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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3" width="50%" style="background-color:#bb002c;color:#FFDD11;" | '''국기''' | ! colspan="3" width="50%" style="background-color:#bb002c;color:#FFDD11;" | '''국기''' | ||
! colspan="1" width="50%" style="width:50%;background-color:# | ! colspan="1" width="50%" style="width:50%;background-color:#16124a;color:#FFDD11;"| '''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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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4" width="100%" style="color:#bb002c;" | '''광명천지'''<br>'''(光明天地)''' | ! colspan="4" width="100%" style="color:#bb002c;" | '''광명천지'''<br>'''(光明天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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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3" width="50%" style="background:#bb002c; color: #FFDD11;" | 칭제건원 이전 | ! colspan="3" width="50%" style="background:#bb002c; color: #FFDD11;" | 칭제건원 이전 | ||
! colspan="1" width="50%" style="background:# | ! colspan="1" width="50%" style="background:#16124a; color: #FFDD11;" | 동시베리아 전쟁 이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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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3" width="40%" style="background:#fff; color: #000000 | [[파일:Flag ofKorea (1897).png|20px]] 조선 | ! colspan="3" width="40%" style="background:#fff; color: #000000 | [[파일:Flag ofKorea (1897).png|20px]] 조선 | ||
! colspan="1" width="40%" style="background:#fff; color: #bb002c | [[파일:다이칸.png|20px]] [[대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한국]]<br/> [[파일:러만주.png|20px]] [[대금민국 (아침해의 원유관)|대금민국]] | ! colspan="1" width="40%" style="background:#fff; color: #bb002c | [[파일:다이칸.png|20px]] [[대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한국]]<br/> [[파일:러만주.png|20px]] [[대금민국 (아침해의 원유관)|대금민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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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4" style="background:# | ! colspan="4" style="background:#16124a; color: #FFDD11;" | 상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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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국기</center> | !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국기</cent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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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이화문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이화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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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4" style="background:# | ! colspan="4" style="background:#16124a; color: #FFDD11;" |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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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2년 대조선국 건국</br>1875년 대한제국 선포</br>1904년 한러일전쟁 승전</br>1930년 한성 진군</br>1937년 제 2차 동아시아 전쟁</br>1941년 동시베리아 전쟁</br>1944년 한성 내전, 헌정 복귀 | | 1392년 대조선국 건국</br>1875년 대한제국 선포</br>1904년 한러일전쟁 승전</br>1930년 한성 진군</br>1937년 제 2차 동아시아 전쟁</br>1941년 동시베리아 전쟁</br>1944년 한성 내전, 헌정 복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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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4" style="background:# | ! colspan="4" style="background:#16124a; color: #FFDD11;" | 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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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수도</center> | !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수도</cent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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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중화민국 (아침해의 원유관)|중화민국]], [[러시아 차르국 (아침해의 원유관)|러시아 ]], [[대일본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일본제국]],[[소련 (아침해의 원유관)|소비에트 연방]]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중화민국 (아침해의 원유관)|중화민국]], [[러시아 차르국 (아침해의 원유관)|러시아 ]], [[대일본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일본제국]],[[소련 (아침해의 원유관)|소비에트 연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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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총 인구</center> | !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총 인구</cent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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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군대</center> | !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군대</center> |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대한제국군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대한제국군 (아침해의 원유관)|대한제국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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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4" style="background:# | ! colspan="4" style="background:#16124a; color: #FFDD11;" | 정치 · 경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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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정치 체제</center> | !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정치 체제</cent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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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대한제국 원 (圓)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대한제국 원 (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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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color:#16124a;padding:5px" | 위치<br/><small>(1943년)</smal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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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대한제국 최대 판도.p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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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margin:-4.5px -9.0px">[[파일:구 한성.jpg]]</div> | | <div style="margin:-4.5px -9.0px">[[파일:구 한성.jpg]]</d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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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목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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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개요=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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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통칭 '''대한''' 혹은 '''제국주의 한국'''은 신미개혁을 시작으로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그 식민지들을 통치했던 제국주의 열강이다. 1875년 7월 3일부터 1945년 4월 4일까지 유지됬으며, 대일본제국과 더불어 동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성공한 유이한 국가였다. 현대까지 아시아 북부와 시베리아 일대에 남아있는 영향력을 끼쳤으며, 이후 헌법의 개헌으로 기존의 제국 체제가 붕괴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대한제국''', 통칭 '''대한''' 혹은 '''제국주의 한국'''은 신미개혁을 시작으로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그 식민지들을 통치했던 제국주의 열강이다. 1875년 7월 3일부터 1945년 4월 4일까지 유지됬으며, 대일본제국과 더불어 동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성공한 유이한 국가였다. 현대까지 아시아 북부와 시베리아 일대에 남아있는 영향력을 끼쳤으며, 이후 헌법의 개헌으로 기존의 제국 체제가 붕괴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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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역사= | ||
===극동의 여명=== | ===극동의 여명=== | ||
당시 조선의 실질적인 집권층은 안동김씨 세도가였으며, 이들은 만주의 후금이라는 방패로 순나라의 마수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노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식적인 관계가 매우 경직된 상태였던 대순<ref> 다만 중국의 압도적인 인구수 때문에 초기 순나라때처럼 공식적인 무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지는 않았다.</ref>에 대한 대체제로 네덜란드, 일본, 후송과 러시아와의 제한적인 무역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홍경래의 난 이후 세가 약해진 안동 김씨 세력의 권력 확보를 위한 조치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남만주로 농민들을 보내 농지를 확보하거나, 명의 붕괴 이후부터 대대적인 순나라와의 밀무역과 새로운 교역국들과의 거래로 세를 얻은 보부상 등의 상인 세력들의 포섭을 통해서 안정적인 정치를 했던 안동김씨 세도가였으나, 19세기에 들어서는 더이상 권세를 그대로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고있는 상황이었다. | 당시 조선의 실질적인 집권층은 안동김씨 세도가였으며, 이들은 만주의 후금이라는 방패로 순나라의 마수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노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식적인 관계가 매우 경직된 상태였던 대순<ref> 다만 중국의 압도적인 인구수 때문에 초기 순나라때처럼 공식적인 무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지는 않았다.</ref>에 대한 대체제로 네덜란드, 일본, 후송과 러시아와의 제한적인 무역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홍경래의 난 이후 세가 약해진 안동 김씨 세력의 권력 확보를 위한 조치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남만주로 농민들을 보내 농지를 확보하거나, 명의 붕괴 이후부터 대대적인 순나라와의 밀무역과 새로운 교역국들과의 거래로 세를 얻은 보부상 등의 상인 세력들의 포섭을 통해서 안정적인 정치를 했던 안동김씨 세도가였으나, 19세기에 들어서는 더이상 권세를 그대로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고있는 상황이었다. | ||
이러는 사이 성장하고 있던 근왕파 세력, 훗날 왕도개화파라불리는 세력이 존재하였는데, 음지에서 암약하던 이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얻게 된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였다. 당시 왕이었던 고조는 안동김씨가 보지 않는 곳에서 서학을 통해 익힌 세계에 대한 식견, 흥선군과 풍양조씨 등과의 동맹을 통해 인형사마냥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짜가고 있는 상황이었고, 고의적으로 안동김씨가 개항을 망설일 때 은근한 동의의 시선을 보내 개항을 하도록 만들었다. 해당 사건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바라지 않던 안동김씨는 이 기회에 프랑스의 세력을 기반으로 개화와 권력 유지를 동시에 이루어내려고 하였으나, 프랑스 측의 무력에 제대로 된 대항도 안하고 문을 연것에 대해 백성들의 민심이 극도로 나빠졌고, 결정적으로 당시 | 이러는 사이 성장하고 있던 근왕파 세력, 훗날 왕도개화파라불리는 세력이 존재하였는데, 음지에서 암약하던 이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얻게 된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였다. 당시 왕이었던 고조는 안동김씨가 보지 않는 곳에서 서학을 통해 익힌 세계에 대한 식견, 흥선군과 풍양조씨 등과의 동맹을 통해 인형사마냥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짜가고 있는 상황이었고, 고의적으로 안동김씨가 개항을 망설일 때 은근한 동의의 시선을 보내 개항을 하도록 만들었다. 해당 사건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바라지 않던 안동김씨는 이 기회에 프랑스의 세력을 기반으로 개화와 권력 유지를 동시에 이루어내려고 하였으나, 프랑스 측의 무력에 제대로 된 대항도 안하고 문을 연것에 대해 백성들의 민심이 극도로 나빠졌고, 결정적으로 당시 이향로가 지부상소를 하며 세도정치 타파와 전면적인 개혁을 실시할것에 대한 호소 올렸다가, 심기가 불편해진 안동김씨 자제 중 하나가 부하들을 동원해 그를 진압하던 도중 뇌진탕으로 죽게 만들어버린'궁내사대부박해'가 일어나면서, 변화를 바라지 않는 유교적 사대부들의 등까지 돌린 안동김씨의 명분이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결국 이 때를 노린 당시 국왕이자 훗날 대한제국 초대 황제가 되는 고조 이현은 왕도개화파를 선동하여, 훗날 신미사화로 불리게 되는 정치적인 숙청을 감행, 몇백년만에 다시 조선의 세도가에게서 권력이 왕을 위시한 근왕 대신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 ||
===천지가 개벽하다=== | ===천지가 개벽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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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양, 일본 등을 방문한 유교적 인사들은 안동김씨가 자신들의 사비로 들여오던 문물 일부와 제물포의 네덜란드발 문물들만 보다가, 완전히 드러난 서양의 발달된 모습에 크게 자극받았고, 여기에 중국으로 방문한 이들이 수도까지 꼴이 말이 아니라는 정보를 공유하면서 그들의 기존 천하관이 마치 징을 울리듯이 흔들렸다. 결정적으로 중국에 파견된 완흥군이 흥선군에게 보고를 올리면서, 그를 많이 믿고 있던 흥선군 또한 개화의 필요성을 단순히 군사력 뿐만이 아닌 모든 면에서 느끼게 됬고, 이를 통해 개혁인사, 보수인사 모두 개화에 관심을 가지고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조선의 근대화 조건의 최소, 지배층의 구화주의 여론 대폭 형성과 기존 유교적 세계관의 변화가 충족되었다. | 당시 서양, 일본 등을 방문한 유교적 인사들은 안동김씨가 자신들의 사비로 들여오던 문물 일부와 제물포의 네덜란드발 문물들만 보다가, 완전히 드러난 서양의 발달된 모습에 크게 자극받았고, 여기에 중국으로 방문한 이들이 수도까지 꼴이 말이 아니라는 정보를 공유하면서 그들의 기존 천하관이 마치 징을 울리듯이 흔들렸다. 결정적으로 중국에 파견된 완흥군이 흥선군에게 보고를 올리면서, 그를 많이 믿고 있던 흥선군 또한 개화의 필요성을 단순히 군사력 뿐만이 아닌 모든 면에서 느끼게 됬고, 이를 통해 개혁인사, 보수인사 모두 개화에 관심을 가지고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조선의 근대화 조건의 최소, 지배층의 구화주의 여론 대폭 형성과 기존 유교적 세계관의 변화가 충족되었다. | ||
한편, 이 무렵 조선은 두가지의 수확을 거두었는데, 첫째는 여진정벌 이후 지속적으로 농민을 보내던 남만주 일대를 완전히 조선의 땅으로 편입하여 새로운 3개의 도로 삼았으며, 두번째는 홍삼과 인삼무역을 통한 상당한 무역 수익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을 통해 근대화를 위한 설비들을 구매할 수 있었고, 임신개혁을 단행하여 '관복개편'으로 관복을 서구화하고<ref>민간에겐 단발을 장려하기는 하였으나, 유교적 사상을 존중해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공직에 임명되는 이들은 반드시 서양식 의복을 착용할 것이 명시되었다 | 한편, 이 무렵 조선은 두가지의 수확을 거두었는데, 첫째는 여진정벌 이후 지속적으로 농민을 보내던 남만주 일대를 완전히 조선의 땅으로 편입하여 새로운 3개의 도로 삼았으며, 두번째는 홍삼과 인삼무역을 통한 상당한 무역 수익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을 통해 근대화를 위한 설비들을 구매할 수 있었고, 임신개혁을 단행하여 '관복개편'으로 관복을 서구화하고<ref>민간에겐 단발을 장려하기는 하였으나, 유교적 사상을 존중해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공직에 임명되는 이들은 반드시 서양식 의복을 착용할 것이 명시되었다.</ref>, 원격제도를 시행하여 국유화한 서원을 통해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단 또한 마련하였다. | ||
이 과정에서 양국의 문명개화를 서로 지켜본 한국과 일본 사이에 묘한 동지의식이 꽃피면서, 외교관계가 상당히 돈독하게 발전했다. 일본 측은 한국의 존재로 육군 주력의 조슈 번의 대륙확장 계획을 무모한 일로 치부하며 폭주를 막을 수 있으니<ref>요시다 쇼인의 이론에 따르면 부산에서만 그쳤던 조선 침략을 다시 재개하여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이 당시 조슈 파벌의 주장이었는데, 예상 외로 한국이 일본이 손을 대기 전부터 변화에 대처를 잘하는 모습을 보이자 조슈 내에서도 한국을 바로 치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여론이 늘어난 것이 한몫했다.</ref> 좋았고, 한국은 해양세력 동맹이라는 특징 덕에 자국의 새로운 3도 내에서 나는 철광석들 중 남은 것들을 쌀과 함께 팔 수 있었고, 사이가 좋지 않은 금나라와 순나라에 같이 대항해 줄 수 있는 국가의 존재를 좋게 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을 동맹으로 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 흥아회가 대대적으로 아시아 대중에게 한일동맹을 홍보하면서 대중에도 동맹 여론이 서서히 퍼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 이 과정에서 양국의 문명개화를 서로 지켜본 한국과 일본 사이에 묘한 동지의식이 꽃피면서, 외교관계가 상당히 돈독하게 발전했다. 일본 측은 한국의 존재로 육군 주력의 조슈 번의 대륙확장 계획을 무모한 일로 치부하며 폭주를 막을 수 있으니<ref>요시다 쇼인의 이론에 따르면 부산에서만 그쳤던 조선 침략을 다시 재개하여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이 당시 조슈 파벌의 주장이었는데, 예상 외로 한국이 일본이 손을 대기 전부터 변화에 대처를 잘하는 모습을 보이자 조슈 내에서도 한국을 바로 치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여론이 늘어난 것이 한몫했다.</ref> 좋았고, 한국은 해양세력 동맹이라는 특징 덕에 자국의 새로운 3도 내에서 나는 철광석들 중 남은 것들을 쌀과 함께 팔 수 있었고, 사이가 좋지 않은 금나라와 순나라에 같이 대항해 줄 수 있는 국가의 존재를 좋게 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을 동맹으로 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 흥아회가 대대적으로 아시아 대중에게 한일동맹을 홍보하면서 대중에도 동맹 여론이 서서히 퍼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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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을 계속하면서 힘을 더 키운 한국은 기세를 몰아 1885년 금나라에 통상을 요구한 뒤 거절당하자 북진하여 남만주 영토를 더 접수했고, 90년대에 들어 순나라와의 관계가 개혁문제로 험악해지자<ref>당시 순나라는 가뜩이나 전통적으로 조선의 번국 자리가 진실로 자신들에게 있는지도 애매한 상황에서,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조선이 서양식 관복을 입고 동등한 외교관계를 요구하는 대한국으로 변모하자 사절의 조정 입장 자체를 금하는 등의 강경대처를 보여줬다.</ref>, 서서히 일본과 손을 잡고 각각 북방과 남방에서 중국,만주를 공략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 개혁을 계속하면서 힘을 더 키운 한국은 기세를 몰아 1885년 금나라에 통상을 요구한 뒤 거절당하자 북진하여 남만주 영토를 더 접수했고, 90년대에 들어 순나라와의 관계가 개혁문제로 험악해지자<ref>당시 순나라는 가뜩이나 전통적으로 조선의 번국 자리가 진실로 자신들에게 있는지도 애매한 상황에서,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조선이 서양식 관복을 입고 동등한 외교관계를 요구하는 대한국으로 변모하자 사절의 조정 입장 자체를 금하는 등의 강경대처를 보여줬다.</ref>, 서서히 일본과 손을 잡고 각각 북방과 남방에서 중국,만주를 공략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 ||
전쟁 준비 이전, 한국은 | 전쟁 준비 이전, 한국은 송나라와 비밀리에 송의 중립과 승전 시의 이득을 보장하는 밀약을 체결할 것을 권유하였고, 송나라가 이에 응하여 중국 내에서 또다른 적군을 맞닥트릴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했다. 그렇게 1893년 벌어진 제 1차 동아시아 전쟁에서 한일동맹이 승리를 거두었고, 한국은 더 나아가 심양궁으로 진격해 실권자인 예허나라 힝전 귀비를 궁에 유폐시켰다. 전후 체결된 조약에서 순나라는 만주 지역에 대한 입김을 그만둘것을 촉구받았고, 일본에게 대만을 할양하고 푸젠성을 조차한 뒤 한국에게 거액의 배상금과 금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인정하였다. | ||
이후, 2년 전부터 서서히 준비되고 있던 환구단의 건설이 완성되고 칭제 요구가 전과는 비교가 안될 수준으로 빗발치자, 고조 이현은 환구단에 올라서 칭제를 한 뒤, 사용하던 독단적 연호인 광무를 다시 제국연호로서 개원하여 제국의 시대를 시작했다. | 이후, 2년 전부터 서서히 준비되고 있던 환구단의 건설이 완성되고 칭제 요구가 전과는 비교가 안될 수준으로 빗발치자, 고조 이현은 환구단에 올라서 칭제를 한 뒤, 사용하던 독단적 연호인 광무를 다시 제국연호로서 개원하여 제국의 시대를 시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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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까지 한국은 빙과 작전이라는 군사작전을 통해 바이칼 호 앞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42년 겨울동안 발생한 병력손실과 추위, 그리고 독일의 전세 약화로 인해 극동에 다시 집중할 수 있게 된 소련으로 인해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1941년 미국 알래스카에 기적적으로 폭격을 성공한 이후부터는 미군도 간간히 동시베리아로 건너와서 한국과 대립하는 지경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경제력으로 확보한 자본과 만주의 철강과 기름을 모두 소련을 상대하기 위한 전쟁에 끌어다 쓰면서 경제는 악화일로를 겪었다. 이러는 도중 대한호국회 내에서도 서서히 분열이 일어난데다가 이들의 독단적인 행보에 서서히 불만을 품은 왕당파가 민주파와 비밀리에 연대를 시작하면서 정치적으로도 혼란이 심화되었고, 급기야 1943년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자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수준으로 대한제국군이 시베리아 전선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김창암에 대한 의원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는데 김창암의 권력은 이들 이상인지라 계속 불만이 축적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결국 이에 위기감을 느낌 김창암은 소위 '기강잡기'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 42년까지 한국은 빙과 작전이라는 군사작전을 통해 바이칼 호 앞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42년 겨울동안 발생한 병력손실과 추위, 그리고 독일의 전세 약화로 인해 극동에 다시 집중할 수 있게 된 소련으로 인해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1941년 미국 알래스카에 기적적으로 폭격을 성공한 이후부터는 미군도 간간히 동시베리아로 건너와서 한국과 대립하는 지경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경제력으로 확보한 자본과 만주의 철강과 기름을 모두 소련을 상대하기 위한 전쟁에 끌어다 쓰면서 경제는 악화일로를 겪었다. 이러는 도중 대한호국회 내에서도 서서히 분열이 일어난데다가 이들의 독단적인 행보에 서서히 불만을 품은 왕당파가 민주파와 비밀리에 연대를 시작하면서 정치적으로도 혼란이 심화되었고, 급기야 1943년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자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수준으로 대한제국군이 시베리아 전선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김창암에 대한 의원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는데 김창암의 권력은 이들 이상인지라 계속 불만이 축적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결국 이에 위기감을 느낌 김창암은 소위 '기강잡기'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 ||
그렇게 | 그렇게 1944년 12월 30일,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평소 김창암에게 반대하던 의원들까지 광화문 앞에 집결하자 김창암은 행동을 결심하였다. 이전부터 자신의 사상을 접해 서서히 광기에 물들어가던 아동들을 대규모로 불러모은 뒤 광장 앞에 집결하였으며, 그 자리에서 의원들을 위압감으로 압박한 뒤 연단 위로 올라가, 자신의 연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의원들 중 대부분이 나라의 앞날을 어둡게 만드는 역적이라는 내용이었고, 그 직후 학생 하나가 의원들을 구타하면서 광화문 참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됬다. | ||
혼비백산한 의원들을 구타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유혈사태를 일으키며 소위 '학도백의단'은 점점 의회 건물 앞으로 진격해 갔으며, 결국 단체로 열광한 상태로 문을 파손시키고 강제로 건물 내부로 진입하였다. 문제는 이 당시 영친왕 이은이 시찰을 위해 의회로 나와있었다는 점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의원들에게 행해진 폭력을 영친왕이 말리던 도중, 상당히 과격한 학생 하나에게 구타를 당한 뒤, '''난간에서 떨어져 의회장 좌석에 추락사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졸지에 황족 하나가 정부 집권당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한국 정계는 당일날 발칵 뒤집혔고, 당일 새벽 6시 의회장을 장악한 김창암 세력에게 군부의 절반 정도가 충성 포기를 선언, 김창암 정권을 쿠데타 세력으로 간주하면서 서서히 불안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 혼비백산한 의원들을 구타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유혈사태를 일으키며 소위 '학도백의단'은 점점 의회 건물 앞으로 진격해 갔으며, 결국 단체로 열광한 상태로 문을 파손시키고 강제로 건물 내부로 진입하였다. 문제는 이 당시 영친왕 이은이 시찰을 위해 의회로 나와있었다는 점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의원들에게 행해진 폭력을 영친왕이 말리던 도중, 상당히 과격한 학생 하나에게 구타를 당한 뒤, '''난간에서 떨어져 의회장 좌석에 추락사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졸지에 황족 하나가 정부 집권당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한국 정계는 당일날 발칵 뒤집혔고, 당일 새벽 6시 의회장을 장악한 김창암 세력에게 군부의 절반 정도가 충성 포기를 선언, 김창암 정권을 쿠데타 세력으로 간주하면서 서서히 불안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 ||
문제는, 아직 김창암이 국내의 민주세력을 모두 쫓아내지는 못한 상황이었다는 점. 여기에 당시 유력 황족이었던 | 문제는, 아직 김창암이 국내의 민주세력을 모두 쫓아내지는 못한 상황이었다는 점. 여기에 당시 유력 황족이었던 양연군 이연과, 민주계의 거두였던 우남 이승만이 합작, 민주세력과 군에게 김창암을 몰아낼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반 김창암 세력을 결집시키기 시작하자, 모 아니면 도라고 판단한 김창암의 지시에 의해 이범석을 따르던 육군들이 다른 육군들에게 발포하면서, 한국 역사상 가장 작지만 중요한 내전인 한성 내전이 발발하였다. | ||
===제국의 끝=== | ===제국의 끝=== | ||
그러나, 황족을 죽였다는 김창암 세력의 이름표는 그 무게가 막심했다. | 그러나, 황족을 죽였다는 김창암 세력의 이름표는 그 무게가 막심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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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 =의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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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 =식민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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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3" width="100%" style="background: linear-gradient(#0f0a4a 30%, #2b2678);color:#fff" |[[파일:다이칸.png|40px|border]]<br/> '''대한제국의 식민지 · 자치령 및 조차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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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60%" style="background:#fff;" | [[파일:무궁한 만주.webp|30px]] [[만주한치시기 (아침해의 원유관)|{{color|#0d173b|만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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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60%" style="background:#fff;" | [[파일:몽고총독부.webp|25px]] [[몽고주 (아침해의 원유관)|{{color|#0d173b|제국 몽고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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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60%" style="background:#fff;" | [[파일:눈꽃심볼.png|30px]] [[연해주 공동자치령 (아침해의 원유관)|{{color|#0d173b|연해주 자치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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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60%" style="background:#fff;" | {{color|#0d173b|청도 행정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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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3" width="20%" style="background:#58538f;color:#fff;" | * 자치령은 1920년대 괴뢰국으로 <ref>연해주 자치령에서 극동 공화국으로, 극동 공화국에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환.</ref>승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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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3" width="20%" style="background:#58538f;color:#fff;" | '''[[대한제국의 괴뢰국 (아침해의 원유관)|괴뢰국]] · [[대한제국군의 군정청 (아침해의 원유관)|군정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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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현대의 평가= | =현대의 평가= | ||
한국 내에서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복잡미묘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래도 부정적인 인식이 강한 편이다. 이런 평가에는 대한제국이 추축국으로서 아시아 지역의 파시즘<ref>전간기의 대한제국은 현대에도 평가가 복잡한 일본과 다르게 확실하게 파시즘 국가로 평가받는다. 이탈리아처럼 황제는 최소한의 명분과 권력만 가지고 실질적인 지도와 국가정책등을 유일한 정당의 지도자이자 총리를 대체한 제국대호국경이 전부 집행하는 구조였기 때문.</ref>과 군국주의의 선봉에 섰고, 시베리아에서 수백만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야기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내전이 나 수뇌부가 한 번 갈아엎어졌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당대에는 아시아의 주요 강대국 중 하나였지만, 만주족의 동화를 명분으로 만주 지역에 경찰통치를 시행하는 등 극단적 집단주의를 내세우며 인권과 같은 현대적 가치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현재에는 평가가 나쁘다. | 한국 내에서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복잡미묘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래도 부정적인 인식이 강한 편이다. 이런 평가에는 대한제국이 추축국으로서 아시아 지역의 파시즘<ref>전간기의 대한제국은 현대에도 평가가 복잡한 일본과 다르게 확실하게 파시즘 국가로 평가받는다. 이탈리아처럼 황제는 최소한의 명분과 권력만 가지고 실질적인 지도와 국가정책등을 유일한 정당의 지도자이자 총리를 대체한 제국대호국경이 전부 집행하는 구조였기 때문.</ref>과 군국주의의 선봉에 섰고, 시베리아에서 수백만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야기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내전이 나 수뇌부가 한 번 갈아엎어졌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당대에는 아시아의 주요 강대국 중 하나였지만, 만주족의 동화를 명분으로 만주 지역에 경찰통치를 시행하는 등 극단적 집단주의를 내세우며 인권과 같은 현대적 가치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현재에는 평가가 나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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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정도의 차이긴 하지만, 당시 한국은 가장 가까운 동양권 나라인 일본을 개화의 모델 중 하나로 삼았던지라 의외로 비슷한 면들이 많이 존재한다. 주로 동아시아적인 가치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 따오기의 기여가 상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한국의 근대시기 한자어 용어(재벌, 경제 등) 중 일본에서 들여온 것들이 꽤 보이는 편이다. 실제로 19세기, 20세기 그리고 현재까지 두 나라의 관계가 상당히 좋은편이기도 했고, 지리상 가깝다는 점과 비슷한 외교적 상황 등이 이러한 교류를 촉발시킨 것으로 추측된다. | 10년 정도의 차이긴 하지만, 당시 한국은 가장 가까운 동양권 나라인 일본을 개화의 모델 중 하나로 삼았던지라 의외로 비슷한 면들이 많이 존재한다. 주로 동아시아적인 가치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 따오기의 기여가 상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한국의 근대시기 한자어 용어(재벌, 경제 등) 중 일본에서 들여온 것들이 꽤 보이는 편이다. 실제로 19세기, 20세기 그리고 현재까지 두 나라의 관계가 상당히 좋은편이기도 했고, 지리상 가깝다는 점과 비슷한 외교적 상황 등이 이러한 교류를 촉발시킨 것으로 추측된다. | ||
하지만 차이점도 분명했다. 한국은 일본에 비해 만주라는 거대한 땅이 있어서 농민들의 생활수준은 더 높은 편이었고<ref>당시 한국 농민의 생활수준은 중화민국, 소련, 이탈리아, 일본보다 높고 프랑스 바로 아래인 수준이었다. 다만 이건 만주로 건너간 농민들이 주를 이루는지라, 본토에서 계속 농사를 짓던 이들은 일본 농민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고, 오히려 세력다툼에서 가격이 싼 농산물 상당량을 들여오는 만주쪽 농민들에게 밀릴 때였다. 때문에 1920년대 대공황 이후 문자 그대로 궁지까지 내몰린 농민들이 만주로 대거 상경하기도 했었고, 이 과정에서 만주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토지를 강탈당했다.</ref>, 전통적인 이유로 군주의 권한이 일본보다 강해서 한국 정치는 황제의 의사가 상당히 | 하지만 차이점도 분명했다. 한국은 일본에 비해 만주라는 거대한 땅이 있어서 농민들의 생활수준은 더 높은 편이었고<ref>당시 한국 농민의 생활수준은 중화민국, 소련, 이탈리아, 일본보다 높고 프랑스 바로 아래인 수준이었다. 다만 이건 만주로 건너간 농민들이 주를 이루는지라, 본토에서 계속 농사를 짓던 이들은 일본 농민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고, 오히려 세력다툼에서 가격이 싼 농산물 상당량을 들여오는 만주쪽 농민들에게 밀릴 때였다. 때문에 1920년대 대공황 이후 문자 그대로 궁지까지 내몰린 농민들이 만주로 대거 상경하기도 했었고, 이 과정에서 만주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토지를 강탈당했다.</ref>, 광무시대까지는 전통적인 이유로 군주의 권한이 일본보다 강해서 한국 정치는 황제의 의사가 상당히 중요했었으나, 결과적으로 광무제의 공신들을 휘어잡을 카리스마를 융희제가 이어받지 못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일본과 그닥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다만 그 흔적이 오늘날에도 일부는 남아있어서, 한국 황실의 경우 일본 황실과 같은 권한보다는 이탈리아의 구 사보이아 왕가, 영국왕실과 좀 더 비슷하다는 평가가 많은 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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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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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아침해의 원유관]] | [[분류:아침해의 원유관]][[분류:아침해의 원유관/국가]] |
2024년 4월 10일 (수) 02:1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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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해주 자치령에서 극동 공화국으로, 극동 공화국에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환.
- ↑ 1922년 3월 2일 즉위
- ↑ 1944년 기준.
- ↑ 다만 중국의 압도적인 인구수 때문에 초기 순나라때처럼 공식적인 무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지는 않았다.
- ↑ 민간에겐 단발을 장려하기는 하였으나, 유교적 사상을 존중해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공직에 임명되는 이들은 반드시 서양식 의복을 착용할 것이 명시되었다.
- ↑ 요시다 쇼인의 이론에 따르면 부산에서만 그쳤던 조선 침략을 다시 재개하여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이 당시 조슈 파벌의 주장이었는데, 예상 외로 한국이 일본이 손을 대기 전부터 변화에 대처를 잘하는 모습을 보이자 조슈 내에서도 한국을 바로 치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여론이 늘어난 것이 한몫했다.
- ↑ 당시 순나라는 가뜩이나 전통적으로 조선의 번국 자리가 진실로 자신들에게 있는지도 애매한 상황에서,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조선이 서양식 관복을 입고 동등한 외교관계를 요구하는 대한국으로 변모하자 사절의 조정 입장 자체를 금하는 등의 강경대처를 보여줬다.
- ↑ 속어로는 귀족이라는 말도 꽤 널리 사용됬다.
- ↑ 다만, 이는 여전히 가세 자체는 비대했던 세도가들도 포함됬다. 예를 들어 안동 김문의 유력자였던 사영 김병기는 김병기 후작으로 봉해졌고(시호:문충공(文忠公))다. 물론 사실상 안동김씨의 정치적인 기반이 사그러든 상태였기에, 더 이상 작위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하려고 시도하는 등의 음모는 없었다.
- ↑ 적어도 현실주의적인 행보와 조선 시대부터의 친선관계로 인해 친한적인 정서가 강했던 송나라와는 다르게, 순나라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은 시장에 한국 물건을 풀어 어지럽히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백인, 일본인과 별 다를 바 없는 착취자였다. 때문에 의화단의 난 당시 피해를 보게 된 것.
- ↑ 연해주 자치령에서 극동 공화국으로, 극동 공화국에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환.
- ↑ 전간기의 대한제국은 현대에도 평가가 복잡한 일본과 다르게 확실하게 파시즘 국가로 평가받는다. 이탈리아처럼 황제는 최소한의 명분과 권력만 가지고 실질적인 지도와 국가정책등을 유일한 정당의 지도자이자 총리를 대체한 제국대호국경이 전부 집행하는 구조였기 때문.
- ↑ 당시 한국 농민의 생활수준은 중화민국, 소련, 이탈리아, 일본보다 높고 프랑스 바로 아래인 수준이었다. 다만 이건 만주로 건너간 농민들이 주를 이루는지라, 본토에서 계속 농사를 짓던 이들은 일본 농민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고, 오히려 세력다툼에서 가격이 싼 농산물 상당량을 들여오는 만주쪽 농민들에게 밀릴 때였다. 때문에 1920년대 대공황 이후 문자 그대로 궁지까지 내몰린 농민들이 만주로 대거 상경하기도 했었고, 이 과정에서 만주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토지를 강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