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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개혁을 단행한 이후, 유교적 보수파의 불만 감소와 황실의 권위 향상등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 [[대한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한제국]] 정부가 기존의 유교를 개량해 만든 사이비 종교, 학문 혹은 유교적 분파의 일종이다. | 임신개혁을 단행한 이후, 유교적 보수파의 불만 감소와 황실의 권위 향상등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 [[대한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한제국]] 정부가 기존의 유교를 개량해 만든 사이비 종교, 학문 혹은 유교적 분파의 일종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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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에 한국 정부가 연합국으로 넘어와 항복했고, 이후 통감청 체제에서 환태평양 총사령부에 의해 유교지령이 발표되면서 사실상 소멸하였지만, 서원본청은 민간종교법인으로 분리되어 개개별로 한국 각지의 서원을 관리하며 지금도 존재한다. | 1944년에 한국 정부가 연합국으로 넘어와 항복했고, 이후 통감청 체제에서 환태평양 총사령부에 의해 유교지령이 발표되면서 사실상 소멸하였지만, 서원본청은 민간종교법인으로 분리되어 개개별로 한국 각지의 서원을 관리하며 지금도 존재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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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설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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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한제국]]이 제국주의의 길로 나선 이후부터는 식민지 각지에 서원을 세우고, 식민지인들에게 국체유학 사상을 강요했다. | [[대한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한제국]]이 제국주의의 길로 나선 이후부터는 식민지 각지에 서원을 세우고, 식민지인들에게 국체유학 사상을 강요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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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 이후= | =항복 이후= | ||
국체유학은 한국의 항복과 통감청 설치 이후, 맥아더에게 한국 파시즘의 사실상 모태라고 판단되어 당시 내각총리대신인 이승만과 합의 후 제거하였다. 어찌 보면 대한제국 민족주의에 의해 왜곡된 껍질을 벋겨내고 다시 원래의 모습인 유학으로 돌아갔다고도 볼 수 있으며, 이후 냉전기에는 폭주의 잠재적 원인 중 하나였던 성리학적 정서도 시대에 맞게 씻겨나가면서, 현재 한국에서 유학은 좀 더 대중친화적인 모습으로 변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 국체유학은 한국의 항복과 통감청 설치 이후, 맥아더에게 한국 파시즘의 사실상 모태라고 판단되어 당시 내각총리대신인 이승만과 합의 후 제거하였다. 어찌 보면 대한제국 민족주의에 의해 왜곡된 껍질을 벋겨내고 다시 원래의 모습인 유학으로 돌아갔다고도 볼 수 있으며, 이후 냉전기에는 폭주의 잠재적 원인 중 하나였던 성리학적 정서도 시대에 맞게 씻겨나가면서, 현재 한국에서 유학은 좀 더 대중친화적인 모습으로 변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
2024년 3월 25일 (월) 19:0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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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해주 자치령에서 극동 공화국으로, 극동 공화국에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환.
- ↑ 본격적인 시작은 박영효를 위시한 진보적 개화파 몇몇이 일본 순방을 끝내고, 그곳에서 신토의 변화를 본 뒤, 대원군과의 밀담으로 체계화하여 황제에게 진상한 '서원과 문명개화의 연관성에 관한 건'으로 국체유학 정립의 초석을 다졌다. 다만, 이 당시까지만 해도 대중적인 유교 학파 중 하나로 분류된지라 대한제국 시기의 위상은 아니였으나, 이후 헌법 제정과 국위 상승 등이 겹치면서 압도적 지지 아래에 안정적으로 한국 사회에 자리잡았다.
- ↑ 고대 성현이 아닌 이를 모신 서원, 한국 거리에서 가끔 보이는 석재, 혹은 콘크리트제 홍살문 등 대부분 이 사상에 기반하여 설치된 시설들이 많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지금보다 제사가 더 화려했다고도 나오니 말 다한 셈.
- ↑ 당시 옆나라인 일본 제국 또한 국가신토라는 이름의 비슷한 정책을 시행했고, 신토라는 이미 존재하던 기반에 유교의 특징까지 흡수한지라 한국보다 더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