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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말하자면, 신하들로 구성된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이는 해당 방식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는 독일 제국 헌법과 같았으며, 심지어 영국도 군 통수권 자체는 국왕이 쥐는만큼, 군주제 하에서 이 조항만은 오늘날에도 의외로 보편적이다. | 다르게 말하자면, 신하들로 구성된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이는 해당 방식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는 독일 제국 헌법과 같았으며, 심지어 영국도 군 통수권 자체는 국왕이 쥐는만큼, 군주제 하에서 이 조항만은 오늘날에도 의외로 보편적이다. | ||
제정 목표는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한 [[이현 (아침해의 원유관)|광무제]]의 조치였다. 초기에 정치 100단인 광무제가 군권을 쥐고 있을때는 이 조항이 유효했으나, 상대적으로 카리스마가 덜했던 융희제의 대 부터는 정치인들과 군인, 공신들이 전체적인 군의 방향성을 황제에게 묻는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군을 통제한지라, 해당 조항은 그저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했다. 거기다가 최고 통수권자가 대황제라고 해서 대황제의 통제를 받았느냐하면, 아예 군과 결탁하여 집권에 성공한 [[김창암 (아침해의 원유관)|김창암]] 내각이 들어선 성덕시대부터는 그조차도 아니었다. 물론, 유교적인 명분을 파시즘과 함께 도입한 김창암 정권인만큼 대황제의 상징성과 권위는 인정했고 실제로도 복종하는 자세를 취했으나, 실질적인 정책 추진에서는 대황제는 단지 재가만 할 뿐이고, 군부와 대한호국회의 결정에 계속 끌려다니는 모양새였다. | 제정 목표는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한 [[고조 태황제 이현 (아침해의 원유관)|광무제]]의 조치였다. 초기에 정치 100단인 광무제가 군권을 쥐고 있을때는 이 조항이 유효했으나, 상대적으로 카리스마가 덜했던 융희제의 대 부터는 정치인들과 군인, 공신들이 전체적인 군의 방향성을 황제에게 묻는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군을 통제한지라, 해당 조항은 그저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했다. 거기다가 최고 통수권자가 대황제라고 해서 대황제의 통제를 받았느냐하면, 아예 군과 결탁하여 집권에 성공한 [[김창암 (아침해의 원유관)|김창암]] 내각이 들어선 성덕시대부터는 그조차도 아니었다. 물론, 유교적인 명분을 파시즘과 함께 도입한 김창암 정권인만큼 대황제의 상징성과 권위는 인정했고 실제로도 복종하는 자세를 취했으나, 실질적인 정책 추진에서는 대황제는 단지 재가만 할 뿐이고, 군부와 대한호국회의 결정에 계속 끌려다니는 모양새였다. | ||
이러한 혼란스러운 통제권의 역사가 있는 탓에, 현재 대한 국방군에서는 통수권을 내각총리대신에게 있음을 규정했다. | 이러한 혼란스러운 통제권의 역사가 있는 탓에, 현재 대한 국방군에서는 통수권을 내각총리대신에게 있음을 규정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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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wikitable" style="width:100%; text-align:center; font-size:10.5pt" | {| class="wikitable" style="width:100%; text-align:center; font-size:10.5p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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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dth=20% | [[파일:공종 성덕제 이영 제복 착용 어진.webp|300px]]{{구분선}}{{글씨 크기|9.5|'''[[대한국/황제 (아침해의 원유관)|대황제]]<br>''' 명목상 통수권자}}<br>[[이영 (아침해의 원유관)|성덕황제]] | | width=20% | [[파일:공종 성덕제 이영 제복 착용 어진.webp|300px]]{{구분선}}{{글씨 크기|9.5|'''[[대한국/황제 (아침해의 원유관)|대황제]]<br>''' 명목상 통수권자}}<br>[[공종 성황제 이영 (아침해의 원유관)|성덕황제]] | ||
| width=20% | [[파일:대호국경대신 김구.png|300px]]{{구분선}}[[대한국/내각총리대신 (아침해의 원유관)|제국대호국경 겸 원수부 총비서]]<br>{{글씨 크기|9.5|실질적 통수권자}}<br>[[김창암 (아침해의 원유관)|김창암]] | | width=20% | [[파일:대호국경대신 김구.png|300px]]{{구분선}}[[대한국/내각총리대신 (아침해의 원유관)|제국대호국경 겸 원수부 총비서]]<br>{{글씨 크기|9.5|실질적 통수권자}}<br>[[김창암 (아침해의 원유관)|김창암]] | ||
| width=20% | [[파일:대육군대신 홍범도.png|450px]]{{구분선}}<div style="letter-spacing:-1.1px; margin:0px -10.0px">육군대신</div>[[홍범도 (아침해의 원유관)|홍범도]] | | width=20% | [[파일:대육군대신 홍범도.png|450px]]{{구분선}}<div style="letter-spacing:-1.1px; margin:0px -10.0px">육군대신</div>[[홍범도 (아침해의 원유관)|홍범도]] |
2024년 6월 9일 (일) 01:2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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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융희 6년(1905년)까지
- ↑ 융희 6년(1905년)부터
- ↑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아시아에서 일본군을 제외하면 한국군을 막을 수 있는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일본군도 해군에선 압도적이었으나 육군의 무장과 위력 면에서는 한국군보다 모자랐고, 더불어 고조라는 한국사 최고의 성군 중 하나가 정부 권위의 강화를 위해 개화 과정에서 체제 및 군사력에 급진적인 변화를 준 것 또한 중요한 이유로 꼽힌다. 다만 중기부터는 늘상 압승으로 끝나는 침략전쟁만이 계속되었고, 군 내 원로들도 다 사라지고 군국주의 정신도 식민지를 넘어 전국에 퍼진데다, 소련과 시베리아에서 총격전을 주고받던 말기가 되었을때는 마치 옆나라 일본의 군대를 연상시키는 막장군대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