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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유교의 개념은 근대의 국수주의 사상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이나 집단들 간의 상호작용 형식을 정하는 학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올바른데, 유교의 예를 정하는 이유는 존재하는 사람 간이나 집단간의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한 사회관습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으로써 쉽게 말하면 서로 존중하는 관습을 만드는 학문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다. 당연하지만 유교는 자연상태의 힘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강자와 약자간의 평등을 전제하지 않으며, 따라서 강자는 약자에게 자비와 관용을 베풀 것을 강조하고 약자는 정당한 강자를 향하여 존경과 순종을 할 것 요구한다. 즉, 단순히 복종이 아닌 상호작용을 통하여 집단에서 상위층의 자비를 촉구하는 것이다. | 원래 유교의 개념은 근대의 국수주의 사상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이나 집단들 간의 상호작용 형식을 정하는 학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올바른데, 유교의 예를 정하는 이유는 존재하는 사람 간이나 집단간의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한 사회관습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으로써 쉽게 말하면 서로 존중하는 관습을 만드는 학문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다. 당연하지만 유교는 자연상태의 힘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강자와 약자간의 평등을 전제하지 않으며, 따라서 강자는 약자에게 자비와 관용을 베풀 것을 강조하고 약자는 정당한 강자를 향하여 존경과 순종을 할 것 요구한다. 즉, 단순히 복종이 아닌 상호작용을 통하여 집단에서 상위층의 자비를 촉구하는 것이다. | ||
조선 시대 때까지만 해도 이 사상은 꽤 철저하게 지켜진 편이었으나, 중국의 실상을 보고 경악한 보수파들도 학문적 사고에 유연한 틈을 줘버리게 되었고, 그렇게 임신개혁 이후 대한제국 정부는 기존 유교의 고대적 개념을 일부 무시하고 성향 자체를 국가의 정책 방향성에 부응할 수 있게 바꾸어 왔다<ref>본격적인 시작은 박영효를 위시한 진보적 개화파 몇몇이 일본 순방을 끝내고, | 조선 시대 때까지만 해도 이 사상은 꽤 철저하게 지켜진 편이었으나, 중국의 실상을 보고 경악한 보수파들도 학문적 사고에 유연한 틈을 줘버리게 되었고, 그렇게 임신개혁 이후 대한제국 정부는 기존 유교의 고대적 개념을 일부 무시하고 성향 자체를 국가의 정책 방향성에 부응할 수 있게 바꾸어 왔다<ref>본격적인 시작은 박영효를 위시한 진보적 개화파 몇몇이 일본 순방을 끝내고, 직후 흥선군과의 밀담으로 체계화하여 황제에게 진상한 문서'서원과 문명개화의 연관성에 관한 건'으로 국체유학 정립의 초석을 다졌다. 다만, 이 당시까지만 해도 대중적인 유교 학파 중 하나로 분류된지라 대한제국 시기의 위상은 아니였으나, 이후 헌법 제정과 국위 상승 등이 겹치면서 압도적 지지 아래에 안정적으로 한국 사회에 자리잡았다.</ref>. 하나는 군주에 대한 충성에서 자비를 배풀 의무를 약화시켜버리고, 휴머니즘적 색채를 약화시키고 기독교적 성향과 군주의 의무를 왜곡시킨 제정 옹호의 성향을 지닌 학문, 혹은 부국강병을 위하여 신민의 충을 강조하되, 거기서 돌아오는 군주의 선정을 민생 부흥이 아닌 국가의 강병을 통한 대업의 달성을 완수하는 것을 천명하는 사이비 학문에 더 가깝게 바꿔버린 것이다. 또한 국체유교는 새천명을 얻은 대한 고유의 것이므로, 이미 천자국이 된 상태에서 근본을 해치지 않는 이상 기존 천자국인 중국의 것만 따를 필요가 없다고 정부 차원에서 주장했고 이 과정에서 근대 민족주의의 입맛에 어울리는 것들<ref>고대 성현이 아닌 이를 모신 서원, 한국 거리에서 가끔 보이는 석재, 혹은 콘크리트제 솟대와 홍살문 등이 대부분 이 사상에 기반하여 설치된 시설들이 많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지금보다 제사가 더 화려했다고도 나오니 말 다한 셈.</ref>이 상당히 많이 추가되었다. | ||
[[대한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한제국]]이 제국주의의 길로 나선 이후부터는 식민지 각지에 서원을 세우고, 식민지인들에게 국체유학 사상을 강요했다. | [[대한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한제국]]이 제국주의의 길로 나선 이후부터는 식민지 각지에 서원을 세우고, 식민지인들에게 국체유학 사상을 강요했다. |
2024년 5월 6일 (월) 03:5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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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해주 자치령에서 극동 공화국으로, 극동 공화국에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환.
- ↑ 본격적인 시작은 박영효를 위시한 진보적 개화파 몇몇이 일본 순방을 끝내고, 직후 흥선군과의 밀담으로 체계화하여 황제에게 진상한 문서'서원과 문명개화의 연관성에 관한 건'으로 국체유학 정립의 초석을 다졌다. 다만, 이 당시까지만 해도 대중적인 유교 학파 중 하나로 분류된지라 대한제국 시기의 위상은 아니였으나, 이후 헌법 제정과 국위 상승 등이 겹치면서 압도적 지지 아래에 안정적으로 한국 사회에 자리잡았다.
- ↑ 고대 성현이 아닌 이를 모신 서원, 한국 거리에서 가끔 보이는 석재, 혹은 콘크리트제 솟대와 홍살문 등이 대부분 이 사상에 기반하여 설치된 시설들이 많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지금보다 제사가 더 화려했다고도 나오니 말 다한 셈.
- ↑ 당시 옆나라인 일본 제국 또한 국가신토라는 이름의 비슷한 정책을 시행했고, 신토라는 이미 존재하던 기반에 유교의 특징까지 흡수한지라 한국보다 더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