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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 최고 통수권자 = | = 최고 통수권자 = | ||
광무 연호 개최 이후 지정된 대한국 국제에 따르면, | 광무 연호 개최 이후 지정된 대한국 국제에 따르면, 대한군의 최고 통수권자는 [[대한국/황제 (아침해의 원유관)|대한국 대황제]]였다. | ||
다르게 말하자면, 신하들로 구성된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이는 해당 방식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는 독일 제국 헌법과 같았으며, 심지어 영국도 군 통수권 자체는 국왕이 쥐는만큼, 군주제 하에서 이 조항만은 오늘날에도 의외로 보편적이다. | 다르게 말하자면, 신하들로 구성된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이는 해당 방식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는 독일 제국 헌법과 같았으며, 심지어 영국도 군 통수권 자체는 국왕이 쥐는만큼, 군주제 하에서 이 조항만은 오늘날에도 의외로 보편적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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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dth=20% | [[파일:공종 성덕제 이영 제복 착용 어진.webp|300px]]{{구분선}}{{글씨 크기|9.5|'''[[대한국/황제 (아침해의 원유관)|대황제]]<br>''' 명목상 통수권자}}<br>[[고종 성황제 이영 (아침해의 원유관)|성덕황제]] | | width=20% | [[파일:공종 성덕제 이영 제복 착용 어진.webp|300px]]{{구분선}}{{글씨 크기|9.5|'''[[대한국/황제 (아침해의 원유관)|대황제]]<br>''' 명목상 통수권자}}<br>[[고종 성황제 이영 (아침해의 원유관)|성덕황제]] | ||
| width=20% | [[파일:|300px]]{{구분선}}[[대한국/내각총리대신 (아침해의 원유관)|제국대호국경 겸 원수부 총비서]]<br>{{글씨 크기|9.5|실질적 통수권자}}<br>[[김창암 (아침해의 원유관)|김창암]] | | width=20% | [[파일:대호국경대신 김구.png|300px]]{{구분선}}[[대한국/내각총리대신 (아침해의 원유관)|제국대호국경 겸 원수부 총비서]]<br>{{글씨 크기|9.5|실질적 통수권자}}<br>[[김창암 (아침해의 원유관)|김창암]] | ||
| width=20% | [[파일:대육군대신 홍범도.png|450px]]{{구분선}}<div style="letter-spacing:-1.1px; margin:0px -10.0px">육군대신</div>[[홍범도 (아침해의 원유관)|홍범도]] | | width=20% | [[파일:대육군대신 홍범도.png|450px]]{{구분선}}<div style="letter-spacing:-1.1px; margin:0px -10.0px">육군대신</div>[[홍범도 (아침해의 원유관)|홍범도]] | ||
| width=20% | [[파일:이응준 공군대신.png|300px]]{{구분선}}<div style="letter-spacing:-1.1px; margin:0px -10.0px">공군대신</div>[[이응준 (아침해의 원유관)|이응준]] | | width=20% | [[파일:이응준 공군대신.png|300px]]{{구분선}}<div style="letter-spacing:-1.1px; margin:0px -10.0px">공군대신</div>[[이응준 (아침해의 원유관)|이응준]] |
2024년 6월 25일 (화) 03:2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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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융희 6년(1905년)까지
- ↑ 융희 6년(1905년)부터
- ↑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아시아에서 일본군을 제외하면 한국군을 막을 수 있는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일본군도 해군에선 압도적이었으나 육군의 무장과 위력 면에서는 한국군보다 모자랐고, 더불어 고조라는 한국사 최고의 성군 중 하나가 정부 권위의 강화를 위해 개화 과정에서 체제 및 군사력에 급진적인 변화를 준 것 또한 중요한 이유로 꼽힌다. 다만 중기부터는 늘상 압승으로 끝나는 침략전쟁만이 계속되었고, 군 내 원로들도 다 사라지고 군국주의 정신도 식민지를 넘어 전국에 퍼진데다, 소련과 시베리아에서 총격전을 주고받던 말기가 되었을때는 마치 옆나라 일본의 군대를 연상시키는 막장군대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