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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dth=20% | [[파일:공종 성덕제 이영 제복.png|300px]]{{구분선}}{{글씨 크기|9.5|'''[[대한국/황제 (아침해의 원유관)|대황제]]<br>''' 명목상 통수권자}}<br>[[이영 (아침해의 원유관)|성덕황제]] | | width=20% | [[파일:공종 성덕제 이영 제복.png|300px]]{{구분선}}{{글씨 크기|9.5|'''[[대한국/황제 (아침해의 원유관)|대황제]]<br>''' 명목상 통수권자}}<br>[[이영 (아침해의 원유관)|성덕황제]] | ||
| width=20% | [[파일:대호국경 김구.png|300px]]{{구분선}}[[대한국/내각총리대신 (아침해의 원유관)|제국대호국경]]<br>{{글씨 크기|9.5|실질적 통수권자}}<br>[[김창암 (아침해의 원유관)|김창암]] | | width=20% | [[파일:대호국경 김구.png|300px]]{{구분선}}[[대한국/내각총리대신 (아침해의 원유관)|제국대호국경]]<br>{{글씨 크기|9.5|실질적 통수권자}}<br>[[김창암 (아침해의 원유관)|김창암]] | ||
| width=20% | [[파일:육군대신 홍범도.png| | | width=20% | [[파일:육군대신 홍범도.png|380px]]{{구분선}}<div style="letter-spacing:-1.1px; margin:0px -10.0px">육군대신</div>[[홍범도 (아침해의 원유관)|홍범도]] | ||
| width=20% | [[파일:이응준 공군대신.png|300px]]{{구분선}}<div style="letter-spacing:-1.1px; margin:0px -10.0px">공군대신</div>[[이응준 (아침해의 원유관)|이응준]] | | width=20% | [[파일:이응준 공군대신.png|300px]]{{구분선}}<div style="letter-spacing:-1.1px; margin:0px -10.0px">공군대신</div>[[이응준 (아침해의 원유관)|이응준]] | ||
| width=20% | [[파일:신성모 해군대신.webp|260px]]{{구분선}}<div style="letter-spacing:-1.1px; margin:0px -10.0px">해군대신</div>[[신성모 (아침해의 원유관)|신성모]] | | width=20% | [[파일:신성모 해군대신.webp|260px]]{{구분선}}<div style="letter-spacing:-1.1px; margin:0px -10.0px">해군대신</div>[[신성모 (아침해의 원유관)|신성모]] |
2024년 4월 23일 (화) 03:3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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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융희 6년(1905년)까지
- ↑ 융희 6년(1905년)부터
- ↑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아시아에서 일본군을 제외하면 한국군을 막을 수 있는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일본군도 해군에선 압도적이었으나 육군의 무장과 위력 면에서는 한국군보다 모자랐고, 더불어 고조라는 한국사 최고의 성군 중 하나가 정부 권위의 강화를 위해 개화 과정에서 체제 및 군사력에 급진적인 변화를 준 것 또한 중요한 이유로 꼽힌다. 다만 중기부터는 늘상 압승으로 끝나는 침략전쟁만이 계속되었고, 군 내 원로들도 다 사라지고 군국주의 정신도 식민지를 넘어 전국에 퍼진데다, 소련과 시베리아에서 총격전을 주고받던 말기가 되었을때는 마치 옆나라 일본의 군대를 연상시키는 막장군대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