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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동북아시아 대한반도, 만주, 몽골, 중국, 동시베리아 일대 등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동북아시아 대한반도, 만주, 몽골, 중국, 동시베리아 일대 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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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수도 | !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수도</center> |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한성 (아침해의 원유관)|황경 한성부]] (1875~1947)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한성 (아침해의 원유관)|황경 한성부]] (1875~194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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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font-size: 10pt | 9,089,7000 <small>(1940년)</small><ref>흔히 당시 대한 인구를 두고하는 '9천만의 총의로' 운운하는 관용구가 여기서 유래. 내지(61,000,000명 이상)와 만주, 몽고, 그 외 번국 거주민들을 포함했다.</ref> | | style="font-size: 10pt | 9,089,7000 <small>(1940년)</small><ref>흔히 당시 대한 인구를 두고하는 '9천만의 총의로' 운운하는 관용구가 여기서 유래. 내지(61,000,000명 이상)와 만주, 몽고, 그 외 번국 거주민들을 포함했다.</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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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민족</center> | |||
| style="font-size: 10pt | 한민족, 만주족, 한족, 슬라브족, 니브흐족, 아이누족, 몽골족 등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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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rowspan="3" align=center style="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언어</center> | | colspan="1" rowspan="3" align=center style="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언어</cent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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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align=center style="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공용문자</center> | | colspan="1" align=center style="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공용문자</center> | ||
| 한자, 한글 | | 한자, 한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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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국교</center> | ! colspan="2"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국교</cent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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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고조 태황제 이현 (아침해의 원유관)|고조 태황제]]<small>(1894~1899)</small><br>[[순종 효황제 이훈 (아침해의 원유관)|순종 효황제]]<small>(1900~1929)</small><br>[[고종 성황제 이영 (아침해의 원유관)|고종 성황제]]<small>(1930~1945)</small><br>[[강조 경황제 이연 (아침해의 원유관)|강조 경황제]]<small>(1946~1947)</small>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고조 태황제 이현 (아침해의 원유관)|고조 태황제]]<small>(1894~1899)</small><br>[[순종 효황제 이훈 (아침해의 원유관)|순종 효황제]]<small>(1900~1929)</small><br>[[고종 성황제 이영 (아침해의 원유관)|고종 성황제]]<small>(1930~1945)</small><br>[[강조 경황제 이연 (아침해의 원유관)|강조 경황제]]<small>(1946~1947)</smal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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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 | !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정부수반</center> |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내각총리대신<ref>1940년을 전후로 일심회 일당제가 확립되며 대한제국 호국령을 겸직하기도 하였으나, 공식석상에선 내각총리대신으로 불리는 경우가 잦았다. 사실상의 테크노파시즘 체제였음에도 이탈리아와같은 순수한 파시즘 체제가 확립되지못한 이유는 강력한 황권이 멀쩡했던 체제적 특징이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자세한 이유는 본문에서 후술.</ref>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의정대신 → 총리대신 → 내각총리대신<ref>1940년을 전후로 일심회 일당제가 확립되며 대한제국 호국령을 겸직하기도 하였으나, 공식석상에선 내각총리대신으로 불리는 경우가 잦았다. 사실상의 테크노파시즘 체제였음에도 이탈리아와같은 순수한 파시즘 체제가 확립되지못한 이유는 강력한 황권이 멀쩡했던 체제적 특징이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자세한 이유는 본문에서 후술.</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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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행정부</center> |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의정부 → 내각<ref>의회 제도에서 'cabinet'에 해당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요구에 따라 창설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행정부인 의정부는 내각의 기능을 보조하고, 공무를 용이케 하는 경각부 산하의 부들 중 하나로서 편입되었다.</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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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입법부</center> |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대한국 제국의회 ([[대한국 중추원 (아침해의 원유관)|중추원]]<ref>이 시기의 중추원은 비정당주의, 비평민주의에 입각한 '훈등상원'으로 구분한다.</ref>, [[대한국 중서원 (아침해의 원유관)|중서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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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주요 | ! colspan="1" width="40%" style="font-size: 10pt; color: #fff; background: #bb002c;" | <center>주요 내각총리대신<br/> |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김홍집 (아침해의 원유관)|김홍집]]<br>[[박영교 (아침해의 원유관)|박영교]]<br>[[김옥균 (아침해의 원유관)|김옥균]]<br>[[박영효 (아침해의 원유관)|박영효]]<br>[[서재필 (아침해의 원유관)|서재필]]<br>[[조소앙 (아침해의 원유관)|조소앙]]<br>[[이항구 (아침해의 원유관)|이항구]]<br>[[김창암 (아침해의 원유관)|김창암]]<br>[[이승만 (아침해의 원유관)|이승만]] | | colspan="3" style="font-size: 10pt | [[김홍집 (아침해의 원유관)|김홍집]]<br>[[박영교 (아침해의 원유관)|박영교]]<br>[[김옥균 (아침해의 원유관)|김옥균]]<br>[[박영효 (아침해의 원유관)|박영효]]<br>[[서재필 (아침해의 원유관)|서재필]]<br>[[조소앙 (아침해의 원유관)|조소앙]]<br>[[이항구 (아침해의 원유관)|이항구]]<br>[[김창암 (아침해의 원유관)|김창암]]<br>[[이승만 (아침해의 원유관)|이승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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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5일 (수) 02:1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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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大韓帝國 | Empire of Kore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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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광명천지[1] 光明天地 (1899-1946) | |||||||||||||||||||||||||||||||
■ 본토 | ■ 식민지| ■ 괴뢰국, 번국 및 점령지 | |||||||||||||||||||||||||||||||
1875년 3월 29일[2]~1947년 10월 12일 | |||||||||||||||||||||||||||||||
칭제건원 이전 | 동시베리아 전쟁 이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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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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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 세상에 밝은 빛을 내리리라'라는 뜻의 사자성어로, 칭제건원 이후 지정된 표어다. 건원 이전의 외왕내제 시절에는 홍범의 14조라는 표어를 사용했다.
- ↑ 칭제건원을 통해 대한제국이라는 국명을 확정한 것은 1894년의 일이지만, 그 이전부터 부황 칭호 등 외왕내제 체제와 대한이라는 국명 자체는 쓰였기에 학계에서는 해당 시기도 대한제국의 역사로서 간주한다.
- ↑ 대한제국령 만주, 치치하얼 시(제원부(齊原府)), 만주 4도 등
- ↑ 대한제국령 청도, 위해 등
- ↑ 몽고번 등 몽골 동부지방
- ↑ 외지, 식민지, 점령지, 본토 및 번국과 괴뢰국들가지 포함한 최대 강역이다.
- ↑ 흔히 당시 대한 인구를 두고하는 '9천만의 총의로' 운운하는 관용구가 여기서 유래. 내지(61,000,000명 이상)와 만주, 몽고, 그 외 번국 거주민들을 포함했다.
- ↑ 표면적으로는 흠정국헌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며 국체유학은 종교가 아닌 500년 사직을 이어온 대한의 국시라고 주장하였으나, 비교종교학적 측면에서는 기존의 성리학과 비교했을 때 종교의 성질을 더 강하게 띄고 있었다. 이 탓에 기존 토속신앙, 불교 및 기독교 등 거대 종교를 제외한 이교 신자, 국체유학을 인정하지 않거나 정부에 터놓고 반대하는 재야 유학자는 비국민으로 매도당했으며, 정부의 압제에 의한 국교적 위치가 강제되었다. 이는 한성대학 인문학부 명예교수이자 종교학자인 손봉호 교수의 주장과도 상동하다. 자세한 내용은 국체유학 문서 참고.
- ↑ 만주 가한, 예케 몽골 울루스 대칸, 대조선국 국왕 겸임
- ↑ 1940년을 전후로 일심회 일당제가 확립되며 대한제국 호국령을 겸직하기도 하였으나, 공식석상에선 내각총리대신으로 불리는 경우가 잦았다. 사실상의 테크노파시즘 체제였음에도 이탈리아와같은 순수한 파시즘 체제가 확립되지못한 이유는 강력한 황권이 멀쩡했던 체제적 특징이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자세한 이유는 본문에서 후술.
- ↑ 의회 제도에서 'cabinet'에 해당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요구에 따라 창설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행정부인 의정부는 내각의 기능을 보조하고, 공무를 용이케 하는 경각부 산하의 부들 중 하나로서 편입되었다.
- ↑ 이 시기의 중추원은 비정당주의, 비평민주의에 입각한 '훈등상원'으로 구분한다.
- ↑ 만주나 몽고 번 일대에서는 만주 원, 몽고 원 등이 통용되었다.
- ↑ 19세기 이전까지의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국가들은 시시각각 분쟁을 일으켰으나, 시간이 지나며 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와중에 근대화와 팽창의 필요성이라는 공동의 과업 앞에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 ↑ 양국은 또한 제국주의 시대에서 당대의 서양 열강들에 비하면 후발주자에 속하는 극동 출신의 열강국가들이였다. 이러한 연유로 한국이나 일본은 모두 기존 질서의 개편을 통한 패권 확보에 매달렸고, 그리하여 각각 영토의 팽창과 태평양의 재패라는 목표를 내세우게 된 셈이다.
- ↑ 다만 중국의 압도적인 인구수 때문에 초기 순나라때처럼 공식적인 무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지는 않았다.
- ↑ 이전까진 밝혀지지 않았으나, 천붕 후 고조의 서재에서 네덜란드, 프랑스 등에서 출판된 여분의 세계지도와 서양 서적들이 밝혀지면서 개인적으로 서학에 관심이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아마 즉위하기 전의 관리시절에 접한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일자는 불명.
- ↑ 흥선군일기(興宣君日記)에서 완림군의 방문에 대한 구절이 꽤 자주 언급됐고, 얼마 후 완림군이 보위에 올랐다. 기록을 보면 여기서 정치적인 담판을 내 당시 원래 계획대로 완림군을 선출하거나 향렬상 최고 우위인 경운군을 선출하기도 애매했던 그를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 ↑ 민간에겐 단발을 장려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세간에서 지배적이던 유교적 사상을 존중해 문명개화 열풍이 절정에 달한 융희 시대 이전에는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문관은 어느정도의 예외를 두더라도 군문과 관련된 공직에 임명되는 이들은 반드시 서양식 의복을 착용할 것이 명시되었고, 나중에 이는 문관에게도 강요되었다.
- ↑ 요시다 쇼인의 이론에 따르면 부산에서만 그쳤던 조선 침략을 다시 재개하여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이 당시 조슈 파벌의 주장이었는데, 예상 외로 한국이 일본이 손을 대기 전부터 변화에 대처를 잘하는 모습을 보이자 조슈 내에서도 한국을 바로 치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여론이 늘어난 것이 한몫했다.
- ↑ 당시 순나라는 가뜩이나 전통적으로 조선의 번국 자리가 진실로 자신들에게 있는지도 애매한 상황에서,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조선이 서양식 관복을 입고 동등한 외교관계를 요구하는 대한국으로 변모하자 사절의 조정 입장 자체를 금하는 등의 강경대처를 보여줬다.
- ↑ 이는 일세일원제를 안정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선택이였다는 학계의 여론이 있지만, 일각에서는 칭제를 통해서만 자주 국체를 선포할 시 그 이전의 대한국 시기는 자주독립국이 아니였다는 의도로 이야기 될 수 있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한 조치라는 추측도 있다.
- ↑ 속어로는 귀족이라는 말도 꽤 널리 사용됬다.
- ↑ 다만, 이는 여전히 가세 자체는 비대했던 세도가들도 포함됬다. 예를 들어 안동 김문의 유력자였던 사영 김병기는 김병기 후작으로 봉해졌고(시호:문충공(文忠公))다. 물론 사실상 안동김씨의 정치적인 기반이 사그러든 상태였기에, 더 이상 작위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하려고 시도하는 등의 음모는 없었다.
- ↑ 적어도 현실주의적인 행보와 조선 시대부터의 친선관계로 인해 친한적인 정서가 강했고,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이전까지는 나름 급진개혁적 시도도 있던 송나라와는 다르게, 순나라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은 시장에 한국 물건을 풀어 어지럽히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백인, 일본인과 별 다를 바 없는 착취자였다. 때문에 의화단의 난 당시 피해를 보게 된 것.
- ↑ 이조차도 실질적인 전선이 끝나지 않은지라 엉성한 마무리에 불과했다. 물론 당시까지는 식민지를 만들었으니 적절한 마무리로 취급받았으나 실상은 그러하지 못했던 셈.
- ↑ 개전 이전 대한제국의 군사특별연구소는 중국을 침공하는 사태가 벌어질 경우, 중원횡분지계(中原橫分之計)를 통해 중국을 크게 가로로 분단하여 일본과 이권을 나누고, 그 내부에서 순종적인 중국 정권을 수립하여 중원 일대를 완전히 양국의 손에 넣는 계획을 구상한 적이 있었다. 그 계획이 구체화되어 협상테이블 위까지 올라온, 사실상의 분할안인 셈.
- ↑ 이는 현재 대한국에게 우호적인인 미국, 영국이나 전통적인 우방인 한편 비슷한 역사를 가진 일본도 매한가지다. 그나마 대한제국과 패권적 연관성이 있는 과거가 있는 일본에선 특별히 대한제국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논조는 드문 편이지만, 영국이나 미국은 애초에 대한제국과 전쟁을 치른 입장인지라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없다.
- ↑ 다만 서구의 인식과는 별개로 구한국과 대한국이 완전히 다른 국체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다. 애초에 현대 한국인들은 대한제국 시기를 광무, 융희, 성덕 등 시대로 구분하지 전혀 다른 국체로 보지도 않고, 무엇보다 한반도계 왕조국가에서 국체가 교체될 시 일어나던 왕조의 교체가 정치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추호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 이는 기존의 나치당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고 서독과 동독으로 새로 정부를 꾸린 독일, 기존의 내각제 시스템은 유자하지만 무솔리니를 스스로 내쫓고 왕정을 폐지함으로써 파시스트의 유산을 청산한 이탈리아와 다른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