하게 오르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이는 막대한 재정을 쥔 재벌들과 현지 도독부 인사들의 정경유착, 그리고 이로 인한 정무의 부패로 이어졌다. 4대 도독인 박정희가 전문 킬러에게 의문사를 당했으며, 8.15 봉기당시 도독부의 시스템이 급격하게 무너진 까닭으로는 현대 사가들 사이에서도 특히 부정부패가 주목받는다.
문화
한일동인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전까진 일본제국 정부 측과 여러 우호정책을 추진했던 대한국의 사회풍조는 승전 이후에도 남아있었고, 이는 당시에 기획된 몇몇 일본과 한국간의 연계사업의 실험이 화서도독부에서 벌어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대부분의 고위층 및 장교들은 한국인으로 구성되었으나 말단 조직원 및 군대에는 일본인들의 참가도 이루어졌으며, 한편 정신적인 부문에선 기존의 국가신도를 유교 국체학으로 대체하는 과정, 신도의 교리 조작과 기존 시정촌을 비롯한 하위 행정구역의 군정방으로의 개편 등 흡수적인 정책 또한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책들은 크게 통틀어 한일동인(韓日同仁) 사상에 기반하였다고 정의되었다.
대한국 내각총리대신치고는 상당히 긴 기간인 5년 5개월을 재임했으며, 그렇게 4년 11개월의 장준하 전 총리를 제치고 전후 최장기 재임 4위 기록을 세웠었다. 의원내각제인 대한국에서 연임을 포함해 총리 임기를 다 채우고 나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단임인 일본국 국무총리대신의 임기 5년보다 더 길게 재임하였고, 그 재임 기간 중 3년 8개월(2003년 ~ 2006년)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국무총리대신과 겹친다. 게다가 굉장히 독특한 성격과 말투를 유지해서 일본인에게 여러 의미로 기억되는 대한 총리가 되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오랜 재임기간 때문에 그에 비례해 악명을 널리 떨친 측면도 있다.[8]
일본에서 김종인의 이미지는 지속적인 장충단 참배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대마도 문제 등으로 인해 극우 이미지가 강하게 박히긴 했지만, 사실 후술되어있듯 김종인 담화를 발표하며 이회창 담화의 계승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고 스가모 형무소를 방문해 사죄의 목소리를 전하는 등 일본에 우호적인 모습 역시 제법 보였다.[9]
어찌 됐든 이 사람만큼 일본인들에게 혐오를 받은 대한 총리는 당시 기준으로는 거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한창 반한 감정이 고조되던 시기엔 '김종인 가지고 놀기' 등의 플래시 게임이 일본 국내에서 유행하기도 했었으며, 같은 이유로 일륜의 시마즈 요시히로(게임)에서 적으로 나오거나, 스타크래프트의 유즈맵 '대마도 지키기'에서 최종보스로 나오는 등, 그런데 세월이 약인지 김종인의 악명도 퇴임 후 17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바랬으며, 퇴임 이후 그의 정치적 제자이기도 했던 김무성이 2013년 재집권 시작부터 막 나갈 기질을 보이면서 김종인을 능가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아예 "김종인 시절 대한이 그나마 나았다"고 하소연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김종인이 과거사 망언은 많았지만 현대사는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았는데, 김무성 정권 들어선 현대사의 대명사인 일한월드컵 개최 사실도 삭제한 교과서를 검정 통과시키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으니. 또 2003년 유사법제 3법 통과 등 군사대국화 기도로 논란이 있었으나, 김무성만큼은 아니었다.
이 외에도 정치인 장제원, 이명박이나 오세훈[10]
, 전광훈, 그리고 김윤주 등 다수가 미친 존재감을 보이면서 일본에서 김종인의 존재감은 점점 묻히고 있다. 도리어 "이런 인간들을 거느리고도 결정적인 선을 넘지 않았던 김종인은 의외로 정상인이 아니었을까"라는 재평가마저 나오는 상황이다.
사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충장단 참배나 대마도 문제를 제외하곤 상식 선에 들었던 인물이었다는 평도 있다. 실제로 이회창 담화를 그대로 계승한 김종인 담화를 발표하고, 스가모 형무소에도 갔다오는 등 대한제국의 만행에 대해서 어느정도 참회하는 모습도 보였다. 2004년에는 일본을 안보 우호국격인 백색 국가에 지정해 신뢰할 만한 나라라는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다. 임기 초반엔 국립한성 현충원을 국립 추도시설로 쓰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충장단의 상징성을 강조하는 대한 우익들의 성화 때문에 무위로 끝난 적도 있었다. 심지어 최초의 북한 정상회담도 이시기(2002, 2004)에 이뤄졌다. 이러한 재평가는 청출어람을 이룬 그의 후임자의 탓도 상당하다.
이런 이면엔 대외정책 문제는 미한동맹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함으로써 국내 문제에 집중하겠다는 의도 또한 작용했을 것이다. 김종인은 특별한 외교적 지향이나 대외정책에 대한 정견이 없었으며, 내정 및 경제개혁이 임기 내내 추구한 단일 목표였다. 그 밖의 다른 분야 정책들은 그 달성을 위해 희생되어도 좋다는 것이 내각의 일관된 기조였다. 김종인이 보여온 이러한 혼란스러운 모습은 이에 기반한 것일지도 모른다.
북아메리카 태평양국(北美洲太平洋國, Nord Amerika Pazifischerstaat, North American Pacific State ), 또는 북태평양국(北美洲太國, Nord Pazifischer Staat, NorthPacific State)은 북아메리카 대륙 서부와 알래스카에 걸쳐 위치한 연방 공화국이다. 1776년 7월 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대략 230여년 간 북아메리카 대륙 동부를 포함한 통일 국가로서 존재해 왔으나, 1949년 미합중국 정부가 추축국에게 항복을 선언한 이후, 워싱턴 조약의 체결을 통해 미 서부와 중부, 동부의 각 추축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독립국가화가 결정되면서 대한제국 측의 주도로 성립되었다.
총 9개의 성과 5개의 부, 6,742개의 군과 1,354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연합왕국령 캐나다, 남쪽으로는 멕시코 제 3제국과 접해있고, 동쪽으로는 록키산맥 정부, 대게르만국의 노르트메리카 국가판무관부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서쪽의 태평양으로는 대한제국령 주가특별도 및 북편도독부와 해역을 맡대고 있고, 극지방에 속하는 아랍서가 성(구 알래스카 주)과는 육로로 이어져 있다. 최대 도시는 구금산부다.
건국의 초기부터 한성이 배후에 있었던 만큼 공영권 내 위치는 속방국, 즉 정규 회원국에도 포함되지 않는 대한제국의 자치국이다. 다만 자치국인 관계로 국성을 전주 이씨로 하고 한국에서 파견된 한국인 고문들의 지시에 따라서 내정을 운영하지만, 연호나 도독부 등 제국의 직할령에 해당되는 지역들의 관제를 정비하지는 않고 있다. 북아메리카 태평양국 정부는 대통령제와 수반우위제를 체택해 대통령제를 실행하되 수반인 북태평양국 정부총리가 많은 권한을 쥐고 있고, 이 외에도 대동아공영권의 핵심구성국[14]으로서 대한제국 내지에서 주기적으로 파견되는 미주 통감, 그리고 참,민의원과 국가평리원이 삼권의 분립을 이룬다.
탕탕탕! 탕탕당당탕탕!! 탕탕탕평책.
콩코드
대한제국
1875년 3월 29일 ~
국기
국장
국호
공식 명칭
• 한국어:대한제국 • 영어:Empire of Korea • 중국어:大韓帝国/大韓帝國 • 러시아어:Корейская Империя
제25-27대 - 김창암 내각총리대신 1934년 5월 16일 ~ 1945년 2월 11일 제28대 - 송병조 내각총리대신 1945년 2월 11일 ~ 1947년 8월 15일 제29대 - 조병옥 내각총리대신 1947년 ~ 1949년 제30대 - 예양정 이재규 내각총리대신 1949년 ~ 1951년 제31대 - 김태선 내각총리대신 1951년 ~ 1953년 제32대 - 변영태 내각총리대신 1953년 ~ 1956년 제33대 -이기붕 내각총리대신 1956년 ~ 1959년 제34대 - 장택상 내각총리대신 1959년 ~ 1961년 제35대 - 장면 내각총리대신 1961년 ~ 1963년 제36-40대 - 박정희 내각총리대신 1963년 ~ 1977년 제41대 - ??? 내각총리대신1977년 ~ 1980년
개국 1392년 8월 5일 태조 고황제 즉위 1392년 8월 13일 조미수호통상조규 1871년 9월 11일 조일수호조규 1875년 2월 27일 갑신경신 1883년 9월 11일 홍문 16조 반포 및 대조선국 선포 1886년 5월 1일 칭제건원 및 대한제국 선포 1894년 10월 12일 흠정대한국 국제 공포 1899년 8월 17일 통감부 설치 1940년 7월 25일 독립전쟁 발발 1944년 8월 29일 연합군의 점령 1945년 8월 15일 대한국 국제 공포 1946년 10월 17일 대한국 국제 시행 및 대한국 출범 1947년 11월 29일 국권회복 1952년 4월 28일
대한국(大韓國), 통칭 대한(大韓), 한국(韓國)은 동아시아의 입헌군주국이다.
북쪽으로는 중화민국과 러시아, 남쪽 해양으로는 일본과 인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청해와도 인접하는 대한반도에 위치해 있다. 인구는 약 9천만명으로 세계 18위에 달하며, 국토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많은 점, 산지 면적이 국토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점 탓에 인구 밀도가 높은 편이다. 특히 한성부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은 인구의 약 40%가 몰려있는 세계 최대의 대도시권 중 하나다.
대한국은 정치적으로는 양원제 의원내각제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대한국 헌법 1조에 의거하여 대황제를 한국인의 정신적인 군주로서 상징적인 국가원수로 하되, 실권은 정부수반인 내각리대신에게 있는 정치 제도를 정비하고 있다. 의결기관인 국회는 크게 비례대표제를 통해 의원을 선출하는 참의원(상원)과 국민의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된 민의원(하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평화의 희구에 대한 조항이 헌법에 존재하는 관계로, 정식 군대가 아닌 경비사라는 준군사조직을 통해서만 기본적인 경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
1871년 개항 이후 다사다난한 근대사를 대한제국 시대동안 보냈으며, 특히 1940년대부터 통감부가 설치된 이래 일본의 국권침탈이 심각해지자 1944년 내전을 통해 일본의 세력을 축출한 뒤 신속히 연합국에게 항복했다. 전후 대한반도는 연합군의 점령을 받았고, 국권 회복 이후 미국의 대(對) 아시아 정책의 일환으로 유엔의 지원을 받았다. 박정희 내각 시기 향촌진흥운동등 고도의 발전을 거듭한 한편 마셜 플랜의 지원하에 막강한 경제성장을 이룩하였으며,
대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진국으로 알려져 있고 또한 지역강대국이다.한국 원은 대한국의 높은 경제 수준과 안전성, 거대한 자산 규모 덕에 안전자산으로 평가받기도 하는 신뢰성이 높은 통화이며, 이 때문에 원화는 미국 달러, 유로, 엔화, 위안, 영국 파운드와 함께 무역통화로 꼽힌다. 대한의 GDP는 프랑스에 이은 세계 8위이며, 금 보유고 세계 5위, 주식시장 규모 세계 7위, 대외순자산 규모 세계 3위 및 국제통화기금(IMF) 투표권이 세계5위를 차지하는 등 수준높은 경제력을 자랑한다. 비서양권 국가 중 일본과 더불어 유일한 G7 회원국이기도 하다. 광복 대한제국 국기.sv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