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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통칭 '''대한''', '''한제'''혹은 '''제국주의 대한'''은 [[임신대경장 (아침해의 원유관)|임신대경장]] 이후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그 식민지들을 통치했던 제국주의 열강이다. 1875년 7월 3일부터 1947년 10월 12일까지 유지됬으며, 동아시아에서 근대화 후 열강 등극에 성공한 유이한 국가였다. 당대 동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일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패전 이후 헌법의 개헌으로 기존의 제국 체제가 붕괴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대한제국''', 통칭 '''대한''', '''한제'''혹은 '''제국주의 대한'''은 [[임신대경장 (아침해의 원유관)|임신대경장]] 이후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그 식민지들을 통치했던 제국주의 열강이다. 1875년 7월 3일부터 1947년 10월 12일까지 유지됬으며, 동아시아에서 근대화 후 열강 등극에 성공한 유이한 국가였다. 당대 동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일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패전 이후 헌법의 개헌으로 기존의 제국 체제가 붕괴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
19세기 중후기를 기점으로 [[대일본제국 (아침해의 원유관)|일본]] 과 더불어 극동 정세의 중요한 강대국으로 부상하였고, 위의 양국은 수교와 이후의 영일동맹, 영한동맹으로 묶인 이래 동아시아에서 협력적인 제국주의 패권을 추구했다. 이러한 기조는 후일 두 나라가 서구 제국주의로부터의 새로히 동아시아의 질서를 개편한다는 [[대동아공영권 (아침해의 원유관)|대동아공영권]] 사상으로 귀결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ref>19세기 이전까지의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국가들은 시시각각 분쟁을 일으켰으나, 시간이 지나며 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와중에 근대화와 팽창의 필요성이라는 공동의 과업 앞에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ref><ref>양국은 또한 제국주의 시대에서 당대의 서양 열강들에 비하면 후발주자에 속하는 극동 출신의 열강국가들이였다. 이러한 연유로 한국이나 일본은 모두 기존 질서의 개편을 통한 패권 확보에 매달렸고, 그리하여 각각 영토의 팽창과 태평양의 재패라는 목표를 내세우게 된 셈이다.</ref> | |||
현대에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대한제국이 패망한 관계로 직접적인 지배권이 더 남아있지는 않지만, 아직도 만주의 동남부 지역에선 한국어 및 그 파생 피진들이 일부 남아있다. 이는 동남부 만주 지역이 만주 전역이 한국의 손에 들어가기도 전인 1894년부터 당시 대한제국의 본토인 '내지'로 편입되어 통치되었기 대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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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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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 =식민지= | ||
{ | {{대한제국의 식민지 (아침해의 원유관)}} | ||
{{대한제국의 괴뢰국 (아침해의 원유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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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역대 대황제= | |||
{{대한국 황상}} | |||
제 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 이전까지 대한제국에서 [[대한국 대황제 (아침해의 원유관)|황제]]가 가지던 권력은 막강했다. 황제의 가족인 황실은 기존의 조선 왕조를 그대로 계승하였으며, [[대한국 국조황실궤범 (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황실궤범]]과 [[흠정대한국 국헌 (아침해의 원유관)|흠정국헌]], 그리고 [[국체유학 (아침해의 원유관)|국체유학]]은 강력한 중앙권력과 더불어 이러한 황제와 황실의 막강한 권위를 보장하는 데에 일조했고, 절정에 달했을때의 황제는 사실상의 신으로 신격화되다시피 했다. | |||
이러한 이유로 당대의 대한제국을 입헌군주국이 아닌, 전제군주제 국가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 쉽게 말해, 당대 한국에서 주요 정치적 담론이였던 [[대한식 입헌군주제 (아침해의 원유관)|한국식 입헌군주제]]는 입헌군주제가 아니라는 것. 다만 의회정치가 기능하는 것 자체는 황제의 신격화와 권력과는 별개로 충분히 가능하였기에, 또 다른 주장에선 대한제국을 "전제정치와 의회정치가 동시에 존재했던 체제"로 해석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 |||
이러한 황제의 신격화는 대한제국이 패전하면서 미국의 주도 하에 황실궤범의 개정, [[대한국 헌법 (아침해의 원유관)|신헌법 제정]], 유학순정지령을 통한 학문의 자유화 정책 등으로 혁파되었고, 대황제의 막강한 권력은 황실의 유지를 담보로 몰수되었다. 이 탓에 오늘날의 대한국 체제에서 대황제가 가지는 권력은 사실상 전무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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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내각총리대신= | |||
{{한국 내각총리대신}} | |||
대한제국 시기의 내각총리대신은 대체로 시대에 따라 여러 변천사를 겪었다. [[광무 시대 (아침해의 원유관)|광무 시대]]에는 황제의 의사가 짙게 반영되어 중추원과 중신들이 뜻을 받드는 방식으로 뽑히는 경우가 주를 이루었으며, [[융희 시대 (아침해의 원유관)|융희 시대]]에는 광무 시대에 활동한 중신들이 원훈이 됨에 따라, 황제의 재가를 받는다는 형식 하에 총리의 임명에 권한을 행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체제는 황권우선주의 의식이 강했던 고종이 즉위 후 원훈들을 견제하기 시작하며 다시 무너졌고, 결국 이는 김창암의 정계 입성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 |||
하지만 어느 시대가 되었건, 기본적으로 총리대신의 권력은 어디까지나 대황제의 신하로서 황제의 아래로 제약되었다. 황제권이 직접 위광을 드러내는 경우가 드물던 융희 시대에도 얼마든지 황제의 지시를 통해 내각이 해산된 경우가 있었으며, 또한 시대를 불문하고 내각에서 직접 대신을 탄핵시키는것은 총리에게 있어 불가능한 일이였다. 이와 같은 전근대적인 제도는 결국 대한제국 정치가 "한국식 민주주의"이상으로 진화하기 힘들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 |||
김창암의 경우 임기 후 황제의 지지를 받는 상황에서 압도적인 실적을 쌓은 덕에 얼핏 보기엔 황제보다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 경우였으나, 이마저도 결국 공적이 새로히 쌓이지 않으면 붕괴할 것이 필연이였다는 한계가 존재하였다. 실제로 김창암은 시베리아에서의 전쟁이 단기간에 끝나는 데 실패하자, 끝내 총리직을 일심회의 다른 주요인사던 [[송병조 (아침해의 원유관)|송병조]]에게 양도하고 하야하는 길을 택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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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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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와는 별개로 금한 양국간의 문화적인 관계 개선은 [[허서리 굴마훈 (아침해의 원유관)|허서리 굴마훈]] 총리가 시행했던 개방정책을 시점으로 신냉전 시대에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중화민국 또한 신냉전 이후 서구 진영으로서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힘쓰고 있다. 최근 들어선 [[중화인민공화국 (아침해의 원유관)|중화인민공화국]] 측의 전쟁피해 호소가 가장 주목받는 편이긴 하지만, 인민정부의 경우엔 일본에 의해서 본 피해가 더 많은지라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 | 다만 이와는 별개로 금한 양국간의 문화적인 관계 개선은 [[허서리 굴마훈 (아침해의 원유관)|허서리 굴마훈]] 총리가 시행했던 개방정책을 시점으로 신냉전 시대에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중화민국 또한 신냉전 이후 서구 진영으로서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힘쓰고 있다. 최근 들어선 [[중화인민공화국 (아침해의 원유관)|중화인민공화국]] 측의 전쟁피해 호소가 가장 주목받는 편이긴 하지만, 인민정부의 경우엔 일본에 의해서 본 피해가 더 많은지라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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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일본 제국과의 관계= | |||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png|20px|link=대한제국-일본제국 관계 (아침해의 원유관)]] 자세한 내용은 [[대한제국-일본 제국 관계 (아침해의 원유관)|대한제국-일본 제국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
흔히들 알려진 두 국가간의 긴밀한 관계는 사실상 이때부터 형성이 이루어졌다고 보면 된다. 거의 몇백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서로간의 군사적인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보니 자연스럽게 악감정 또한 소멸하였으며, 이후 각자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한편 교류가 가속화되며 패권과 풍조에 기반한 새로운 외교관계가 정립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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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0일 (금) 06:1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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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목록 ]
[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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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 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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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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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大韓帝國 | Empire of Kore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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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광명천지[1] 光明天地 (1899-1946) | |||||||
■ 본토 | ■ 식민지| ■ 괴뢰국, 번국 및 점령지 | |||||||
1875년 3월 29일[2]~1947년 10월 12일 | |||||||
칭제건원 이전 | 동시베리아 전쟁 이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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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 |||||||
애국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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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 세상에 밝은 빛을 내리리라'라는 뜻의 사자성어로, 칭제건원 이후 지정된 표어다. 건원 이전의 외왕내제 시절에는 홍범의 14조라는 표어를 사용했다.
- ↑ 칭제건원을 통해 대한제국이라는 국명을 확정한 것은 1894년의 일이지만, 그 이전부터 부황 칭호 등 외왕내제 체제와 대한이라는 국명 자체는 쓰였기에 학계에서는 해당 시기도 대한제국의 역사로서 간주한다.
- ↑ 대한제국령 만주, 치치하얼 시(제원부(齊原府)), 만주 4도 등
- ↑ 대한제국령 청도, 위해 등
- ↑ 몽고번 등 몽골 동부지방
- ↑ 외지, 식민지, 점령지, 본토 및 번국과 괴뢰국들가지 포함한 최대 강역이다.
- ↑ 흔히 당시 대한 인구를 두고하는 '9천만의 총의로' 운운하는 관용구가 여기서 유래. 내지(61,000,000명 이상)와 만주, 몽고, 그 외 번국 거주민들을 포함했다.
- ↑ 표면적으로는 흠정국헌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며 국체유학은 종교가 아닌 500년 사직을 이어온 대한의 국시라고 주장하였으나, 비교종교학적 측면에서는 기존의 성리학과 비교했을 때 종교의 성질을 더 강하게 띄고 있었다. 이 탓에 기존 토속신앙, 불교 및 기독교 등 거대 종교를 제외한 이교 신자, 국체유학을 인정하지 않거나 정부에 터놓고 반대하는 재야 유학자는 비국민으로 매도당했으며, 정부의 압제에 의한 국교적 위치가 강제되었다. 이는 한성대학 인문학부 명예교수이자 종교학자인 손봉호 교수의 주장과도 상동하다. 자세한 내용은 국체유학 문서 참고.
- ↑ 만주 가한, 예케 몽골 울루스 대칸, 대조선국 국왕 겸임
- ↑ 1940년을 전후로 일심회 일당제가 확립되며 대한제국 호국령을 겸직하기도 하였으나, 공식석상에선 내각총리대신으로 불리는 경우가 잦았다. 사실상의 테크노파시즘 체제였음에도 이탈리아와같은 순수한 파시즘 체제가 확립되지못한 이유는 강력한 황권이 멀쩡했던 체제적 특징이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자세한 이유는 본문에서 후술.
- ↑ 만주나 몽고 번 일대에서는 만주 원, 몽고 원 등이 통용되었다.
- ↑ 19세기 이전까지의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국가들은 시시각각 분쟁을 일으켰으나, 시간이 지나며 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와중에 근대화와 팽창의 필요성이라는 공동의 과업 앞에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 ↑ 양국은 또한 제국주의 시대에서 당대의 서양 열강들에 비하면 후발주자에 속하는 극동 출신의 열강국가들이였다. 이러한 연유로 한국이나 일본은 모두 기존 질서의 개편을 통한 패권 확보에 매달렸고, 그리하여 각각 영토의 팽창과 태평양의 재패라는 목표를 내세우게 된 셈이다.
- ↑ 다만 중국의 압도적인 인구수 때문에 초기 순나라때처럼 공식적인 무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지는 않았다.
- ↑ 이전까진 밝혀지지 않았으나, 천붕 후 고조의 서재에서 네덜란드, 프랑스 등에서 출판된 여분의 세계지도와 서양 서적들이 밝혀지면서 개인적으로 서학에 관심이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아마 즉위하기 전의 관리시절에 접한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일자는 불명.
- ↑ 흥선군일기(興宣君日記)에서 완림군의 방문에 대한 구절이 꽤 자주 언급됐고, 얼마 후 완림군이 보위에 올랐다. 기록을 보면 여기서 정치적인 담판을 내 당시 원래 계획대로 완림군을 선출하거나 향렬상 최고 우위인 경운군을 선출하기도 애매했던 그를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 ↑ 민간에겐 단발을 장려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세간에서 지배적이던 유교적 사상을 존중해 문명개화 열풍이 절정에 달한 융희 시대 이전에는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문관은 어느정도의 예외를 두더라도 군문과 관련된 공직에 임명되는 이들은 반드시 서양식 의복을 착용할 것이 명시되었고, 나중에 이는 문관에게도 강요되었다.
- ↑ 요시다 쇼인의 이론에 따르면 부산에서만 그쳤던 조선 침략을 다시 재개하여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이 당시 조슈 파벌의 주장이었는데, 예상 외로 한국이 일본이 손을 대기 전부터 변화에 대처를 잘하는 모습을 보이자 조슈 내에서도 한국을 바로 치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여론이 늘어난 것이 한몫했다.
- ↑ 당시 순나라는 가뜩이나 전통적으로 조선의 번국 자리가 진실로 자신들에게 있는지도 애매한 상황에서,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조선이 서양식 관복을 입고 동등한 외교관계를 요구하는 대한국으로 변모하자 사절의 조정 입장 자체를 금하는 등의 강경대처를 보여줬다.
- ↑ 이는 일세일원제를 안정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선택이였다는 학계의 여론이 있지만, 일각에서는 칭제를 통해서만 자주 국체를 선포할 시 그 이전의 대한국 시기는 자주독립국이 아니였다는 의도로 이야기 될 수 있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한 조치라는 추측도 있다.
- ↑ 속어로는 귀족이라는 말도 꽤 널리 사용됬다.
- ↑ 다만, 이는 여전히 가세 자체는 비대했던 세도가들도 포함됬다. 예를 들어 안동 김문의 유력자였던 사영 김병기는 김병기 후작으로 봉해졌고(시호:문충공(文忠公))다. 물론 사실상 안동김씨의 정치적인 기반이 사그러든 상태였기에, 더 이상 작위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하려고 시도하는 등의 음모는 없었다.
- ↑ 적어도 현실주의적인 행보와 조선 시대부터의 친선관계로 인해 친한적인 정서가 강했고,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이전까지는 나름 급진개혁적 시도도 있던 송나라와는 다르게, 순나라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은 시장에 한국 물건을 풀어 어지럽히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백인, 일본인과 별 다를 바 없는 착취자였다. 때문에 의화단의 난 당시 피해를 보게 된 것.
- ↑ 이는 현재 대한국에게 우호적인인 미국, 영국이나 전통적인 우방인 한편 비슷한 역사를 가진 일본도 매한가지다. 그나마 대한제국과 패권적 연관성이 있는 과거가 있는 일본에선 특별히 대한제국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논조는 드문 편이지만, 영국이나 미국은 애초에 대한제국과 전쟁을 치른 입장인지라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없다.
- ↑ 다만 서구의 인식과는 별개로 구한국과 대한국이 완전히 다른 국체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다. 애초에 현대 한국인들은 대한제국 시기를 광무, 융희, 성덕 등 시대로 구분하지 전혀 다른 국체로 보지도 않고, 무엇보다 한반도계 왕조국가에서 국체가 교체될 시 일어나던 왕조의 교체가 정치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추호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 이는 기존의 나치당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고 서독과 동독으로 새로 정부를 꾸린 독일, 기존의 내각제 시스템은 유자하지만 무솔리니를 스스로 내쫓고 왕정을 폐지함으로써 파시스트의 유산을 청산한 이탈리아와 다른 점이다.