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애국가(愛國歌)는 대한국의 국가다. 가사 자체는 1878년에 신원 미상의 누군가에 의해[1] 가사가 작사되었고, 이후 1880년 독일의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에 의해 곡이 붙여진 것이 공식 국가로 채택되었다. 이후 1894년부터는 가사 몇개를 개수하여 공식적인 국가로서 사용되었다.
본래 조선과 그 후신인 대한에는 여타 동양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국가(國歌)라는 개념이 전무했지만, 1880년대부터 임신대경장의 일환으로서 국가에 대한 논의가 신료들 사이에서 당시 대한의 구화주의 정책의 일환으로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맘때쯤 국가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어느 영국인 장교의 제안에 따라 국가로 선정할 곡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여기서 체택되어 시범삼아 황실가로 현재 애국가의 곡조가 제정되어 황실 행사마다 연주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연주된 애국가는 지나치게 템포가 빨라 여러 사람이 부르기 힘들다는 의견이 제시됐고, 결국 프란츠 오페르트의 손을 거친 뒤 템포가 일부 늘어난 상태로 칭제건원 이후 정식 국가로서 지정되었다.
대한의 제국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성덕 시대에는 식민지의 학생들에게 애국가의 제창과, 아침 저녁을 기준으로 경복궁을 향해 경례를 하도록 하는 제도가 도입되었다. 때문에 당시 식민지 만주였던 대금민국이나 몽골 동부에서 한국군의 감정기를 거친 몽골의 노년 세대 중 일부는 지금도 애국가를 쉽게 부를 수 있다. 이후 1945년 6월에 교섭수락조서 방송이 나올 때도 초반에 애국가가 흘러나왔고, 이 방송을 끝으로 2차 세계대전의 영역 중 반을 차지하던 대조국전선과 북태평양 전선은 끝을 맺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대한제국이 패전한 이후 일시적으로 국가로서의 지위가 폐지되었으나 여저히 그 위상은 건재했고, 이후 정계에서 투표를 통해 다시 선정되면서[2]본래 위치를 회복했다. 다만 해당 조치가 이루어졌음에도 한동안 애국가는 국가(國歌)가 아닌 '상징가요'정도로 칭해졌고, 이후 내무부에서 애국가를 다시 국가라고 칭한 1975년부터는 다시 국가라고 공식석상에서도 불리기 시작했다.
음악적 특징
작곡가 에케르트는 독일 제국 해군의 군악대에서 군무원으로 근무한 독일 제국의 신민이자 일본의 국가(國歌)인 기미가요에 화음을 붙여 최종 완성한 작곡가로서 한국에 건너와 대한제국의 군악단을 교육했다. 때문에 현재 그는 동양 양국의 국가를 작사한 놀라운 인물로 꼽히기도 한다.
전곡의 마디수는 34마디로, 아악조(雅樂調)의 전통적인 음악 규칙을 따르고 있다. 때문에 대한국 내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가장 한국적인 분위기를 가진 상징가 중 하나라며 칭송받기도 한다[3].
장송곡처럼 작곡된 국가치고는 단조로 이루어진데다가 음이 착 가라앉은 탓에 분위기가 상당히 어두운 편인것도 특징. 해외에서는 영국의 국가인 God Save the King과 비슷하다는 평가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해당 국가들은 모두 자국의 군주인 영국 국왕과 한국 황제를 예찬하는 내용을 국가에 담았고, 끝과 시작에서 말하는 내용도 비슷하다[4].
다만 이러한 특징 탓에 천지에 제사 드릴 수 있는 것은 천자(황제) 본인뿐인데 백성들이 상제에게 기도하는 것은 대한국의 주류 문화인 유교 문화와 맞지 않는다는 문화적 고증에 대한 비판 또한 존재한다. 예시로 송시열을 배향한 화암서원 도유사같은 경우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국가의 상징성에 대해 여러 번 까는듯한 언급을 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