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격시대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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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대한국

일본국

대금민국

러시아 차르국

중화민국

티베트 왕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마다가스카르 왕국

몽골

타이완민주주의인민공화제국

대한제국

대한 공화국

예케 몽골 울루스

대청제국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대한국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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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시대의 시작을 알린 두 황제의 어진(御眞)

개요

한국과 일본은 자유민주주의, 기본적인 인권과 국민의 정신적인 지주, 법의 지배라고 하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대 사회의 시작 이래부터 함께 협력한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로 일한관계의 기초가 아닌가.-아베 신조
동양의 감격시대라는것은 제국주의를 미화시킨 구역질 나는 환상이다. 단지 유럽에서 이미 있던 위선을 조선과 일본이 반동주의적인 식견을 가지고 반복했을 뿐이다.-장 폴 사르트르

감격시대는 일본사, 한국사의 시대구분 중 하나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대한제국, 일본제국에 의해 아시아가 제패되었던 기간을 의미한다. 통상적으로 이들의 국제적인 위상이 급부상한 제 1차 동아시아 전쟁의 승전 직후부터 제 2차 동아시아 전쟁의 패배까지를 감격시대로 보는 시각이 주류이며, 일부는 이후 한국과 일본이 다시 경제적으로 부상했기에 이 시기도 감격시대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으나 이 시기는 전반적으로 아시아의 성장세가 큰 시대였기 때문에 특정 국가들만이 제국주의로서 번영한 감격시대와 같은 선상에 두기는 힘들다는 의견이 대세다.

배경

여명기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아시아의 봄날

태극과 욱일의 시대

세계대공황

황혼기

한국과 일본에게 1920년대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시대일것이다.-미국 경제칼럼

본격적인 감격시대의 쇠락은 유럽으로부터 얻어내던 전쟁특수가 몰락하고, 끝나지 않을 듯하던 수직적인 경제 상승이 멈추고 부터였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성장으로 한껏 오른 국위 덕분에 성장만 멈췄을 뿐 호황 자체는 계속되리라는 시각이 있었으나, 호황이 끝나자 억눌려 있던 노동자들의 사회주의 운동과 조선공산당과 일본 공산당의 발흥 등 사회문제가 심화될 조짐이 보였고, 정치적으로도 민주주의가 겉으로는 잘 유지되고 있었으나, 약간의 문제가 생기는 순간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상황이였다.

결국 일본의 치안유지법 신설과 한국의 치안법 개정을 시작으로 사회의 본격적인 경직이 시작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맘때쯤 재임한 총리들의 무능과 이로 인한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 그리고 결정적으로 을축대홍수관동대지진, 나아가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받으면서 호황의 꿈 조차도 사그러들었다. 이때 입은 피해는 한국과 일본의 경제적인 성과를 사실상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렸고, 타 열강들에 비해 국가적인 역량이 부족하던 이들의 특성상 피해는 유럽 국가들보다 컸다. 특히 한국의 경우 이 사태를 기점으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치안법을 개정한 이후에도 상당히 활발했던지라 '반공'이 사실상 국내 정치인들의 주 지지도 획득 방법으로 거듭났고, 일본도 관동 대지진 당시 사회에 준 충격으로 인해 다이쇼 시대에 이룩한 민주주의가 붕괴하고, 대신 정치가 극단적으로 변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종막

긍정적 평가

아시아의 근대적 역사의 개막

사회와 경제의 안정화

오늘날의 국제질서와의 연관성

부정적 평가

제국주의와 민족차별

당시 감격시대를 사실상 주도했다고도 볼 수 있는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은 엄연한 제국주의 열강이였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식민지 등을 건설한 뒤 현지인들을 착취하여 자국의 풍요를 축적했다는 뜻이 되기도 하며, 실제로 당시 아시아의 북방 지방은 한국이, 남방 지방은 일본이 식민지화하는 방식으로 대규모 식민활동이 벌어졌고 이는 사회진화론, 아시아주의 등으로 미화되어 대내외로 선전되었다.

이렇게 식민지가 된 지역과 그 지역에 사는 민족들은 졸지에 나라를 뺏기거나 본국의 상품을 강제로 구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고, 이들의 산업구조는 서양 열강이 그러했듯 철저히 일본이나 한국 본국에 귀속된 형태로 발전이 진행되었다. 한국이 한국령 만주에서 광산 개발을 통한 수익을 독점했듯이 돈이 되는 상품들은 종주국들이 독점하는 사례 역시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민족적인 차별도 이루어졌다. 개항 이후 근대화와 열강 등극으로 한껏 거만해진 한,일 정부는 자국 내에서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한 타국과 타 민족의 생활 및 문화를 야만으로 포장하여 묘사했고, 이를 아시아주의에 의거하여 '문명개화' 시키는 것이 의무라는 내용의 사상을 국민들에게 주입했다. 이에 따라 자연히 한국인과 일본인들은 중국인, 만주인, 몽골인 등을 위시한 식민지 민족들에게 선민사상을 품게 되었고, 이는 곧 식민지 민족들을 미개인으로 취급하는 풍조로 이어졌다. 이러한 양국인들의 시각은 다윈의 진화론에서 파생된 사회진화론이 보편적인 기저 사상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식민지들이 독립할 수 있던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기존 식민제국들인 한국과 일본이 패망한 뒤 미국과 소련의 합의로 식민지들의 주권이 반환되면서부터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시절 상전이었던 한국과 일본의 경제 문화적 영향력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보면 감격 시대 식민지에 드리운 어둠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전쟁과 학살

사회 불평등과 정치적 혼란

이후

여담

대중매체에서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