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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정치 체제</center> | !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정치 체제</center> |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전제군주제<small>(1875~1890)</small><br>→한국식 입헌군주제 · 의원내각제 · 과두정<small>(1890~1930)</small><br>→한국식 입헌군주제 · 일당우위제 · 의원내각제<small>(1932~1939)</small><br>→일당독재 · 군사독재 · 호국 체제<small>(1940~1945)</small><br>→의원내각제 ·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전제군주제<small>(1875~1890)</small><br>→한국식 입헌군주제 · 의원내각제 · 과두정<small>(1890~1930)</small><br>→한국식 입헌군주제 · 일당우위제 · 의원내각제<small>(1932~1939)</small><br>→일당독재 · 군사독재 · 호국 체제<small>(1940~1945)</small><br>→의원내각제 · 연합군 군정<small>(1945~1947)</smal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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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국가 원수<br/> | !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국가 원수<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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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정부 수반</center> | !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정부 수반</center> |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내각총리대신<ref>1940년을 전후로 일당제가 사실상 확립되며 대한제국 호국령을 겸직하기도 하였으나, 공식석상에선 내각총리대신으로 불리는 경우가 잦았다. 사실상의 테크노파시즘 체제였음에도 이탈리아와같은 순수한 파시즘 체제가 확립되지못한 이유는 강력한 황권이 멀쩡했던 게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자세한 이유는 본문에서 후술.</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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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주요 정부수반<br/> | !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주요 정부수반<br/> |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김홍집 (아침해의 원유관)|김홍집]]<br>[[박영교 (아침해의 원유관)|박영교]]<br>[[김옥균 (아침해의 원유관)|김옥균]]<br>[[박영효 (아침해의 원유관)|박영효]]<br>[[서재필 (아침해의 원유관)|서재필]]<br>[[조소앙 (아침해의 원유관)|조소앙]]<br>[[김창암 (아침해의 원유관)|김창암]]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김홍집 (아침해의 원유관)|김홍집]]<br>[[박영교 (아침해의 원유관)|박영교]]<br>[[김옥균 (아침해의 원유관)|김옥균]]<br>[[박영효 (아침해의 원유관)|박영효]]<br>[[서재필 (아침해의 원유관)|서재필]]<br>[[조소앙 (아침해의 원유관)|조소앙]]<br>[[김창암 (아침해의 원유관)|김창암]]<br>[[이승만 (아침해의 원유관)|이승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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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현대의 평가= | =현대의 평가= | ||
한국 | 현대 [[대한국 (아침해의 원유관)|한국]]에선 대한제국이 인정해야 할 역사부터 자랑스러운 과거, 어둠의 시대까지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으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체적인 인식은 부정적인 축에 속한다<ref>이는 현재 대한국에게 우호적인인 미국, 영국이나 전통적인 우방인 한편 비슷한 역사를 가진 일본도 매한가지다. 그나마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아침해의 원유관)|패권적 연관성이 있는 과거]]가 있는 일본에선 특별히 대한제국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논조는 드문 편이지만, 영국이나 미국은 애초에 대한제국과 전쟁을 치른 입장인지라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없다.</ref>. 후세의 이러한 평가에는 대한제국이 [[추축국 (아침해의 원유관)|추축국]]으로서 아시아 대륙의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선봉에 섰고, 중국과 시베리아, 북태평양에서 수백만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야기한 한편 [[제 2차 세계대전 (아침해의 원유관)|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했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 ||
분명 [[신미사화 (아침해의 원유관)|한국의]] [[임신대경장 (아침해의 원유관)|근대화]]는 동아시아를 넘어서, 세계사적 관점에서도 중요한 사건에 속한다. 이 시기 서구에서는 [[한영일 동맹 (아침해의 원유관)|러시아의 대륙 진출을 견제할 의도]]에서 한국을 전근대적 세계관과 제도를 버리고 탁월한 개혁으로서 기적을 이룬 문명국이라며 연신 찬사를 거듭하였다. 당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동아시아를 여행한 서양인들도 중국인이나 만주인의 성격과 생활습관, 문화와 역사에 대해 혹평을 내린 것과는 별개로 일본인, 한국인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사실상의 전제군주국이였음에도 대한제국이 당대 지식인들에게 지속적인 고평가를 받은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 |||
그러나 대한제국은 문호 개방의 과정에서 물질적인 계몽에는 성공했을지언정 사상, 사회, 정치의 자유와 국민 계몽에는 도달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강성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팽창주의, 제국주의의 길'''로 접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수많은 전쟁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당대에는 분명 주요 강대국 중 하나였지만, 그 체제의 선진성과 자유도는 당시의 서구 열강이나 현대의 대한국과 비교할 때 현저히 낮았던 셈이다. | |||
다만 악행의 수위는 치밀한 관료제 아래에서 집중적인 학살을 벌인 나치 독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양호하다고 평가받는다. 대한제국의 대외정책은 독일과 같은 타 민족의 전면적인 멸절과는 거리가 멀었고, 침략과 내분유도를 통해 주변국의 자주도를 대폭 낮춘 뒤 동군보좌제 등 외부 제도 도입을 통해 사실상의 속국으로 전락시키거나, 한성의 영향력을 짙게 밭는 괴뢰정부의 만드는 것이 목적이였다. | |||
한국의 식민지배, 혹은 내정간섭을 받은 나라들의 한국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특히 [[만주한치시기 (아침해의 원유관)|식민지배]]로 인한 최대 피해국인 [[대금민국 (아침해의 원유관)|대금민국]]이나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중화민국 (아침해의 원유관)|중]][[중화인민공화국 (아침해의 원유관)|국]]같은 경우엔 전후 대한국에 대해서 감정의 골이 워낙 깊었고, 회복되기까지 기나긴 시간이 걸렸다. 특히 냉전 시기 진영조차 제 2세계로 달랐던 대금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감정은 더 심했던 것으로 유명하며, 중금 2개국이 한국에 대한 원한을 풀기까지는 데탕트의 시작 이후에도 몇십년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 |||
다만 [[러시아 차르국 (아침해의 원유관)|러시아 차르국]]의 경우에는 애초에 국가의 어버이 격 상징인 황실부터가 한국의 금관작전으로 목숨을 건진 로마노프 왕가 황통이고, 소련을 바로 코 위에 두고있는 상황에서 전후에도 강도높은 친미, 친영 및 친한 정책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던지라 감정회복이 빠르게 된 편에 속한다. 실제로 2010년 방한 당시 몇몇 러시아 차르국 측 정치인들은 [[충장서원 (아침해의 원유관)|구 충장단]]에 참배하며 지난 전쟁에서 대한은 무고했다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국가는 아니지만 우크라이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대한제국이 나치의 의견을 묵살하고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고, 대조국전쟁 당시에 우크라이나 반군에게 독일을 통해 간접적인 물자 원조도 한지라 평가가 매우 좋은 편. 그렇다고 [[대한제국군 (아침해의 원유관)|구 한국군]]이 직접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적도 없던지라 현대에도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는 대한에 대해 우호적인 여론이 남아있다. | |||
서양에서는 한국에 의해 유럽 본토가 입은 피해는 전무한지라, 제국주의 일본을 대하는 것처럼 다소 무관심한 모습을 보인다. 예시로 유튜브 등지의 사이트에서 나치 독일의 군가는 재빠르게 검열당하는 데 반해, [[양양가 (아침해의 원유관)|양양가]]나 [[�대한혼 (아침해의 원유관)|대한혼]], [[멸공의 횃불 (아침해의 원유관)|멸공의 횃불]] 등 대한제국의 군가는 큰 검열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대다수. 몇몇은 소련의 공산주의와 전면적으로 호각을 다투는 한편 미국에게도 북태평양에서 팽창적인 행보를 보였다는 점 때문에 좋아하는 경우도 존재하며, 케케묵은 과거사로 싸우는 걸 건설적이지 못하게 여겨 중국이나 대금민국 등이 한국의 만행을 규탄하는 것을 '다 끝난 과거를 저열하게 물고 늘어지는 행태'라 여기는 경우도 있다. | |||
하지만 아직 소련에서는 대조국전쟁시기 독소전쟁과 한소전쟁을 동시에 경험한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전쟁범죄를 겪기도 하였고, 이전부터 소련과 한국의 관계가 전러시아 제국정부 시절 러시아 차르국 문제 등으로 좋은 편이 아니였던지라 반한 감정이 종종 남아있는걸 볼 수 있다. 또 다른 예시론 미국이 있는데, 이 지역도 알류샨 열도 전역이나 [[대한제국군의 알래스카 폭격 (아침해의 원유관)|알래스카 폭격]]탓에 한국군에 의한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 이 탓에 구 세대와 지역들을 중심으로 미국과 소련에는 반한감정이 남아있다. | |||
대금민국과 중국의 거센 반한에 회의적인 사람이 많은 이유는, 이들은 현재의 [[대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한국]]을 구 대한제국과 정권, 이념 등 모든 면에서 다른 국가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ref>다만 서구의 인식과는 별개로 [[대한제국 (아침해의 원유관)|구한국]]과 [[대한국 (아침해의 원유관)|대한국]]이 완전히 다른 국체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다. 애초에 현대 한국인들은 대한제국 시기를 광무, 융희, 성덕 등 시대로 구분하지 전혀 다른 국체로 보지도 않고, 무엇보다 한반도계 왕조국가에서 국체가 교체될 시 일어나던 왕조의 교체가 정치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추호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 이는 기존의 나치당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고 서독과 동독으로 새로 정부를 꾸린 독일, 기존의 내각제 시스템은 유자하지만 무솔리니를 스스로 내쫓고 왕정을 폐지함으로써 파시스트의 유산을 청산한 이탈리아와 다른 점이다.</ref> 여기서 대금민국의 경우 신냉전이 한창인 현 국제정세에서 친 소련적인 면모를 견지했다는 점도 한 몫 했다. | |||
다만 이와는 별개로 금한 양국간의 문화적인 관계 개선은 [[허서리 굴마훈 (아침해의 원유관)|허서리 굴마훈]] 총리가 시행했던 개방정책을 시점으로 신냉전 시대에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중화민국 또한 신냉전 이후 서구 진영으로서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힘쓰고 있다. 최근 들어선 [[중화인민공화국 (아침해의 원유관)|중화인민공화국]] 측의 전쟁피해 호소가 가장 주목받는 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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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2024년 11월 11일 (월) 07:3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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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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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 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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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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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大韓帝國 | Empire of Kore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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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광명천지[1] 光明天地 (1899-1946) | |||||||
파일:전간기 대한제국 최대 판도.png ■ 본토 | ■ 식민지| ■ 괴뢰국, 번국 및 점령지 | |||||||
1875년 3월 29일[2]~1947년 10월 12일 | |||||||
칭제건원 이전 | 동시베리아 전쟁 이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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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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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 세상에 밝은 빛을 내리리라'라는 뜻의 사자성어로, 칭제건원 이후 지정된 표어다. 건원 이전의 외왕내제 시절에는 홍범의 14조라는 표어를 사용했다.
- ↑ 칭제건원을 통해 대한제국이라는 국명을 확정한 것은 1894년의 일이지만, 그 이전부터 부황 칭호 등 외왕내제 체제와 대한이라는 국명 자체는 쓰였기에 학계에서는 해당 시기도 대한제국의 역사로서 간주한다.
- ↑ 대한제국령 만주, 치치하얼 시(제원부(齊原府)), 만주 4도 등
- ↑ 대한제국령 청도, 위해 등
- ↑ 몽고번 등 몽골 동부지방
- ↑ 외지, 식민지, 점령지, 본토 및 번국과 괴뢰국들가지 포함한 최대 강역이다.
- ↑ 흔히 당시 대한 인구를 두고하는 '9천만의 총의로' 운운하는 관용구가 여기서 유래. 내지(61,000,000명 이상)와 만주, 몽고, 그 외 번국 거주민들을 포함했다.
- ↑ 표면적으로는 광무국헌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며 국체유학은 종교가 아닌 500년 사직을 이어온 대한의 국시라고 주장하였으나, 비교종교학적 측면에서는 기존의 성리학과 비교했을 때 종교의 성질을 더 강하게 띄고 있었다. 이 탓에 기존 토속신앙, 불교 및 기독교 등 거대 종교를 제외한 이교 신자, 국체유학을 인정하지 않거나 정부에 터놓고 반대하는 재야 유학자는 비국민으로 매도당했으며, 정부의 압제에 의한 국교적 위치가 강제되었다. 이는 한성대학 인문학부 명예교수이자 종교학자인 손봉호 교수의 주장과도 상동하다. 자세한 내용은 국체유학 문서 참고.
- ↑ 만주 가한, 예케 몽골 울루스 대칸, 대조선국 국왕 겸임
- ↑ 1940년을 전후로 일당제가 사실상 확립되며 대한제국 호국령을 겸직하기도 하였으나, 공식석상에선 내각총리대신으로 불리는 경우가 잦았다. 사실상의 테크노파시즘 체제였음에도 이탈리아와같은 순수한 파시즘 체제가 확립되지못한 이유는 강력한 황권이 멀쩡했던 게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자세한 이유는 본문에서 후술.
- ↑ 만주나 몽고주 일대에서는 만주 원, 몽고 원 등이 통용되었다.
- ↑ 다만 중국의 압도적인 인구수 때문에 초기 순나라때처럼 공식적인 무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지는 않았다.
- ↑ 이전까진 밝혀지지 않았으나, 천붕 후 고조의 서재에서 네덜란드, 프랑스 등에서 출판된 여분의 세계지도와 서양 서적들이 밝혀지면서 개인적으로 서학에 관심이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아마 즉위하기 전의 관리시절에 접한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일자는 불명.
- ↑ 흥선군일기(興宣君日記)에서 완림군의 방문에 대한 구절이 꽤 자주 언급됐고, 얼마 후 완림군이 보위에 올랐다. 기록을 보면 여기서 정치적인 담판을 내 당시 원래 계획대로 완림군을 선출하거나 향렬상 최고 우위인 경운군을 선출하기도 애매했던 그를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 ↑ 민간에겐 단발을 장려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세간에서 지배적이던 유교적 사상을 존중해 문명개화 열풍이 절정에 달한 융희 시대 이전에는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문관은 어느정도의 예외를 두더라도 군문과 관련된 공직에 임명되는 이들은 반드시 서양식 의복을 착용할 것이 명시되었고, 나중에 이는 문관에게도 강요되었다.
- ↑ 요시다 쇼인의 이론에 따르면 부산에서만 그쳤던 조선 침략을 다시 재개하여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이 당시 조슈 파벌의 주장이었는데, 예상 외로 한국이 일본이 손을 대기 전부터 변화에 대처를 잘하는 모습을 보이자 조슈 내에서도 한국을 바로 치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여론이 늘어난 것이 한몫했다.
- ↑ 당시 순나라는 가뜩이나 전통적으로 조선의 번국 자리가 진실로 자신들에게 있는지도 애매한 상황에서,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조선이 서양식 관복을 입고 동등한 외교관계를 요구하는 대한국으로 변모하자 사절의 조정 입장 자체를 금하는 등의 강경대처를 보여줬다.
- ↑ 이는 일세일원제를 안정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선택이였다는 학계의 여론이 있지만, 일각에서는 칭제를 통해서만 자주 국체를 선포할 시 그 이전의 대한국 시기는 자주독립국이 아니였다는 의도로 이야기 될 수 있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한 조치라는 추측도 있다.
- ↑ 속어로는 귀족이라는 말도 꽤 널리 사용됬다.
- ↑ 다만, 이는 여전히 가세 자체는 비대했던 세도가들도 포함됬다. 예를 들어 안동 김문의 유력자였던 사영 김병기는 김병기 후작으로 봉해졌고(시호:문충공(文忠公))다. 물론 사실상 안동김씨의 정치적인 기반이 사그러든 상태였기에, 더 이상 작위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하려고 시도하는 등의 음모는 없었다.
- ↑ 적어도 현실주의적인 행보와 조선 시대부터의 친선관계로 인해 친한적인 정서가 강했고,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이전까지는 나름 급진개혁적 시도도 있던 송나라와는 다르게, 순나라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은 시장에 한국 물건을 풀어 어지럽히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백인, 일본인과 별 다를 바 없는 착취자였다. 때문에 의화단의 난 당시 피해를 보게 된 것.
- ↑ 숙신도호부에서 트란스아무르 공화국으로, 트란스아무르 공화국에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환.
- ↑ 이는 현재 대한국에게 우호적인인 미국, 영국이나 전통적인 우방인 한편 비슷한 역사를 가진 일본도 매한가지다. 그나마 대한제국과 패권적 연관성이 있는 과거가 있는 일본에선 특별히 대한제국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논조는 드문 편이지만, 영국이나 미국은 애초에 대한제국과 전쟁을 치른 입장인지라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없다.
- ↑ 다만 서구의 인식과는 별개로 구한국과 대한국이 완전히 다른 국체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다. 애초에 현대 한국인들은 대한제국 시기를 광무, 융희, 성덕 등 시대로 구분하지 전혀 다른 국체로 보지도 않고, 무엇보다 한반도계 왕조국가에서 국체가 교체될 시 일어나던 왕조의 교체가 정치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추호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 이는 기존의 나치당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고 서독과 동독으로 새로 정부를 꾸린 독일, 기존의 내각제 시스템은 유자하지만 무솔리니를 스스로 내쫓고 왕정을 폐지함으로써 파시스트의 유산을 청산한 이탈리아와 다른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