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아침해의 원유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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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의 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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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황족을 죽였다는 김창암 세력의 이름표는 그 무게가 막심했다.  
그러나, 황족을 죽였다는 김창암 세력의 이름표는 그 무게가 막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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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평가=
=현대의 평가=
한국 내에서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복잡미묘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래도 부정적인 인식이 강한 편이다. 이런 평가에는 대한제국이 추축국으로서 아시아 지역의 파시즘<ref>전간기의 대한제국은 현대에도 평가가 복잡한 일본과 다르게 확실하게 파시즘 국가로 평가받는다. 이탈리아처럼 황제는 최소한의 명분과 권력만 가지고 실질적인 지도와 국가정책등을 유일한 정당의 지도자이자 총리를 대체한 제국대호국경이 전부 집행하는 구조였기 때문.</ref>과 군국주의의 선봉에 섰고, 시베리아에서 수백만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야기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내전이 나 수뇌부가 한 번 갈아엎어졌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당대에는 아시아의 주요 강대국 중 하나였지만, 만주족의 동화를 명분으로 만주 지역에 경찰통치를 시행하는 등 극단적 집단주의를 내세우며 인권과 같은 현대적 가치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현재에는 평가가 나쁘다.
한국 내에서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복잡미묘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래도 부정적인 인식이 강한 편이다. 이런 평가에는 대한제국이 추축국으로서 아시아 지역의 파시즘<ref>전간기의 대한제국은 현대에도 평가가 복잡한 일본과 다르게 확실하게 파시즘 국가로 평가받는다. 이탈리아처럼 황제는 최소한의 명분과 권력만 가지고 실질적인 지도와 국가정책등을 유일한 정당의 지도자이자 총리를 대체한 제국대호국경이 전부 집행하는 구조였기 때문.</ref>과 군국주의의 선봉에 섰고, 시베리아에서 수백만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야기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내전이 나 수뇌부가 한 번 갈아엎어졌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당대에는 아시아의 주요 강대국 중 하나였지만, 만주족의 동화를 명분으로 만주 지역에 경찰통치를 시행하는 등 극단적 집단주의를 내세우며 인권과 같은 현대적 가치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현재에는 평가가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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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차이점도 분명했다. 한국은 일본에 비해 만주라는 거대한 땅이 있어서 농민들의 생활수준은 더 높은 편이었고<ref>당시 한국 농민의 생활수준은 중화민국, 소련, 이탈리아, 일본보다 높고 프랑스 바로 아래인 수준이었다. 다만 이건 만주로 건너간 농민들이 주를 이루는지라, 본토에서 계속 농사를 짓던 이들은 일본 농민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고, 오히려 세력다툼에서 가격이 싼 농산물 상당량을 들여오는 만주쪽 농민들에게 밀릴 때였다. 때문에 1920년대 대공황 이후 문자 그대로 궁지까지 내몰린 농민들이 만주로 대거 상경하기도 했었고, 이 과정에서 만주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토지를 강탈당했다.</ref>, 광무시대까지는 전통적인 이유로 군주의 권한이 일본보다 강해서 한국 정치는 황제의 의사가 상당히 중요했었으나, 결과적으로 광무제의 공신들을 휘어잡을 카리스마를 융희제가 이어받지 못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일본과 그닥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다만 그 흔적이 오늘날에도 일부는 남아있어서, 한국 황실의 경우 일본 황실과 같은 권한보다는 이탈리아의 구 사보이아 왕가, 영국왕실과 좀 더 비슷하다는 평가가 많은 편.
하지만 차이점도 분명했다. 한국은 일본에 비해 만주라는 거대한 땅이 있어서 농민들의 생활수준은 더 높은 편이었고<ref>당시 한국 농민의 생활수준은 중화민국, 소련, 이탈리아, 일본보다 높고 프랑스 바로 아래인 수준이었다. 다만 이건 만주로 건너간 농민들이 주를 이루는지라, 본토에서 계속 농사를 짓던 이들은 일본 농민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고, 오히려 세력다툼에서 가격이 싼 농산물 상당량을 들여오는 만주쪽 농민들에게 밀릴 때였다. 때문에 1920년대 대공황 이후 문자 그대로 궁지까지 내몰린 농민들이 만주로 대거 상경하기도 했었고, 이 과정에서 만주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토지를 강탈당했다.</ref>, 광무시대까지는 전통적인 이유로 군주의 권한이 일본보다 강해서 한국 정치는 황제의 의사가 상당히 중요했었으나, 결과적으로 광무제의 공신들을 휘어잡을 카리스마를 융희제가 이어받지 못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일본과 그닥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다만 그 흔적이 오늘날에도 일부는 남아있어서, 한국 황실의 경우 일본 황실과 같은 권한보다는 이탈리아의 구 사보이아 왕가, 영국왕실과 좀 더 비슷하다는 평가가 많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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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8일 (목) 22:48 판

 [ 국가 목록 ] 
 [ 소개 ]  
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대한국

일본국

대금민국

러시아 차르국

중화민국

티베트 왕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마다가스카르 왕국

몽골

타이완민주주의인민공화제국

대한제국

대한 공화국

예케 몽골 울루스

대청제국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대한제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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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의 역사
大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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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민족: 예맥, 삼한, 한민족

상고
시대
고조선(단군조선) 진국 주호국
부여 고조선(위만조선)
원삼국
시대
한사군* 마한 변한 진한
고구려 옥저 동예
삼국
시대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탐라국
남북국
시대
발해 통일신라
후삼국
시대
태봉 후백제 후신라
고려
시대
고려
조선
시대
조선
대한제국
시대
대한제국
현대
시대
대한국
*: 한국사에 포함되는지 아닌지에 대해 학술적인 논쟁이 있음.

대한제국의 식민지 · 자치령 및 조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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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지역 명칭 담당기관
북만주 만주 만주총독부
동몽골 제국 몽고주 몽고도독부
프리모예 연해주 자치령 연해총관부
해당지역 명칭 기관
칭다오 청도 청도행정부
* 자치령은 1920년대 괴뢰국으로 [1]승격
괴뢰국 · 군정청
한자문화권의 황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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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제국 (야마토)

일본
대일본제국
일본국
(대월) → (대남) 대한
대한제국
대한국



대한제국
大韓帝國 | Empire of Korea
국기 국장
광명천지
(光明天地)
칭제건원 이전 동시베리아 전쟁 이후
조선 대한국
대금민국
상징
국기
태극기
국화
무궁화, 오얏꽃
황실 상징
이화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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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대조선국 건국
1875년 대한제국 선포
1904년 한러일전쟁 승전
1930년 한성 진군
1937년 제 2차 동아시아 전쟁
1941년 동시베리아 전쟁
1944년 한성 내전, 헌정 복귀
지리
수도
한성부
최대도시
한성부
위치
동북아시아 한반도 일대, 만주,
시베리아 일대 등
주변국
중화민국, 러시아 , 대일본제국,소비에트 연방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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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약 5600만(본토)
공용어
한국어
공용 문자
한글, 한자
민족
한국인, 러시아인, 만주인 등
국교
명목상 없음, 사실상 국체유학
종교 분포
20% 무교, 30% 유학, 12% 천주교, 5% 불교, 그 외 33%
군대
대한제국군
정치 ·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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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양원제→일당독재, 군사독재, 입헌군주제→환태평양 사령부 통감청
정부 수반
내각총리대신→제국대호국경
국가 원수
공종 성덕제 이영[2]
행정 수반
김창암[3]
여당
대한호국회
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계획경제
통화
대한제국 원 (圓)
위치
(1943년)
구 황도 한성부 제국은행 앞 거리

개요

대한제국, 통칭 대한 혹은 제국주의 한국은 신미개혁을 시작으로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그 식민지들을 통치했던 제국주의 열강이다. 1875년 7월 3일부터 1945년 4월 4일까지 유지됬으며, 대일본제국과 더불어 동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성공한 유이한 국가였다. 현대까지 아시아 북부와 시베리아 일대에 남아있는 영향력을 끼쳤으며, 이후 헌법의 개헌으로 기존의 제국 체제가 붕괴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역사

극동의 여명

당시 조선의 실질적인 집권층은 안동김씨 세도가였으며, 이들은 만주의 후금이라는 방패로 순나라의 마수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노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식적인 관계가 매우 경직된 상태였던 대순[4]에 대한 대체제로 네덜란드, 일본, 후송과 러시아와의 제한적인 무역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홍경래의 난 이후 세가 약해진 안동 김씨 세력의 권력 확보를 위한 조치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남만주로 농민들을 보내 농지를 확보하거나, 명의 붕괴 이후부터 대대적인 순나라와의 밀무역과 새로운 교역국들과의 거래로 세를 얻은 보부상 등의 상인 세력들의 포섭을 통해서 안정적인 정치를 했던 안동김씨 세도가였으나, 19세기에 들어서는 더이상 권세를 그대로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고있는 상황이었다.

이러는 사이 성장하고 있던 근왕파 세력, 훗날 왕도개화파라불리는 세력이 존재하였는데, 음지에서 암약하던 이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얻게 된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였다. 당시 왕이었던 고조는 안동김씨가 보지 않는 곳에서 서학을 통해 익힌 세계에 대한 식견, 흥선군과 풍양조씨 등과의 동맹을 통해 인형사마냥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짜가고 있는 상황이었고, 고의적으로 안동김씨가 개항을 망설일 때 은근한 동의의 시선을 보내 개항을 하도록 만들었다. 해당 사건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바라지 않던 안동김씨는 이 기회에 프랑스의 세력을 기반으로 개화와 권력 유지를 동시에 이루어내려고 하였으나, 프랑스 측의 무력에 제대로 된 대항도 안하고 문을 연것에 대해 백성들의 민심이 극도로 나빠졌고, 결정적으로 당시 이향로가 지부상소를 하며 세도정치 타파와 전면적인 개혁을 실시할것에 대한 호소 올렸다가, 심기가 불편해진 안동김씨 자제 중 하나가 부하들을 동원해 그를 진압하던 도중 뇌진탕으로 죽게 만들어버린'궁내사대부박해'가 일어나면서, 변화를 바라지 않는 유교적 사대부들의 등까지 돌린 안동김씨의 명분이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결국 이 때를 노린 당시 국왕이자 훗날 대한제국 초대 황제가 되는 고조 이현은 왕도개화파를 선동하여, 훗날 신미사화로 불리게 되는 정치적인 숙청을 감행, 몇백년만에 다시 조선의 세도가에게서 권력이 왕을 위시한 근왕 대신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천지가 개벽하다

실권을 잡은 근왕 세력과 고조는 이후 서양 문물에 대해서 내부적으로 조사하는 기간을 가졌고, 이때 순나라와 후송나이 각각 버마전쟁과 아편전쟁으로 몰락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최종적으로 정치적 숙청이 끝난 조선에 때마침 다시 돌아온 조선통신사가 당시 비슷한 일을 겪고 있던 일본의 내부상황을 알리면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한 개화에 대한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개혁의 방향성을 정하기 위해 조선은 서방에는 보빙사를 파견했고, 일본, 중국 2개국에는 통신사를 개편한 수신사와 영선사를 파견하여 동아시아적 개혁에 어울리는 방향성의 모델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당시 서양, 일본 등을 방문한 유교적 인사들은 안동김씨가 자신들의 사비로 들여오던 문물 일부와 제물포의 네덜란드발 문물들만 보다가, 완전히 드러난 서양의 발달된 모습에 크게 자극받았고, 여기에 중국으로 방문한 이들이 수도까지 꼴이 말이 아니라는 정보를 공유하면서 그들의 기존 천하관이 마치 징을 울리듯이 흔들렸다. 결정적으로 중국에 파견된 완흥군이 흥선군에게 보고를 올리면서, 그를 많이 믿고 있던 흥선군 또한 개화의 필요성을 단순히 군사력 뿐만이 아닌 모든 면에서 느끼게 됬고, 이를 통해 개혁인사, 보수인사 모두 개화에 관심을 가지고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조선의 근대화 조건의 최소, 지배층의 구화주의 여론 대폭 형성과 기존 유교적 세계관의 변화가 충족되었다.

한편, 이 무렵 조선은 두가지의 수확을 거두었는데, 첫째는 여진정벌 이후 지속적으로 농민을 보내던 남만주 일대를 완전히 조선의 땅으로 편입하여 새로운 3개의 도로 삼았으며, 두번째는 홍삼과 인삼무역을 통한 상당한 무역 수익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을 통해 근대화를 위한 설비들을 구매할 수 있었고, 임신개혁을 단행하여 '관복개편'으로 관복을 서구화하고[5], 원격제도를 시행하여 국유화한 서원을 통해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단 또한 마련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국의 문명개화를 서로 지켜본 한국과 일본 사이에 묘한 동지의식이 꽃피면서, 외교관계가 상당히 돈독하게 발전했다. 일본 측은 한국의 존재로 육군 주력의 조슈 번의 대륙확장 계획을 무모한 일로 치부하며 폭주를 막을 수 있으니[6] 좋았고, 한국은 해양세력 동맹이라는 특징 덕에 자국의 새로운 3도 내에서 나는 철광석들 중 남은 것들을 쌀과 함께 팔 수 있었고, 사이가 좋지 않은 금나라와 순나라에 같이 대항해 줄 수 있는 국가의 존재를 좋게 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을 동맹으로 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 흥아회가 대대적으로 아시아 대중에게 한일동맹을 홍보하면서 대중에도 동맹 여론이 서서히 퍼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개혁을 계속하면서 힘을 더 키운 한국은 기세를 몰아 1885년 금나라에 통상을 요구한 뒤 거절당하자 북진하여 남만주 영토를 더 접수했고, 90년대에 들어 순나라와의 관계가 개혁문제로 험악해지자[7], 서서히 일본과 손을 잡고 각각 북방과 남방에서 중국,만주를 공략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전쟁 준비 이전, 한국은 송나라와 비밀리에 송의 중립과 승전 시의 이득을 보장하는 밀약을 체결할 것을 권유하였고, 송나라가 이에 응하여 중국 내에서 또다른 적군을 맞닥트릴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했다. 그렇게 1893년 벌어진 제 1차 동아시아 전쟁에서 한일동맹이 승리를 거두었고, 한국은 더 나아가 심양궁으로 진격해 실권자인 예허나라 힝전 귀비를 궁에 유폐시켰다. 전후 체결된 조약에서 순나라는 만주 지역에 대한 입김을 그만둘것을 촉구받았고, 일본에게 대만을 할양하고 푸젠성을 조차한 뒤 한국에게 거액의 배상금과 금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인정하였다.

이후, 2년 전부터 서서히 준비되고 있던 환구단의 건설이 완성되고 칭제 요구가 전과는 비교가 안될 수준으로 빗발치자, 고조 이현은 환구단에 올라서 칭제를 한 뒤, 사용하던 독단적 연호인 광무를 다시 제국연호로서 개원하여 제국의 시대를 시작했다.

칭제 이후, 안동김씨 척결 직후 공신들의 공을 치하하며 지정되었던 별도의 직위에 대한 재개편이 신분제 변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기존의 공신, 국가에 큰 공훈이 있는 자들과 이름있는 반가들을 사족(士族)[8]이라는 하나의 귀족 집단으로 뭉쳤으며, 이후 그 중 손에 꼽을 만한 명문가 당주들과 직접 개혁을 실시한 공신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은 작위사족(爵位士族)으로 다시 분류하여, 그 공과 명성에 따라 오등작으로 분류하였다[9]. 이후 몇년 전부터 설치가 논의되던 왕족 교육 기관인 수학원의 계획도 끝이 났으나, 노년의 나이에 업무를 과다하게 처리한데다가 측근이었던 대원군의 죽음이 탈이었는지, 광무제 고조가 결국 1899년 황태자 이훈을 정식 후계자로 선포하고 붕어했다.

영광과 전성기

1899년, 융희시대의 시작 이후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 한국인이 피해를 입자[10] 분노한 대한제국 정부는 서양 열강들과 손을 잡고 순나라로 진군하기로 결정, 북경에 입성하여 10개국 연합군으로서 그 이름을 알렸고, 이에 1901년 맺은 천진조약에서 옌타이를 조차하고 대량의 배상금과 유교 문화재들을 받는 성과를 냈다. 그러나 시베리아에서 러시아와의 갈등은 한영일 동맹 체결과 더불어 점점 고조되고 있었고, 결국 한국의 대금민국 러시아 공사관 포위와 일본 연합함대의 사할린 공격을 시작으로 한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모두가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결과는 정 반대로 한일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는 러시아 극동군의 무능과, 비정상적으로 육,해군에 투자한 한국군과 일본군의 특징, 그리고 유능하게 대처했던 한일 정부의 선택이 결합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전쟁을 끝으로 프랑스를 비롯한 모든 열강과 맺어진 불평등조약은 완전히 청산되었으며, 더이상 친러 외교로 생존이 불가능해진 대청제국을 완전히 집어삼키고, 해삼위를 일본제국과 함께 공동통치하는 자치령으로 삼았다.

이후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본토에서의 진격으로 사실상 붕 떠버린 독일령 칭다오를 공격하여 점령했고, 철강과 군수품 등을 수출하여 상당한 경제적 성장을 이루어내, 191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독점자본주의 국가로 거듭날 수준의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중국 북부 지방의 시장에 한국산 물품을 대량 뿌려 시장 장악을 통한 이익을 톡톡히 보기도 했는데, 이렇게 호황이 계속되던 도중 외교적으로 엄청난 이들을 얻은 사건이 발생했다.

1917년대, 러시아 혁명이 백군의 열세로 흘러가자 제국 내부에서 백군을 지원하여 반공정신을 강하게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그 정책의 일환으로 비밀작전인 금관작전을 실행하여, 러시아 귀족 몇몇과 로마노프 황가의 황손들을 구출하여 해삼위로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한 양국이 막대한 물자를 쏟아부어도 백군이 서부전선에서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두지 못하자, 한국과 일본은 고민 끝에 기존 백군 잔당들과 러시아 민주주의자들을 긁어모아 기존 연해주 자치령을 개편, 괴뢰정부인 극동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 편입 이후 한국의 칭다오 문제, 일본의 장시성 문제와 겹쳐 영국과의 동맹이 흔들리게 되었고, 결국 미국의 압박 하에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의 결과로 영국과 일본의 동맹이 끊어지면서 공식적으로 한영일 동맹은 영국이 빠져나가며 끝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1920년대 한국은 최전성기를 달렸다. 한성은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가장 발전한 도시로 거듭났고 거리 여기저기에서 벼락부자가 됬다는 이들의 이야기가 들려왔으며, 정계에서는 정당출신 총리들이 연일 임명되고 민주주의와 민권운동 열풍이 불었고 서양에서 들어온 최신 문화들과 발전한 대한의 문화가 어우러지면서, 한성 거리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이 시기를 흔히들 융희 로망이라고 부르며 한국 역사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 중 하나로 불린다.

사람들은 이 몽환의 단장이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믿었고, 국민들의 해외여행도 증가하는 등 실제로 그런 듯 보였다. 하지만 1920년대가 서서히 종막을 고하던 해, 그 단장이 마침내 아래로 내려갔다.

위기, 그리고 파시즘의 대두

조짐은 옆나라인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이 발발하면서 일본에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 일부 한국의 주식들이 일제히 성장에 이상징후가 보이자마자, 불안한 투자자들에 의해 거액의 돈이 빠져나가면서 경제를 지탱하던 자금의 안정성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1929년 미국에서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며 한국의 경제는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당시 제국은행 앞에서 서로를 밀치면서 먼저 돈을 확보하려다가 압사당한 사람도 속출했으며, 한강과 대동강의 파출소에서는 잇따른 투신자살 소식이 이어져서 들려왔다. 만주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은 극에 달했으며, 한성에서 간간히 보이던 좌익 인사들은 이제 광화문 광장 앞에서 대놓고 시위를 할 정도로 기세가 성장하였다.

급한대로 원로였던 김옥균을 다시 정계로 소환한 개화당 내각은, 경제적인 회복과 민심의 조절, 그리고 공산주의 확산의 단절을 위하여 기존과 다른 친서민적인 경제정책 및 법안을 발효하려고 했으나, 사족들 및 기업가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실패했고 결정적으로 만주 총독부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폭탄 테러 미수가 발생하면서 여론이 시끄러워지자 흐지부지 되었다.

한편, 공산주의의 발흥과 경제적인 사정과 더불어 한국에는 서서히 새로운 사상이 퍼져나가고 있었으니, 바로 파시즘이었다. 우익적인 사고와 사회주의적인 경제 정책, 그리고 계급간의 총단결을 통한 국가 부흥을 주장하는 파시즘 세력은 한국 내에서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고루 인기를 얻었으며, 반공, 군비 확장을 통한 경제 부흥과 한국의 영광 등을 주장하며 사회적인 지지도를 점차 높여갔다. 이 중 대한백의단이라는 공산주의 계열 한국 정당의 거두인 조선노동당을 직접 사제 폭력 조직을 동원해 진압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이렇게 이들의 명성이 올라간 데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가 나타나다

백의단의 지도자는 김창암이었는데, 단호한 결단력과 카리스마, 그리고 행동력 등으로 인해 백의단의 지도자까지 맡은 인물이었다. 김창암은 백의단의 전권을 손에 쥔 뒤 한국을 자신이 원하는 국가로 개조할 계획을 짜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서 유교 근본주의, 파시즘과 민족주의등을 고로 내세우며 전 계층의 지지도를 확보한 뒤, 쿠데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쿠데타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백의단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던지라,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인물들 중 자신의 뜻에 동참할 것이고, 쿠데타에 협조할 인물을 선정하였다.

선정된 인물은 바로 대한제국군 군 내 파시즘 모임임 북진회의 수장 이범석 장군이었다. 원래부터 백의단 내의 인사들과 고루 알고 지내던 장교이기도 했고, 현 시점에서 군에 대한 통제권 또한 발휘할 수 있는 이였기에, 김창암은 1930년 새해에 이범석과 밀담을 나누어, 한성을 시작으로 하는 진군을 통한 정권 장악을 모의하였고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라고 생각한 이범석은 이 계획에 동참하였다.

작전은 2월 10일 전날인 2월 9일 저녁 10시경부터 시작되었다. 이 기간동안 이범석을 위시한 북진회가 자신들이 소집한 인력들로 의회와 중추원 건물을 포위하였고, 이어서 군 일부는 백의단 인원들과 함께 한성 거리로 진입, 경복궁을 향해 진군하는 한성 진군을 개시하였다. 마침내 경복궁 앞에 도착하자 시위대와의 대치가 시작되었으며, 백의단 인원들은 황제에게 자신들의 뜻을 받아주지 않겠다면 차라리 자결하겠다며 단체로 지부상소를 시작했다. 의회에서는 의원 한 명이 빠져나가려다가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고, 이러한 상황들에 패닉에 빠진 성덕제는 계속 버티던 중 쿠데타 세력이 자결을 권고한 2월 10일 아침 8시가 되기 20분 전, 결국 얼떨결에 백의단의 요청을 수락, 김창암을 구국자로서 임명하고 이범석을 육군대신에 임명한다는 칙서를 반포했다.

이러한 기행과 군사적인 수단을 통해 결국 목적을 달성한 백의단은 우선 해산했고, 본격적으로 한성 거리에서 그 다음날부터 홍보 활동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군부 또한 급격히 과격화되어 예산을 더 늘릴 것을 요구했으며, 기회주의적 정치인들이 출세를 위해 여기에 가세하면서 점점 김창암의 정치적인 기반은 커져만 갔다.

그렇게 이듬해 내각총리대신 임명기간이 다가왔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사람들의 압도적인 지지와 군부와의 연줄을 무기로 들고 나온 백의단, 이제는 대한호국회의 김창암이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임명되었다.

폭주

집권 정당으로 거듭난 대한호국회는 기다렸다는듯이 본격적으로 군비를 확충했고, 사족들의 재산 제도를 '군자의 품격'을 명분으로 재개편하여 경제 성장에 필요한 목돈을 마련한 뒤, 이를 이용하여 거대 시설 건축같은 일자리를 마련하여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방침으로 경제적인 발전을 꾀했다. 동시에 기존엔 역량 부족으로 한계가 어느정도 있었던 만주에 대한 수탈을 더욱 가속화하여 한국인들의 재산을 불렸으며, 기업들에는 지원등을 통해 정부에게 협력한다면 막대한 이득을 주겠다고 꼬드겨 자연스레 합류하도록 유도했다. 또, 그동안 사실상 군의 서자 취급을 받던 해군도 예산 증가, 요직 임명 등을 통해 확장시켜 해군부에서 일고 있던 불만을 달랬다.

이 시기에 국가에 대한 충성 강화를 위해 일반적인 사족들의 권위를 대규모 축소시켜, 작위사족을 제외하면 사실상 평민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파격적인 경제정책으로 일시적으로 한국은 일본의 경제력을 뛰어넘는 기염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이 경제력은 직후 군비에 투자되어 외부 확장을 위한 발판 자금으로서 서서히 준비되었다.

군사력이 충분히 확보되었다고 판단한 김창암은 몽골로 출병할 것에 대한 재가를 황제로부터 받아낸 뒤, 1932년 몽골 출병을 명령하였다. 처음엔 압도적으로 한국의 우세였으나, 지휘관의 무능과 한국군의 방심, 그리고 현지 민심의 반발이 합쳐지면서 한국군은 졸지에 몽골에서 졸전을 시작했으며, 여기에 소련의 지원이 들어오자 몽골이 예상 외로 잘 버티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몽골에서의 전세가 기울리는 듯 했다. 그러나 1934년 결국 국력의 한계치로 인해 몽골 인민공화국이 먼저 항복했고, 한국은 점령지의 핵심인 동몽골 일대는 별도의 총독부로 통치하기 시작한 뒤, 자신들이 확보한 몽골 영토에는 괴뢰국인 예케 몽골 울루스를 설립하여 관리했다. 이후 몽골에서 한국 기업들이 대규모로 진출하며 몽골의 경제는 파탄났지만 역으로 한국의 경제는 다시 성장세를 보였으며, 이제 더 이상 망설일것이 없다고 완전히 판단한 대한호국회는 본격적인 확장계획을 시작하였다.

먼저, 대한호국회 집권 이후부터 '반공'과 '왕도정치'를 주 이념 중 하나로 내세운 한국은 1936년 일본제국에 이어 방공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듬해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이 설립한 괴뢰국인 대명국의 주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남하, 칭더를 위시한 북중국 일대를 점령한 뒤 일본과 북경에서 만나 중국의 분할을 논했다. 그러나 여기서 일본과 중국 점령 방식을 가지고 논쟁을 펼치다가 결국 중국 북부 위주로 한국은 영토를 점거하기로 결정이 났으나, 곧이어 몽골에서 2차 내전이 발발하고 중국인들의 치열한 저항이 시작되면서, 연전연승만 대부분 거듭하던 대한제국군은 지루한 소모전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던 와중 40년대부터 한국에 석유 가격 인상조치만 경고하던 미국이 한국에게도 일본에 이어 기어이 석유 금수조치를 취하자, 한국은 분노해도 빈약한 해군 탓에 미군을 공략할 방법이 없었고, 결국 기름을 모을 다를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의논 끝에 나온 결론은, 소련을 쳐서 석유를 확보하고 공산주의의 위협도 방어하며 영토도 확보하자는 계획이었다. 이미 예전에 나왔다가 현실성에 대한 문제로 폐기된 안이었으나, 곧 소련과 독일이 전쟁을 시작하면 소련은 극동 방면에 신경쓸수가 없다고 주장한 이범석에 의해 작전이 승인되었고, 작전을 준비하던 도중 정말 이범석의 예상한 대로 독소전쟁이 개전하자, 한국은 그해 3월 할힌골에 대한 기습 공격으로 소련군의 극동 방면 정예 육군을 분쇄, 연해주의 러시아 차르국과 함께 북진하여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소련이 한국에게도 선전포고 하면서 동시베리아 전쟁이 개전되었다.

42년까지 한국은 빙과 작전이라는 군사작전을 통해 바이칼 호 앞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42년 겨울동안 발생한 병력손실과 추위, 그리고 독일의 전세 약화로 인해 극동에 다시 집중할 수 있게 된 소련으로 인해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1941년 미국 알래스카에 기적적으로 폭격을 성공한 이후부터는 미군도 간간히 동시베리아로 건너와서 한국과 대립하는 지경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경제력으로 확보한 자본과 만주의 철강과 기름을 모두 소련을 상대하기 위한 전쟁에 끌어다 쓰면서 경제는 악화일로를 겪었다. 이러는 도중 대한호국회 내에서도 서서히 분열이 일어난데다가 이들의 독단적인 행보에 서서히 불만을 품은 왕당파가 민주파와 비밀리에 연대를 시작하면서 정치적으로도 혼란이 심화되었고, 급기야 1943년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자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수준으로 대한제국군이 시베리아 전선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김창암에 대한 의원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는데 김창암의 권력은 이들 이상인지라 계속 불만이 축적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결국 이에 위기감을 느낌 김창암은 소위 '기강잡기'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그렇게 1944년 12월 30일,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평소 김창암에게 반대하던 의원들까지 광화문 앞에 집결하자 김창암은 행동을 결심하였다. 이전부터 자신의 사상을 접해 서서히 광기에 물들어가던 아동들을 대규모로 불러모은 뒤 광장 앞에 집결하였으며, 그 자리에서 의원들을 위압감으로 압박한 뒤 연단 위로 올라가, 자신의 연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의원들 중 대부분이 나라의 앞날을 어둡게 만드는 역적이라는 내용이었고, 그 직후 학생 하나가 의원들을 구타하면서 광화문 참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됬다.

혼비백산한 의원들을 구타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유혈사태를 일으키며 소위 '학도백의단'은 점점 의회 건물 앞으로 진격해 갔으며, 결국 단체로 열광한 상태로 문을 파손시키고 강제로 건물 내부로 진입하였다. 문제는 이 당시 영친왕 이은이 시찰을 위해 의회로 나와있었다는 점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의원들에게 행해진 폭력을 영친왕이 말리던 도중, 상당히 과격한 학생 하나에게 구타를 당한 뒤, 난간에서 떨어져 의회장 좌석에 추락사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졸지에 황족 하나가 정부 집권당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한국 정계는 당일날 발칵 뒤집혔고, 당일 새벽 6시 의회장을 장악한 김창암 세력에게 군부의 절반 정도가 충성 포기를 선언, 김창암 정권을 쿠데타 세력으로 간주하면서 서서히 불안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아직 김창암이 국내의 민주세력을 모두 쫓아내지는 못한 상황이었다는 점. 여기에 당시 유력 황족이었던 예친왕 이연과 민주계의 거두였던 우남 이승만이 합작, 민주세력과 군에게 김창암을 몰아낼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반 김창암 세력을 결집시키기 시작하자, 모 아니면 도라고 판단한 김창암의 지시에 의해 이범석을 따르던 육군들이 다른 육군들에게 발포하면서, 한국 역사상 가장 작지만 중요한 내전인 한성 내전이 발발하였다.

제국의 끝

그러나, 황족을 죽였다는 김창암 세력의 이름표는 그 무게가 막심했다.

의의

식민지


대한제국의 식민지 · 자치령 및 조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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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지역 명칭 담당기관
북만주 만주 만주총독부
동몽골 제국 몽고주 몽고도독부
프리모예 연해주 자치령 연해주 대한제국청
해당지역 명칭 기관
칭다오 청도 청도관리위원회
* 자치령은 1920년대 괴뢰국으로 [11]승격
괴뢰국 · 군정청

현대의 평가

한국 내에서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복잡미묘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래도 부정적인 인식이 강한 편이다. 이런 평가에는 대한제국이 추축국으로서 아시아 지역의 파시즘[12]과 군국주의의 선봉에 섰고, 시베리아에서 수백만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야기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내전이 나 수뇌부가 한 번 갈아엎어졌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당대에는 아시아의 주요 강대국 중 하나였지만, 만주족의 동화를 명분으로 만주 지역에 경찰통치를 시행하는 등 극단적 집단주의를 내세우며 인권과 같은 현대적 가치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현재에는 평가가 나쁘다.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현재까지도 분명 근대사에서 상당히 대단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일이다. 이 시기 한국에 대한 세계의 평가는 서구에서는 정치적으로는 대륙에서의 러시아 패권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을 중세적,중화중심적인 세계관을 버리고 혁신적인 개방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문명국이라며 찬사를 거듭하였고, 당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동아시아를 여행한 서양인들도 중국인의 성격과 생활습관, 문화와 역사에 대해 혹평을 내린 것과는 반대로 비슷하게 일본인, 한국인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문호 개방의 과정에서 물질적인 계몽에는 성공했을지언정, 사상, 사회, 정치의 자유와 국민 계몽에는 도달하지는 못했다. 대한제국은 오히려 신장한 국력을 통해 주변 국들을 합병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제국에 비견되는 수많은 전쟁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의 식민지배, 혹은 내정간섭을 받은 나라들의 한국에 대한 평가는 복잡한 편인데,연해주의 러시아 차르국의 경우에는 애초에 국체인 차르부터가 한국의 금관작전으로 구조된 로마노프 왕가 황통들이고, 소련을 바로 코 위에 두고있는 상황에서 사실상 한국 외 선택지는 아예 괴뢰국으로조차 남겨두지 않겠다는 인식이 있던 일본제국 이었던지라 친한 여론이 진작에 형성되었으며, 전후에도 소련으로 인해 강도높은 친미, 친영 및 친한 정책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던지라 감정회복이 빠르게 된 편에 속한다. 이 외에도 국가는 아니지만 대금민국의 간도지역에서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높은 편으로, 방언 등에서 한국어의 깊은 영향들을 볼 수 있고 현대에 영유권 분쟁이 계속 발생할 정도로 한국의 영향력이 강한 편이다. 반면, 만주에 위치한 대금민국의 경우 그 사이가 최악으로 자국의 과거 집권 세력인 공산주의 세력부터가 한국의 지속적인 탄압을 받은 데다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금나라인들은 식민통치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도 한국에게 사과와 배상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인식 때문에 반한감정이 상당히 강한 편에 속한다.

동시베리아 전쟁 중 한국군의 폭격을 받은 동구권 국가들도 어느정도 감정의 골이 있었으며, 이를 회복하기까지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다만 이들은 냉전이 시작된 이후 소련의 영향력을 벋어나기 위한 용도로 한국에도 어느정도 줄을 대기 시작하였으며, 현대에는 한국 기업들이 많이 진출해있을 정도로 사이가 좋아진 편들에 속한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2차 대전당시 대한제국이 나치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약속을 하였고, 독소전쟁 당시에 원조도 한지라 평가가 매우 좋은 편. 한국군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적도 없던지라 현대에도 우크라이나에서는 한국에 대해서 좋은 평가가 강세다.

서양, 구미권에서는 한국에 의해 유럽 본토 및 미국 본토가 입은 피해는 전무한지라, 제국주의시기 일본을 대하는 것처럼 다소 무관심한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동아시아의 또다른 제국으로서 소련의 공산주의와 전면적으로 호각을 다퉜다는 점 때문에 좋아하는 경우도 존재하며, 몇몇은 케케묵은 과거사로 싸우는 걸 건설적이지 못하게 여겨 중국이나 대금민국 등이 한국의 만행을 규탄하는 것을 '이미 다 끝난 일들을 저열하게 물고 늘어지는 행태'라 여기는 경우도 존재한다.

하지만 아직 소련에서는 할힌골 사변 등으로 독소전쟁과 한소전쟁을 동시에 경험한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전쟁범죄를 겪기도 하였고, 이전부터 소련과 한국의 관계가 러시아 차르국 문제 등으로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였던지라 반한 감정이 종종 남아있는걸 볼 수 있다. 다만, 젊은 세대들은 이러한 인식이 부족한지라 자국 내에서의 이런 주장을 케케묵은 주장으로 보는 경우도 종종 존재한다.

대금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등의 거센 반한에 회의적인 사람이 많은 이유는, 이들은 현재의 대한국을 구 대한제국과 정권, 이념 등 모든 면에서 다른 국가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2차대전 말미에 민주세력이 내전으로 다시 돌아온지라 이 인식이 더 강한것도 있고.

동시기 일본제국과의 비교

10년 정도의 차이긴 하지만, 당시 한국은 가장 가까운 동양권 나라인 일본을 개화의 모델 중 하나로 삼았던지라 의외로 비슷한 면들이 많이 존재한다. 주로 동아시아적인 가치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 따오기의 기여가 상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한국의 근대시기 한자어 용어(재벌, 경제 등) 중 일본에서 들여온 것들이 꽤 보이는 편이다. 실제로 19세기, 20세기 그리고 현재까지 두 나라의 관계가 상당히 좋은편이기도 했고, 지리상 가깝다는 점과 비슷한 외교적 상황 등이 이러한 교류를 촉발시킨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차이점도 분명했다. 한국은 일본에 비해 만주라는 거대한 땅이 있어서 농민들의 생활수준은 더 높은 편이었고[13], 광무시대까지는 전통적인 이유로 군주의 권한이 일본보다 강해서 한국 정치는 황제의 의사가 상당히 중요했었으나, 결과적으로 광무제의 공신들을 휘어잡을 카리스마를 융희제가 이어받지 못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일본과 그닥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다만 그 흔적이 오늘날에도 일부는 남아있어서, 한국 황실의 경우 일본 황실과 같은 권한보다는 이탈리아의 구 사보이아 왕가, 영국왕실과 좀 더 비슷하다는 평가가 많은 편.

기타


  1. 연해주 자치령에서 극동 공화국으로, 극동 공화국에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환.
  2. 1922년 3월 2일 즉위
  3. 1944년 기준.
  4. 다만 중국의 압도적인 인구수 때문에 초기 순나라때처럼 공식적인 무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지는 않았다.
  5. 민간에겐 단발을 장려하기는 하였으나, 유교적 사상을 존중해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공직에 임명되는 이들은 반드시 서양식 의복을 착용할 것이 명시되었다.
  6. 요시다 쇼인의 이론에 따르면 부산에서만 그쳤던 조선 침략을 다시 재개하여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이 당시 조슈 파벌의 주장이었는데, 예상 외로 한국이 일본이 손을 대기 전부터 변화에 대처를 잘하는 모습을 보이자 조슈 내에서도 한국을 바로 치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여론이 늘어난 것이 한몫했다.
  7. 당시 순나라는 가뜩이나 전통적으로 조선의 번국 자리가 진실로 자신들에게 있는지도 애매한 상황에서,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조선이 서양식 관복을 입고 동등한 외교관계를 요구하는 대한국으로 변모하자 사절의 조정 입장 자체를 금하는 등의 강경대처를 보여줬다.
  8. 속어로는 귀족이라는 말도 꽤 널리 사용됬다.
  9. 다만, 이는 여전히 가세 자체는 비대했던 세도가들도 포함됬다. 예를 들어 안동 김문의 유력자였던 사영 김병기는 김병기 후작으로 봉해졌고(시호:문충공(文忠公))다. 물론 사실상 안동김씨의 정치적인 기반이 사그러든 상태였기에, 더 이상 작위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하려고 시도하는 등의 음모는 없었다.
  10. 적어도 현실주의적인 행보와 조선 시대부터의 친선관계로 인해 친한적인 정서가 강했던 송나라와는 다르게, 순나라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은 시장에 한국 물건을 풀어 어지럽히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백인, 일본인과 별 다를 바 없는 착취자였다. 때문에 의화단의 난 당시 피해를 보게 된 것.
  11. 연해주 자치령에서 극동 공화국으로, 극동 공화국에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환.
  12. 전간기의 대한제국은 현대에도 평가가 복잡한 일본과 다르게 확실하게 파시즘 국가로 평가받는다. 이탈리아처럼 황제는 최소한의 명분과 권력만 가지고 실질적인 지도와 국가정책등을 유일한 정당의 지도자이자 총리를 대체한 제국대호국경이 전부 집행하는 구조였기 때문.
  13. 당시 한국 농민의 생활수준은 중화민국, 소련, 이탈리아, 일본보다 높고 프랑스 바로 아래인 수준이었다. 다만 이건 만주로 건너간 농민들이 주를 이루는지라, 본토에서 계속 농사를 짓던 이들은 일본 농민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고, 오히려 세력다툼에서 가격이 싼 농산물 상당량을 들여오는 만주쪽 농민들에게 밀릴 때였다. 때문에 1920년대 대공황 이후 문자 그대로 궁지까지 내몰린 농민들이 만주로 대거 상경하기도 했었고, 이 과정에서 만주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토지를 강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