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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와 중세 시대에는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지였던 중국 대륙에 지나치게 가까운탓에 중원국가들에게 국력을 억제받았으나, 1592년 부산 전투에서 조기에 왜란을 막아낸것과 명나라와의 합동작전인 만주대첩을 시작으로 국력을 점차 증강하여, 결과적으로 중국이 분열된 상태에서 다시 조각나 부족들이 난립하는 만주를 울타리로 삼는 동북면 방면의 패권을 기반으로 상당한 국력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개항 요구에 응하여 서양 열강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서서히 모순점이 드러나던 안동 김씨 세도가<ref>대한제국 시기의 후작가 사족 안동 김문이 바로 이 가문이다. 다만 공식적인 자료에 따르면 후작위를 하사받고 난 뒤에는 주기적인 녹봉만 수령하고, 직접적인 정계 진출의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ref>는 근왕개화파 세력에 의해 몰락하였다. 1873년에는 임신개혁을 단행하여 구시대적 대조선국 체제를 끝내고 대한제국 체제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후금, 순나라와 후송보다는 먼저, 일본보다는 조금 늦게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수용하고 체화하는데 성공했으며 이후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한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울타리 정도로만 생각하던 만주의 남부는 완전히 합병, 나머지는 식민지화 시키는 동시에 일본과 연해주를 점령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일본에 버금가는 동아시아 열강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1929년 발발한 대공황으로 경제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자 1938년 김창암을 위시한 파시즘 세력의 집권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에 참전해 중국과 몽골 침략에 나섰고, 1941년에는 독일의 비밀제의로 소려과 동시베리아 전쟁을 개시했으나, 결국 1944년 영친왕 이택의 김창암 세력에 의한 피살을 기점으로 황실과 문민세력의 합공작전으로 인한 김창암 내각이 붕괴하면서 평화협정으로 끝을 맺게 된다. | 전근대와 중세 시대에는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지였던 중국 대륙에 지나치게 가까운탓에 중원국가들에게 국력을 억제받았으나, 1592년 부산 전투에서 조기에 왜란을 막아낸것과 명나라와의 합동작전인 만주대첩을 시작으로 국력을 점차 증강하여, 결과적으로 중국이 분열된 상태에서 다시 조각나 부족들이 난립하는 만주를 울타리로 삼는 동북면 방면의 패권을 기반으로 상당한 국력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개항 요구에 응하여 서양 열강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서서히 모순점이 드러나던 안동 김씨 세도가<ref>대한제국 시기의 후작가 사족 안동 김문이 바로 이 가문이다. 다만 공식적인 자료에 따르면 후작위를 하사받고 난 뒤에는 주기적인 녹봉만 수령하고, 직접적인 정계 진출의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ref>는 근왕개화파 세력에 의해 몰락하였다. 1873년에는 임신개혁을 단행하여 구시대적 대조선국 체제를 끝내고 대한제국 체제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후금, 순나라와 후송보다는 먼저, 일본보다는 조금 늦게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수용하고 체화하는데 성공했으며 이후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한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울타리 정도로만 생각하던 만주의 남부는 완전히 합병, 나머지는 식민지화 시키는 동시에 일본과 연해주를 점령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일본에 버금가는 동아시아 열강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1929년 발발한 대공황으로 경제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자 1938년 김창암을 위시한 파시즘 세력의 집권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에 참전해 중국과 몽골 침략에 나섰고, 1941년에는 독일의 비밀제의로 소려과 동시베리아 전쟁을 개시했으나, 결국 1944년 영친왕 이택의 김창암 세력에 의한 피살을 기점으로 황실과 문민세력의 합공작전으로 인한 김창암 내각이 붕괴하면서 평화협정으로 끝을 맺게 된다. | ||
전후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 영토에는 군정이 들어섰으나, 이미 내전으로 파시즘 세력이 축출된 한국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미국은 일본과 같은 직접지배보다는 보다 간접적인 지배를 택했다. 미군의 간접지배하에 헌법이 개정되어, 조선시대때 확보한 영토를 제외하고 모든 영토를 토해냈으며 한국의 황제는 국민적 통합자로서만 명시되었다.이후, 1949년에 체결되고 이듬해 발효된 부산 강화조약으로 완전한 국권을 회복하고 미국과의 동맹을 맺어 제1세계로 편입된 뒤, 많이 남은 편이었던 인프라들을 이용하여 중국 내전과 루스 차르국의 정상국가화에대한 투자 등으로 호황을 이룩하는데 성공하였다. 한국의 정치 · 외교는 이때부터 재형성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 대한국 헌법 제1조는 황제의 지위를 '대한국의 상징이고 한민족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일부 눈치채기 힘든 방면에서는 황제의 권력이 유효하다<ref>이는 국내에서 민주주의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거두가 당시 | 전후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 영토에는 군정이 들어섰으나, 이미 내전으로 파시즘 세력이 축출된 한국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미국은 일본과 같은 직접지배보다는 보다 간접적인 지배를 택했다. 미군의 간접지배하에 헌법이 개정되어, 조선시대때 확보한 영토를 제외하고 모든 영토를 토해냈으며 한국의 황제는 국민적 통합자로서만 명시되었다.이후, 1949년에 체결되고 이듬해 발효된 부산 강화조약으로 완전한 국권을 회복하고 미국과의 동맹을 맺어 제1세계로 편입된 뒤, 많이 남은 편이었던 인프라들을 이용하여 중국 내전과 루스 차르국의 정상국가화에대한 투자 등으로 호황을 이룩하는데 성공하였다. 한국의 정치 · 외교는 이때부터 재형성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 대한국 헌법 제1조는 황제의 지위를 '대한국의 상징이고 한민족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일부 눈치채기 힘든 방면에서는 황제의 권력이 유효하다<ref>이는 국내에서 민주주의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거두가 당시 양연군으로도 알려진 태시황제 이현이어서가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ref>. 실질적인 정치는 의원내각제로 운영되며 최고 실권자는 내각총리대신으로 현직은 안철수다. 외교에 있어선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바탕으로 한 친미/친서방 외교를 고수해 왔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ref>소련이 서방측이기는 하나,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 딱히 강경한 입장을 보이지 않고있는지라 소련을 중화인민공화국과 같은 제 2세계로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다만, 최소한 소련은 중국이 그랬듯이 [[2021년 중국의 티베트 침공|최소한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침공하지는 않았다.]]</ref> 신냉전이 본격화된 2010년대 후반 이후론 서방 세계 내에서 신뢰받는 대중국 전략 파트너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ref>다만,일각에선 한국의 현 영향력이 제국 시대에 만주지역과 연해주에 기반을 다져 놓고, 그 기반으로 대금민국과 러시아 차르국을 조정해서 현 외교적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게 아니냐는 주장도 존재한다. 반서방 기질이 강한 편인 러시아 차르국이 한국의 눈치를 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제 2세계 진영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게 아니냐는것. 물론, 대금민국과 한국의 관계는 실제로는 껄끄러운만큼 단순히 주장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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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징 = | = 상징 = | ||
== 국호 == | == 국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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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황제 (아침해의 원유관)|대한국/황제]] 문서 참조. | [[대한국/황제 (아침해의 원유관)|대한국/황제]] 문서 참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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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 =사회= | ||
==민족 구성== | ==민족 구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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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2차 대전 이후로는 소비, 제조등의 부문이 아닌 곳에서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는 사례들도 많이 늘어난 편이라고 평가받는다. | 다만, 2차 대전 이후로는 소비, 제조등의 부문이 아닌 곳에서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는 사례들도 많이 늘어난 편이라고 평가받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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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한국의 정치 체제는 내각총리대신이 실권을 행사하는 의원내각제 국가임에 따라, 국회의 지명을 받은 국회의원이 총리로 발탁되어 실질적인 정치를 담당한다. 또한, 양원제를 따르는 시스템인지라 입법부인 국회는 민의원(하원)과 중추원(상원)으로 나뉜다. 민의원, 중추원은 각자 행사하는 권한이 다르며, 대부분의 일은 민의원에서 처리한다. | |||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민의원에는 중추원보다 더 많은 권한이 쥐어져있다. 서열상으로야 상원인 중추원이 더 높으나 조약 승인권, 내각총리대신 지명, 불신임결의권과 예산안 책정 승인권이 모두 민의원의 관할에 있고, 헌법상 민의원이 가결한 법률을 중추원이 기각시키더라도 얼마든지 민의원의 재결의에서 2분의 1 이상의 찬성이 나오면 법률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대한국의 정계는 민의원이 우세한 성향을 띄고 있다. | |||
그렇다고 중추원에 권한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민의원과 더불어 중추원에는 주요 인사의 임명에 대한 동의권이 부여되어있으며, 이 권한이 특히 두드러지는 임명식은 내각 외의 기관, 예를 들면 대한은행 총재의 임명 등이 있다. | |||
대한제국 시기에는 민의원은 중의원(중민원)과 중추원이 양원을 이루었으며, 이 당시까지만 해도 중추원의 권한이 상원답게 더 강한 편이었으나 1945년 한국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받은 조건으로 인해 중의원이 민의원으로 변경되었고, 중추원은 유지는 되었으나 권한이 대폭 축소됐다. 이는 당시 황제로부터의 특수 지위 수여와 권세를 통한 중추원 의원들의 압박, 그리고 군부 및 우파들의 지지로 집권했던 김창암 정권의 집권방식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 한편으로는, 당시까지도 독일식 귀족 과두정같은 성향이 남아있어 비교적 강력한 편이었던 한국 내 [[사족 (아침해의 원유관)|사족]]들의 권한을 줄이는 목적이 있었다. | |||
==내각총리대신== | ==내각총리대신== | ||
[[대한국/내각총리대신 (아침해의 원유관)|대한국/내각총리대신]] 문서 참조. | [[대한국/내각총리대신 (아침해의 원유관)|대한국/내각총리대신]] 문서 참조. | ||
==행정각부== | |||
{{대한국 각부대신 (아침해의 원유관)}} | |||
국내에서는 중앙행정부라고 불리는 16개의 부(府,ministry)가 설치되어 있으며, 해당 부서를 대표하는 각부대신직들에는 주로 국회의원이 임명된다. 원칙상 민간인도 대신이 되는 것은 가능하나, 다만 그 수가 각료 총원의 5분의 1 이상을 넘는 경우는 불허된다. 공통적으로 각부의 대신직에 임명되는 이들은 모두 황제로부터 형식적인 임명장을 수여받고, 그 이후부터 정식 대신으로서의 업무를 보게 된다. | |||
통상적으로는 민의원 출신에서 대신 및 총리를 선출하며, 상원에 해당하는 중추원 출신의 의원들도 대신직을 역임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나, 대신직을 맡아 내각에 입각 시 중추원 출신 의원의 각료수가 전체 내각의 4분의 1 정도만 입적되도록 규정이 정해져 있다. | |||
각부대신과는 차이가 있는 일종의 비정규직 대신직도 존재한다. 이를 특명담당대신(政務担当大臣)이라고 부르는데, 통상적으로 집권 중인 내각의 총리의 재량에 따라 정권에서 중요한 과제라 생각되는 것들에 관한 업무를 집중적으로 처리한다. 당연히 정권마다 중요한 문제가 바뀌는 만큼 특명담당대신은 내각에 따라서 자리가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시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직책이기도 하다. | |||
==입헌군주제== | ==입헌군주제== | ||
1893년 고조 광무제 이연의 칙서를 받은 제 6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대한제국헌법''''을 발표하면서 귀족정과 황제를 위시로 하는 프로이센 방식의 입헌군주제가 초기에 도입되었다. 순종 효황제 이훈의 치세 당시에 자유주의 열풍과, 이웃나라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조금 더 민주주의적인 체제로 변화하였다. | 1893년 고조 광무제 이연의 칙서를 받은 제 6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대한제국헌법''''을 발표하면서 귀족정과 황제를 위시로 하는 프로이센 방식의 입헌군주제가 초기에 도입되었다. 순종 효황제 이훈의 치세 당시에 자유주의 열풍과, 이웃나라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조금 더 민주주의적인 체제로 변화하였다. | ||
본격적으로 황제의 권력이 약해지기 시작하였다고 평가받는 시대는 의외로 1938년 김창암의 대한백의단이 공종 의 재가를 받아 정권을 잡은 시기로, 파시즘의 열풍과 이영 본인의 소심한 성격이 합쳐진 결과 김창암의 권력이 황제를 압도하는 일도 벌어졌었다<ref>다만 백범일지의 내용 등을 분석해보면, 집권 초기의 김창암 본인은 개인적으로 황제를 자신보다 상관으로 인지한 것 같기는 한것으로 보인다.다만 집권 후기부터 황제의 권위를 깔보는듯한 모습도 보였는데, 예시로 | 본격적으로 황제의 권력이 약해지기 시작하였다고 평가받는 시대는 의외로 1938년 김창암의 대한백의단이 공종 의 재가를 받아 정권을 잡은 시기로, 파시즘의 열풍과 이영 본인의 소심한 성격이 합쳐진 결과 김창암의 권력이 황제를 압도하는 일도 벌어졌었다<ref>다만 백범일지의 내용 등을 분석해보면, 집권 초기의 김창암 본인은 개인적으로 황제를 자신보다 상관으로 인지한 것 같기는 한것으로 보인다.다만 집권 후기부터 황제의 권위를 깔보는듯한 모습도 보였는데, 예시로 《공종실록》中성덕 10년(서력 1942년) 4월 3일에 나온 기록에 따르면, 본인이 엄연히 황실의 권한인 사관 임명에서 일시적으로 우위를 가지려 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참고로, 해당 권한은 융희시대 당시에도 침해된 적이 없었고, 이에 성덕제가 언짢아하는 모습을 보이자 김창암도 해당 발언을 철회했다고 한다.</ref>. 대금민국을 비롯한 한국 제국주의의 피해국들이나 한국 내부의 보수파들은 공종을 대한제국의 침공 선봉에 서 있던 마왕 등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상징성으로는 선봉이 맞아도 과연 건강이 심각할 수준으로 좋지 않던<ref>공종은 역대 조선왕조 국왕들 중에서 건강이 좋지 않은것도 있지만, 어릴때부터 정치보다는 학문에 관심이 더 많았다고 기록될 정도로 서정적인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ref> 공종 본인이 제대로된 판단을 내렸을지가 의문이라는 이야기 또한 존재한다. 그가 사망한 지금 진실은 저 너머에. | ||
내전 이후 들어선 민주주의 세력도 황실인사가 지도부인 성격을 띄고 있었고, 이에 따라 친미파인 정치적 지도자 | 내전 이후 들어선 민주주의 세력도 황실인사가 지도부인 성격을 띄고 있었고, 이에 따라 친미파인 정치적 지도자 양연군 이현이 권력을 잡은 한국보다는 기반이 적은 일본과 러시아 차르국에 더 신경을 써야한다 판단한 맥아더 장군의 환태평양 사령부의 결론은 한국의 황제를 ''동아시아 북방 민주주의의 수호자''와 ''반공의 정점''으로 이용하는 것을 택하였고, 몇년 뒤 성덕제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한 이강과의 협의로 헌법을 개정한것을 마지막으로 한국에서의 영향력을 하나 둘 철수해나갔다. | ||
이현 개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약화된 황권과 합쳐져, 구국자로서 황실의 권위를 높이는 대신<ref>단, 전범이나 김창암 세력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황실 인사들에 대한 격하작업이 이루어지기는 하였다.</ref> 권력을 낮추는 성과를 내었고, 이현의 치세가 종막에 저물 무렵에는 완전한 민주주의에 기반한 입헌군주제 확보에 성공하였다. | 이현 개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약화된 황권과 합쳐져, 구국자로서 황실의 권위를 높이는 대신<ref>단, 전범이나 김창암 세력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황실 인사들에 대한 격하작업이 이루어지기는 하였다.</ref> 권력을 낮추는 성과를 내었고, 이현의 치세가 종막에 저물 무렵에는 완전한 민주주의에 기반한 입헌군주제 확보에 성공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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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경제= | =경제= | ||
한국은 일본과 더불어 아시아의 대표적인 선진국이자 강대국 중 하나다. 원화는 세계 무역결제통화 비중의 10~15%를 차지하며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평가받는 신뢰성이 높은 통화 중 하나다. 이 때문에 원화는 미국 달러, 유로, 엔과 함께 세계 4대 통화로 꼽힌다. 한국의 GDP는 세계 5위이며, PPP는 세계 6위, 금 보유고 세계 9위, 주식시장 규모 세계 4위, 대외순자산 규모 세계 2위 및 국제통화기금(IMF) 투표권은 세계 3위다. 몇 안되는 비서양권 국가 중 G7 회원국이자 북동아시아 경제연합 주도국, 유네스코 예산 분담률 3위로서 전세계적으로 상당한 중요성을 가진 국가이다. | 한국은 일본과 더불어 아시아의 대표적인 선진국이자 강대국 중 하나다. 원화는 세계 무역결제통화 비중의 10~15%를 차지하며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평가받는 신뢰성이 높은 통화 중 하나다. 이 때문에 원화는 미국 달러, 유로, 엔과 함께 세계 4대 통화로 꼽힌다. 한국의 GDP는 세계 5위이며, PPP는 세계 6위, 금 보유고 세계 9위, 주식시장 규모 세계 4위, 대외순자산 규모 세계 2위 및 국제통화기금(IMF) 투표권은 세계 3위다. 몇 안되는 비서양권 국가 중 G7 회원국이자 북동아시아 경제연합 주도국, 유네스코 예산 분담률 3위로서 전세계적으로 상당한 중요성을 가진 국가이다. | ||
이러한 한국의 경제 배경은 중국 내전 당시의 지원과 만주 소비에트 전쟁에 대한 군수물자 특수로 채워졌다는 의견이 많은 편. 실제로 옆나라인 일본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더 처참한 상황을 타파하였고, 베트남 전쟁에도 중화민국을 통한 간접 물자 수출식의 지원을 하여 최종적으로 한국의 경제력을 앞질렀다. | 이러한 한국의 경제 배경은 중국 내전 당시의 지원과 만주 소비에트 전쟁에 대한 군수물자 특수로 채워졌다는 의견이 많은 편. 실제로 옆나라인 일본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더 처참한 상황을 타파하였고, 베트남 전쟁에도 중화민국을 통한 간접 물자 수출식의 지원을 하여 최종적으로 한국의 경제력을 앞질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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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행정구역= | =행정구역= | ||
{{대한국의 행정구역 분포}} | {{대한국의 행정구역 분포}} | ||
대한국은 도부(道府)제를 시행중이며, | 대한국은 도부(道府)제를 시행중이며, 20여개의 도급 행정구역과 총 25개의 부급 행정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있다. 이 22개의 부 중 2개의 부는 경성급으로 분류되는 수도권으로, 한성과 평양 2개가 존재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동래부를 경성급으로 편입시키자는 의견도 늘었으나, 아직 대한국 의회는 동래부가 차후 어떻게 될 것인지 의사를 표한 바가 없다. | ||
부는 기본적으로 도 아래의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그중 경성급 부들은 한국 내에서 최중요 도시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련특별시의 경우, 조선 시대 이후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승전을 통해 확보한 영토이나, 한국인 인구 비중과 국경선 상의 문제로 인해 추가적인 군정 기간을 거친 뒤 다시 한국에게 반환시키는 대신, 민족특수성을 고려하여 부 외의 행정구역으로 취급하는 조건으로 행정구역에 돌아왔다. | 부는 기본적으로 도 아래의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그중 경성급 부들은 한국 내에서 최중요 도시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련특별시의 경우, 조선 시대 이후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승전을 통해 확보한 영토이나, 한국인 인구 비중과 국경선 상의 문제로 인해 추가적인 군정 기간을 거친 뒤 다시 한국에게 반환시키는 대신, 민족특수성을 고려하여 부 외의 행정구역으로 취급하는 조건으로 행정구역에 돌아왔다. | ||
대한국의 제국주의 시대에는 더 많은 행정구역이 존재하였으나, | 대한국의 제국주의 시대에는 더 많은 행정구역이 존재하였으나, 본토가 아닌 외지(外地)로서 행정구역이 구분되었다. 이 행정구역들은 훗날 식민지들이 광복을 맞으며 폐지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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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외교= | =외교= | ||
==한러관계== | ==한러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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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왕조 중 송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비교적 경직된 편이었고, 송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거리 차이때문에 닿기 힘들었지만, 전조인 명의 후계자들의 피가 섞인 황제가 황통을 이어가고 있었기에 꽤 좋은 편이었다. | 두 왕조 중 송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비교적 경직된 편이었고, 송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거리 차이때문에 닿기 힘들었지만, 전조인 명의 후계자들의 피가 섞인 황제가 황통을 이어가고 있었기에 꽤 좋은 편이었다. | ||
본격전인 관계의 변화가 시작된 시기는 근대로, 중화의 두 왕조 모두 중화사상이라는 오만에 빠져 파멸로 치닫게 되자 조선 내부에서는 정말 순수 그대로의 중화질서만이 답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서서히 제기되었다. 이후 조선이 개항을 시작하고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은 | 본격전인 관계의 변화가 시작된 시기는 근대로, 중화의 두 왕조 모두 중화사상이라는 오만에 빠져 파멸로 치닫게 되자 조선 내부에서는 정말 순수 그대로의 중화질서만이 답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서서히 제기되었다. 이후 조선이 개항을 시작하고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은 1878년에 체결된 한송수호조규였다. 당시 한국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맹주라 여겨지는 중원국가들과 대등한 근대 조약을 맺음으로써, 이를 근대식으로 개조한 유교사상과 연대해 국내에서의 급격한 근대화에 대한 반발을 돌릴 수 있으리라 계산한 것이다. 반면, 순송 2개국 입장에서는 서두를 게 없는 상황이었고, 체급도 맞지 않는데다가 중원이 통일되지 않았어도 인식적으로 번국으로 취급되던 같은 아시아 국가가 전통적인 조공책봉관계가 아닌 근대적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에 대해 각국 조정에서 반발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당시 송나라의 강유위는 우선은 한국과의 좋은 관계를 굳이 깰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수호조규를 맺는것을 승낙하였다. 반면 송나라의 이홍장은 일본의 수교 제의를 거절해봤자 원한만 살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나, 조정 내의 강력한 반발로 결국 수교 제의를 거절했다. | ||
비록 송나라만이 허락한 것이지만, 명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없는 중원국가가 조공책봉관계로 조선을 다루지 않겠다는 선언은 실로 남아있던 조선 내 유학도들에게도 큰 충격을 줄만한 변화였고, 그 자체만으로도 근대화를 막 시작한 한국의 대,내외적 위신을 확립시켜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중 1893년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당시 한국이 일본과 연합하여 금나라, 순나라를 완전히 박살내면서 중국 내부에서는 큰 충격이 일었고, 이어서 한러일 전쟁으로 아예 제 1의 번국이 열강의 반열에 진입하자 전통적인 중국-한국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한국과 사이가 양호한 편이었던 송나라는 말할것도 없고, 사이가 좋지 않던 순나라를 시작으로 중국 내에서는 새로운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일본과 한국을 개화의 모델로 보게 되었다. | 비록 송나라만이 허락한 것이지만, 명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없는 중원국가가 조공책봉관계로 조선을 다루지 않겠다는 선언은 실로 남아있던 조선 내 유학도들에게도 큰 충격을 줄만한 변화였고, 그 자체만으로도 근대화를 막 시작한 한국의 대,내외적 위신을 확립시켜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중 1893년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당시 한국이 일본과 연합하여 금나라, 순나라를 완전히 박살내면서 중국 내부에서는 큰 충격이 일었고, 이어서 한러일 전쟁으로 아예 제 1의 번국이 열강의 반열에 진입하자 전통적인 중국-한국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한국과 사이가 양호한 편이었던 송나라는 말할것도 없고, 사이가 좋지 않던 순나라를 시작으로 중국 내에서는 새로운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일본과 한국을 개화의 모델로 보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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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관계== | ==한만관계== | ||
썩 좋다고 하지 못할 관계를 보내고 있다. 아무래도 20세기 중반동안 식민지로서 한국의 심한 수탈과 파시즘으로 인한 억압을 겪었고, 만주 내의 반한감정으로 인해 수교도 1990년대나 되서야 정식으로 진행된 역사가 있기 때문. 이 뿐만 아니라 1970년부터 만주는 공산정권의 지배가 주를 이룬 데 반해 한국은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의원내각제였던지라, 체제적인 이해도도 서로 떨어지는 편이다. | |||
==한미관계== | ==한미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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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프랑스대사관은 한성에, 주불한국대사관은 파리에 위치해있다. | 주한프랑스대사관은 한성에, 주불한국대사관은 파리에 위치해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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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문화= | =문화= | ||
==기본적인 문화== | ==기본적인 문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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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컬쳐 및 애니메이션== | ==서브컬쳐 및 애니메이션== | ||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2번째로 애니메이션 시장이 발달한 곳이다. 초기에는 제작 시 검열과 제한이 특유의 사회가치관으로 인해 일본에 비해서 더 심한 편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규제가 상당히 풀리면서 꽤나 자유로운 서브컬쳐 매체의 제작이 가능해졌다. |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2번째로 애니메이션 시장이 발달한 곳이다. 초기에는 제작 시 검열과 제한이 특유의 사회가치관으로 인해 일본에 비해서 더 심한 편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규제가 상당히 풀리면서 꽤나 자유로운 서브컬쳐 매체의 제작이 가능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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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대중매체에서의 한국의 모습= | |||
통상적으로 유교, 선비 및 경제력과 기술로 대외적으로는 알려진 나라다보니,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더불어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다. 미국, 유럽권같이 한국에 우호적인 성향의 국가에서는 대체적으로 전쟁 관련 영화라 대한 제국 시기의 파시즘을 묘사하는 게 아니면 어딘가 옛스러운 문화와 높은 경제력에서 비롯된 첨단기술의 조화 등으로 묘사하는 케이스가 많은 편. | |||
반면 대금민국이나 중국 같이 한국에게 피해를 본 나라들의 경우, 민족주의정서가 강한 편이라 대체적으로는 제국주의자, 파시스트, 국체유교시기 당시의 광신적인 사이비 유교에 기반한 전쟁범죄 등 부정적인 모습이 많이 부각된다. | |||
==전반적인 매체에서== | ==전반적인 매체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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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원작 애니메이션<하나의 하루>의 배경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에서 추가된 언급을 보면, 개화기에 노비제 폐지로 인한 일부 양반가의 불만을 대처하는 과정에서 유럽의 늑인제도를 애매하게 도입한지라, 늑인에 대한 대우가 비정상적일 수준으로 세계에서 낮은 편이라는듯. 결국 늑인 인신매매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내각이 총사퇴하고, 인신매매를 묵인한 전임 총리 및 관료들이 연속으로 검거까지 되고 나서야 대우가 나아졌다. | 웹툰 원작 애니메이션<하나의 하루>의 배경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에서 추가된 언급을 보면, 개화기에 노비제 폐지로 인한 일부 양반가의 불만을 대처하는 과정에서 유럽의 늑인제도를 애매하게 도입한지라, 늑인에 대한 대우가 비정상적일 수준으로 세계에서 낮은 편이라는듯. 결국 늑인 인신매매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내각이 총사퇴하고, 인신매매를 묵인한 전임 총리 및 관료들이 연속으로 검거까지 되고 나서야 대우가 나아졌다. | ||
소설 <배틀로얄>의 대조선제국이 한국을 모티브로 한 나라다. 오랜 동맹인 대동아공화국과는 미묘한 협력중이긴 하나, 사회 자유도는 더 양호한지라 이쪽으로 망명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는듯. | |||
==대체역사에서== | ==대체역사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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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혁명의 시대>에서는 현실적인 전개와 고증 때문에 대청제국과의 긴밀한 동맹 중 하나로 나왔다. 남만주 전역과 연해주, 추가적인 시베리아 영토를 합병한 상황에서 당장은 만족하고 있으나, 아이신기오로 푸이의 공작으로 인해 잃은 것도 많은지라, 독자들은 차후 한국의 행보를 걱정하는 중. | <만주,혁명의 시대>에서는 현실적인 전개와 고증 때문에 대청제국과의 긴밀한 동맹 중 하나로 나왔다. 남만주 전역과 연해주, 추가적인 시베리아 영토를 합병한 상황에서 당장은 만족하고 있으나, 아이신기오로 푸이의 공작으로 인해 잃은 것도 많은지라, 독자들은 차후 한국의 행보를 걱정하는 중. | ||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는 시베리아에서 독일과의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는 언급이 나왔다. 묘사를 보아 점령한 땅인 시베리아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아서(...)생각보다는 통제가 쉬운 모양. 그렇지만 시즌 4 시점에 나온 뉴스에서 시베리아 철수를 명령했다는 내용이 나온 걸 보아, 결국 일본처럼 식민지 통제권을 상실해버린 듯 하다. |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는 시베리아에서 독일과의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는 언급이 나왔다. 묘사를 보아 점령한 땅인 시베리아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아서(...)생각보다는 통제가 쉬운 모양. 그렇지만 시즌 4 시점에 나온 뉴스에서 시베리아 철수를 명령했다는 내용이 나온 걸 보아, 결국 일본처럼 식민지 통제권을 상실해버린 듯 하다. | ||
327번째 줄: | 363번째 줄: | ||
<검은머리 미국 대원수>에서는 호시탐탐 김유진을 섭외하려 드는 역할로 나왔으나, 정작 회유할때마다 김유진에게 돈만 뜯기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후 미군정 간접통치 치하에서 박헌영의 쿠데타 시도가 조기 적발되는 것으로 추가적인 등장은 종료. | <검은머리 미국 대원수>에서는 호시탐탐 김유진을 섭외하려 드는 역할로 나왔으나, 정작 회유할때마다 김유진에게 돈만 뜯기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후 미군정 간접통치 치하에서 박헌영의 쿠데타 시도가 조기 적발되는 것으로 추가적인 등장은 종료. | ||
<홈프론트>에서는 대만의 외교술에 굴복해 대아연맹의 일원이 되었다고 나온다. 황제제도는 유지됬다는 듯. | |||
<아토믹 하트>에서는 소련의 재빠른 진격으로 남한인 대한국과 북한인 대한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었다는 언급이 나왔다. 묘사를 보아 이 세계 한국의 미래는 그닥 밝지는 않을듯. | <아토믹 하트>에서는 소련의 재빠른 진격으로 남한인 대한국과 북한인 대한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었다는 언급이 나왔다. 묘사를 보아 이 세계 한국의 미래는 그닥 밝지는 않을듯. | ||
대금민국 소설<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역사가 개변되어 연합군에 들어갔고, 그로 인해 아직까지 만주 식민지가 건재하다. 연해주의 러시아 차르국도 차르국이 아닌 | 대금민국 소설<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역사가 개변되어 연합군에 들어갔고, 그로 인해 아직까지 만주 식민지가 건재하다. 연해주의 러시아 차르국도 차르국이 아닌 트란스 아무르 공화국으로 계속 유지되는 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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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아침해의 원유관]][[분류:아침해의 원유관/국가]] | [[분류:아침해의 원유관]][[분류:아침해의 원유관/국가]] |
2024년 4월 20일 (토) 20:2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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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년 이재황에 의해 최종적으로 고안된 이래로 사용된 태극기
- ↑ 2024년 기준
- ↑ 8.65점
- ↑ 대한제국 시기의 후작가 사족 안동 김문이 바로 이 가문이다. 다만 공식적인 자료에 따르면 후작위를 하사받고 난 뒤에는 주기적인 녹봉만 수령하고, 직접적인 정계 진출의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 ↑ 이는 국내에서 민주주의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거두가 당시 양연군으로도 알려진 태시황제 이현이어서가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 ↑ 소련이 서방측이기는 하나,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 딱히 강경한 입장을 보이지 않고있는지라 소련을 중화인민공화국과 같은 제 2세계로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다만, 최소한 소련은 중국이 그랬듯이 최소한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침공하지는 않았다.
- ↑ 다만,일각에선 한국의 현 영향력이 제국 시대에 만주지역과 연해주에 기반을 다져 놓고, 그 기반으로 대금민국과 러시아 차르국을 조정해서 현 외교적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게 아니냐는 주장도 존재한다. 반서방 기질이 강한 편인 러시아 차르국이 한국의 눈치를 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제 2세계 진영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게 아니냐는것. 물론, 대금민국과 한국의 관계는 실제로는 껄끄러운만큼 단순히 주장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 개항 과정에서 한국이 미국과의 접점이 그리 크다고 보기는 힘드나, 당대의 유학파들 중 미국에 다녀온 분파가 한국에 미국의 소비문화를 일부 퍼트린것이, 땅과 집을 중시하는 한국의 정서와 맞물리면서 일어난 현상으로 학계에서는 거론된다.
- ↑ 다만 백범일지의 내용 등을 분석해보면, 집권 초기의 김창암 본인은 개인적으로 황제를 자신보다 상관으로 인지한 것 같기는 한것으로 보인다.다만 집권 후기부터 황제의 권위를 깔보는듯한 모습도 보였는데, 예시로 《공종실록》中성덕 10년(서력 1942년) 4월 3일에 나온 기록에 따르면, 본인이 엄연히 황실의 권한인 사관 임명에서 일시적으로 우위를 가지려 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참고로, 해당 권한은 융희시대 당시에도 침해된 적이 없었고, 이에 성덕제가 언짢아하는 모습을 보이자 김창암도 해당 발언을 철회했다고 한다.
- ↑ 공종은 역대 조선왕조 국왕들 중에서 건강이 좋지 않은것도 있지만, 어릴때부터 정치보다는 학문에 관심이 더 많았다고 기록될 정도로 서정적인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 ↑ 단, 전범이나 김창암 세력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황실 인사들에 대한 격하작업이 이루어지기는 하였다.
- ↑ 이 시기 한국은 정부 차원에서 미국을 미 제국주의자들이나 코쟁이, 일본발 멸칭인 귀축미영이라고 칭하는 등 반미감정을 조장하였으며, 마찬가지로 미국 또한 한국계 미국인들을 자택 내부에 감금하거나 수용 시설에 보내는 등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 ↑ 1920년대 당시 미국의 페도라에 갓마냥 무늬를 희미하게 그려넣는 스타일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누가 먼저 제작을 했는지는 두루뭉술해서 자세한 정보가 없으나, 가장 유력한 이야기로는 당시 프랑스의 유명 디자이너의 제자 중 하나가 대한제국에 방문해서 갓을 시험 삼아 구매한것이 시작이었다고 전해진다.
- ↑ 선망한다는 뜻의 영어단어 envy와, 한국의 영어권 표기법인 Korea를 합친 신조어이다.
- ↑ 정확히는 근대 시절 한옥과 서양 건축을 혼용한 한양풍, 또는 한양절충 양식의 저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